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약간 여유로운 휴일을 보냈다. 이런저런 일들과 함께 원고 하나가 밀려 있긴 하지만 네 편을 써야 했던 지난주에 비할 바가 아니고, 무엇보다는 내주가 시험기간이어서 두 과목에 대한 강의준비를 안 해도 된다는 점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이유다. 그래서 모처럼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8)의 한 장을 읽고 있기도 하다(아, 이건 외부 강의준비이기도 하다). 낮잠까지 조금 자고서 동네 도서관에 가 조너선 스펜스의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푸른숲, 2002)과 남경태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역사>(들녘, 2008)를 대출했다. 그러고 보니 <마오쩌둥>의 번역자가 남경태 씨다.  

그리고 동네 대형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잠깐 둘러보고 오는 길에(고종석의 <여자들>이 출간됐다) 손에 든 경향신문에서 <삼국유사>에 얽인 이야기를 닮은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현암사, 2009)에 관한 기사를 흥미롭게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대학생 자유기고가' 한윤형의 대학 총학생회 문제를 다룬 칼럼을 읽고서 엊그제 읽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칼럼과 나란히 스크랩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진보정치의 딜레마를 고민하게 하는 칼럼들이 아닌가 한다(사적 영역과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란 문제).   

경향신문(09. 12. 12) [2030콘서트]‘허수아비’ 대학 총학생회 

대학가에서 가을은 총학생회 선거의 계절이다. 올해는 유난히 총학 선거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지인이 많았다. 개표 전 ‘투표함 개봉’과 ‘도청’을 통한 비리 폭로로 파행으로 치달은 서울대 총학 선거를 비롯해 우려스러운 모습이 많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기성 정치권 못잖은 ‘꼬마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 어떻게 해도 투표를 하지 않는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 어느 쪽을 택하든 씁쓸함은 남는다. 우스갯소리로 운동권이 총학을 잡으면 자기네 정치조직으로 돈이 흘러가고, 비(운동)권이 총학을 잡으면 학생회장과 그 측근들의 주머니로 돈이 흘러간다고 한다. 이 말에 약간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학생의 대표자로서 제 역할을 하는 총학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실정이므로 학생들이 총학 선거에 무심해지고, 그 무심함의 장막 뒤편에서 총학이란 조직에 배정된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한 난장판이 벌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오늘날의 대학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해방구’도 아니고, 진학률 86% 시대의 대학생을 특권층이라 칭하는 것도 부질없다. 대학생의 위상이 낮아지면서 이들을 예비노동자라 부르는 이도 나타났지만, 지금은 이조차 사치스럽다. ‘예비’라는 글자를 떼어내기 위해 젊은이들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이제 대학생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고, 다만 자신의 삶이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에 던져진 2000년대 초반의 운동권 정파들은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을 주장해서 학우들의 신망을 얻어 총학을 잡고, 총학을 잡은 이후엔 자기네 정치조직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학생들을 위하는 ‘복지공약’과 제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투쟁’의 이분법 속에서 등록금 문제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설령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총학은 대학 당국에 대해 얼마나 무력한 조직인가? 가장 강경한 정파가 가장 강경하게 투쟁했을 때도 등록금 투쟁은 실패로 끝나곤 했다.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몇몇만 희생양이 되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학 선거가 복마전이 되는 이유는 총학이 학생들에게 참여를 독려할 만큼의 권력은 지니지 못했으되, 선거에서 승리한 몇몇 학생들에겐 충분히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의 조직이 되어버렸기 때문 아닐까?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듯이, ‘학생 없는 학생회’에 대해 얘기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꼬마 정치꾼들’과 ‘선거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 대한 규탄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다.

총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학생들이 총학 선거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학생들의 열렬한 참여 없이는 대학 당국이 총학에 더 큰 권력을 배분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을 거다. 이 딜레마 속에서 총학은 대학 당국과 학생들 사이에 어떠한 소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허울 좋은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총학에 대한 고민은, 이렇게 그것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한윤형 | 대학생·자유기고가)   

