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지니까 이래저래 못다한 일들이 작당하여 "언제까지 할 건데?"라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일들까지 새로이 몰려다니며 "이것도 좀 해보지?"라고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나는 협박에도 약하고 추파에도 약하다. 그러니 더더욱 진퇴양난이다. 머리가 손가락 수의 절반만이라도 됐으면 싶다(분신술 수련이라도 해야 할까?). 그럼, 능력있는 남편에, 자상한 아빠에, 명민한 학자에, 재능있는 작가에, 얼치기 정부(情夫)까지 5역 정도는 해낼 수 있을 텐데, 사정이 그러하질 못하여 유감스럽다(대략 '얼빠진 30대 가장'이 내 모습이다. 내가 집사람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정신나갔어!'이다). 그저 저녁 먹은 걸 소화시킨다는 이유로 또 책 얘기나 늘어놓는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한나 아렌트(1906-1975)의 <과거와 미래 사이>(푸른숲)이다(내년이 아렌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군!). '푸른숲 필로소피아'의 13번째 책으로 나온 것인데, 9번째 책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였고, 12번째 책이 <정신의 삶> 3부작 중 제1권 '사유'였다. 세 권의 책을 옮김 역자 3인이 소위 '아렌트 3인방'으로 한국에 아렌트 번역/수용을 주도하고 있는 연구자들이다. 이번에 나온 <과거와 미래 사이>는 1968년에 나온 책인데,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연습'이란 부제를 갖고 있고, 당연히 8편의 논문 모음으로 돼 있다. 몇 년전에 아렌트에 심취하여(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가 계기였던 듯하다.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인연으로 저자와 메일을 교환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저들과 연구서들을 구했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도 거기에 포함된 책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 2002)와 함께 이번 겨울에 읽어볼 짬을 내봐야겠다.

역자인 서유경 교수가 이전에 옮긴 책은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이다(나는 그 책의 원서까지 제본해서 갖고 있다). 알다시피 1920년대 대학 초년생 아렌트와 젊은 교수 하이데거는 사제지간이면서 그 이상의 연인관계를 잠시 유지했었다. 유부남 교수와의 관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추천에 따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던 야스퍼스의 지도학생이 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유태인이었던 아렌트는 이후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계와 언론계에서 지적인 명성을 쌓게 된다. 출세작은 '악의 평범성'을 묘파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과 함께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1)과 <혁명론>(1968)을 비롯한 나머지 주저들은 번역돼 있다.

아렌트의 고유한 용어들의 번역 문제가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녀에 관한 유일한 전기로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를 참조할 수 있다. 아렌트 자신이 훌륭한 전기적 스케치들을 남기고도 있는데, 그녀의 저작으론 최초로 소개된 듯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이 그 전범이다(현재는 절판돼 있는데,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러시아아어본도 갖고 있다). 얼마전에 나온 손택의 <우울한 열정>(시울)과 견줄 만한 책이다. 사실, 벤야민론에 있어서는 아렌트가 손택의 선배인데, 최초의 영역본 선집 <일루미네이션>을 편집하고 해설격의 서문을 붙인 이가 벤야민과 교우가 있었던 아렌트이다. 그녀의 벤야민론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일루미네이션>의 국역본인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에 수록돼 있다(모두 절판된 책들이지만).

 

 

 

  

두번째 책은 이미 지난주에 언론에 소개되었고, 기대만큼의 반응을 불어일으키고 있는 듯한 <대담>(휴머니스트)이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인문과학이란 제유가 가리키는 이는 영문학 전공의 도정일 교수이고 자연과학이란 제유가 지칭하는 이는 사회생물학 전공의 최재천 교수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간판급 지식인들인데, 연배로는 도정일 교수가 위이지만 두 사람은 (띠)동갑내기이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인데, <대담>은 이승환, 김용석 교수의 대담을 기록한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2001),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교수간의 대담을 기록한 <오만과 편견>(2003)에 이은 '물꼬틀기'의 세번째 책이다. 나는 세 책을 모두 진작에 사두게 됐는데, 아마도 이번에 나온 <대담>을 가장 먼저 읽게 될 거 같다. 내용이 나의 관심사와 가장 밀착돼 있기 때문이다.

'늦깎이' 평론가 도정일 교수의 첫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가 나온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이다(도교수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보다 한 살 더 많다!). 저자는 그때 이미 수 권의 책들을 조만간 한꺼번에 낼 거란 예고를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러한 예고는 <대담>의 머리에서도 다시 읽게 된다. 이번 만큼은 공약(空約)이 아니었으면 싶다. 그만큼 기대를 걸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겠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이 번역서들을 제외하고 내가 갖고 있는 최재천 교수의 책들이다. 단독저작으로는 올봄에 나온 <당신의 생을 이모작 하라>(삼성경제연구소, 2005) 정도가 빠진 듯하다. 물론 <개미제국의 발견>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애독자로서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최재천 교수는 발군의 필력을 자랑한다(황소개구리에 관한 글이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니!). 한국의 도킨스라고나 할까?(그는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나의 고전'으로 꼽기도 했다). 하긴, 애초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최교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관심이 연장된 것이다. 사제지간의 끈끈함을 보여주는 번역서들이 또한 아래와 같다(두 사람의 공통 키워드는 '개미'이겠지만).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지론이다. 그게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될는지는 의문이지만(그쪽이라면,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정현종의 시구에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연과학에서라면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통섭' 효과라도 발휘가 돼서 그런 사랑이 인문학적 앎에도 통할 수 있었으면 싶다. 그게 바람이긴 하지만, 내가 아직 더 끌리는 쪽은 정신분석학이 말해주는 진리이다. "알면 사랑하지 않는다!" 왜 있잖은가, 이런 푸념들. "내가 그걸 몰랐던 거지!" "내가 바보였던 거야!" "진정 난 몰랐었네!" 그리하여 신파조의 결론: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울 줄 아아알았다면..."

 

 

 

 

한편, 생물학 분야의 책으로  루이키 루카 카발라-스포르차의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지호)와 재출간된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도 일독할 만하겠다. 예전에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1985)로 출간됐던 도킨스의 책은 도킨스 입문서로서도 가장 적격인 책이다.   

