이번주 역사서 가운데 눈길을 끄는 책은 나가미테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탄생>(푸른역사, 2010). 관심분야의 책이라 바로 입수했는데(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저자가 도서관 사서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구체적으론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도서실'에 근무하는 걸로 돼 있고, 이미 <잡지와 독자의 근대>(1997)란 책으로 일본출판학회상을, <모던도시의 독서 공간>(2001)이란 책으로 일본도서관정보학회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독서국민의 탄생>(2004)까지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의 경우와 비교도 해봄직한, 그런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다. 소개기사를 챙겨놓는다.   

국민일보(10. 01. 30) 100년전 일본엔 ‘책 읽는 국민’이 있었다… ‘독서국민의 탄생’ 

책에는 인류의 지혜와 각종 정보가 담겨 있다. 지식을 축적하고 전파하는 주요 수단이다. 따라서 책을 많이 읽을수록 그만큼 무형의 자산을 많이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국가적으로도 독서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독서는 다른 오락거리에 밀려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08년 국민 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3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대표적인 독서강국으로 꼽힌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승객들이 무언가를 읽고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초등학생의 연간 도서관 대출 건수가 1인 평균 30권이 넘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어려서부터 독서문화가 형성돼 있다. 이는 일본이 경제는 물론 문화에서도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됐다. 일본의 독서문화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일본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독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도서실에서 근무하는 나가미네 시게토시가 쓴 ‘독서국민의 탄생’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독서국민’을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습관을 가진 국민으로 정의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대 초기에 형성된 독서 문화에서 독서국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활자미디어의 전국 유통,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 다양한 독서 장치의 보급 등이 어우러지면서 독서문화는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19세기 말 대량수송수단인 철도의 출현과 신문 판매업자나 서적·잡지 중개업자의 등장은 활자미디어의 전국 유통망을 구축했고, 이것이 독서의 대중화를 이끄는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철도망의 확대로 철도 여행자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차내 독자’라는 근대의 새로운 독자 유형과 여행 독서 시장이 생겨난 것도 특징이다. 일본의 철도 승객은 1880년대 수백만명에서 1907년 1억43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했다. 독서는 철도 여행의 무료함을 해소하는 수단이어서 승객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다. 당시 차내에서 독서하는 모습은 문명국민의 상징이었다.

일본의 독서국민 탄생에는 정부의 역할도 컸다. 정부는 신문종람소와 도서관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독서국민을 이끌었다. 신문종람소는 역 구내나 주변을 중심으로 여러 신문이나 잡지를 모아 무료나 혹은 싸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독서시설로 1880∼90년대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설치된다. 또 호텔이나 여관, 기차 대합실, 열차 안 등 곳곳에 독서공간을 마련해 독서 환경을 조성했다.

도서관의 활성화는 독서국민 탄생의 기폭제였다. 일본 정부는 전 국민의 의식 함양을 위해 일찍부터 지방에 작은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 결과 일본의 도서관은 1912년에 540개나 됐고, 총장서도 275만권에 달했다. 도서관은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나 26년에는 4000개에 달했다.

1880년대 도서관 이용자들은 주로 도시의 중산층 지식인과 그들의 자제인 학생들이었으나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도시의 하층계급 뿐 아니라 지방 군 지역 주민들로까지 확대됐다. 도서관 이용자는 도서관에서의 독서체험을 통해 근대적인 독서 습관을 몸에 익힌 독자로 성장해 독서국민의 중핵을 형성하게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912년 도서관 이용자는 전국적으로 연간 395만명에 달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독서국민을 형성하려면 읽고 쓰는 능력과 독서습관의 보급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서 습관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읽어야 할 독서 재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을 독서국민 형성의 둘째 요건으로 꼽았다. 일본에서는 20세기로 넘어가는 그 즈음 이 두 가지 요건이 적절히 갖춰지면서 독서 습관이 몸에 밴 국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독서는 국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독서가 개인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세기 전 독서국민의 시대를 연 일본의 사례는 문화강국을 꿈꾸는 우리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라동철 기자) 

10. 01. 30. 

P.S. 기사에도 일부 인용돼 있는데,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적은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이렇다(미리보기를 참고할 수 있다).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국민 의식의 형성에 '독서'가 담당한 역할의 중요성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전국 방방곡곡에 유통되는 신문이나 잡지, 서적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가 형성되지 않았을 경우 국민국가의 형성은 불가능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온 '식자율'의 문제, 즉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활자미디어를 읽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독서 습관'의 문제, 즉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독서습관을 가진 독자층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국민의 탄생'입니다. <독서국민의 탄생>에선는 이 문제를 활자미디어의 유통,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 독서 장치의 보급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다뤘습니다.(5쪽) 

요점은 독서국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국민국가 형성도 불가능하다는 것. 중앙집권국가의 기반은 활자미디어의 중앙 집중체제였다는 주장이다. 일찍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한데(저자가 머리말에서 가장 먼저 거명하고 있는 것도 앤더슨이다), 저자는 이를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던가란 사례를 통해 실증해보인다.    