경향신문(09. 12. 11) [사유와 성찰]개인 삶을 희생하는 진보

우리 사회 진보파 가운데는 개인 삶을 돌보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진보를 위해서는 개인 삶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사적 영역 자체를 부정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돈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한 민주노동당은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관, 중앙당 및 지역조직 상근자 등, 이른바 진보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된 사람들에게 평균 127만3000여원의 월급을 줬다. 국가 예산으로 지급된 국회의원과 보좌관 급여는 당이 환수했다. 이 모든 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받는다”는 논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후 약간의 증액은 있었지만 그 원칙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지켜지고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를 교육하는 등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구나 불만조차 잘 표출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자칫 돈을 밝히는 사람이거나 진보의 대의에 헌신하려는 자세가 안돼 있는 사람으로 비난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균임금 받는 국회의원
그렇다고 진보에 대한 도덕적 헌신은 강해졌을까? 그것도 아니다. 개인 삶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열정은 식고 현실의 압박은 커졌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진보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되니, 조직의 인적 역량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을 교체할 수도 없었다. 저임금 구조에서 고용 안정마저 위협되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유능한 인력이 충원되고 순환되기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저임금 구조로 통합·유지하는 조직, 공식적으로는 급여를 올리기 어렵다보니 편법을 통한 소득 보전을 강구해야 하는 진보 아닌 진보정당이 되고 말았다.

공직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한다는 생각은 파리코뮌의 원칙이었다. 달리 말해 혁명 내지 혁명정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혁명의 원칙으로 실천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에게 기반을 두는 정치체제이고, 진보정당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평범한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수용되고 실천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개인 삶을 희생하는 진보는 혁명의 원칙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원리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차티스트 운동을 단순히 노동자 참정권 주장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 제기된 요구 가운데 하나는 대표들에게 세비를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개인 삶을 희생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공직에 돈을 요구하는 것은 천박하다며 반대한 사람들은 돈 걱정이 없는 귀족들이었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래야 정치 참여와 개인 삶이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지켜지는 개인 삶이 튼튼할 때 민주주의가 사회 속에 뿌리내릴 수 있듯이, 진보의 이름으로도 개인 삶이 안정될 수 있어야 자기 삶을 걸고 진보를 지키려는 의지가 커질 수 있고 또 오래갈 수 있다. 돈이 진보정치를 타락시킬까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저임금을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민주주의 원리와 양립 어려워
돈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이다. 돈을 잘못 다뤄서 인간이 타락하는 것이지 돈 그 자체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니다. 돈에 무심하다거나 돈 욕심이 없다는 것을 진보인 양 자랑하거나 돈이 가치를 잃어야 인간성이 되살아난다는 진보의 통념은, 자칫 온정적 엘리트주의나 변형된 귀족주의이거나 현실의 고용·피고용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나타날 때가 많다. 진보를 이유로 개인 삶이 희생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박상훈 |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09.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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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1:54   좋아요 0 | URL
학생회든 회사의 노조든 그들이 가야 할 길, 아니 쉽게 말해 자신이 무슨일을 하는지, 무슨일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등록금 동결, (똑같은 맥락인) 임금인상 등이 그들의 하는 일인지...차라리 대학이라는 곳이 취업준비하는 곳이 아닌 학문의 연구,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런 그들이 사회에 나가 어느 곳에 들어가도 일도 잘하고 사람관계도 잘하는 진짜 엘리트임을 증명해보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조에서 임금 4.9%인상을 이끌어내었다고 하면 몇십만원 오른 월급 기뻐하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말입니다. 그 금액이 더 좋은 곳에 쓰일 데는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잠깐 씁쓸해지는 나약한 인간성을 그들이 도리어 느끼게 해주더군요

로쟈 2009-12-13 22:16   좋아요 0 | URL
흔히 '생활정치'라고 하는, 등록금 동결이나 인하 요구도 저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럼에서도 지적됐지만, 문제는 현재의 총학이 그런 걸 할 수 있는 역량을 안 갖고 있다는 것이고요. 이번의 불미스런 사건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총학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 저항이지 않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허울 좋은 들러리'를 '정치적 참여'라고 포장하는 건 기만적이죠...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2:27   좋아요 0 | URL
'생활정치'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의 관심과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제가 아쉬운 건 왜 등록금을 낮추어야 하는가 의 원인의 밑바닥에 있는 '인간', '인간다운 삶' 이라는 주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죠. 우리네의 정치처럼 말입니다.

로쟈 2009-12-13 22:30   좋아요 0 | URL
사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대학에서 좋아하는 '수혜자 부담' 원칙에도 어긋나기 때문이죠.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졸업장을 받아도 취업이 안되는 현실이라면 말이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절반은 후불제로 해야된다고도 생각합니다...

