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의 체호프 단편집이 출간됐다.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아홉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초기작으론 <굴>, <진창>, <구세프>, 그리고 중/후기작으론 작가 스스로 '소삼부작'이라고 부른 <상자 속의 사나이>, <산딸기>, <사랑에 관하여>와 러시아의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체호프 삼부작'으로 각색/연출하기도 한 <검은 수사>, <로실드의 바이올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이 포함됐다.  

  

체호프가 남긴 단편들만 하더라도 수백 편에 이르고 짐작에 국내에 소개된 건 수십 편 수준이다. 아직도 읽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체호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럴 땐 즐거움이다. 펭귄판만 하더라도 단편집이 여러 권인데, 한국어 펭귄판은 일단 한권으로 묶었다. 책이 나온 김에 체호프의 영어본들을 둘러봤는데, 퓅귄판이나 옥스포드판과 다른, 특히 표지가 사뭇 매혹적인 판들이 눈에 띄어서 잠시 눈요기를 했다. 여유만 된다면 순전히 표지만으로라도 소장해두고 싶은 책들이다. 일단 새 옥스포드판.  

  

   

러시아 미술작품들을 표지로 썼다. 새로운 컨셉은 아니지만, 일단 그림들은 좋다. 하지만 내가 더 경탄한 건 원월드 클래식(Oneworld Classics)이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이다. 러시아문학 쪽으론 현재 15권이 나와 있는데, 표지로만 치면 가장 탐나는 시리즈이다. 그 중 체호프의 작품으론 단편집 <상자 속의 여인>과 <사할린 섬>이 출간돼 있다. <사할린 섬>은 나도 갖고 있는데, 한권만으로는 표지의 전체적인 컨셉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상자 속의 여인>은 가장 맘에 드는 체호프 작품의 표지이다.     

 

 

내친 김에 맘에 드는 표지 몇 개를 더 나열해본다. 

-톨스토이, <세 편의 노벨라> 

   

-도스토예프스키,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부닌, <어두운 가로수길>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0. 02. 11.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10-02-1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 표지 멋져요. 다른 표지들도 멋지네요.

로쟈 2010-02-11 22:0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표지 얘길 하려니까 하이드님 생각이 났어요.^^

Kitty 2010-02-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찾 브리핑에서 무심코 클릭하면서 하이드님 페이퍼인줄 알았는데 로쟈님 서재로 넘어와서 깜짝 ^^;; 표지들 다 정말 멋지네요~

로쟈 2010-02-12 09:22   좋아요 0 | URL
평범한 표지들만 보다 보니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펠릭스 2010-02-1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 시대에 책의 겉표지 또한 독자와 중요한 소통의 한 방법같습니다. 아마 출판 기획자가 가장 신경쓰는 부분같기도 하구요.
 

문화웹진 나비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nabeeya.yes24.com/Archive/archive_view.aspx?CD_MENU=41&bType=&ID_CONTENT=2574).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에 대한 것이다. 웹진이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오전에 보낸 원고가 바로 편집돼 올라왔다.     

나비(10. 02. 11) 음악,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음악은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다?” 
음악은 왜 존재하는가? 인지심리학자이 레코드 프로듀서이기도 한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보다 먼저 읽은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2010)에서 진화심리학자인 저자가 던진 물음이다. “음악은 인간 문화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만, 정작 음악이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했는가는 거의 완벽한 미스터리”라는 게 그 물음의 출발점이다. 음악이 인간의 삶에서 행해 온 역할과 음악과 인간의 공진화 과정을 살펴보는 『호모 무지쿠스』의 여정에 들어서기 전에 미리 문제의 윤곽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모두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지만, 음악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레비틴의 문제의식이지만, 예외적인 인물도 있었다.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다. 그는 음악을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음악 애호가와 음악학자들에게 큰 파문을 던졌다. 맛있는 치즈케이크라면 좋다는 말일까? 그게 아니다. 전중환의 설명에 따르면, “입으로 맛보는 치즈케이크를 폭식하는 행위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듯이,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를 애써 만들거나 감상하는 행위도 생존과 번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음악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적인 부산물(스팬드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상황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호모 무지쿠스』의 전작이자 레비틴의 데뷔작 『뇌의 왈츠』(마티, 2008)의 마지막 장 ‘음악본능’에 나오는 얘기다. 음악 지각과 인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1997년 학술대회가 MIT에서 열렸고 스티븐 핑커가 개막 연설자로 초대됐다. 그는 언어는 명백히 진화적 적응인 반면에 음악은 부산물이란 주장을 펴면서 “음악은 인간이 수행하는 인지작용 가운데 가장 흥미롭지 않은 연구 주제”라고 못을 박았다. 자신의 『언어본능』을 인용하여 그는 이렇게까지 선언했다.   