한편,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한국에서도 동일한 관점의 연구가 이뤄진다면"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으리란 바람을 피력한다. 이미 천정환 교수의 <근대의 책읽기>(푸른역사, 2003)가 나와있다는 걸 알았다면 반가워했을 법하다. 비록 <근대의 책읽기>는 '독서국민의 탄생'이 아니라 '대중 독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국민독자의 탄생>과 비교하자면, '독서 장치의 보급'이란 면도 자세히 다루어지진 않았다. 나가미네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읽었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디에서' 읽었느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의 책읽기>와 더 닮은 책은 마에다 아이의 <일본 근대 독자의 성립>(이룸, 2003)이 아닐까 싶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 2010-01-31 20:02   좋아요 0 | URL
예전 이승연씨 사건관련한 글을 잠깐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역사라는 것이 왜곡되는 순간이 언제일까요..해석가들의 눈이 어떤 사건을 분석하기는 이미 늦은 시간일까요..기계로 사람이 움직여지고 의사가 왜곡되고 사람의 입술이 이미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말을 해석하고 사건을 해석하기는 이미 늦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건가요..어떤 이의 일을 해석하고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후분석되고 사후진행되는 진실규명이 어떤 죽음을 막는다면 그래도 나은 일일까요..어떤 이들의 행위가 어떤 의도로 왜곡되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기술이 이제 문자나 책이 아니라 음성이 되어야 할 지경이고 그것보다 더하게 음성이전에 어떤 전파 기술이라면 ..역시나 역사는 없는 자에게는 가혹하네요. 기술을 쥔 권력의 입술을 막아설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삽니다. 어떤 정부가 거짓을 감아 두고 목숨을 연명하려고 한다면 역사는 유죄를 선택하겠죠 그때가 언제가 되던...그들은 단죄되어야 하고 단죄될겁니다..
가장 빠른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된다..이것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역사적 해석이겠죠..언젠가 하신 말씀이던가요??
오늘 장의차를 봤습니다. 서동시장 우수학원이란 간판 아래서요. 이말 언젠가 한것 같은데..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들었습니다. 그 기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흐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배후를 밝히고 그들을 단죄해야 겠죠..
무고한 목숨이 갔습니다..
알고 계신가요??그들의 이름을??기억하셔야 할텐데요...

어떤 배우의 죽음을 목도했고 그것은 살해였습니다. 그들의 목숨과 연결된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총맞았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압니다. 가상의 총이라더군요.
가상의 죽음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누군가 총맞았다는 말을 조심해서 들으셔야 할테입니다. 가짜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정부가 있습니다..
노라는 정부의 수장이 갔습니다.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역사라는 이름이 어떤때에 누군가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도 그런 반복이 진행된다면 반복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증오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행위자라는 ...주체라는 이름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그것은가해자의 이름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곰곰 2010-01-31 20:04   좋아요 0 | URL
역사와 전쟁을 치르는 한정부가 있습니다. 그 정부의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이름 뒤에 어떤 누군가의 이름이 더 올려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이..라는 이름을 쓰던 한 사내가 그의 운명을 다하여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그는 역사의 이름으로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목숨을 쥔 자들은 자유롭습니다...역사가 그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이제 역사가 그들을 데려갈 시간입니다.

펠릭스 2010-01-31 22:40   좋아요 0 | URL
전통적으로 종이에 씌여진 글자를 읽는 독서에서 음성으로 읽은 녹음도서를 편안했습니다. 최근 애플의 아이팟용 전자도서도 종이로된 책을 읽은 느낌같습니다. 플레쉬리뷰로 책 미래보기 역시 글씨크기를 확대할 수 있어 읽기 좋았습니다. 독서 인구가 선진국보다 낮다고 탓하기 보다는 독서할 수 있는 환경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2-01 14:58   좋아요 0 | URL
독서인구도 그렇고 독서열도 낮은 편이죠. 요즘은 대학생보다 직장인들이 책을 더 읽는다고도 하고요...

펠릭스 2010-02-07 05:5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의 청소년기의 강요된 독서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찜질방이란 곳에 다녀왔다. 수건으로 양머리를 하진 않았지만 먹고 자다 때밀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었다. 방학이 끝나가는 아이의 소원이 '온가족 찜질방 가기'여서 결단(?)을 내린 것인데, 이런 정도의 '소원'만 계속 가져주면 아빠로선 소원이 없겠다. 눈을 붙이기 전에 습관처럼 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니 대부분은 안면을 튼 책이다. 몇 권의 예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조철수 교수의<예수 평전>(김영사, 2010). 성서 해석에 신기원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성서학계에 이미 알려진 견해인지 저자의 독자적인 주장인지 궁금하다), 그냥 번역학적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한겨레의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1810.html). 책은 저명한 종교학자 크로산의 <하나님과 제국>(포이에마, 2010)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승리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로마의 제국신학과 '정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제국을 꿈꾸는 미국과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책"으로 소개된다.
 

  

한겨레(10. 01. 30)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신약성서>의 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 믿기 어려운 기적의 진실은 무엇일까?