 

 

 

 

세번째 책은 역시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인데, 60년대 문단에 '감수성의 혁명'(유종호)를 가져왔던 작가 김승옥을 문학적 생애를 기념/조명하고 있는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앨피)이다. 그와 나란히 나온 책이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인데) "4.19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1960년 9월 1일부터 1961년 2월 14일까지 167일간, 대학생 김승옥이 서울경제신문에 연재한 네 컷짜리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해설과 함께 보여주고 있는 <혁명과 웃음>(앨피)이다. "만화의 인물, 아이콘, 상징들은 모두 대중적인 표상으로서 당시의 인간과 사회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작년에 새롭게 출간된 <김승옥 소설 전집>(문학동네)과 함께 꽂아둘 만한 자리를 서가에 두는 것이 좋겠다. (흔히 4.19세대라 불리는) 한 세대의 문학적 초상과 정신을, 그리고 그 감수성을 거기에 고스란히 모셔두고 음미해보는 것도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테니까.

 

 

 

 

네번째 책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누엘 푸익이 1973년에 발표한 세 번째 장편소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현대문학)이다. 제목은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의 원제로 익숙한데, 그게 푸익의 원작이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다. "내 영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마누엘 푸익이다."(왕가위) 설명을 보태면, "반페론주의적 성향과 동성애 관계에서의 남성성의 비하를 문제 삼아 1973년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모티프가 된 책으로 화제가 되었다."

영화 <해피 투게더>(1997)도 한때 동성애 장면이 문제가 되어 수입이 보류되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가 축제때 야외에서 저녁시간에 영화상영되는 걸 본 적도 있는데(화질이 안 좋아서 주제가만 좀 들었다), 지금은 영화의 비디오와 음반도 갖고 있다. 물론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를 접하게 된 것도 이 영화를 통해서였고. 작년엔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2000)를 TV에서 볼 수 있었다. 생일파티를 맞은 장국영의 짓궂은 장난기도 메이킹 필름에는 담겨져 있었는데, 그가 더이상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쉽다.  

아무튼 푸익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는 많은 걸 떠올려주는 소설이다. 그의 작품으론 <조그만 입술>(책세상, 2004)와 <거미 여인의 키스>(민음사, 2000)도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다. 윌리엄 허트가 주연한 헥터 바벤코의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도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정치영화'인 걸 보면, 동성애는 푸익 문학세계의 중요한 코드인가 보다(푸익의 소설들을 모두 번역하고 있는 송병선 교수의 <영화속의 문학읽기>(책이있는마을, 2001)에는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이 실려 포함돼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미국 작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열림원). 원제는 'Briar Rose'(1996)이다. 소개를 잠시 옮겨보면, "'하이퍼 픽션(Hyper-Fiction)'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소설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가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세간에 익히 알려진 그림 형제의 동화를 '다시쓰기' 한 작품으로, 잠자는 미녀 이야기에 대하여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버전들을 공주, 왕자, 노파 요정이라는 세 인물의 관점에서 나열한다."

사실 쿠버란 이름은 내게 <하녀 볼기치기>(책세상, 1987)의 작가로 각인돼 있는데,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 2002)에는 이 작품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기도 하다(좀 어색하게도 <하녀 때리기>로 번역돼 있다). 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어서, 한때 언젠가 책을 쓰면 같은 제목을 달고,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부제를 붙일 생각을 하기도 했다(제목이 풍기는 인상으론 '헤겔과 페미니즘' 정도를 다뤄주어야 할 텐데, 어느 세월에!).

그런 작가가 지난 5월말에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하여 강연한바 있으며 나는 직접 작가의 육성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았다. 후줄근한 차림의 쿠버 '교수'(브라운대학에선가 문예창작을 가르친다고)는 기대만큼의 카리스마는 보여주지 못했고, '하이퍼픽션'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서 많은 걸 얘기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 방면으론 아직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내 취향은 여전히 하녀의 볼기나 치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일보(5.8)에 실린 김성곤 교수의 기고문을 잠시 발췌해 본다: "쿠버 씨는 집필이 끝나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 소재한 명문 브라운대에 나가 창작을 가르친다. 쿠버 씨가 주관하는 ‘케이브(CAVE·최첨단 컴퓨터 영상화 센터)’는 전자시대의 문학을 산출하는 미래 소설의 인큐베이터다. 벽이 대형 스크린으로 돼 있는 가상 현실 랩이다. 그곳에 들어가면 컴퓨터그래픽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전자음악과 3D 가상현실이 뒤섞이면서 문학은 더 이상 종이 위의 고정된 활자가 아니라, 사운드와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3차원 멀티미디어 종합예술이 된다."

-“나는 컴퓨터게임과 문학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보세요. 컴퓨터게임과 아주 흡사합니다.”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만들어내는 쿠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 소설의 대가’이자 ‘게임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전자소설의 대부’라고 불리는 쿠버 씨가 73세라는 사실은, 나이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최첨단 작가여서인지 쿠버 씨는 얼굴마저 동안(童顔)이다.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도 저는 말보다 스크린 이미지로 청중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벌집문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구멍을 통해 들어가지만 우리는 결국 인터넷이라는 꿀통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하며 살고 있는 셈이지요.” 쿠버 씨의 아내 필라 씨는 46년 전 그가 스페인 체류 시 카탈루냐에서 만나 결혼한 여자다. “카탈루냐는 프랑스 쪽에 가깝다는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차별받는 지역입니다. 그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작가란 정신적 망명객과도 같아서 카탈루냐 사람들처럼 늘 소외된 삶을 살게 되니까요.”

-쿠버 씨는 아내 필라 씨에게 이번에 극동여행을 특별한 선물로 제공한다. 그의 대표작 <공개 화형>의 배경 가운데 하나인 한국을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함께 서울에 올 계획이다. “현대판 마녀재판으로 불리는 매카시즘을 패러디하는 소설 <공개 화형>을 쓰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1985년 한국을 방문했지요. 이제는 인터넷 강국이 된 한국을 20년 만에 다시 찾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밤이 오면 쿠버 씨는 집에서 영화를 본다. 그의 소설 <영화 보는 밤>은 바로 문학과 영화를 접목시킨 소설이다. 아예 영화처럼 1부와 2부 사이에 막간 휴식도 있다. 쿠버 씨의 하루는 동화들에 대한 패러디 소설 집필로 끝난다. 최신작 ‘계모’에서는 계모가 등장하는 여러 동화들의 재해석을 통해 여성 문제와 성장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하나의 고정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이끌어냄으로써, 동화들을 시대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지요.”