“생물학적 인과관계로 볼 때 음악은 무용지물이다. 오래 살거나 자손을 보거나 세상을 정확하게 지각하고 예측하려는 목표를 위해 설계되었다는 징후가 전혀 없다. 언어, 시각, 사회적 추론, 신체 능력과 달리 음악은 우리 종에서 사라진다 해도 우리의 삶의 양식에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이 도발적인 주장에 레비틴과 그의 많은 동료들은 당혹스러워했고, ‘음악의 진화적 기원’에 대해 재고하면서 핑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들의 생각으론 첫째, 음악이 비적응이라면 음악 애호가에겐 진화적인 불이익이 있었을 것이고 둘째, 음악은 오랫동안 있어온 현상이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음악은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같이해 왔고 보편적일뿐더러 영속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음악은 어떤 점에서 ‘진화적 적응’이라 할 수 있는가? 여러 가설들이 제시된 가운데, 전중환은 음악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음악은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구애행동이다, 음악은 엄마가 갓난아이를 달래는 자장가에서 기원했다 등 세 가지 가설을 간단히 소개한다. 


 
“음악은 ‘부산물’이 아니다. ‘진화적 적응’의 산물이다.”
레비틴은 『뇌의 왈츠』의 마지막 장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강하게 음악이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하는데, 요점은 이렇다. 모든 인간에게서 발견되며(하나의 종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생물학자의 기준을 충족시킨다), 오랫동안 존재해왔고(청각적 치즈케이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특별한 뇌 구조와 관련된 전담 기억체계가 있으며(모든 인간에게서 관련 뇌 체계가 발달할 때 우리는 진화적 기초를 갖는 것으로 본다), 다른 종의 음악활동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음악은 진화적 적응의 산물이다. 그의 두 번째 저작인 『호모 무지쿠스』는 이러한 주장의 확장판이다. 



‘여섯 가지 노래의 세상(The World in Six Songs)’라는 원제대로, 저자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음악의 갈래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우애의 노래, 기쁨의 노래, 위로의 노래, 지식의 노래, 종교의 노래, 사랑의 노래가 그 목록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급진적인’ 이 유형분류의 근거를 그는 노래가 갖는 진화적 기능과 역할에서 찾는다. 왜 우애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근육과 동작을 서로 일치시키는 노래와 춤을 통해 초창기 인류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을 터이므로 노래는 우애와 사회적 유대의 수단이었다. 왜 기쁨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수치가 증가하여 기분을 좋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으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계를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다. 왜 위로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슬픈 노래는 신경안정 호르몬인 프롤락틴이 배출되게 하여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주었다. 왜 지식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노래와 집단 가창은 지식과 정보를 전수해주어 생존과 번식에 이득을 부여했다. 왜 종교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의식과 종교의 음악은 궁극적으로 개인에게 안전하다는 인식을 주고 자신이 행동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왜 사랑의 노래가 필요했던가? 사랑의 노래는 인간의 가장 큰 열망과 고매한 품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적으로 돌보도록 했다. 물론 이러한 능력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사회는 만들어질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요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뇌신경과학, 진화심리학 지식과 함께 음악 애호가이자 프로듀서로서의 풍부한 경험이다. 사실 그의 주장의 많은 부분은 믿음과 추정에 의존하고 있으며, 음악의 진화적 기원은 아직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책에서 예시하는 수많은 노래들은 우리가 ‘음악적 인간(호모 무지쿠스)’이며, 친구인 올리버 색스가 명명한 대로 ‘뮤지코필리아’ 곧 ‘음악사랑’이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는 점을 잘 입증해준다(인용된 노래들은 이 책의 인터넷사이트 www.sixsongs.net 에서 들을 수 있다). 대개의 사랑이 그렇지만 음악에 대한 사랑도 못 말리는 사랑이다.  



P.S. 개인적인 발견은 저자가 맨 마지막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랑 노래’로 꼽은 마이크 스코트(아일랜드 밴드 워터보이스의 보컬리스트)의 <모두 가져와>(Bring 'Em All In)이다(http://www.youtube.com/watch?v=EuEhb35y2SM). 현란한 기타 스트러밍과 함께 흥얼거리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모두 가져와, 내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잔챙이도 좋고 상어도 좋아
밝은 곳에 있는 녀석도, 어두운 곳에 있는 녀석도 다 가져와 
(…)
용서할 수 없는 것, 되찾을 수 없는 것을 가져와
잃어버린 것, 이름 없는 것을 가져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추방당한 것, 잠들어 있는 것을 가져와
입구에 가져와, 발 옆에 놓아두게

음악을 끔찍이 아끼고  좋아하는 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음반들 옆에  나란히 꽂아두어야 할 책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SHIN 2010-02-1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음악은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니.
전 그 표현도, 풀이도 마음에 드는데요.(웃음)

로쟈 2010-02-11 22:01   좋아요 0 | URL
보기에 따라선 비하하는 의미가 아닐 수도 있겠어요...