2009-12-1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3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2:54   좋아요 0 | URL
등록금을 내고, 공부를 하고, 과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의학에서든 문학에서든 예술에서든 삶의 원리와 진지한 태도를 배우게 되고, 그래서 더 공부할 수 밖에 없고, 그 후에 졸업장을 받았을때 취업 역시 우등상장처럼 따라오는... 학문의 전당, 성공하는 인재를 만드는 대 학 이 되길...
(굶어가고 있는 아내를 버리고 공부,학습하고도 자신은 위대한 철학자가 되고 아내에겐 악처란 이름을 준) 소크라테스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도록 말입니다.^^

로쟈 2009-12-13 22:58   좋아요 0 | URL
'학문의 전당'이나 '성공하는 인재'는 대학의 평균치와 무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진학률 86%라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대학진학이 '선택'의 의미를 잃었으니까요...

펠릭스 2009-12-13 23:25   좋아요 0 | URL
진보주의자라고 해서 아니면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당사자의 가족이 진보거나 보수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요. 만약 진보주의자의 가족이 돈을 펑펑 쓴다며 세간에 알려지면 그것은 '시칠리아의 암소'격이라 비난 받을 가능성 있습니다.진보든 보수주의자든 그에게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생활 경제권이 있습니다.하지만 부자중에 진보주의자가 있던가요, 아니면 학생(노동)운동권에,,,부유계층은 복지부동하며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로쟈 2009-12-14 23:37   좋아요 0 | URL
그리스 민주정이 노예제를 기반으로 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homania 2009-12-24 17:42   좋아요 0 | URL
하지만 강남좌파라는 말은 일정부분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건 사실입니다

델러웨이부인 2009-12-15 21:42   좋아요 0 | URL
어머 저와 이름이 같은 분이 댓글을 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

로쟈 2009-12-15 23:12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아까 기획회의를 읽던 참이었는데요.^^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

이번주에 읽은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대표적 MB용어가 된 '국격'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라는 걸 알게 해준 칼럼과 '용산' 이후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질문하는 칼럼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용산 묵시록이다.   

경향신문(09. 12. 10) [이대근칼럼]버려야 할 것 - 국격·곡격·국역·구격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격은 소수만이 쓰던 예외적이고 특수한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사용 빈도가 부쩍 늘더니 요즘은 이 걸 빼고는 말을 못할 정도로 대유행이다. G20 정상회의 주최, 외교 강화, 기부, 관광산업, 공적개발지원(ODA) 확대 모두 국격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국격은 국회 의장대 도입, 아프가니스탄 파병, 법질서 확립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부에게는 바람직한 국정의 표상이 다. 정부는 이미 ‘국격 업그레이드’를 위한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운영 중이고 대통령은 내년 부처별 업무보고 때 국격 향상안을 내라는 지시를 했다. 정부의 용산 참사 방치, 인권침해도 국격을 손상한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국격은 이렇게 방어와 공격은 물론 여야가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도 요긴한 만능의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어느 새 이 단어가 풍기는 낯섦과 어색함은 사라지고 ‘국민’이 지켜야 할 새로운 규범이자, 누구나 존중해야 할 기준이 되어 가고 있다. 그 덕에 자기 주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고, 자기 제안의 설득력을 높이고자 할 때 쓰는 권위 있는 말이 되기도 했지만, 남용으로 상투어처럼 되기도 했다.

세련된 포장의 국가주의, 국격
국격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국가도 하나의 인격체나 다름없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말이다. 따라서 국격은 국가를 다른 어떤 것의 반영물·대리자가 아니라 스스로 유지하고 강화해야 하는 자기 고유의 목적을 지닌 독자적인 실체로 여긴다. 이 유기체적 국가관은 시민을 전체를 위한 일부로 간주하고 자아실현 역시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국가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국가관이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모태신앙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이 한국에는 이미 국가가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태어나서도 잊을까 가족·학교·군대·언론이 끊임없이 환기시켜 줘야 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국격이 빠르게 한국인의 언어습관을 지배하게 된 배경이다. 나라를 잃었던 역사적 기억의 반영이라고 이해해도, 박정희 군사집단의 국가폭력 경험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정말 특별한 정서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강한 국가에 대한 이 낭만주의적 열정은 아직 뜨겁다.