-그는 진부한 리얼리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향해 이렇게 질타한 적이 있다. “차라리 다시 한번 고래 뒤를 추적하거나, 헨리 밀러처럼 유랑의 길을 떠나거나, 아니면 신화나 동화의 세계를 탐색해 보라.” 쿠버 씨는 지금 사이버공간 속에서 문학의 미래를 탐색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은 안개를 뚫고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흰 고래 ‘모비 딕’처럼 이제 우리 앞에 그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나온 '동화'는 바로 그런 계열의 책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읽고 싶은 건 <공개 화형>이나 <영화 보는 밤> 같은 작품들이다. 순서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한국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공개 화영> 같은 소설이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태는 나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05. 11. 23-24.

P.S.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동아시아) 두 권, <대칭성 인류학>과 <신의 발명>이 새로 나왔다. 해서 시리즈는 모두 5권이 되었다(몇 권이 더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처지가 못된다. 애독하시는 분들의 리뷰를 기다려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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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야놀러가자 2005-11-23 22:04   좋아요 0 | URL
오옷 스포르차의 책이 나왔군요!
맥닐의 책과 함께 무진장 기다리던 책인데...

비로그인 2005-11-23 22:45   좋아요 0 | URL

로쟈님, 저번에 소개해주신다고 하셨던 이 책 말이예요,

괜찮은 책인가요? "과학혁명의 구조" 너무 읽기가 고역이라서....

저 또 그리고 스피박 넘기 이 책 번역 상태가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로쟈 2005-11-24 13:01   좋아요 0 | URL
구스님/ <토마스 쿤>은 제가 안 갖고 있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네요.^^ 소개로는 읽을 만한 책입니다. <스피박>은 제가 원서와 함께 갖고 있는 책이지만 당분간은 손이 가지 않을 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 벤야민, 데리다, 지젝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는 데다가 전공쪽의 책들도 산더미인지라... 언제 갑자기 마음이 동하면 리뷰는 쓰고 싶지만...

롯데명품위즐 2005-11-28 22: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음.. 제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는 로쟈님과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메일을 드렸습니다.
제가 라캉에 대해 오인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라캉을 접속시키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생각해봤습니다. 흠..... 왠지 제가 메일을 드린 게
후회가 되네요.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로쟈 2005-11-29 09:34   좋아요 0 | URL
위즐님이 보내신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무의식'과 '되기'가 유사하지 않나고 하셨는데, '무의식-되기'가 불가능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단은 '감'에 의지하기보다는 두 철학자에 대한 가감없는 '읽기'에 몰입하시는 게 더 생산적일 듯합니다(물론 독학보다는 대화적 소통이 더 바람직합니다. 이미 나와 있는 논의들도 참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와 라캉'이란 주제 자체가 상당한 견적의 사유를 요구하니까요. 라캉에 대하 '오인'하신 부분을 더 늘려나가시다 보면,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실 수도 있고, 굳이 저에게 문의하지 않으실 정도의 자신감도 얻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롯데명품위즐 2005-12-01 11:29   좋아요 0 | URL
친절한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년이면 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1941-1996)의 사망 10주년이 된다. 그의 이름은 'Krzysztof Kieslowski'로 표기되는데, 몇 가지 이형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키에슬로프스키)'라고 읽어주는 게 일반화된 듯하다. 여하튼 그 이름은 타르코프스키란 이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지난 90년대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동시대 감독으로서 그는 언제나 영감과 경탄의 원천이었다. 그보다 10년 전에 죽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영화가 어떻게 시의 깊이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었다면(내년이면 사망 20주년이군!), 키에슬롭스키는 영화가 어떻게 철학적 사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시사해주었다. 물론 겸손했던 그 자신은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문학에 비해서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로 내가 제일 처음 본 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이었던 듯하다(원제는 '베로니크의 두 가지 삶'). 기억에는 허리우드극장에서였던 듯한데, 연거푸 두 번을 보았고 이후에도 개봉관에서 한번 더 본 영화. 이후에 비디오로도 보고(몇년 전에 교보문고 지하도에서 구입한 중고 비디오는 유감스럽게도 정품이 아니라 복사품이어서 화질이 떨어진다. 2,000원짜리도 안 될 걸 8,000원이나 주고 샀었다! 환불하려고 벼르다가 끝내 교보쪽으로 다시 갈 일이 없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영화 자체도 매혹적이었지만, 주연을 맡았던 이렌느 야곱(1966- )의 신비한 매력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 물론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도 귓가를 오래 맴돈다(나는 영화속 가상의 작곡가인 '반덴 부덴마이어'의 음반을 사러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레드

이렌느 야곱의 모습은 이후에 '삼색' 시리즈의 <레드>(1994)에서도 다시 만나볼 수 있었는데, 영화 관람 후에 얻는 포스터를 상당히 오랫동안 벽에 붙여놓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삼색' 시리즈의 시나리오 영역본과 키에슬롭스키의 대담집 등을 구하게 되었고, 며칠 전에는 그에 관한 새로운 연구서들이 나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중 안네트 인스도르프(Annette Insdorf)의 연구서 <두 가지 삶, 두 번의 기회(Double Lives, Second Chances)>(1999)는 막바로 구할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이렌느 야곱(Irene Jacob)이 짤막한 서문을 붙이고 있는 것. 책 중간에 저자가 키에슬롭스키와 함께 찍은 사진들도 들어가 있는 걸로 보아 이렌느 야곱과도 친분이 있었던 듯싶다. 키에슬로프스키의 한 인터뷰를 에피그라프로 하고 있는 이 서문을 옮겨보면 이렇다(아래는 책 표지. 저자는 콜럼비아대학 영화학과 교수이며 <영화와 홀로코스트> 등의 저작을 더 갖고 있다): 

세상은 휘황한 불빛들과 바쁜 걸음걸이, 코카콜라, 새로운 차... 이런 건만은 아닙니다. 또다른 진실이 있습니다... 내세에서요? 맞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것일 수도 혹은 나쁜 것일 수도 있겠죠. 나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다른 게 있을 겁니다.”(<텔레라마>지와 인터뷰에서 키에슬롭스키)

-크쥐시토프가 건네준 대본을 매번 다 읽고 나면 나는 항상 수수께끼들에 대면하곤 했다. 왜 그녀는 이 나무를 만지는 거지? 이 구두끈에서 그녀는 무얼 찾는 거야? 그녀는 왜 ‘마법 구슬’의 굴절된 빛을 통해서 풍경을 바라보는 걸까?(<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주인공은 투명한 플라스틱 공 모양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것은 바닥에 튕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빛을 분산시킨다.)   

