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레닌을 생각한다

2009년에 이어서 2010년에도 '1월의 책'은 '레닌'이다. 두툼한 분량의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부제는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아래가 원서의 표지이고, 번역본의 표지는 좀 크게 넣었다.
 

 

<레닌 재장전>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박노자 외,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에 이어서 개인적으로는 '레닌 시리즈'의 '3탄'쯤 되는 책으로 평하고 싶다. <레닌 재장전>의 원서 목차와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http://books.google.co.kr/books?id=YCk5GA0QhrYC&dq=Lenin+Reloaded&printsec=frontcover&source=bn&hl=ko&ei=BiE_S_H5G5CgkQWpjM36CA&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4&ved=0CCkQ6AEwAw#v=onepage&q=&f=false 를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한 꼭지 번역에 참여했는데, 어떤 모양새의 책이 나올지 궁금하다. 다른 역자분들과 편집진의 노고와 마음 고생이 많았다. 조만간 축하의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다... 

10. 01. 14.  

P.S. 책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책이 나오는 대로 풀어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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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레닌주의적 제스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4 10:55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드디어 출간됐다(아직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알라딘에도 입고돼 있다). 책은 어제 배송받았는데, 표지가 깔끔하고 책도 분량에 비해 가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속표지(표2)에는 특이하게도 지난 11월 '번역자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발췌돼 있다(7명의 역자 중 5명이 참석했었다). 사진은 마티출판사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영어권 정치철학자들이 쓴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 2009)이 최근의 관심도서 중 하나라는 건 얼마 전에 적었다. 책은 원서와 함께 주초에 구했고 '역자 서문'을 읽어보았다. 언제 시간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10편의 독립적인 논문 모음집인 만큼 흥미를 끄는 장을 먼저 읽어볼 수는 있겠다. 마침 공역자의 한 사람이자 번역의 기획자인 곽준혁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올해 공화주의 연구서들을 낼 계획이라 한다.  



한겨레(10. 01. 14) “한국 설익은 공화주의 바람…경계해야

“구체화된 원칙이나 제도적 구상을 깊게 고민하기보다, 공화주의의 수사적·수단적 가치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곽준혁(42·사진) 고려대 교수가 최근 국내 사회과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서 진행중인 공화주의 논의에 일침을 놓았다.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외래 사조를 수입하던 20~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상사적 전통이나 사회적 맥락, 담론이 내장한 이론적 문제의식에 진지하게 천착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담론을 수입해 적당히 활용하다가 새 사조가 나오면 별 고민 없이 내다버리는 것, 우리 지식인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휴대전화 갈아치우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유사한 조짐이 지금의 공화주의 논의에서도 감지됩니다.”

 

최근 영미권 공화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리처드 벨러미와 리처드 대거 등이 함께 쓴 <공화주의와 정치이론>(까치)을 번역해 내놓은 데 이어, <비지배 자유> <비지배적 상호성>이란 제목의 공화주의 연구서를 올해 안에 출간할 예정이다.

12일 안암동의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곽 교수가 가장 신랄하게 꼬집은 것은 공화주의에 대한 섣부른 일반화였다. 내부의 다양한 갈래들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차이를 무시한 채 무리하게 뭉뚱그려 공화주의를 정의하는가 하면, 학문적 논의가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정치인들이 수사적 차원에서 공화주의란 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서구 학계의 이론적 성과가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한국에선 여전히 공화주의로부터 단합이나 조화, 연대 같은 공동체적 가치만 찾는 경향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최근의 공화주의는 갈등을 균열의 요인으로 위험시하기보다, 당연히 존재하는 사회현상이며, 잘 조정되면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거든요. 연대보다는 다양성을, 안정보다는 갈등을 좋은 사회의 징표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공화주의입니다.”

곽 교수가 볼 때 조화와 통합, 공공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공화주의라기보다 공동체주의에 가깝다. 이런 공동체주의는 전체의 공익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 요인을 내포한다. 하지만 공화주의는 다르다. 이 점은 고전적 공화주의의 독특한 자유 개념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자유는 ‘간섭이 부재한 상태’를 의미하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컨대 사적인 지배나 주종적 예속관계로부터 자유다. 이를 공화주의에서는 ‘비지배 자유’라고 이른다.