1976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고대 셈어,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을 공부하고 수메르어로 학위를 받은 뒤 10여년간 히브리대에서 가르쳤던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 조철수(60) 교수의 <예수 평전>은 눈이 번쩍 뜨이는 설명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먼저 마르코 복음서 6장의 이 기적 이야기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동료들끼리 풀밭에 앉게 했다. 백 명의 동료지간의 백부장과 오십 명의 동료지간의 오십부장이 끼리끼리 자리잡았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축복하고 빵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며 그들 앞에 나누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는 이 가운데 ‘백명의~’ 부분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마태오나 루가 등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예 없다. 이 표현의 차이에 주목하라.   



조 교수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 내용은 자신이 따로 번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게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원본 자체가 번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복음서나 사도들 편지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고 적어도 그 수십년 뒤에야 그리스어 본들이 만들어졌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리스어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다. 따라서 아람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자신이 직접 번역한 조 교수의 인용문이 당시 이스라엘(유대)의 언어행위 실상과 사회상에 더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조 교수는 1947년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 등의 옛 전적들을 성서와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예수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서 ‘오천 명’이라 옮긴 단어는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아메쉐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쉐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의 바꿔 읽기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종종 활용됐다. 따라서 오천을 오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 명씩 오십 명씩’은 백부장, 오십부장으로 옮길 수 있다.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다섯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천부장들은 당시 예수가 한때 소속돼 있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에서 재판관들과 사제장들, 부족장 등과 함께 그 조직 주요 구성원이었다. 

사해 문헌 중의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천명의 장과 백 명, 오십 명, 십 명의 지도자와 재판관” 등이 재판 청문회에 참석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나중에 에세네 공동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떠나간 예수의 공동체 역시 성찬의례를 통해 다섯 천부장을 뽑고 그들이 열두 제자들 모임에 합류하는 좀더 발전된 상부조직을 갖게 된다. 열두 광주리의 12라는 숫자도 이스라엘 12지파, 12제자처럼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고,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러 각지에 파견한 72제자의 72라는 숫자도 당시 천문관념에 따라 지파당 6명씩 배치한 결과로 읽힌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외딴곳 그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제자들 질문이나, 다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복음서들 얘기는 오역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날 성찬의례 참석자, 빵과 물고기를 단합과 사명과 정체성 확인 차원의 의례행위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의 소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마르코 8장의 일곱개 빵으로 사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일곱명의 원로들 모임에 합세할 네명의 천부장을 선출한 것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루가 6장의 “가난한 자는 복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은 마태오 5장에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으로 돼 있다.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다. 그런데 레브는 특정 맥락에서 모세 오경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토라 공부 때문에 가난한 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아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게 조 교수 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로 옮기는 건 의역이란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들의 갖가지 치유기적의 의미, 두드리면 무엇이 열린다는 것인지,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이 첫째 된다는 게 뭔지, 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모두 같은 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유다는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입 맞췄는지 등 성서 속의 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헌 근거들을 토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사해문헌 중의 <하박국서 해석>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린 사제가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떠났으며 재산 때문에 법규들을 배반하고 반동폭력배와 백성들의 재산을 훔쳐간 ‘악한 사제’로 로마 법정에 선동 혐의로 넘겨져 사형당한다. 조 교수는 그 사나이가 바로 예수라고 본다. 그를 악한으로 묘사한 하박국서 해석은 예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본 이 해석서의 작성 주체인 에세네파의 시선이다.

바리새, 사두개는 물론이고 한때 자신이 그 사제요 교사로 복무했던 에세네파의 한계까지 과감하게 뛰어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900쪽의 두툼한 <예수 평전>은 당대의 문헌자료들과 문화적 배경설명을 토대로 그 생애를 치밀하게 재해석한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1. 30.  

P.S. 찾아보니 저자는 이미 <유대교와 예수>(길, 2002),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2003),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김영사, 2003), <랍비들이 풀어 쓴 창세신화>(서해문집, 2008) 등 다수의 저술과 주해서를 펴낸 바 있다. <유대교와 예수>는 <예수 평전> 입문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0-01-30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기에 그 글자 하나 하나가 틀림이 없으며, 역사와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서읽기방식이 축자 영감설입니다.특히 미국을 근간으로 한 청교도 계통에서 이런 주장을 하며,미국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내 기독교 교단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지요.축자 영감설은 주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이 있는데“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로쟈님 글처럼 성경은 필사에 필사를 거듭한 책이라,그러다 보니 필사하다 오류가 생길수도 있고 필사자의 생각이 들어갈수 있는데다 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영어등 유럽어로 번역되면서 원래 의미와 달라진 부분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선지 우리 나라 성경도 원래 희브리나 그리스 성경과 비교해보면 틀린 부분이 다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부정확한 부분을 가지고 제 맘대로 해석하다보니 이단이다 뭐다가 많이 나온다고 하네요.

로쟈 2010-01-30 10:10   좋아요 0 | URL
축자 영감설은 전혀 영감을 주지 않는데, 성서 번역 문제는 흥미롭습니다. 예전부터 '젊은 여자'를 '처녀'로 오역하는 바람에 '처녀수태설'이 잉태됐다는 얘기는 있었죠...