-현장에서 내가 크쥐시토프에게 그 장면(scene)에 대한 아이디어가 뭐냐고 물어볼 때면 그는 대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건데. 그게 나에겐 더 흥미로울 거 같아.” 그래서 내가 장황한 설명을 할라치면 그는 이렇게 가로막았다. “오호, 이렌코, 그건 너무 복잡해. 좀더 간단하게 말해주지 않을래요?”

-그는 현장에서 어떤 장면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걸 꺼려했다. 대신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로 계속 발견하고자 했다. 이미 정해져있거나 틀지어져 있는 게 아닌 뭔가 새로운 해석을 말이다. 

 

-좋은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들은 열려 있다. 그래서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자기 안의 ‘마법구슬’을 사용하여 우리의 해석과 재해석이라는 굴절된 빛을 통해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경우에만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궁금해하곤 한다. “왜 그녀는 그 나무를 만진 걸까?”... 그저 그 질문을 열어놓을 뿐이다.


-안네트 인스도르프는 이 멋진 연구서에서 크지시토프 키에슬롭스키 전작(全作)에 대한 통찰력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매 작품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넓혀놓으면서. 나는 그의 영화들과 인터뷰들을 새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다시 방문해보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아주 멋진 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안네트는 우리가 그 나무들을 만져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1987)에 피아노 선생으로 처음 출연했었던 이렌느 야곱이 <베르니카의 이중생활>에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었다. 키에슬롭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케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고, 나중에 <블루>의 주연을 맡게 되는 줄리엣 비노쉬 역시 <퐁네프의 연인들> 촬영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그때 눈에 띈 것이 이렌느 야곱이며, 그녀는 이 영화로 칸느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에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1995)와 <오셀로>(1997) 등의 영화에 출연한 이렌느 야곱을 더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녀의 최고작은 아무래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으로 남게 될 듯싶다. 키에슬롭스키가 세상을 뜬 이상 말이다.

 

 

 

 

<레드> 이후에 키에슬롭스키는 감독직을 그만두었지만, 와병 중에도 <신곡> 3부작에 대한 각본 작업을 진행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키에슬롭스키판 <십계>(<데칼로그>)에 이어서 영화사에 남을 만한 유산이 되었을 텐데, 키에슬롭스키판 <신곡>을 끝내 만나볼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깝다. 원래 TV용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데칼로그>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두 편이 극장 상영판으로 따로 제작되기도 했다(두 버전은 런닝타임이 다르며 결말도 약간 상이하다). 

김용규 선생의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가 이 시리즈에 대한 유일한 참고문헌이다. 철학자/신학자로서 저자가 <데칼로그>의 핵심적인 전언들을 짚어내는 데 있어서 영화비평가들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책은 입증해준다. 저자는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실천, 2004)도 내고 있는데, 이러한 저작들은 한편으론 한국 영화학계의 태만을 돌이켜보게 한다(하긴 한국영화사를 정리하는 데만도 일손이 모자랄 테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영화학에서의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에 지젝이 개입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책인데, 그가 키에슬롭스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흥미롭다. 읽기에 만만찮은 책이지만, 읽을 만한 번역이며 충분한 보상을 제공한다.    

 Kieslowski on KieslowskiThe Films of Krzysztof Kieslowski: The Liminal Image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기본적인 문헌은 <키에슬롭스키가 말하는 키에슬롭스키(Kieslowski on Kieslowski)>(1995)이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Joseph G. Kickasola의 <키에슬롭스키의 영화세계(The Films of Krzysztof Kieslowski: The Liminal Image)>(2004). 나는 이 책이 물 건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05.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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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1-2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제가......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가장 매혹적이었고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좋아하는...영화) 중 몇손가락 안에 꼽힐겁니다. (1위 2위 3위라고 순위를 정할 수는 없지만....)

삼색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를 단연 좋아했죠.

이렌느 야곱 역시.....너무너무 좋아요...

이 두 영화 말고...또 이렌느야곱이 주연한 키에슬롭스키의 단편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제목은 기억이 잘 안나네요...
대학시절...정말 좋아하던 배우와 감독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로쟈님의 글...
싼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맘으로 기다리겠습니다!

blowup 2005-11-23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레드>의 이렌느 야콥이로군요. 어여어여. 글 올려주세요.

로쟈 2005-11-23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키에슬롭스키 연구서 하나를 복사했는데, 이렌느 야곱이 짤막한 서문을 썼더군요. 제가 좋아했던 감독과 배우이기도 해서, 그걸 옮겨놓으려고 합니다. 대단한 글은 아니랍니다.^^

파란여우 2005-11-2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훈늉한 영화이죠
참고로 제 영세명이 뭐게요?^^

이네파벨 2005-11-2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베로니카??? ^^

mannerist 2005-11-2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망자2'를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눈 헉- 뜨고, 내내 통탄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쿨럭;;;;

검둥개 2005-11-2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전 이 영화를 어제 케이블에서 잠깐 봤어요. 십 년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는데 이렌느 야곱이 키에슬로브스키에 대해 쓴 글이 있다구요? 무척 궁금합니다. ^^ 이렌느 야곱은 <오델로>에서도 괜찮은 연기를 했죠.