L.SHIN 2010-02-12 17:16   좋아요 0 | URL
네,그러니까요.
 

수학책 하나를 찾다가 러시아의 여성수학자 코발레프스카야(코발렙스카야)에 관해 조사하게 됐다.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소냐는 소피아의 애칭이다). 관련자료가 몇 건 검색되지 않는데, 러시아 수학자 하면 로바체프스키나 페렐만을 떠올리게 되는 우리의 상식에 코발레프스카야란 이름도 포함시키면 좋겠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 코발레프스키 또한 저명한 고생물학자였다. 고종석 편집위원은 '사랑없는 결혼'이라고 했지만 짐작엔 '위장결혼'이었다(여성을 불평등한 처지에서 구제하기 위한 위장결혼은 당시 러시아사회의 유행이기도 했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도 나온다). 아무려나 부부의 지명도로 치자면, 퀴리 부부 다음은 되겠다. 여성저널 일다의 리뷰기사는 페미니즘적 시각의 과학사 <피타고라스의 바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한국일보(01. 11. 07) [오늘 속으로] 코발레프스키 

1840년 11월7일 러시아의 동물학자 알렉산드르 코발레프스키가 태어났다. 1901년 몰(歿). 코발레프스키는척추동물과 원색동물(原索動物)의 비교 연구에서 업적을 남겼다. 원색동물이란 원시적 등뼈인 척색(脊索)이 소화기의 등쪽에 있는 바닷동물들을 말한다.멍게가 그 예다. 원색동물과 척추동물을 합해서 척색동물이라고 부른다. 코발레프스키는 동포 생물학자 일리아 메치니코프와 공동으로 발생학과 비교해부학을연구해다윈의 진화론을 보강했다.

학문의 역사에서 코발레프스키가문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동물학자 코발레프스키라기보다는 그의 동생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 부부다.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1842~1883)는고생물학자로서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일하며 포유류 특히 유제류(有蹄類)의 화석 연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유제류란 소나 말, 코끼리, 사슴,노루처럼 발끝에 각질의 발굽이 있는 포유류 동물들을 가리킨다.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다윈의 진화론을 각론적으로 크게 보강한공적이 있다.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의 아내 소냐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는 수학자다. 그녀 자신 편미분방정식론과 함수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프랑스에서 과학 분야 최고상인 보르댕상을 받기도 했지만, 코발레프스카야는 근대해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수학자 테오도르 바이어슈트라스와 절친한 사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외국 유학도 미혼 여성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소냐는 18세에 고생물학자 블라디미르코발레프스키와 사랑없는 결혼을 한뒤 곧바로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산 스승 바이어슈트라스의 지적 동지이자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고종석편집위원)   

일다(05. 02. 14) 남성적 학문의 세계에 뛰어든 여성들

핵 물리학자 페이 에이젠버그-셀러브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짓궂게 말한 바 있다. “하버드에건 다른 어느 대학에건, 이류밖에 안 되는 많은 남자교수들이 있다. 나는 이류밖에 안 되는 여성들이 정년직을 받는 것을 보게 되면 비로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고 믿겠다.”

그녀의 약력은 왜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1950년대에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버드 물리학과 과장에게 강사직을 얻을 수 없다는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사이클로트론(원자핵 파괴 장치)을 사용하는 실험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건물 내 여성출입금지’라는 규칙 때문에 밤에 몰래 실험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에이젠버그-셀러브와 같은 선구적인 연구자 덕택에,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수학, 과학의 영역에서도 성차별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물리학의 종교적 속성이 여성배제 부추겨
마거릿 버트하임의 <피타고라스의 바지: 여성의 시각에서 본 과학의 사회사>는 수학, 과학이 어떻게 해서 여성배제적인 성격을 확립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또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소수의 여성물리학자나 천문학자들이 어떻게 차별의 벽을 뛰어넘어 학문적 성과를 남기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지은이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학 및 통계학, 생물학, 화학의 영역에는 여성 연구인력이 절반을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물리학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지독하게 낮은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물리학의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지목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물리학은 그 뿌리가 가장 종교와 긴밀하게 얽혀있는 과학이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수를 연구하여 신의 원리를 깨닫고자 하는, 다분히 신비주의적 세계관을 설파했다. 중세 후기 이후 기독교 성직자들은 성서의 신을 수학적 창조주라고 생각했다. 또한 뉴턴을 비롯한 근대 과학자들은 마치 종교를 통해 세상의 진리를 파악하듯, 과학을 통해 세계를 완벽하게 해석하는 ‘사제적인 과학자’ 상을 확립했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당대 교회는 18세기에 계몽주의가 성행하기 전까지 수리 과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현대의 경우, 아이슈타인에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정상급의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수학적으로 설명해내려는, 현실 초월적인 시도에 매달리고 있다.