2010-01-30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1-3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동 기자의 책소개는 늘 신뢰성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 들고 자신의 편견에 따라 마음대로 왜곡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평전>을 직접 읽어 봐야 알겠지만, 이 기사의 내용도 역시 한 기자 마음대로 곡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한 기자는 <성경>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인의 경전이고 신약은 기독교인의 경전인데, 기독교인은 가능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정통' 유대인은 신약을 부정합니다. 한기자는 사해문서에 마치 신약성경도 포함되어 있는 양 기사를 쓰고 있는 데, 사해문서는 주로 구약과 유대인의 종교 문헌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해문서에서 예수의 행적을 구성한다는 부분 자체에 의심이 갑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신약은 애초에 희랍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독교는 헬레니즘 세계에 전파된 종교이기 때문에 바울 서신과 복음서들은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의 공용어였던 희랍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기자는 페시타(시리아아, 아람어) 판 신약성서도 사해문서에 포함된 것인양 혼돈을 주는 방식으로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페시타 판본은 사해문서와는 전승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텍스트 역시 희랍어 원본을 번역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학자들이 원래 시리아어로 기록된 단편을 참고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는 있으나 '시리아어로 기록된 원래의 단편' 자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페시타 본으로 신약성서를 재해석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소수의 의견을 따른 것일 것입니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이런 기본적인 사항들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물론 책을 봐야 알겠지만 책의 두께로 보아 아마 이러한 부분도 섬세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전 기자의 책 내용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로쟈 2010-02-01 15:01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전체적인 건 책을 봐야겠어요. 한데, 워낙 두꺼워서...

펠릭스 2010-01-3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성경)학자들의(?) 몫이군요. 믿음을 갖는다는 것과 성경 문구의 신뢰성은 다를듯 해요. 서품을 받은 신부들 중에는 유럽(독일 등)으로 신학공부를 떠나죠(보통 7~8년정도). 신학 공부가 끝나 한국에 입국하면 3년정도 일반 본당(성당)에서 주임(보좌)신부로 근무하다, 대개는 카톡릭신학교 교수로 발령나 가르칩니다. 저도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해 궁금했죠. 문제는 요술처럼 갑자기 불어나 다 먹었다는 것은 아니고요.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음식을 이웃(옆사람)을 위해 내놓아 서로 배불리 나누어 먹었다로 설교하던데요. 하지만 신학적인 논리와 사실성의 입장에서 근거는 번역의 오류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깊이 신학공부하신 신부님 외 전문가에게 알아 보고 싶습니다. 기부금 명칭중에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도 있습니다.

로쟈 2010-02-01 15:00   좋아요 0 | URL
성서학자들이 그토록 오래 과문했다는 건 잘 믿기지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3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은 빼고 마태 마가 누가만 가리키는데 한승동 씨가 잘못 알고 있군요.

로쟈 2010-02-01 14:5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단비스 2010-02-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것만큼 힘들다는 표현도
사실은 낙타와 밧줄이라는 단어가 유사해서 오역이 된거라고 하던데,
그러한 부분들이 여러군데 있나보네요...

로쟈 2010-02-04 11:35   좋아요 0 | URL
웃지 못할 일들입니다...
 

제목 때문에 눈에 띄는 과학서는 에롤 해리스의 <파멸의 묵시록>(산지니, 2010)이다. 과학서라고 했지만, 저자는 철학자이고 형이상학과 과학철학, 종교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남기고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파멸의 묵시록>은 그가 90세에 출간한 책으로 "방대한 연구결과를 대단히 간결하게 압축한 결정판"이라고 한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한번쯤 읽어보고픈 책이다. 원제는 '묵시록과 패러다임'이고 부제가 '과학과 일상적 사유'인데, 국역본 제목과 부제는 그걸 적당히 재분배했다. 한겨레의 간단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자세한 건 출판사의 책소개를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10. 01. 30) 인문학, 뉴턴 패러다임을 벗어라

환경과 생태계 파괴, 온난화, 핵전쟁 위협, 자원 고갈, 인구 폭발, 끝없는 분쟁과 양극화 등 인류 자체의 절멸을 걱정해야 할 파국적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인류 대다수는 이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채 파국적 상황을 가속화하고 있다. 개인과 가족, 또는 민족, 국가의 무한 이기주의로 표출되는 사유와 생존 방식의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이 위기의 근저에 뉴턴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자리잡고 있다. 원자론과 개인주의, 분리주의, 환원주의를 낳은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 근대적 가치관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의해 이미 근본적으로 무너졌는데도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자연과학 외의 영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양자역학 시대에 지구인들 대다수의 삶은 여전히 뉴턴적 17세기 자연과학 패러다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어긋남이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절연에서 비롯된 이른바 ‘두 문화’고민과도 상통하는 이 위기는, 그러나 뉴턴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는 두 문화의 절충적 통섭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여전히 뉴턴적인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철학,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하이젠베르크가 물리학에서 이룩한 패러다임 혁명으로 인도하라! 인간과 자연, 사회, 그리고 극미와 극대의 우주까지 상호의존적 내적 관계를 지닌 유기적 통합체라는 전체론(holism)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인류가 지니게 된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자연스런 전환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1. 29.