물론 국격이 획일주의의 낡은 가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위원회가 배려·다문화·기여를 국격 향상의 과제에 포함한 점이 그렇듯 성숙한 사회를 위한 성찰도 담고 있다. 문제는 성숙한 사회를 바라는 시민의 욕망조차 국가의 명예·국가 브랜드·국격 향상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박힌 국가주의적 사고이다. 그런 사고는 점차 업그레이드되어 조국 근대화니 국익이니 했던 단순 투박함을 벗고 국격이란 세련된 옷을 입은 채 국가주의를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 담론을 효과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국가(국격)를 위해 무엇을 했나’라고, ‘국민’을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주의를 공고하게 재생산한다. 사실 국격을 국가의 품격이라고 우아하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는 한국인의 가슴을 적시는 주제가 될 수 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년 이명박 정부의 목표대로 G20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국격이 높아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 그렇지 않아도 시장 만능으로 힘들어진 시민은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국가 개입으로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시장과 국가 모두 한 편만 드는 불공정 게임조차 한국인들은 국가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믿고, 오랫동안 잘도 참아 왔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는 없다. 국가는 시민 의사의 총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로운 ‘시민’만 남겨 놓자
국가의 목적을 이행하는 ‘국민’이라는 제복을 벗어야 한다. 이 칼럼을 쓰던 중 ‘한글문서’에서 국격에 대해 맞춤법 검사를 해봤더니 ‘철자가 잘못 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나왔다. 국어사전에 없는 신조어였기 때문이다. 대체해야 할 단어가 제시되었는데 곡격·국역·구격 세 가지였다.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 버리자. 국가도 버리고, 국격도 버리자. 자유로운 ‘시민’만 남겨 놓자. 나의 삶과 행복을 고민하는 나만을 남겨 놓고 다 버리자.(이대근 논설위원)  



한겨레(09. 12. 12) [삶의창]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라도 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2009년 1월20일, 용산4구역 철거현장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망루에 올라 몸을 떨며 시위를 하던 다섯 사람과 경찰 한 사람이 불에 타서 숨졌다. 사람들은 이를 참사라고 부르지만, 추운 겨울에 그 무리한 철거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나,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을 지닌 사람들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정부는 정부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고 했고, 고위 관료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무마할 계책을 적어 산하기관에 이메일로 보냈으며, 경찰은 거의 동일한 상황을 연출하여 진압훈련을 했다. 그런데 사법부는? 검찰은 시위자들 가운데 불에 타 숨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기소했으며, 판사들은 그들에게 이 참사의 책임을 물어 중형을 선고했다. 물론 행정부가 이들 철거민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는 한 번 빈손으로 참사현장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이 참상 앞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시인, 소설가, 비평가 192인이 각기 한 줄 선언을 써서 ‘작가선언’을 발표한 것은 지난 6월9일이다. 이 선언은 그달 말에 <이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작가들은 7월부터 용산참사 현장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시작하고, 각종 매체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하여, 이 릴레이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달 초에 발간된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도 이 진행중인 릴레이 시위와 기고활동의 보고서이다. 시를 쓸 사람은 시를 쓰고 산문을 쓸 사람은 산문을 썼다. 그리고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원들이 그림을 그렸다. 80년의 광주 이후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글과 그림이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이 참사가 잊히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주검이 땅에 묻히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고, 릴레이를 하는 사람들의 힘이 바닥나고, 그래서 갑자기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살라는 대로 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결국은 ‘저만 손해’라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아파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09. 12. 12.  

P.S.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의 칼럼을 먼댓글로 붙여놓는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에 재수록돼 있다. 같이 수록된 칼럼은 '용산,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260.html)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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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12-12 19:27   좋아요 0 | URL
왠만하면 저기 위에 아저씨 얼굴 좀 가려 주세요. ㅡㅡ' 저 아저씨 얼굴 보면 갑자기 배가 막 아프다는. 예전에 아침밥을 먹다가 신문을 펼쳤는데 저 아저씨 얼굴이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보니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제가 씩씩거리며 포크를 쳐들고 있더라구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 자신의 돌발적인 폭력성에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노 대통령 죽고 얼마 안 있다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저 아저씨 얼굴 되도록 안 보려고 피해 다녀요. ㅡㅡ

로쟈 2009-12-12 20:00   좋아요 0 | URL
블라인드 처리가 안돼 그냥 내렸습니다...

Joule 2009-12-12 22:42   좋아요 0 | URL
친절하신 로쟈 님.