물리학의 현실 초월적 성격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배제시켰다. 중세대학들은 수리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곳이었으므로 여성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여성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남성을 방해하는 ‘하이에나’ 혹은 ‘선동자’들이었다. 1603년에 설립된 초기 과학협회인 린체이 학회에서는 여성과의 관계가 과학적 활동을 저해하는 구속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할 정도였다.

물론 18세기의 여성 물리학자 라우라 바시와 같은 소수 여성들은 헌신적이고 계몽적인 부모나 남편을 통해 과학적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방식을 통해 탄생한 여성 과학자들은 남성 과학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19세기의 위대한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마저 그녀의 업적을 모조리 남편의 덕으로 돌리려는 세간의 비난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지은이는 물리학의 유사-종교적 속성과 여성배제적인 특성을 동시에 비판한다. 물리학의 현실 초월성은 수학적 법칙에 신비성을 부여하는 유사-종교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현실에 밀착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적 성격의 물리학 실험이 필요로 하는 공적인 지원이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식욕도 무한한 탐욕만큼이나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계가 여성 물리학 연구자들에게 보다 개방된 자세를 취하는 것과 종교적인 속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보다 개방적이고 평등한 태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목표인 셈이다. 이런 비판은 서구 학계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학계에도 해당될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의 생애 
<피타고라스의 바지>에 등장한 여성수학자와 과학자들은 마리 퀴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노벨상과 비슷한 위상을 차지할 만한 파리 학술원의 보르당상을 수상한 19세기 러시아 여성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1850~1891) 또한 그러하다. 독일의 아동학자이자 사학자 코듈라 톨민이 쓴 <소피아 코발렙스카야: 불꽃처럼 살다간 러시아 여성 수학자>는 당대의 여성이 학문이라는 남성의 영역에 뛰어들기 위해 어떤 고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라는 격동의 혁명적 시대를 살아간 어느 열정적인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소피아와 그의 언니 아뉴따는 당대 러시아 귀족 집안의 자녀답게 외국 가정교사 아래서 유럽의 선진화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이 매혹적인 세계라고 생각했으며 여러 친척과 가정교사들에게 자청해서 수학수업을 받았다. 한편 그녀는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대의 후진적인 러시아 정치 체제를 비판하던 개혁적인 젊은 세대들은 ‘허무주의자’라고 불렸으며, 사회의 위험세력으로 간주됐다. 소피아 역시 ‘허무주의자’로서, 혁명에 대한 애착과 수학연구에 대한 애착은 소피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구심점 노릇을 했다.

소피아와 언니 아뉴따는 계속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러시아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들은 진보적인 남성과의 ‘위장 결혼’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된다. 소피아와 동료들은 새로운 개념의 가족 공동체를 만들었다. 예컨대 소피아가 수학 연구를 해야 할 때 친구가 몇 년씩이나 기꺼이 그녀의 딸에게 엄마 노릇을 대신 해주었던 것이다.

소피아는 파리 꼬뮌에 투신한 언니와 형부를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구명운동을 펼쳤으며, 남편 블라디미르가 헛된 부자의 꿈에 빠져 사업에 실패한 후 그의 빚을 계속해서 갚기도 했다. 이처럼 소피아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의 안위를 뛰어넘어 상대를 위해 애쓰는 열정이 흘렀다.

이런 순수한 열정은 소피아의 학문적 후견인을 자청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 바이어슈트라스와 그녀에게 스톡홀름 교수직을 마련해주었던 수학자 미탁-레플레르에게서도 발견된다. 소피아는 여성의 대학 입학이 금지된 러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왔지만, 유럽에서도 여성이 수학수업을 듣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소피아의 지지자들이 없었다면, 출산과 가족, 남편의 빚에게 계속 신경을 써야 했던 그녀가 연구를 계속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유럽에서 ‘변두리’에 속했던 스톡홀름에 자식을 친구에게 맡겨두고 홀로 공부를 온 미망인 소피아에게 보수적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나 여성에게는 박사학위를 줄 수 없다고 보수적인 대학이 고집할 때 이들은 그녀가 계속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격려했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피아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남편과 같이 살지 않아요. 어떤 이유에서건 남편과 떨어져 사는 여자는 누구든 착하고 제대로 생각하는 귀부인들의 눈에는 의심스럽고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죠. 거기에다 배운 여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안 좋게 평가되죠.”