P.S. 출판사 책소개의 한 대목은 이렇다. 저자가 화이트헤드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세계관을 진단하는 측면에서 이 책은 화이트헤드의 <발상의 모험>(Adventures of Ideas)과 가장 유사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화이트헤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연구가 활발한데, 일찍이 그는 “하나의 학문이 임시방편 가설의 메들리(a medley of ad hoc hypotheses)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들려면 반드시 철학적 성찰을 수행해서 그 학문의 기초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근본전제부터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 화이트헤드는 17세기 및 20세기의 자연과학 성취를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한 후, 뉴턴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라는 저서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파멸의 묵시록>은 이런 화이트헤드의 문제의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에롤 E. 해리스는 화이트헤드를 깊이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책이 철학에 중점을 둔 책이라면, 이 책은 문명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랜만에 화이트헤드의 책을 검색해보게 되는데, <발상의 모험>은 <관념의 모험>(한길사, 1996)이란 타이틀로 한길 그레이트북스 첫 권으로 나온 바 있다. <과정과 실재>(민음사, 1999)는 현재 절판중이고, <과학과 근대세계>(서광사, 2008)는 재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개인적으론 모두 박스보관 도서라 '그림의 책'이다. <과정과 실재>는 원서도 구해놓았었지만 아직 폼도 못 잡아봤다. 절실히 읽고 싶을 때가 따로 오지 않을까 한다.  

  

과학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주에 출간된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지호, 2010)도 언급해두고 싶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언제쯤 '원더풀'한 저자의 글솜씨를 감상할 수 있을는지...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바다 2010-01-29 20:23   좋아요 0 | URL
<관념의 모험>을 <발상의 모험>으로 번역한 그 '발상'이 더 신선하군요^^ 화이트헤드 책들은 원서와 번역본 모두 구비되어 있고 가까운 책장에 손 닿는 곳에 있어 적잖게 손 때를 묻혔건만 아직 정상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습니다. 그나저나 <과정과 실재>가 절판됐다니 안타깝군요. 훌륭한 번역자가 나와서 더 좋은 번역본을 내주면 좋겠지만 오영환 선생의 번역도 계속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1-30 10:1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과정과 실재> 독회 같은 것도 있었고(김용준, 김용옥 형제도 멤버였던), 그때 혼자 읽긴 힘든 책이란 '신화'도 만들어졌었죠.^^;

푸른바다 2010-01-30 17:13   좋아요 0 | URL
러셀이나 포퍼 같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근거 없는 '신화'는 아닌 듯 싶습니다^^ 러셀 자서전을 보면, 러셀이 화이트헤드와 대화하다가 사건으로서의 존재라는 아이디어를 얻어서 그의 책에 사용했는데, 화이트헤드가 유감을 표명하면서 절교로 이어졌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사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잘못 이해된 방식으로 사전에 알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러셀에게 암시를 주었던 그 생각이 훗날 <과정과 실재>에 포괄적으로 기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화이트헤드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 러셀도 이해하기 힘든 어떤 '사상적 단절'이 <과정과 실재>에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파멸의 목시록> 역자의 경력에 증산도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게 저에게는 편견의 눈으로 책을 보게 하는 군요^^

빵가게재습격 2010-01-30 00: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과학과 근대세계>를 보니 약간 유감스러워서 끄적입니다. 저도 얼마 전 서점에 갔다가 <과학과 근대세계> 개정판이 나온 걸 보고 좀 뒤적거려봤는데요. 양장본이 된 걸 제외하면 이전 판본(?)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더군요. -저는 1판 8쇄, 2005년도에 출간된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무려 만삼천원이 더 올랐더군요. 물론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차라리 양장본을 포기하고 5000~8000원 정도의 인상폭이 어땠을까(너무 야박한가요?^^)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로쟈 2010-01-30 10: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서점에서 보고 좀 심하단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중원문화사에서 재간되는 철학 책들도 가격을 보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펠릭스 2010-01-30 13:27   좋아요 0 | URL
좀 생뚝맞은 소릴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책을 사서 읽는다는 의미속에는 단순히 책을 통독한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경제원리가 적용되는 것같아요. 베스트셀러의 속성은 재미와 구입자의 경제적인 사정과 더불어 사회적 통념 등이 작용한 통계치라 생각됩니다(물론 그것이 나쁘다는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불하려는 책값 수준이 만원 전후에 머룰러 있다는 것도 고정 관념의 일환(경제적 지불 능력)이겠고, 다른 사람이 2~3만원선의 책을 선택한 것도 또한 본인 선택 사항이라 생각하지만요.

로쟈 2010-02-01 15:02   좋아요 0 | URL
그만큼 독자층이 엷다는 반증이어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시라소니 2010-01-30 15:0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파멸의 묵시록>을 번역한 이현휘입니다. 우연히 이곳에 들렀는데, "푸른바다"님의 댓글이 눈에 띠어 몇자 적고자 합니다. 제가 잠시 증산도사상연구소에 순수 학자의 신분으로 근무한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곳을 그만 두고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알라딘의 역자 프로필 대신, <파멸의 묵시록> 역자 프로필 참고). 이 문제는 저에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파멸의 묵시록>이라는 책의 주제와 증산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증산도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파멸의 묵시록>을 번역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와보니 화이트헤드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 반갑습니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동양의 다양한 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특히 중국 학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심한데, 이런 태도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을 뿐, 학문적 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화이트헤드 자신은 서양철학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리스나 화이트헤드에 주목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답니다. 앞으로 이곳의 논의가 아주 고급스런 수준에서 계속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로쟈 2010-02-01 15:04   좋아요 0 | URL
그제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없더군요.^^; 오프라인에서는 종로나 나가야 책을 구할 수 있으니...
 