로쟈 2009-12-12 22:47   좋아요 0 | URL
저도 보기 싫은 얼굴이긴 해요.--;

Mephistopheles 2009-12-13 15:28   좋아요 0 | URL
사진을 이미 내리셨는데도 누군지 확실히 아는 1人

로쟈 2009-12-13 20:46   좋아요 0 | URL
뭐 다들 아는 얼굴이긴 해요...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1:42   좋아요 0 | URL
조금은 주제가 다르지만..해결되지 않는 용산참사 문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시위라는 것, 평화 집회라는 것을 할 때 집회자들 내부에도 소위 말해 -튀는- 돌발 행동이나 시위의 본질과 맞지 않는 폭력행위, 혹은 계획하지 않은 사고 등이 일어날 수 있죠 그걸 통제해 주고 질서 있는, 그래서 하려고 했던 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모임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집회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리고 나타나야만 하는 그들의 역할이지요
시위자들이 오히려 그들이 필요하고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혹시 경찰이 오지 않으면 왜 안오지 하고 두리번거릴 수 있게 말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있는 군인, 경찰들 역시 시위자들과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무관심한 국민들보다 한발 더,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을 테지요. 이런 생각이 실천되는 사회는 진정 꿈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펠릭스 2009-12-14 10:43   좋아요 0 | URL
'나는 지금 영안실 냉동고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이미 얼어 있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민음사>의 "나는 죽은 몸"을 페러디합니다.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아트앤스터디의 오프라인 배움터(인문숲)에서 진행하게 될 '로쟈의 러시아문학 기행: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강좌를 소개한다. 처음에 8주 강좌 제안을 받고, 대학에서 평소에 하던 강의를 압축해서 해보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렇게 해서 기획된 강좌다. 평소 러시아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면, 그리고 특별히 '로쟈'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분이라면, 이 참에 러시아 명작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셔도 되겠다. 사실 두 시간 강의에서 한 작가와 대표작을 소개한다는 건 무리하기에 입문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행' 혹은 '투어'라는 말을 붙였다. 강의는 내년 1월 4일부터 2월 22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까지 진행된다). 내가 적은 강좌의 개요는 이렇다.  

러시아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나 초심자에게 러시아문학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배경지식과 대표 작가·작품에 대한 입문적인 소개를 제공한다. 본 강의는 일종의 러시아문학 ‘투어’로서 푸슈킨부터 체호프까지 19세기 러시아문학의 탄생에서부터 절정과 황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게 되며, 러시아문학의 독특한 향취를 맛보고 각각의 명작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밖의 강의소개는 아트앤스터디에서 제공한 것이며, 8주 강좌에서 다룰 작품들의 목록과 일정은 홈피를 참고하실 수 있다(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asp?lessonidx=off_hwLee01&OVRAW=%EB%A1%9C%EC%9F%88&OVKEY=%EB%A1%9C%EC%9F%88&OVMTC=standard&OVADID=19304485042&OVKWID=221901605542). 

'러시아문학으로의 초대'라는 강의 개관에 이어서 다루게 될 7명의 작가와 7편의 작품은 아래와 같다. 교재는 지정하지 않았지만, 처음 읽으시는 분이나 새로 구입하시려는 분은 참고하시면 좋겠다.  

1. 푸슈킨의 <에브게니 오네긴>  

  

2.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 

 

3.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4. 투르게네프, <첫사랑> 

 

5.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7. 체호프의 <갈매기> 

 

09. 12. 12. 

P.S. 강의장소인 '인문숲'의 위치는 아래와 같다. 확대해서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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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19 01:35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에서 지난 겨울 '로쟈의 러시아문학 기행'의 속편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를 진행한다(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10.asp?lessonidx=off_hwLee07&OVRAW=%EB%A1%9C%EC%9F%88&OVKEY=%EB%A1%9C%EC%9F%88&OVMTC=standard&OVADID=193044
 
 
Joule 2009-12-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미뤄야 하나. 쩝.

2009-12-12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2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3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2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2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2-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년전엔가 톨스토이 중편<하지 무라드>를 읽다가 그 전에 읽은 <현대의 영웅>에 체첸 이야기기가 나온 게 기억나서 다시 훑어본 적이 있습니다.'레르몬토프와 톨스토이가 바라본 체첸의 차이점'이라는 제목으로 연구노트를 만들려다가...생각만 했지요.

로쟈 2009-12-12 21:59   좋아요 0 | URL
어떤 차이점인지 궁금한데요.^^ 영어권에서는 이 주제의 연구서와 논문도 나와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2-13 22:20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가 좀 더 체첸을 이해하려는 느낌이 있다는 느낌 정도...하지만 러시아를 일본으로, 체첸을 조선으로 본다면 하지 무라드가 일종의 전향한 독립군 같다는 느낌이 난 것도 사실이었어요.