“예를 들어볼까요? 갑이란 노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예요. 게다가 주인과 친하기까지 합니다. 어느날 주인이 말합니다. 넌 이제부터 소출의 일부를 갖다주지 않아도 돼.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갑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겁니다. 신체적 간섭도 경제적 수탈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공화주의자들이 보기에 갑은 여전히 노비입니다. 주인의 마음이 바뀌거나 주인이 죽으면 갑이 누리는 자유도 몰수되니까요.”

이처럼 자유를 ‘비지배’로 파악할 경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세금을 거둬 빈곤층에게 적절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의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비지배’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 때문에 타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상황을 막는다는 점에서 복지의 제공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장하는 조처다. 거꾸로 국가가 비지배의 조건을 훼손하는 형태로 삶에 개입한다면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논리 역시 공화주의는 제공한다. 곽 교수는 “국가의 개입과 그것에 대한 저항을 동일한 조건에서 정당화하는 개념은 공화주의의 비지배 자유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공화주의에서 신자유주의 광풍 앞에 무기력한 개인으로 전락한 시민들의 삶과, 비효율과 무능력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민주주의를 구원할 희망을 찾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곽 교수는 본다. 문제는 재분배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로 공화주의 이념을 활용하는 경우다.

“공화의 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재분배의 필요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재분배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공화의 가치를 빌려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경우 굳이 공화주의란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곽 교수는 지금 시급한 것은 공화주의에 대해 한층 정교한 학문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구호나 지침으로 대중에게 제시하기 전에 밀도 있는 심의와 토론으로 공화주의 내부의 차이를 선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곽 교수는 그 계기를 <공화주의와 정치이론>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이세영기자) 

10.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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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5 00:08   좋아요 0 | URL
명분(핑게)의 정도를 어디까지 활용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등이 형성되는군요. 민주공화국이 곧 공화주의인데 구지 공론화하려는 의도는 뭘까요?

로쟈 2010-01-16 20:44   좋아요 0 | URL
실종돼서 그렇지요...
 

시사IN에 '로쟈'와 관련한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도서출판 텍스트에서 펴내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소개기사인데, 나도 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미 마감을 여러 차례 넘겨서 자주 독촉받고 있는 처지이긴 하지만, 애쓰고 있는 편집팀의 환한 미소를 보니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그나저나 원고는 언제 다 넘기나...  

시사IN(10. 01. 06) “젊은이여, 자서전 써라”  

텍스트 출판사가 펴내는 시리즈물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는 ‘20·30대 젊은이들이 쓰는 자서전’을 표방한다. 극소수 스타 필진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낯선 저자들이 채 절반도 지나지 않았을 인생을 소재로 ‘자서전’을 쓴다. 왜?

이 시리즈를 기획한 박선화 편집장은 “소위 ‘88만원 세대론’이 나온 이후 젊은 세대에 대한 비판은 많아졌는데 정작 20·30대 본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게 기획 의도다”라고 말했다. 블로그를 뒤지고, 홍대 인디신과 영화계와 시민단체를 훑고, 언론의 독자투고란까지 꼼꼼히 살피며 필자를 발굴한다.

박 편집장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세대론’으로 치환하는 풍토가 마땅찮다. 그 자신 386 세대이지만, 추상적 담론을 먼저 꺼내들고 그걸 기준으로 20·30대 젊은이의 구체적 현실을 끼워 맞추는 태도야말로 전형적인 ‘386스러움’이라는 것. 만인보 시리즈는 말하자면 ‘구체에서 추상으로’ 순서를 뒤집어보자는 접근법이다.

“정말로 젊은이 1만명의 자서전을 만들어 한데 모아보면, 그때는 정말 이 세대를 두고 뭔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박 편집장의 ‘야심찬’ 목표다. 자서전 하면 흔히 떠오르는 대필 작가는 전혀 쓰지 않는다. 저자로 선정된 이들은 원고지 700장 정도의 분량을 손수 채운다. 한눈에 봐도 돈 될 기획은 아니지만, 얼마 전 뚝심 있게 열 권을 채웠다. 내년에도 젊은 인문학자 로쟈, 만화가 기선 등 20여 명의 ‘젊은 자서전’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천관율기자)   

10. 01. 11. 

 

P.S. 작년말에 나온 '만인보' 3차분 세 권이다. 나는 4차분에 맞추기로 했는데, 계획대로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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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2 00:24   좋아요 0 | URL
출판기획이라는게 새로운 유형의 통계 모델을 만드는 수학자같군요. 기다려집니다.