슬라보예 지젝이 이달에 인도 뉴델리에서 강연을 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인도는 MB만 간 것이 아니었다!). 오마이뉴스에 현지취재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6580). 강연에서 새로운 내용을 더 알게 된 건 아니지만 '근황'과 '건재'를 확인할 수 있어 반갑다(반대로 지젝이 낯선 독자에게는 유용한 길잡이가 될 듯싶다). 사진과 글은 손석주 기자의 것이다.    

오마이뉴스(10. 01. 07)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는 진보주의자" 

<역사의 종언>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대로 과연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일까?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는 쉬울지 몰라도, 사망한 공산주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주의로 온통 물든 세상에서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로 돌아가자고 핏대를 세우는 이가 과연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이는 책에서만 인용되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강연이 있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생긴 내가 가진 질문들 가운데 하나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창한 역사의 종언이 9·11테러로 정치 부문,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 부문에서 틀렸음이 입증됐고 그리하여 역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므로, 위기에 대한 대안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유효한가? 1990년 슬로베니아 대선 후보로 출마한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기도 한 그가 자신이 주창한 '재창조된 공산주의(Reinvented Communism)'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규율 있는 테러(disciplinary terror)'라며 도발적인 언사를 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동시대 '서양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비난과 동시에 문화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조롱받기도 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나는 강연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뉴델리에 위치한 인디아 해비태트 센터 강당에서 화요일 5일 저녁 7시에 예정된 강연 시간에 맞춰 도착한 나는 정문 앞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 깜짝 놀랐다. 2007년 10월에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의 강연을 별무리 없이 좋은 자리에 앉아서 들을 수 있었던 경험 때문에 느긋했던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좌석이 매진되자 출입문을 걸어 잠근 주최 측은 시끌벅적한 항의에 시달리자 마지못해 '입석' 혹은 '바닥석'을 조건으로 문을 열었다.  



극좌파 낙살라이트, 공산당, 사회당에서부터 극우정당 시브세나까지 공존하는 나라다 보니 유명 정치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듯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린 탓에 15분 정도 지연된 후 강연이 막 시작되기 전, 통로 바닥에 앉아 있던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남인도 여성이 지나가는 걸 보게 됐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본 후 옆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야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1997년 첫 번째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아룬다티 로이였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소설가에서 반전, 반핵, 페미니즘, 하층민 인권을 위한 활동가로 변신한 그녀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과격 공산주의자의 이데올로기 강연에 실망한다면 그녀를 본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작정이었다.  



스타벅스 마시며 제3세계 돕는다?   
잠시 후, 불룩 나온 배에 검정 라운드 반팔티셔츠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른 동유럽 얼굴의 늙은 남성이 등장하더니 퍼포먼스 같은 도발적인 강연이 시작됐다. 괴상한 영어 발음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는 자신의 신간 <우선 비극, 다음은 희극>(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족, 공장, 학교가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통합체로 발전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루이 알튀세르 같은 좌파 이론가들의 주장을 따르고 발전시킨 듯했다. 이 시대를 행동하지 않는 '냉소의 시대'라고 단호하게 규정하면서, 그는 현대인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제3세계 노동자, 불우한 이웃 등을 간접적으로 돕게 된다는 광고 전략에 넘어가는 모습을 질타했다. 직접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냉소주의로 인해서 자본가들에 놀아나는 현대 소비주의 행태를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태도라는 주장이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야말로 진보주의자이며 그를 쓰러트리려는 세력은 왕정복고를 위한 반동 지배세력이라는 주장과, 영화 <죠스>의 상어는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사회주의를 상징한다는 주장은 그의 이어지는 파격적인 '막말'에 비하면 약과였다. 인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하느님만 찾았다면서 성녀 마더 테레사를 비난할 때 벌어진 내 입은, 프로이드나 라캉처럼 정신분석학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이 학창 시절 억눌린 성적 욕구로 여선생님과 성관계를 맺고 싶었다는 농담 섞인 폭로에는 더 이상 다물 길이 없었다. 불꽃놀이 같은 그의 언변 행간에 던져진 핵심은 바로 "바보들아, 문제는 이데올로기야"였다. 쉬운 예를 들어서, 물건을 만들고 사는 일이 더 이상 단순한 시장 행위가 아닌 경험을 사고파는 이데올로기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창하는 '재창조된 공산주의'는 가난한 국가들만이 아닌 유럽 등 모순점들이 팽배한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그는 2008년 금융위기야 말로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의 망상이 파괴된 일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그는 경고했다.  