로쟈 2009-12-13 22:28   좋아요 0 | URL
한편으로 하지 무라트는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상적 자아상의 투영으로요...

노이에자이트 2009-12-14 16:57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가 도덕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러시아에 투항하긴 했으나 조국에 대한 애착은 여전한 하지 무라드와 비슷하다는 해설을 읽었습니다.

마냐 2009-12-1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내게 하시는군요. 저 한때는...저 이야기들로 밥벌이를 할 꿈을 갖기도 했는데요. ^^;;;

로쟈 2009-12-13 20:43   좋아요 0 | URL
밥벌이가 좀 어려운 분야이긴 해요.^^;

sophie 2009-12-1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2월초에 드가는데.. 후속강의가 이어지는 건가요?

로쟈 2009-12-13 20:49   좋아요 0 | URL
보따리장수의 처지에서 말씀드리자면, 그게 '장사'가 되면 이어지는 거라고 할 수 있죠...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선생님 글을 읽기만 하고 도망(?)가는 도둑(?)중의 한명입니다.^^ 생각은 많으나 말은 거기 못미치고 글은 더욱 뒤쳐지며 실천은 부끄러울 정도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으론 가끔 제 생각도 좀 써보려고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고골, 톨스토이, 뚜르게네프...막 설레는 이름들입니다.
어린 시절엔 그들의 번득이는 재능과 글 솜씨가 부럽더니 요즘은 그들이 얼마나 삶과 사람을 사랑했는가 하는 게 부럽습니다. 기대되는 강의네요 중요한 시험과 겹친 것이 아쉽습니다. 하긴 TV에 나오신 것도 못봤네요 ㅜ.ㅜ

로쟈 2009-12-13 22:10   좋아요 0 | URL
커밍아웃하신 건가요?^^ 반갑습니다. 러시아 작가들을 '셀레는 이름'이라고 해주시니까 더더욱! 가끔 댓글로 안부도 전해주시길.^^

펠릭스 2009-12-1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문학이 5%(인텔리겐치아)를 위한 문학이었다면, '나로드'로 봐선 문학 또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척도로, 있는 자의 유희일 뿐이라 생각했을 것같아요.

로쟈 2009-12-14 00:25   좋아요 0 | URL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할 듯싶은데요.^^; 못 읽는 대중에서 안 읽는 대중으로 바뀌었을 뿐...
 

어제도 모임이 있어서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했다. '책읽는 밤'의 영향인지 방문자가 600명 가량 늘었고, 즐찾도 대여섯 명이 많아졌다. 시청자가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KBS 내에서는 최저 시청률을 다투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주로 금요일에 대형서점에 들르곤 하는데, 연거푸 연말모임이 겹치는 바람에 두 주 동안 신간을 둘러보지 못했다. 온라인 검색에서와는 다른 '눈요기'를 놓치고 있어서 아쉽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각 언론의 북리뷰나 일람해보는 것이다. 12월도 중순을 넘어가면 출판쪽에서는 비수기인지라 보통 '대작'들이 나오지 않는다. 내년 1월로 넘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 때문인지, 그냥 기분인지 마음을 잡아끄는 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에 음모론의 단골주인공인 프리메이슨에 관한 책 몇 권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12. 12) '세계를 지배하는 비밀조직' 진실을 파헤치다