이네파벨 2005-11-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삽입된 곡들이 너무 맘에 들어서..사운드트랙 앨범을 꽤 힘들게 찾아다니다 구매했던 기억이 납니다.(멜로디가 머리속에 떠오르네요. 배경으로 깔리던 곡들...베로니크가 노래한 합창곡....)

음...앤디 맥도웰이나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베로니카는 상상하고싶지도 않네요.

배우의 이미지는 맡은 배역으로 각인되는 것이긴 하지만...
앤디 맥도웰은 신비스럽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너무나 미국 냄새가 풍기잖아요...(세번의 결혼식...에 나온 그 이미지가 딱!)
줄리엣 비노쉬도 나름 개성있고 신비(?)스럽기는 하지만 그 개성과 신비감을 지나치게 돌출시키고 강요하는 타입이라 별로....(거칠게 말해 오버스럽다고 할까요..)

......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벌써 죽은지 10년이 되었군요...(사실 죽은지도 몰랐지만..)
아름다운 우주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버렸군요....

검둥개님, 케이블에서 이 영화를 해주었단 말이죠? 놓치다니....너무나 안타깝네요...지금 찾아보니 DVD 타이틀도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것 같아요...TV에서 이걸 보셨다니 그저 부러울 뿐...ㅠ.ㅠ

2007-02-28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들의 영역판에 새로이 서문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서문들에서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하다.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들뢰즈 번역서들이 영역판에서 중역을 하는 대신에 불어원전을 옮겨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역판 서문들이 소개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영역판 서문을 부록으로 옮겨놓고 있는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 그리고 불어판을 옮기고 있는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2001)과는 달리 영역판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등이다.

 


 

 

 

 

 

 

<니체와 철학>(1962) 영역판(1983) 서문은 역자인 '휴 톰린슨(Hugh Tomlinson)에게‘라는 헌사를 달고 있는데, 우리말로 옮겨진 첫문장은 이렇다: “어떤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다.”(11쪽) 이에 대한 원문은 “It is always exciting for a French book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이다. 즉, ”어떤 불어 책이 영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라는 것.


우리말 번역대로, 이 흥분은 ’번역 일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불어에서 영어로‘라는 특정한 번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에도 매번 서문을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영어와 영미문학/철학이 갖는 의미가 좀 각별하다는 점을 여기서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경험론자로서 당대의 이질적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를 나는 ’영국 철학자‘로 분류하고픈 유혹을 자주 느낀다).  


그에게서 왜 영어와 영국이 문제되는가? “니체가 가장 많이 오해되어 온 것은 아마 영국에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프랑스 합리주의와 독일 변증법에 맞서서 투쟁한 주요 주제들은 결코 영국식 사유들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이론적으로 사용하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소유했었다. 그것은 니체를 통한 우회가 그들에게는 별로 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의 ‘양식’에 어긋나는 니체의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한 우회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역본에는 생략돼 있지만(Tomlinson suggests), 이러한 지적은 영역자 톰린슨의 견해를 들뢰즈가 수용한 것이다.


즉, 합리주의와 변증법에 감염돼 있지 않은 영국인들에게 ‘니체 철학’이라는 처방(우회로), 혹은 '백신'은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면역돼 있는 상태였으며, 니체의 ‘망치로 하는 철학’ 대신에 이미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영국식 망치를 잘도 쓰고 있었던 것. 해서, 영국에서 니체는 (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극작가들에게나 겨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철학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수용됐다. 


여기서 상기해둘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 독특하게도 ‘장소’에 대해 질문하는 ‘지리철학(geophilosophy)’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철학을 동일시한다면, 그의 철학은 반철학(anti-philosophy)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기원, 다른 계보, 다른 종족의 철학을 기획했었다(작년에 나온 들뢰즈 가이드북 하나는 'Deleuze and Geophilosophy'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아무튼 니체 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처음에 전제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 철학이 영국인들에게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며 그것은 일면 필연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그는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왜 위대한가? 철학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자(thinker)를 날고 있는 화살에 비유한다. 그것은 또다른 사유자가 그 이외에 다른 곳에 그것을 쏠 수 있기 위하여 그 떨어진 곳을 찾는 그러한 화살이다. 그에 따른다면, 철학자는 영원하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반시대적(untimely)’, 언제나 반시대적인 것이다.”(12쪽) 그래서, 이 반시대성은 니체 철학의 표지이다.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니체는 (철학사에서) 어떤 선배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오래전의 전-소크라테스학파(Pre-Socratics)와, 그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단 한 사람의 선배인 스피노자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니체 철학의 계보는 단촐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잘 알려진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삶을 ‘질병’으로 간주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러한 ‘병적인 철학’에 맞서서 니체는 삶과 철학에 건강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건강’의 문제는 들뢰즈에게서도 핵심적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면, 니체-들뢰즈의 금언은 “너 자신이 되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불건강한, 병약한 자들인가? 주제를 파악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삶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긍정하는 대신에) 부정하며 진정한 삶을 내세의 삶으로 유예시킨다. 말하자면, 감히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가령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 “인생이 다 지나갔군. 산 것 같지도 않게!..” 왜 그런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긍정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타성과 관습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해서 자신의 삶을 어떠한 술어로도 고정/한정시킬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표어는 "삶은 다른 곳에 있다!(Life is elsewhere!)"이다.


반면에 건강한 자들이란 주제 파악 못하는 자들이다. 삶에 대한 넘치는 식욕으로 잠못 이루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삶은 지금/여기에 있다!(Life is here/now!)"이다. 그들은 언제나 앙콜(Encore!)을 외친다. "좋아, 한번 더!" 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이대로!'라고 건배하는 '부유한 노예'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와는 다른 것이다.