"1930년대 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나는 지금의 이러한 위기가 나오미 클라인이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라고 지적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규율 있는 테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데 대해서 그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수사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스탈린식의 공포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모든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새로운 대중적 규율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나의 동료인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말하기를 '자유와 자유를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무기는 바로 규율'이라고 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당신은 '필로테이너'
이런 생각을 가진 그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 같은 영화는 재앙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소년이 행운을 거머쥔다는 할리우드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겁니다. 거기다가 인도의 불행한 현실을 모두 다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죠." 

할로윈 파티에 참석한다면 무슨 복장을 하겠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악마의 복장을 하겠다고 질문자의 기를 죽인 다음, 재치 있게 인도의 피에 굶주린 칼리(Kali) 여신을 예로 들었다. "팔이 100개나 달린 칼리 여신도 팔 하나는 선한 곳에다가 쓴 답니다. 그래서 나도 보기보다는 나쁘지 않으니까 두려워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선한 악마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려 보여주는 그의 퍼포먼스 같은 강연에 박장대소와 아연실색을 오가던 청중들의 반응은 그가 상아탑 속에 갇힌 철학자도 권력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정치가도 아님을 보여주는 듯했다. 강연장을 나오면서 나는 그에게 요즘 유행하는 방식으로 그의 직업인 철학자 뒤에다가 엔터테이너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었다. 철학자이면서도 대중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사람, 바로 '필로-테이너(Philo-tainer)'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주지는 않았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에 관계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케케묵은 공식을 바꿔야 합니다. 철학자들이란 세상을 해석하기만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말했죠. 하지만 20세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행동도 중요하지만, 사상 없는 행동은 재앙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10. 01. 28.  



P.S. 궂긴 소식도 있다. <미국 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1922-2010)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챙겨놓아야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량 2010-01-2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닌 재장전>에도 필자로 참여한 다니엘 벤사이드가 지난 12일에 타계했다고 합니다. 저도 엊그제서야 알았는데, 한국에서는 거의 기사화가 안 된 것 같아요.

로쟈 2010-01-28 19:09   좋아요 0 | URL
람혼님의 포스팅으로 저도 알게 됐습니다. 하워드 진과는 달리 벤사이드의 책은 한권밖에 안 나와 있어서요...

2010-01-29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3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에 대한 안티팬도 있군요. 궁금했죠, 지젝이 어떤 사상가이길레 그의 인기나 관심이 큰 것인지, 아니면 동유럽이나 인도를 제외한 어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판하는 것인지, 그를 비판하는 저자들이 있다면 양쪽을 보고 싶더군요. 한쪽이 넘 열열하면 들추기 싫어지는 게으름이 있더라구요. 제 이런 선입견이 지젝의 책에 가까이 가지 못한 변명이기도 합니다.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 2010)이라는 다소 '구티'나는 제목의 책이 있다. 무슨 책인가 궁금했는데, 마침 저자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저자 박동천 교수는 서구 정치사상을 전공하고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한길사, 2004),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2006)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알고 보니 책으로는 '구면'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란 개념/입장이 눈길을 끈다.   



한겨레(10. 01. 28)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손잡을 여지 많아” 

2002년 노무현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던 유권자 가운데 300만~400만명은 5년 뒤 선거에서 이명박·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이 사실은 한국사회 부동층의 우경화를 드러내는 지표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런 우경화가 왜 그토록 급속하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사진)가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에서 규명하려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노무현을 지지하던 그 많은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박 교수가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것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네 가지 프레임이다. ‘마녀사냥’ ‘권력숭배’ ‘선견지명’ ‘집단생존’이란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들이야말로 “우리 정치의식을 편협하고 폐쇄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라는 게 박 교수의 진단인데,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마녀사냥 프레임이다. “가짜 문제를 하나 찾아낸 뒤 언어적 분풀이를 영속시키는 경향”이자 “보기 싫은 일이 있으면 원인이 뭔지, 무슨 탈이 실제로 생기는지,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 등을 따지기 전에 무작정 그 징후를 말로만 공격해대는 증상”이다. 지역주의가 전형적 사례다.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선 ‘지역감정’ ‘지역구도’ ‘지역주의’ 등의 구호들이 대표적인 분풀이의 과녁 역할을 했습니다. 보수·진보를 망라해 지식인들이 20년 동안 지역감정을 열심히 비난해온 결과 이제는 거의 모든 국민이 지역감정을 말하지 않고는 한국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런 경향들이 ‘가짜 문제’를 만들어 공론장에서는 지속적으로 그것을 공격하면서도 “사적 공간에서는 거기에 적응하는” 이중적 행위습성을 빚어낸다는 점이다. 교육 문제의 원인을 ‘대학서열화’로 돌리거나 사회위기의 근원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하면서 정작 삶의 영역에서는 서열화된 대학 시스템이나 신자유주의 경쟁논리에 기민하게 적응하는 영악함이 그것이다. 이를 두고 박 교수는 “범사회적 정신분열증”이라 비판한다. 권력숭배나 선견지명(교조주의), 집단생존(민족주의)이란 나머지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가 볼 때 이들 모두 “가짜 문제를 쫓아다니는 마녀사냥의 습성과 관계가 깊다”는 점에서, 진보진영이 결별해야 할 ‘보수적 편협성’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이런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제도적 지향점으로 박 교수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다. 그런데 사회적 자유주의란 개념이 다소 생소하다. 박 교수는 “그 생경함이야말로 우리 사회 정치의식의 편협함과 폐쇄성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꼬집는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여러 갈래 중에는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넓”은데, 사회적 자유주의는 바로 “정치·사법의 자유주의”와 “소외계층의 복지”를 결합한 제도다. 그 사례를 박 교수는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의 케인스 등에서 찾는다.