로쟈 2010-01-12 09:10   좋아요 0 | URL
기획이란 게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거죠. 수학적 계산도 필요하지만 예술적 영감도 필요해보입니다. 거기에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문적 교양도 덧붙이고요..

L.SHIN 2010-01-12 09:04   좋아요 0 | URL
헤, 괜찮은 생각이군요.
수백년 뒤의 후손들이 이 시대를 쳐다보는데 도움이 되겠군요.
'20-21세기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삶과 생각들은 이러했다'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라 약간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가긴 해도.

로쟈 2010-01-12 09:08   좋아요 0 | URL
한번 동참해보시는 것도.^^

L.SHIN 2010-01-13 16:55   좋아요 0 | URL
안됩니다. 그건, '지구인 젊은이들의 자서전'이잖아요.(웃음)

지나갈께요 2010-01-12 13:45   좋아요 0 | URL
이 책 잼있죠. 만권까지 채워졌으면 좋겠네요. 그 안에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첫 댓글이네요 ㅋㅋ)

로쟈 2010-01-13 23:12   좋아요 0 | URL
만권은 '정서적' 목표치이지만, 수백 권은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2 15:53   좋아요 0 | URL
참신한 기획인데, 로쟈님도 그 주자라니 급 관심 모드. 700매라면 경장편 분량인데, 한 두달 이상 걸릴 것 같네요. 로쟈님이라면 더 빠를 수도... 달려가는 로쟈님, 파이팅!

로쟈 2010-01-13 23:12   좋아요 0 | URL
제가 걸음이 좀 느려서요.^^;

정서방 2010-01-13 13:17   좋아요 0 | URL
흠.. 근데. 로쟈님.. 2, 30대에 해당되기는 하신거죠?. ^^;; 살짝 태클

로쟈 2010-01-13 23:13   좋아요 0 | URL
계약은 30대에 했습니다.^^;

델러웨이부인 2010-03-02 23:15   좋아요 0 | URL
와 멋집니다!!! 저도 30대가 가기전에 삶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좋은 기획이네요.
 

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http://dangbi.tistory.com/). 신년초의 독서나 독서계획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인데,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토콘드리아>와 <윤리적 노하우>에 대한 독후감이 돼 버렸다. 같이 생각해둔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와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물의 성향> 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몇 마디 적어야겠다.  

 

온라인 당비의생각(10. 01. 11) 다시 한 해의 책읽기를 시작하며 - 책읽기와 자비에 대하여

지난 연말에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던 책 중의 하나는 <권력, 섹스, 자살>이다. 제목만으로는 세간을 들썩이게 했던 고 장자연씨 자살사건을 바로 떠올리게 하지만, 아직 그 사건을 다룬 ‘책’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의 재수사 결과 전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가 불구속 기소되고 성상납 의혹을 받은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의 인물들은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한국사회에서 익숙한 ‘사법 불의’이다.  

<권력, 섹스, 자살>이란 ‘미래의 책’ 대신에 내가 읽은 건 ‘진화의 숨은 지배자’를 다룬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이 책의 원제가 ‘권력, 섹스, 자살(Power, Sex, Suicide)’이다. 내심 ‘올해의 책’의 하나로 꼽아두었지만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읽은 흉내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책장을 펼쳤다. 이런 경우 보통은 서론 정도를 읽어두는데, 그 정도라도 성과가 없진 않다.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지식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면 바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린 마굴리스의 ‘세포 공생설’이지만 그게 어느덧 ‘1970년대’ 이야기이다. 하지만, 최근 20여 년 사이 과학계에서는 미토콘드리아의 새로운 면들이 속속 밝혀졌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저자가 일러주는 것은 예정된 세포자살, ‘아포토시스(apoptosis)’이다. 모든 세포가 더 큰 이익, 즉 몸 전체를 위해 하는 자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이 아포토시스를 결정하는 것이 핵 유전자가 아니라 미토콘드리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이게 단순히 ‘과학적 발견’ 정도의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다. 세포들이 알아서 죽지 않는 것, 곧 아토포시스가 일어날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암의 근본원인이기에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의학적 발견’이기도 하다. 조금 인용해보자.  