이처럼 소피아를 외롭게 한 일상적 관습의 벽은 막강했다. 그녀가 이룬 업적은 그녀 개인의 천재성뿐만이 아니라 비공식적 차원에서 행해진 아낌없는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피야의 일대기는 한 개인이 시대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고 보다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집단이 주변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성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차별이 극복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김윤은미 기자) 

10. 02. 10. 

Софья Ковалевская Софья Ковалевская. Воспоминания

P.S. 러시아에서 출간된 코발레프스카야의 회고록이다. 기사에서 그녀 역시 '허무주의자'였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흥미롭게도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란 중편소설도 남기고 있다. 오른쪽은 <어린시절의 화상>과 <여성 니힐리스트> 두 편을 같이 묶은 책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0-02-1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경우 성도 남성와 여성에 따라서 격변화를 일으키나요.부부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편은 코발레프스키와 코발레프스카야라고 하네요^^

han86866 2010-02-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냐 코발레프스카야 이야기를 여기서 보는군요 사실 수학사에서 유명한 여성수학자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에미 뇌터가 첫손에 꼽힐겁니다 코발레프스카야가 여성수학자가 드물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거의 최초의 여성수학자라고 한다면 뇌터는 단지 여성이기때문이 아니라 그업적 자체도 당시(20세기 초중반)활동하던 다른 일급수학자들과 비교해도 발군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괴팅엔 수학학단의 일원이었고 오늘날에도 학부 대수학교재에서부터 대학원과정까지 그녀가 남긴 많은 정리들이 연구되고 강의되어지고 있습니다

로쟈 2010-02-15 12:10   좋아요 0 | URL
네, 저로선 '여성'뿐만 아니라 '러시아 수학자'라는 데 관심이 있어서요. 뇌터의 경우도 평전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어젯밤에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를 읽다가 '아인 랜드(1905-1982)'란 이름을 다시 보게 됐다. 이런 구절이다.    

진실로 영성을 갈구하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혼란한 상황들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지만 전통적인 종교제도가 암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요가, 불교, 아인 랜드, 밥 딜런, 조운 바에즈, 레넌 앤 매카트니, 제포슨 에어플레인의 음악, 그리고 때로는 약물에 손을 내밀었다.(86쪽)

그리고 '아인 랜드'란 이름에만 각주가 붙었는데, 그건 그만큼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란 뜻이겠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 소설가이자 철학자로 그녀의 합리적 개인주의 사상은 오늘날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이면서 단순한 통속작가가 아니라 미국사회의 철학적 토대를 보여준 철학자라고도 하지만 우리에겐 낯설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미국 따라하기'가 충분하진 않다는 뜻도 되겠다. 그녀의 대표작인 <아틀라스>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인지는 마이클 셔머가 <진화경제학>(한국경제신문, 2009)에 적어놓은 대목이 잘 말해준다. 

나는 <아틀라스>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책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1991년 의회도서관과 '이달의 북클럽'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무엇이었는지 설문조사한 결과 성경 다음으로 이 책을 꼽은 적이 있다.(28쪽) 

 

     

언젠가 <아틀라스>(민음사, 2003)를 읽어보려다가 너무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이미 절판된 책이라 제쳐놓았는데,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인 <마천루>(광장, 1988)는 아직 살아있기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미국식 개인주의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작가이고 작품이라면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과 소비에트 소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러시아 출신 아닌가! 러시아 이름으론 '알리사 지노비예브나 로젠바움'이다. 이름에서도 유대인이란 걸 알 수 있다. 요컨대,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 작가'이다.   

다시금 검색하다 보니 아인 랜드는 앨런 그린스펀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하고, <마천루>는 첼리스트 장한나가 '내 인생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원제는 'The Fountainhead(근원)'이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1949년에 만들어진 킹 비더 감독의 영화가 국내에 <마천루>로 소개돼, 그렇게 굳어진 듯하다(킹 비더는 헐리우드판 <전쟁과 평화>(1956)의 감독이기도 하다. 오드리 햅번이 주연했던 그 영화다). <마천루>는 작년 11월 서울 광화문 미로스페이스에서 열린 제1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개막작으로도 상영됐다. 이 영화제를 소개한 기사와 함께 장한나씨의 칼럼을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대략 어떤 작가이고 어떤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주간한국(09. 11. 19) 건축, 영화를 만나 도시를 증언하다

미국 자본주의의 이상 <마천루>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영화제의 개막작은 킹 비더 감독의 1949년작 <마천루 The Fountainhead >다. 아인 랜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건축 영화의 고전이다. 하워드 로크라는 천재 건축사가 기존의 건축적 관행, 대중적 취향에 맞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다는 내용.