“‘곤들매기(작은 물고기 등을 먹고 사는 연어과 민물고기)의 자유는 붕어에겐 죽음’이란 말이 있어요. 자유주의자가 이 측면을 도외시한다면 파시스트에 가까운 것이고, 사회주의자로서 절차를 배척한다는 것은 사춘기적 열사숭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제도의 변화’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진 않는다. 중요한 건 ‘공론의 변화’다. 공론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도 제도를 바꿀 순 있지만, 이 경우 법률의 문구만 바뀔 뿐 사람들의 행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요청하는 것은 공론과 제도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적 사고인데, 문제는 지금의 진보진영에선 그런 유연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시화한 ‘반신자유주의 연대론’과 ‘반이명박 연대론’의 대립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편을 가르기 위한 명칭이란 것 말고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신자유주의 반대’는 ‘자본주의 반대’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정책지향을 담을 수 있는 문구가 아닙니다. ‘이명박 반대’도 적극적 가치를 표명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저항 구호인 것은 마찬가지지요. 결국엔 진영 간의 주도권 다툼이 아닌가요?”

박 교수는 이러한 담론상의 대립이 실상은 자기 진영의 주도권 확보를 노린 정치적 욕망의 표현임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쌍방이 상황을 이처럼 세속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뭔가 엄숙한 의미를 불어넣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면” 타협의 가능성을 좁히고 결국엔 판을 깨는 것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뉴질랜드에 체류중인 박 교수와의 대화는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600쪽에 가까운 방대한 저작의 집필에 매달렸던 이유를 묻자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정부 말기 나는 일본 같은 체제가 결국 아시아의 정치모델로 고착되지 않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단생존에 매몰돼 공장 부품처럼 일하는 개인들로 지탱되는 사회, 도덕이나 역사에 관한 상상력은 제한되고 손재주 또는 생산력으로 그럭저럭 버티는 사회 말이죠. 이는 민중의 요구가 임계점 가까이 가면 보수파가 선심 쓰듯 수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가는 엘리트 순환체제입니다. 이런 흐름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이세영 기자) 

10. 01. 28.  

P.S. 본문과는 별도로 이번주에는 눈에 띄는 인문번역서들이 많다. 비로소 새 '시즌'에 접어든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하이데거의 니체 강연이 새로/다시 번역돼 나오는데, 일단 <니체1>(길, 2010)이 출간됐다. 역자는 하이데거 전공자이자 니체 전문가인 박찬국 교수다. 그리고 알랭 바디우의 예술론 <비미학>(이학사, 2010)도 '인덕후'들의 입질감이다. 사회심리학자 세르주 모스코비치의 <다수를 바꾸는 소수의 심리학>(뿌리와이파리, 2010)도 '왠지' 관심이 가는데, 간단한 책소개는 이렇다.  

‘사회영향이론’으로 사회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석학 세르주 모스코비치의 대표 저작. 사회적 권위와 규범에 저항하는 적극적 소수가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이끈다. 동조와 복종의 심리학에서 이탈과 혁신의 심리학으로 살펴보는 저자는 다수 중심의 기존 사회심리학이 보인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소수가 사회적 변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 국내서로는 이진경의 '역작' <역사의 공간>(휴머니스트, 2010)과 김영민의 <김영민의 공부론>(샘터사, 2010)이 관심도서다.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개마고원, 2010)과 함께 이번주 리뷰가 기다려지는 책들이다...  

P.S.2. 지젝의 책도 돌라르와의 공저 <오페라의 두번째 죽음>(민음사, 2010)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이왕이면 바디우와의 공저 <현재의 철학>(2009)도 소개되면 좋겠다. 랑시에르의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도 영역본이 <미학과 그 불만>이란 타이틀로 출간됐다. 책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디우의 <비미학>과 찍지어 읽어보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얼추 2월의 독서 스케줄이 다 채워지는 듯하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이] 2010-01-28 15:40   좋아요 0 | URL
좋은책들 정말 많이 등장했군여ㅋㅋ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10-01-28 18:28   좋아요 0 | URL
네,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네요.^^;

바밤바 2010-01-30 03:15   좋아요 0 | URL
김진석 교수가 또 책을 내나 보네요. 정녕 기대 되네요.^^;;

로쟈 2010-01-30 10:07   좋아요 0 | URL
이번주 한겨레에 서평이 실렸습니다...

펠릭스 2010-02-01 14:19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 부동층은 실용주의적인 성향 때문일까요? 저자가 말하는 '이중적 행위습성'인 '범사회적 정신분열증'은 지젝도 언급하고 있더군요.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공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토론 문화는 논증없는 주장이 많아 패거리화되는 성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