“암에 걸린 세포는 한 생명체의 일부라는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진화의 초기단계에서 이런 속박은 분명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포가 죽음이라는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더 커다란 세포집단의 일원으로 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독립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아포토시스가 없었다면 세포들을 연결해 다세포 생물로 만들어주는 결속력은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포토시스는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은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세균 수준을 넘어 진화하는 일은 미토콘드리아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보자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세포집단의 일부로 예속되기보다는 자유로운 독립생활을 선택한 세포도 있었으리라. 다만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승자가 되지는 못한 것이리라. 즉, ‘가지 않은 길’이라기보다는 ‘가다 끊긴 길’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자유’에 대한 그리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암세포들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숙주인 유기체가 죽으면 결과적으로 암세포 자신 또한 죽음을 맞게 되므로 그의 ‘독립생활’도 자살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여, 공생을 위한 자살이냐 자유를 위한 자살이냐, 세포들의 두 갈래 길이다.     



두 갈래 길에 대한 명상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갈무리)에서도 빌미를 얻을 수 있다. 사회성 곤충들에 대한 연구가 1970년대에 많이 진행되었는데, 그중 네오포네라 아피칼리스라는 개미 집단에 관해서는 이런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가장 유능한 보모개미들만 모아서 새로운 작은 개미집단을 만들어놓았더니 보모개미들의 사회적 역할이 급격히 달라져서 양육하는 대신에 먹이를 구하는 일에 나서더라는 것. 원래의 개미집단에서는 반대로 낮은 등급의 보모개미들이 양육활동을 많이 하게 됐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단 전체 개미집단이 어떤 구성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 즉 개체의 정체성이 상대적 배치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이다. 한데, 문제는 이 개미사회는 전체를 조정하는 ‘중앙 통제적인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럼에도 전체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전체의 중앙에서 조정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바렐라는 이것을 ‘무아적 자아’ 혹은 ‘가상적 자아’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자아 없는 자아’이고, “간단한 구성 요소들의 활동으로부터 창발하는 정합적 전체 패턴이 마치 중심부에 있는 것 같지만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다.  

바렐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자아 없는 자아’가 대뇌의 뉴런 앙상블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자아” 또한 ‘중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자아가 가상적이고 비어있다는 ‘깨달음’은 동양적, 특히 불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낯설지 않다. 이 비어있음을 채우는 것이 곧 자비이다. 이때 자비란 무조건적이고 무자비한 자발적 연민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하면, “주체와 객체의 비이원적 드러남 속에서 자아의 비어있음의 실현을 체화하고 표현하는 행동”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말하면, 자아라는 환상의 횡단이 되겠다. 때문에 비어있음(공성)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무조건적인 자비라는 긍정적인 상태의 예비단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보모개미들이 자신의 상대적 배치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양육에 종사하기도 하고 먹이를 구하러 나서기도 하는 것은 윤리적 숙련의 높은 단계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이미 불성(佛性)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미와 인간은 진화의 여정에서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러한 불성과 자비를 통해서 만난다. 만날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는 어떤 형태의 지속되고 훈련된 수련 또는 주체의 변화를 위한 수련”에 전념해야 하고 “개인 스스로 발견하고 가상자아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키워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 해의 책읽기를 시작한다. 미토콘드리아와 개미를 머릿속에 넣고서 ‘자유냐 자비냐’를 오래 저울질해볼 참이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책읽기 또한 ‘숙련’의 문제라면 그것은 ‘자아실현’과는 무관하다는 사실. 고로 ‘나는 책을 읽는다’는 맞지 않다. 그냥 ‘책을 읽는다’. 자비로 세상이 가득할 때까지.  

10.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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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르다>(현대문학사, 2004)에 이어서 이성복 시인의 두번째 사진 에세이집 <타오르는 물>(현대문학, 2009)이 지난해 말에 출간됐다. 해가 넘어오면서 여유가 없었던 탓에 미처 챙겨놓지 못했다. 다행히 소개기사가 눈에 띄기에 기꺼이 옮겨놓는다. 책은 내주에 구해봐야겠다.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에세이 12편에다 미발표작 12편을 더해 사진에세이집을 펴낸 이성복 시인. 이 책은 “졸린 눈으로 바라보는 포식자 곁에서 태연히 풀을 뜯는 가젤의 무리처럼 삶은 고통 바로 옆에서, 고통과 함께 자고 먹고 새끼 친다” 같은 명징한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세계일보(10. 01. 09) 이성복 시인 사진에세이집 ‘타오르는 물’

해가 바뀌는 어수선한 시기에 얼굴을 내민 책이 있다. 이성복(58) 시인의 사진에세이집 ‘타오르는 물’(현대문학)이 그것인데, 사진작가 이경홍의 추상적인 흑백사진 24장을 붙들고 시인의 사유를 길게 이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남해 금산’의 시인이 공들여 음각한 문장이 명징하게 빛나는 근래 보기 드문 명품 에세이집이다.