하워드 로크는 단지 고집스러운 건축사가 아닌, 미국식 자본주의가 상정하는 이상적 개인이다. 단순한 쾌락에는 좀처럼 현혹되지 않으며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이 극대화된 인물. 소설 <마천루>의 한 구절은 그의 건축적 이상을 잘 드러낸다.

"저의 규칙은 이렇습니다. 하나의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른 재료로 결코 만들 수 없다. 두 개의 재료가 똑같은 것은 없다. 지구상에 두 개의 장소가 똑같은 곳은 없다. 두 개의 건물이 똑같은 용도를 가진 것은 없다. 용도와 장소와 재료는 형태를 결정한다. 중심이 되는 하나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합리적이거나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한다. 건축물은 인간처럼 살아 있다. 건물은 그 자체의 진실과 그 자체의 유일한 주제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체의 유일한 용도에 맞게 사용된다. 사람은 자기 육체의 조각을 빌리지 않는다. 건물은 혼을 빌리지 않는다. 건물을 만든 사람이 건물에 혼을 주고, 그 혼을 표현할 모든 벽과 창문과 계단을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이기도 한 작가 아인 랜드는 <마천루>가 출간된 지 25년이 지난 후 덧붙인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의 목적은 "이상적인 사람과 그런 사람이 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주인공인 하워드 로크의 "의지의 힘"을 찬양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외부적 조건으로서의 "자유롭고 생산적이며 합리적인 체제, 무간섭주의인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한다. '건축'이라는 행동이자 산물은 이런 이상향의 메타포인 셈이다. 소설 <마천루>가 일종의 미국사회의 철학적 토대로서 논의되어 온 배경이다.

아인 랜드 자신은 소설 속 어떤 인물이나 에피소드도 실재와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하워드 로크의 엄격하고 간명한 캐릭터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사"라고 칭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와 엮여 이야기되어 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2000년 미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한 '20세기 10대 건축물' 중 넷이 그의 작품일 정도로 미국 건축사를 대표하는 인물. 독창적인 풍모로 여전히 세계를 매혹시키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대자연과의 유기적인 어우러짐을 구현한 낙수장 등이 대표작이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그의 건축 형태와 철학은 창조자를 꿈꾸는 많은 건축사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박우진기자)  

 

매일경제(10. 01. 15) 첼리스트 장한나 "나의 가능성을 믿고 전진하라" 

2010년을 맞이하며 새해에는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라는 화두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휘자의 길을 가면서 무엇보다 '타협'과 '비전'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됐다. 타협이란 현재 상황에 맞게 내 비전을 현실적으로 조금씩 고쳐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만족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반면 비전이란 뚜렷한 목표이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할 만한 절대적인 가치가 아닐까. 문득 미국 금융정책가 앨런 그린스펀의 정신적 지주였던 러시아 작가 에인 랜드(Ayn Rand)가 쓴 소설 '더 파운튼헤드(The Fountainhead)' 서론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만드는 영광이 하나의 환상이 아닌, 진짜이며 살아 있는 현실로 보고 싶다. 어딘가에도 나 말고 그것을 원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비전을 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자기 자신을 불태워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혼도 연료가 필요하다. 그것도 마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많은 사람과 그들 비전에 충분히 적용되는 것 같다. 이 책은 '모든 값진 비전은 불가능한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인간이기에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게 심어줬다.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수학 선생님께 받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책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개인 목적을 위해 부딪히는 복잡한 구성과 끝없는 극적 긴장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들은 건축과 언론에 몸담은 사람들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처지와 약점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개인적인 욕망과 이윤을 위해 가차없이 행동한다. 비겁한 사람, 약은 사람, 약한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 남을 잘 조정하는 사람, 비도덕적인 사람…. 

작가가 만들어낸 이 복잡하고 각진 사회 속에도 그가 정의한 이상적인 인간형이 있다. 바로 자기 비전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건축가 하워드 로악(Howard Roark). 그는 건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건축한다. 굽히지 않는 의지 때문에 대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사회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하지만 결코 자기 가치와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오늘이 힘들다고 내일을 타협하지 않는다. 냉정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자신이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곁에는 하나 둘씩 그의 비전을 믿고 응원하는 친구들이 생긴다.

하지만 그 믿음이 항상 진실할 수 있을까. 혹시 오만은 아닐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간의 가능성에 한계를 정할 능력도 권리도 없다. 최선과 최고, 이상을 위한 비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충분히 가능한 마음자세인 것 같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진정한 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원천은 바로 '자아(ego)'에서 비롯된다는 사상을 전한다. 자기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나를 위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철학이다. 이상적인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 일을 하지만, 이상적인 최고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문명 발전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원천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 '파운튼헤드'로 정했다.