 

이 ‘너 자신이 되는 것(To become what one is)’에 대한 주판치치의 창의적인 주해에 따르면, ‘자신이 존재하는 바가 되는’ 순간은 합일의 순간이 아니라 순수한 분열의 순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순간’은 주체화로 진입하는 순간이자 합일의 순간이고, 니체의 ‘너 자신이 되는 순간’은 주체로 퇴거하는 순간이자 분열의 순간이다('주체화'와 '주체'의 차이는 토이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 참조. 한편, 이 ‘분열적 주체’는 막바로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 분열의 표현들 중 하나는 퇴락 또는 부정의 원칙과 시초 또는 긍정의 원칙 사이의 구분이다.”(<정오의 그림자>, 43쪽) 그리고 이 분열에 대한 ‘개념적 인물들’이 그리스도(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디오니소스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디오니소스란 그 분열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 “디오니소스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 뒤에,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서 오는 게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새로운 다른 가치들의 등가물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낡은 것의 몰락 이후에 오는 새로운 시대의 시초, 신기원의 아침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낮으로서의 시초이며, ‘하나가 둘로 변하는(one turns to two)' 순간이며 다시 말해서 새로운 그 무엇으로서의 바로 그 '둘이 됨(becoming two)' 또는 분열의 순간이다."(43쪽)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책세상판, 21쪽) 내가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지만, 당장 옆에 있는 거라서 인용한다(내게 친숙한 것은 최승자 역의 청하판이다. 나는 5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

독어의 'Untergang'은 이행과 몰락의 뜻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 주판치치가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디오니소스란 따로 하나가 둘이 되면서 이러한 과정(이행)과 몰락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 그러한 순간의 이름이 아닐까도 싶다. 그런 것들은 새로이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나는 불어본과 함께 영어본, 러시아어본, 2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과 주판치치의 <정오의 그림자>를 마저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작정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여기까지가 영역본 <니체와 철학>에 들뢰즈가 붙인 서문의 첫 페이지 '브리핑'이다. 원문보다 길어지는 것도 브리핑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쌓여가는 머리속의 글들을 처치(!)하기 위해서 이 글의 초안은 어제 자정 넘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걸려 한 페이지를 소화하는 걸 보면, 위대하기는커녕 내 위장이 얼마나 작은지 알겠다(떠들어대는 것들을 조지기 위해서는 깍두기들이라도 동원해야 할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주제 파악을 하게 될는지!..

05. 11. 23.

P.S. 그러니까 들뢰즈의 이 서문의 '본론'에 대한 브리핑은 또 미뤄지는 셈이 됐다(덕분에 애초의 제목과는 달리 니체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게 돼버렸다!) 그런 식으로 미뤄지는 만큼 수명도 연장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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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5-11-2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 자신이 돼라"에서 '되다'는 피동형이 아닌가요. 그래서 문맥과 상충하는 어미인 듯합니다. '하다'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다형으로 하자면 문장을 변형해야겠지만요.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8-11-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다'는 어떻게 결합되는 것인지요? 문맥상 '하다(do)'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라...

포월 2005-12-29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의 식욕(?)에 까무라칠 지경입니다. @_@ 몇년 사이에 들뢰즈의 글 모음집이 프랑스에서 두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첫번째 권이 영역되었고 둘째권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 ... 판권계약해서 한국어번역도 진행중일텐데, 프랑스어판 둘째권은 들뢰즈가 쓴 영역판 서문이 모조리 모아져있더군요.
 

수능을 하루 앞두고 날이 풀렸다. 날씨도 수험생들을 배려하다니 기특하다. 어제 아는 집의 자제도 고3이어서 우리 가족이 '합격기원' 선물 배달을 갔었다(어디에 합격하나?). 중학교때 본 아이는 어느새 나보다도 키가 더 커 있었다. 그렇듯 자라나는 게 '도덕'이라고 믿는 나로선 아이의 '도덕성'이 또한 기특했다. 물론 성적은 도덕순이 아니므로 내일 애써 분전해야 하리라. 그의 건투를 빈다.

 

 

 

 

잠깐의 외출 뒤에 집에 돌아와 내가 잡은 책은 다시 손택의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이다. 거기서도 벤야민을 다루고 있는 "토성의 영향 아래". 이미 한번 읽은 걸 찬찬히 다시 읽고 있다. 손택의 벤야민론을 정리하는 건 지난번에 폴 굿맨과 롤랑 바르트 얘기를 정리하면서 미뤄둔 일인지라 마음 한구석에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마저 다 읽지 못한 상태이지만 쉬엄쉬엄 진도를 빼기로 한다.

손택의 벤야민론은, 사진에 관한 책도 낸바 있는 저자답게, 벤야민 사진 몇 장에 대한 얘기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갖고 있는 Picador판의 원서 "Under the Sign of Saturn"(2002)에도 그렇고, 우리 번역서에도 이 사진들을 싣고 있지 않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따다가 대략 설명과 맞추어본다.

첫번째 사진은 손택이 본 가장 오래된 사진인데, "1927년, 그가 서른 다설 살때의 사진이다." 이어지는 묘사는 이렇다: "넓은 이마 위에 짙은 색 곱슬머리, 두툼한 아랫입술까지 덮은 콧수염. 젊고,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모습이다. 머리를 숙이고 있어 재킷 속의 어깨가 바로 귀 뒤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고 나머지 손은, 둘째, 셋째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입가를 가리고 있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내리깐 시선, 근시안의 부드럽고 몽상가 같은 시선은 사진의 왼쪽 아랫부분으로 더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65쪽)

그리고 두번째 사진. "1930년대 후반에 찍은 사진은, 이마는 거의 벗겨지지 않았음에도 젊음이나 미모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얼굴이 커졌고 상체는 육중하고 건장해 보인다. 숱 많은 콧수염과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은 통통한 손이 입가를 덮었다. 시선은 불투명하다. 전보다 더 내면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열심히 듣는 사람은 보지 않는다." 벤야민을 카프카에 대한 글에 이렇게 썼다). 등뒤에는 책이 꽂혀 있다."