‘다빈치 코드’로 뜬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의 신작 ‘로스트 심벌’로 세계 최고의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부자 등 미국 역대 대통령 3분의 1 이상이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알려지면서 적잖은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역사는 곧 프리메이슨의 역사이며, 미국의 실체를 바로 알려면 먼저 프리메이슨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프리메이슨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 마침 프리메이슨을 다룬 3권의 책이 동시에 번역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먼저,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한 진형준 홍익대 인문대 학장이 집필한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살림). 프리메이슨을 ‘서구 신비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모든 종교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종교를 추구하며, 형제애를 강조하는 정신 또는 그 모임’으로 정의하는 저자는 프리메이슨의 기원을 기존에 알려진 16∼17세기 중세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석공 길드가 아닌, 고대 이집트의 신비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찾는다. 기원전 6세기 크로톤에서 정치개혁을 단행한 피타고라스학파는 엄격히 계급을 구분하였고 회원 간의 형제애와 비밀 체험을 강조하는 등 프리메이슨의 기본 정신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은 프리메이슨들의 역사와 신화, 상징 등을 다방면에 걸쳐 기술하는 한편 그동안 일반인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했던 갖가지 논란들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심벌코드의 비밀’(팀 웰레스 머피 지음, 김기협 옮김, 바다출판사)은 프리메이슨 탄생의 역사를 천착했다. ‘서양 문명에 숨겨진 이단의 메시지’라는 흥미로운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중세 유럽을 거쳐 현대 프리메이슨 조직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정통 기독교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해 왔던 숨겨진 세력의 역사를 담고 있다. 특히 그들이 자신과 자신들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 건축과 회화 등 기독교 문화 안에 몰래 기록해 놓은 비밀 암호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프리메이슨 특유의 모자이크 문양과 기둥, 사다리 등의 상징이 담겨 있는 제도판(製圖板).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사다리는 프리메이슨의 진보를 향한 정신을 보여준다.

책은 과학이 이단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상징’과 ‘암호’는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지식과 발견을 서로 전하던 독창적이고도 현명한 방법이었을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서양 문명에는 정말 암호와 상징이 가득 숨어 있을까? 저자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상징의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미국 1달러 지폐 뒷면의 피라미드 상단에 그려져 있는 ‘호루스의 눈’은 프리메이슨이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상징이고, 지금도 프랑스의 렌르샤토 마을에 모여드는 순례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의 무리 라는 것이다. 



‘프리메이슨, 빛의 도시를 건설하다’(크리스토퍼 호댑 지음, 윤성원 옮김, 밀리언하우스)는 무수히 많은 신화, 전설, 음모 이론들의 실체와 미스터리를 파헤쳐 프리메이슨이 건설한 빛의 제국 미국과, 수도 워싱턴 DC의 탄생에 얽힌 충격적인 비밀을 풀어준다. 실제 프리메이슨 회원인 저자는 프리메이슨이 감춰놓았다는 다양한 상징물과 암호를 찾아 워싱턴 DC의 거리와 건축물을 구석구석 답사하고 생생한 사진과 역사적 기록을 함께 제시한다.

미국 국회의사당 초석 비문, 국방부 펜타곤 건물 지붕의 펜타그램 모양, 워싱턴 DC 몰에 숨은 세피로스 등 현재 워싱턴 DC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프리메이슨의 상징들과 만날 수 있다. 또한 프리메이슨 입회식 장면의 배경으로 나온 템플하우스의 주소에 얽힌 숫자 ‘33’의 비밀, 주인공 로버트 랭던이 ‘워싱틴의 심장’으로 묘사한 170m 높이의 웅장한 오벨리스크의 상징, 사건의 단서가 되는 프리메이슨 크립토스 조각상에 담긴 불가사의 한 암호와 미국 국새에 그려진 피라미드의 감춰진 비밀도 파헤친다.(조정진 기자) 

09. 12. 12. 

 

P.S. 프리메이슨에 관한 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0년 이후에 나온 책으로 크리스티앙 자크의 <프리메이슨>(문학동네, 2003), 폴 제퍼스의 <프리메이슨>(황소자리, 2007)을 더 얹을 수 있다. 폴 제퍼스는 이 방면의 전문저술가로 보이는데, <미국의 프리메이슨>(2007)이란 책도 그의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18세기 계몽주의자들 가운데 프리메이슨이 많아서 지성사적 관심대상이 되곤 한다. 별로 내키는 독서는 아니지만 "세계사 거대 사건의 배후에는 늘 그들이 있었다"는 문구에 혹해서 대출해볼 수는 있겠다. 이렇게 다 들통날 정도면 그게 과연 '비밀조직'인가라는 의문도 풀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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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12 11:44   좋아요 0 | URL
저도 인터뷰하신 것 보았어요! 카메라도 잘 받으시고 말씀을 어찌 잘하시던지 ^^*

로쟈 2009-12-12 13:05   좋아요 0 | URL
그게 그 중 잘 나온 대목으로 편집했을 테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12-12 21:50   좋아요 0 | URL
이인호<러시아 지성사>에도 프리메이슨에 관한 논문이 있지요.그때는 '자유석공회'라는 번역어를 쓴 게 지금과 다릅니다만...

로쟈 2009-12-12 21:57   좋아요 0 | URL
네, 박사학위논문으로 기억합니다...