물론 현실 속에서 로악처럼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비전이 있다면 모든 행동은 그 불가능할 것 같은 비전을 이루는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니체가 쓰고 랜드가 동의했듯 행동이 아닌 믿음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그 누구도 인간의 가능성에 한계를 정할 수는 없다. 그 가능성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 불가능한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고 새해를 시작해 본다.  

10. 02. 09.



P.S. 찾아보니 그린스펀이 랜드 여사에게 얽매여 있는 걸 조롱하는 이미지도 눈에 띈다. 아인 랜드의 책은 국내에 몇 권 더 소개돼 있다.  

 

<자본주의의 이상>(자유기업센터, 1998),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자유기업센터, 1998)와 <낭만주의 선언>(열림원, 2005) 등이 그것인데, 나는 <자본주의의 이상>과 <낭만주의 선언>의 저자가 같은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각각 저자가 '에인 랜드'와 '아인 랜드'로 표기돼 있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레닌주의도 공부하는 김에 아인 랜드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지젝은 아인 랜드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해놓은 게 있군!)...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eonjoo 2010-02-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언급하신 "진화경제학"의 프롤로그에서도 저자 셔머가 '아틀라스'에서 받은 영향을 서술하고 있더군요. 지적하신 우리의 '미국 따라하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로쟈 2010-02-09 13:37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언제 아인 랜드를 찾아봤나 했더니 그 책을 읽다가였습니다.^^ 다시 보니 거기선 '에인 랜드'라고 표기했네요...

blanca 2010-02-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장한나 인터뷰에서 저 책을 보고 엉뚱한 제목으로 검색해 보다 번역이 안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었는데 있었군요. 다른 얘기지만 장한나의 독서량과 깊이도 상당한 것 같아요. 보관함에 넣어두어야 겠습니다. 철학자이면서 소설가. 게다가 유태계 러시아 태생의 여류작가가 쓴 건축가의 이야기라니 기대가 많이 됩니다.

로쟈 2010-02-09 14:24   좋아요 0 | URL
'에인 랜드'도 '러시아 작가'리고 해놓았는데, 로스트로포비치의 영향인지 러시아문학도 많이 읽습니다.^^

아포지 2010-02-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에서 아인 랜드를 언급하는데, 다른 책에서도 언급을 하나요? 최근 가장 뜨거운 미드 중 하나인 Mad Men에는 미스 랜드가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더불어 북미에서 어린 남자애들이 아주 잘 혹하는.... 특히나 알파독일 경우엔..더욱 더 선봉하게 되는 그런 작가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2-10 09:47   좋아요 0 | URL
온라인에서 검색이 됩니다. 아마 그 책에 삽입되었을 수도 있을 듯하고요. '알파독'이란 표현을 쓰나 보군요. 덕분에 알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0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는 엘리트 덕에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철학을 갖고 있죠.만약 엘리트들이 파업을 하면 전세계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습니다.저는 랜드의 주장은 전쟁 때 보병소총수는 전사해도 금방금방 충원이 되지만 파일럿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봅니다.<마천루>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엘리트이고 주변의 잡것들은 봉황의 뜻을 모르는 참새들이다...그거죠.

로쟈 2010-02-10 09:46   좋아요 0 | URL
엘리트주의인데,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나 봅니다...

13jkng 2011-07-15 23:01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아인 랜드의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엘리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엘리트의 경지로 이끌어 올려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Atlas Shrugged 에서 보면은 주인공들이 특권 계층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보편적인 hero, heroine의 느낌이 난다기 보다는 그저 공감할 수 있는, 비틀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Dagny와 Hank둘 다 경제적으로 부층에 해당하기 때문에 약간의 반발(?)을 살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glorify되는 다른 캐릭터들을 보면 거의 노동자들이거든요. 그리고 사실상 Dagny나 Hank 같은 기업가들도 노동자이죠. 자기가 할 일을, 즉 머리를 쓰는 일을 노동자들이 근육을 쓰는 것만큼 열심히 한다는 면에서 말이에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주의에 적합한 philosophy는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나가다 보이길래 느낀 거 몇 마디 적어봅니다 :)

심술 2010-02-0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랑 얽힌 기억 몇 개
1.맨 첨 아인 랜드를 알게 된 건 우연히 잠 안 오는 어느 날 새벽 텔레비전에서 본 Passion of Ayn Rand 라는 영화에서였어요. 쎅씨한 헬렌 미렌 여사께서 아인 랜드였죠.
2.언젠가 요새는 활동이 거의 없는 나귀님 서재에서 나귀님이 나도 아인 랜드를 좋아하지만 고급 무협지로서 좋아하지 누구누구처럼 랜드를 시대의 선구자로서 신봉하는 건 아니다 라고 썼던 거 같아요. 누구누구가 누구였는진 이제 잊었어요.
3.언젠가 강유원이 쓴 글에서 아인 랜드가 미국인에게는 인기 있는 작가인지 몰라도 나랑은 영 안 맞는다 라는 대목을 만난 거.
4.갑자기 기억이 더 안 나는군요.