갯벌 위로 가득 찼던 바닷물이 간조 때가 되어 햇빛을 받으며 빠져나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찍어낸 흑백사진들은 대단히 추상적인 빛과 어둠의 무늬를 그려낸다. 시인은 이 사진들 하나하나에 다양한 은유의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에게 은유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맨 처음 등장하는 사진은 이 책에 실린 것들 중에서도 비교적 쉽게 어떤 형상을 연상해낼 수 있는 편인데, 시인의 은유는 “어두운 밤 곧추 일어선 몽구스가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늑대의 기습을 경계하는 모습이라거나, 불시에 낯선 별에 착륙한 외계인이 은빛 금빛 가루를 방사하며 망연자실 서 있는 모습이라거나, 그도 아니면 어미 짐승의 자궁 속에서 눈도 뜨지 못한 채 혼몽한 잠을 자고 있는 태아의 모습이라거나…”(13쪽)로 이어진다.

그는 “이처럼 다양한 연상을 통해 떠오르는 은유들은 그러나 결코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그것들을 조심스레 포개놓고 보면 막막한 삶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존재들의 고독감과 무력감이 공통 속성으로 드러난다”고 첫머리부터 분명하게 은유의 속성을 규정하고 넘어간다. 한마디로 “모든 형체는 은유의 조명을 받아 의미를 갖게 되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모르는 숲 속에서 저 혼자 쓰러지는 나무와 같을 것”이라는 언설이다.  

이 에세이집 각 장마다 큼직하게 제시되는 사진을 보고 읽는 이들이 각자 자신의 느낌을 독자적으로 전개해 본 뒤 시인의 사유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방식일 것 같다. 사람마다 체험과 무의식의 밑그림들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어서 똑같은 추상 무늬를 앞에 두고도 수백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성복 시인이 사진을 붙들고 전개해나가는 자신의 ‘무의식 탐사 여행’은 명징한 아포리즘으로 가득 채워져 찬찬히 읽고 밑줄 긋게 되는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 자체가 상처라 하듯이, 모든 형체의 생겨남 또한 상처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 형체 자체가 이미 상처인 것이다. 애초에 시간과 공간이 우주와 더불어 태어난 것이기에 우주 이전과 이후의 시공을 생각할 수 없듯이, 상처보다 앞선 형체는 없으며 상처보다 나중 형제도 없다.”(34쪽)

시인의 생각을 좇아가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는 태생으로 상처를 안고 나왔으니 서럽지 않은 것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회한도 슬픔도 묻어있지 않은 눈물, 때로 삶 앞에서 고통이 내보이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한 “결핍과 상처는 아름다움이라는 생체(生體)의 두 숨구멍”이라고 규정하며 아름다움이란 “결핍과 상처의 구멍을 통해 숨 쉬고 살아 있는 어떤 것, 달리 명명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이름”이라고 명명한다.

왜 이리 시인은 환한 빛의 긍정보다는 실루엣의 슬픔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고 따라가는 것일까. 시인 자신도 “어째서 기쁨은 슬픔에 비해 감동적인 은유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자문한다. 그는 “은유는 본디 은유하는 자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에게 은유하는 자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각인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일 뿐이라고 자답한다. 이는 일견 모든 형체는 은유의 조명을 받아야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자신의 말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모순된 진술로 다가오는데, 그만큼 역설적으로 ‘은유의 바깥’이란 얼마나 황폐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강조하기 위한 언설로 들린다.(조용호 선임기자)  

10. 01. 10. 

 

P.S. 아포리즘집을 제외하면 이성복의 산문집/에세이집은 세 권이다. 더듬어 보니,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이후에 아직 시집이 묶이지 않았다. 올해는 시인의 새 시집도 기대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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