세번째 사진은 "1938년 여름의 사진"으로 "1933년부터 덴마크에 망명하여 살고 있는 브레히트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브레히트의 집앞에 서 있는 벤야민은 46세의 노인으로 흰 셔츠와 타이, 양복바지에 회중시계를 달고 있다. 느슨하고 비만한 몸집으로 카메라를 도전적으로 응시하고 있다."(66쪽)

네번째 사진은 "1937년의 또 다른 사진"으로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벤야민의 모습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두 남자가 벤야민 뒤쪽에 좀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다. 벤야민은 오른쪽 전경에 위치하는데 아마도 10여 년 동안 집필 중인 보들레르와 19세기 파리에 대한 책을 위한 메모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왼손으로 책을 펼쳐 잡고 있는 책을 보고 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사진의 오른쪽 아랫부분을 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어서 손택이 인용하고 있는 숄렘의 증언은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 2002)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한데, 벤야민의 절친한 친구 게르숌 숄렘은 1913년 벤야민을 처음 보았을 때를 이렇게 묘사한다. "시오니스트 청년 단체와 스물 한 살의 벤야민이 회장을 맡고 있는 자유 독일 학생 협회의 유태인 회원들의 조인트 모임이었는데, 벤야민은 <청중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천장 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즉흥 연설을 했다. 격정적으로 열변을 토했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바로 글로 활자화해도 될 그런 연설이었다.>"(66쪽) 

이제 본론이다. 먼저 제목 '토성의 영향 아래'에 대한 해명. "프랑스인들은 벤야민을 '슬픈 사람(un triste)'이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 벤야민의 모습은 '심오한 슬픔(a profound sadness)'이 그의 특징인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 벤야민은 스스로를 우울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현대 심리학에서 붙이는 명칭을 경멸하여 전통적인 점성술적 개념을 끌어온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점성술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몇 권 나와 있지만, 그런 것까지 참조할 형편은 못된다. 아마도 서양 점성술에서 토성(Saturn)은 우울증적 기질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기야, 과거엔 토성이 태양계의 가장 마지막, 외곽의 행성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간주되었을 법하다(명왕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이들은 어떻게 되나?). 그래서 요일에서도 맨마지막에 자리하고('즐거운 토요일'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런 우울증을 상쇄하기 위한 마스크일는지도 모르겠다). '토성의 영향 아래'라고 번역돼 있지만, 우리식으론 '토성의 기운 아래' 혹은 '토성의 기를 받아'라고 새기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하겠다.

"벤야민의 주된 작업, 1928년에 출간된 독일 바로크 연극에 관한 책과 완성되지 못한 <파리, 19세기의 수도>는 이 책이 우울증 이론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67쪽) 역자는 이런 대목들에서 복수형을 대개 단수형으로 옮기고 있는데, 한국어답긴 해도 의미의 모호성을 유발한다('이 책이'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손택이 벤야민의 주된 작업(major projects)으로 들고 있는 것은 박사학위청구논문이었던 <독일 비극의 기원>(1928)과 '파리, 19세기의 수도'를 다룬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알다시피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지난번에 절반이 출간됐고, 나머지 절반도 근간 예정인 걸로 안다. <독일 비극의 기원>은 번역이 진행중인 걸로 알지만, 언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일어로는 <독일 비애극의 근원>으로 옮겨져 있다. 'Traurspiel'(비극)은 문자 그대로 '비애극(sorrow-play)', '애도극'이란 뜻이다.

벤야민 비평의 두 가지 키워드는 알레고리와 멜랑콜리(우울증)이다. 따라서 우울증적 기질에 대한 손택의 강조는 당연하며 정당하다. "벤야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기질을 모두 자신의 주요 연구과제에 투사했으며, 그의 기질이 그의 글쓰기의 주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해서, 비평가로서 그가 다룬 대부분의 작가들에서 그가 본 것이 '우울함'이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면서도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하다못해 벤야민은 괴테에게서도 '토성적 기질'을 발견한다.

 

 

 

 

벤야민의 괴테론은 <친화력>에 관한 에세이가 유명한데, 종종 번역서들에서는 <선택적 친화성> 등으로 (잘못)옮겨지고 <우울한 열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영어의 'Elective Affinities'의 번역이긴 하지만, (이전에 자주 언급한 대로) 고유명사의 번역은 주의를 요하며 기존의 관행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에 우리의 우울증적 벤야민은 그가 읽어내는 모든 걸 블루로 채색한다.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세상을 그 혼란상 속으로 끌어당기는 고독'을 묘사하고, 카프카도 파울 클레처럼 '본질적으로 외로웠다'고 설명하며, 로버트 발저의 '인생에서의 성공에 대한 공포'를 인용한다." 가히, 구제 불능이라 하겠다. 손택에 따르면, "삶을 이용해서 작품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품을 이용해서 삶을 해석할 수는 있다."(One cannot use the life to interpret the work. But one can use the work to interpret the life.) 바로 벤야민의 경우가 그렇다...

05. 11. 22.

P.S. 다른 볼일들 때문에 일단은 여기에서 끊는다. 필요 때문에 도서관에서 가서 사르트르에 관한 자료들을 좀 뒤적거려야 한다. 어젯밤에도 사르트르를 좀 뒤적이다가 고유명사 표기에 관해서 좀 어리둥절한 일이 있었는데, 가령 사르트르의 희곡 'Huis clos'(1945)에 대해서도 <유폐의 방>, <닫힌 방>, <닫힌 문>, <출구는 없다>, <출구 없는 사회> 등등으로 표기돼 있었다(영역은 'No Exit'). <유폐의 방>과 <출구 없는 사회>가 같은 작품을 지칭하는 거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과연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야만 하는 건지 의문이다. 

그러다 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사르트르의 장편 <자유의 길>의 1권은 'L'age de raison'이고 '철들 무렵' 혹은 '철들 나이' 등으로 번역돼 있다. 한데, 래빈 여사의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동녁, 1993, <방송강의 철학사>로 다시 나왔다)에서는 영역본 제목('The age of reason' )을 옮기느라 거창하게도 '이성의 시대'라고 번역해놓았다. 이해할 만한 오역이지만, 피할 수 있는 오역이란 것도 분명하다(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확인해볼 수는 있는 노릇이다). 참고로, 래빈 연사의 강의 철학사는 권장할 만한 책이다.  

 

 

 

 

P.S. 주말에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를 DVD로 대여해 봤는데(이 작품의 진리는 간명하다. '대한민국 검찰은 쇼'라는 것, 나머지 드라마는 그걸 떠받치기 위한 구색 맞추기일 텐데 내겐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네번째 에피소드인가의 제목이 '전설(傳設)'로 돼 있었다. '전설(傳說)'이 아니라. 이건 또 무슨 장진식인가, 하며 보았지만, '전설(傳設)'과 관련된 내용은 따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오타였던 것(타이틀 목차에는 '전설(傳說)'로 돼 있었다). 이런 해프닝들이 '옥의 티'로 즐거움을 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나는 어수룩한 '쇼'를 좋아하지 않는다(보여주는 것 없는 국내판 '쇼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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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1-2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베호벤 감독
에로틱과 피의 감독이죠. 요즘은 뭘 한대요?