L.SHIN 2009-12-12 22:20   좋아요 0 | URL
프리메이슨..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

로쟈 2009-12-13 20:47   좋아요 0 | URL
'자유석공조합'이란 번역어와 어감이 너무 다르긴 합니다...

L.SHIN 2009-12-13 21:16   좋아요 0 | URL
네, 사전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

일반인 교양강좌 준비로 들뢰즈와 벤야민의 책들을 한두 권씩 가까운 서가로 옮겨놓고 있는데, 마침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리라이팅'한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그린비, 2009)가 출간됐다. 저자는 <계몽의 변증법>을 리라이팅했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의 저자 권용선 씨. 수유너머에서 강의한 내용을 이번에도 책으로 펴낸 듯싶다. 참고문헌으로 챙겨놓는다.  

 

한겨레(09. 12. 11) 베냐민의 아케이드 정치적 독법으로 안내 

완결되기를 거부했고, 완결되지 않아 전설이 된 책. 발터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르는 말이다. 자본주의와 현대성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이름 높은 베냐민의 유작이지만, 완결된 책이라기보다 메모·단상의 형태로 남겨진 사유의 덩어리에 가까웠던 까닭에, 그 존재가 알려진 뒤에도 상당 기간 독자들의 접근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불친절한 책으로 남아 있었다.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그린비 펴냄)는 전설과 풍문에 주눅 든 독자들을 위해 권용선(사진) 수유+너머 연구원이 쓴,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안내하는 인문학적 개념 지도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지도는 지도이되 목적지에 이르는 최적·최단의 경로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 연구원은 말한다. “베냐민의 ‘아케이드’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다. 나는 엔(n) 개의 길 가운데 내가 보았던 것 하나를 이야기할 뿐이다.”  



이 필생의 역작을 통해 베냐민이 성취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해부학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현대성의 자기파괴적 속성에 대한 비판, 나아가 탈자본주의적 출구를 탐색하는 혁명의 문화정치학이란 해석도 있다. 권 연구원은 “다 맞는 말”이라면서도 “다만 나는 정치적 방식의 독해를 선호한다”고 덧붙인다.

정치적 독법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환등상’이란 우리말로 번역되곤 하는 ‘판타스마고리아’인데, 이 개념은 ‘잠-꿈-각성’이라는 상이하면서도 연속적인 계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상’이나 ‘환영’과는 구별된다. 요컨대 파리의 아케이드라는 19세기의 판타스마고리아에는 소비 자본주의의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의 요소(잠)뿐 아니라 동시대인들이 꿈꿨던 유토피아를 향한 소망(꿈)과, 기만의 현실을 차고 이륙하기 위한 도약(상기·각성)의 계기가 공존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비약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일”이라고 권 연구원은 말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복원된 청계천을 보면서 대중의 저급성이나 권력과 자본의 토건적 상상력을 냉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판타스마고리아적 형식에 속박된 개인적·집합적 꿈(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공존과 화해)의 기억을 상기시켜 변혁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각성의 계기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처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찰나의 계기들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지가 관건인 셈인데, 이에 대한 베냐민의 처방을 권 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진보에 기대 과거를 낡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듯 은폐된 과거의 흔적들을 섬광처럼 잡아채서 발굴하는 것, 다름 아닌 ‘기억’을 역사화시켜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세영 기자)  

09. 12. 11.  

P.S.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 개념을 또 다른 도시공간인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 적용한 책은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환영의 도시를 거닐다'가 부제. 물론 나 같은 전공자에겐 유익한 필독서이지만, 벤야민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도시공간의 모더니즘에 대한 분석으로 가장 탁월한 책의 하나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이다. 오랜만에 언급하게 되는데, 번역만 더 깔끔했다면 강의실에서도 필독서로 쓸 수 있었을 텐데란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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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a49 2009-12-11 09:48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가는 비가 뿌리던 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가 생각납니다.

로쟈 2009-12-12 09:53   좋아요 0 | URL
책을 보시면 기억에 더 새로울 수도 있으실 듯해요...

2009-12-11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2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2-12 07:31   좋아요 0 | URL
저자의 '슈우너머 연구원'에 '고미숙' 박사도 생각나네요.
비슷할지 모르나 '판타스마고리아'의 개념을 '지방'의 권력층인
'자치단체장들'도 사용하는 숫법이기도 하죠...(11,17:04)

로쟈 2009-12-12 09:55   좋아요 0 | URL
연구거리가 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