로쟈 2005-11-2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까지 소식이 오는 건 아니지만 저보다 바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계속 영화들을 찍고 있다니까...
 

 

 

 

 

 

 

옛날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철학에 대하여>(동문선, 1997)를 (부분)정리해놓은 게 눈에 띄어서 옮겨놓는다. 요컨대 개인적인 작업노트이다. '철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은 개인적으로 알튀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한 대담이라고 생각한다. 1993년인가 <이론>지에 번역/소개되었던 자크 데리다와의 대담(대담자는 마이클 스프린커)과 함께(이상하게도 이 대담은 원문의 절반 정도만이 번역되었다). '묘한' 사제간이었던 데리다와 알튀세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헌이다.

 

1부.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

1장-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 데모크리토스의 노선

 

-“마르크스의 발견의 핵심이 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학적 철학이나 물리학적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그는 자기비판을 통해 <인식론적 단절>이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경향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19)

 

-당시 나는 프랑스에서 내가 1948년 이래 당원으로 있던 프랑스 공산당에 개입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내겐 선택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에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내게 남아 있던 개입의 길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순수한 이론, 즉 철학을 통한 개입이 그것입니다.(27) 나는 <자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될 만한 것을 탐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30) 당은 이제는 나를 추방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던 나의 개입이 마르크스에 의거하고 있었고, 나는 하나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 해석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불가침의 聖父인 사상가>가 되어 당 내부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알튀세르에게서의 당의 문제: "그에게 있어서 할 수 없었던 것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당을 떠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의 투쟁이 당 내부에 있다고 간주했습니다. 반면 저는 당원이 아니었고 그래서 저는 당 밖에 있는 알튀세르를 또한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있었고 저는 아니었습니다. 차이를 아시겠지요? 그것은 무시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 <진정한> 유물론,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적합한 유물론은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노선에 서 있는 우발적 유물론입니다.(33) 우리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상상적> 철학(레이몽 아롱)을 만들어 냈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에 문자대로 엄격하게 매달린다면 그의 저작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철학 말입니다.(36) 어떤 것이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철학, 철학사에 속하는 하나의 철학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용했던 개념적 발견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일 것입니다.(37) 그가 탐구한 것은 <비철학>, 그 이론적 헤게모니 기능이 철학의 새로운 존재 형태들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소멸할 <비철학>입니다.(38) 이처럼, <자본>이라는 과학적-비판적-정치적 저작을 씀으로써 그는 자신이 결코 쓰지 않은 철학을 실천한 것입니다... 현재 과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을 가공해 내는 것입니다.(39)

 

-이 유물론[우발적 유물론]은 주체(신이든 프롤레타리아트이든)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있는 목적이 업이 자기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없는) 과정의 유물론입니다.(40) 의 철학, 의 철학은 기원 등등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질문들을 척결합니다. 이 철학은 우리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세계의, 그리고 세계의 의미의, 일종의 선험적 우연성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이렇게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증여>입니다.(42)

 

-여기서 내 의도는 철학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마키아벨리-홉스-루소-마르크스-하이데거의 전통입니다... 그것은 통상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것으로 돌려지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다시 말해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인 저 유물론을 포함하여 유물론으로 인정받던 유물론들에까지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우성의 유물론, 요컨대 우발성의 유물론입니다.(43) 모든 형태에 대해 무가 우선하며, 현존에 대해 부재가 우선합니다.(44)

 

*데리다가 대담에서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중요성: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하이데거는 금세기의 회피할 수 없는 유일한(the)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유일한 위대한 적수이자 또한 동시에 일종의 매우 중요한 동맹자 또는 잠재적인 후원자로서 말입니다(알튀세르의 전저작은 이러한 징후에 따라 읽혀져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것을 <세계는 일어나는 것 전체이다>(<세계는 우리에게 떨어져내리는 것 전체이다>)라고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훌륭한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세계에는 예고 없이 <우리에게 떨어져 내리는> 사례들․상황들․사물들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례들, 즉 서로 전적으로 구별되는 개별적 개체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테제가 바로 명목론의 기본 테제입니다... 나는 명목론이 유물론의 대기실이었을 뿐 아니라 유물론 그 자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49)

 

 

 

 

 

 

 

 

-세계는 전적으로 개별적이고 유일고유한 사물들고 구성되어 있고, 사물들은 제각기 고유한 명칭고 속성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여기> 있는 것, 이것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지 명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은 이미 추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에 대한 몸짓의 우위, 기호에 대한 물질적 흔적의 우위가 뜻하는 바를 말을 사용하지 앟고서 말해야, 즉 가리켜야 합니다.(50)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유일고유하고 우발적이며 예견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의미의 역사의 이론에도, 정치적 실천의 이론에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역사의 이론, 현재 속의 정치적 실천의 이론에 대해 유일하게 사고한 사람은 마키아벨리입니다.(51)


2장-철학-이데올로기-정치

-내 생각에 철학이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으로서 성립한 것은 수학이라는 최초의 과학이 성립한 시기입니다... 철학은 과학에서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어떤 것, 즉 철학에 불가결한 합리적 추상화의 모델을 끌어왔습니다... 요컨대 순수한 합리적 담론, 그 모델이 과학들 속에 있는 합리적 담론이 미리 존재하지 않고서는 철학이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54)

 

-모든 철학은 자신의 대립물이라는 유령을 안고 있습니다. 관념론은 유물론이라는 유령을, 유물론은 관념론이라는 유령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이론적 전투를 개시하는 것입니다... 

 

05. 11. 21.

 

P.S. 데리다의 대담에 대한 정리, 그리고 데리다의 알튀세르 비판의 요점 등은 따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그 자리는 공간이지만 시간의 좌표를 갖고 있다. 기약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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