로쟈 2010-02-10 09:4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유원시 글은 전에 읽었습니다. <아틀라스>에 대해서였죠. 결정적으로 너무 두꺼운 책이죠.^^;

sophie 2010-02-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천루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로쟈 2010-02-10 09:45   좋아요 0 | URL
아직 절판되지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레닌 재장전>(마티, 2010)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긴' 서평이기도 해서 한번 일독해보기 위함이다. 필자는 진보신당 상상연구소의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으로 <레즈를 위하여>(공저, 실천문학사, 2003), <혁명을 꿈꾼 시대>(살림, 2007)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프레시안(10. 02. 06) '레닌 르네상스'…그가 돌아왔다!

'레닌 재장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레닌의 초상을 표지에 실은 책이 나왔다. 원제는 'Lenin Reloaded'. 아무래도 영화 <매트릭스>에서 따온 표현임이 분명하다. 할리우드 영화와 레닌의 이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 21세기도 새 10년을 맞이하는 지금, 레닌이 다시 서점가에 등장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근 베를린 시가 레닌 동상을 복구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마지막 레닌은 거의 스무 해 가까이 전 해체된 동상의 모습인 것 같다.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에 나왔던, 강에 떠내려가는 레닌 동상. 독일 영화 <굿바이 레닌>에 나온, 헬리콥터에 실려 공중에 떠 있는 그 동상. 



1980년대 변혁 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을 무렵 읽었던, <무엇을 할 것인가>니 <국가와 혁명>이니 하는 저작 속의 그 단호하고 신랄한 문구들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퇴장이었던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레닌 동상이 해체되던 그 무렵이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짧은 20세기'의 종지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레닌의 저작에 흥분하기도 하고 주눅 들기도 하다가 그 처연한 퇴장을 목도한 우리는 '짧은 20세기'의 끝물에 휩쓸렸던 것이겠다.

지젝-레닌 커넥션
이 씁쓸한 기억이 채 다 가라앉기도 전에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휘저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레닌이 했던 그 일을, 물론 100년 전과는 분명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이기는 하겠지만,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시대에 어긋난 몽상가, 선동가들인가. 아니면 <레닌 재장전>이라는 책의 부제('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처럼,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리'의 고지자들인가. 



레닌 컴백을 주도하는 사람은 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다. 2004년에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에서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한 <Revolution at the Gates>라는 책이 나왔다. 번역하면, '문 앞의 혁명' 정도가 되겠는데, 레닌에 대한 지젝의 글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에 쓰인 레닌의 글들이다.

국내에도 레닌에 대한 지젝의 저작이 두 권이나 나와 있다. 하나는 그의 독일어 논고들을 번역한 <혁명이 다가온다-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이서원 옮김, 길 펴냄)이고, 다른 하나는 위의 영어 저작을 번역한 <지젝이 만난 레닌-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다. 말하자면 '레닌 르네상스'는 어느 정도는 지젝의 노고의 결과다.

이번에 나온 <레닌 재장전>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편저자 중 한 명으로 지젝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글도 한 편 수록되어 있다. 사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집필 시점은 앞에 소개한 책들보다 앞서 있다. 비록 영어본이 나온 것은 2007년이지만, 2001년에 독일에서 열린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레닌의 복구'라는 국제 심포지엄의 발표문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젝은 왜 이토록 레닌에 집착하는가. 대중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를 소재로 삼아 헤겔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강의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 21세기 철학자가 잊혀진 20세기의 혁명가를 자꾸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지젝은 고국인 슬로베니아(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나라)에서 공산당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는 '자유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서기까지 했었다.

수많은 레닌들 중에서도 1917년의 레닌
여기에서 우리는 지젝이 주목하는 레닌이 그의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도 특히 1917년의 레닌임을 주목해야 한다. 차르 정권에 맞서기 위해 지하 정당을 만들던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도 아니고,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불철주야하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의 레닌도 아니다.

이미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곧장 나아가자고 주장하던,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의 레닌이다. 지젝이 여러 레닌들 중에서도 유독 이 시기의 레닌에 주목하는 것은 이 시기의 레닌이 펼친 그 '정치'가 지금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시기의 레닌의 정치는 마치 무소불위인 것처럼만 보이던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하는 역사적이자 집단적인 행위였다.

우리 시대 지구화의 미래가 어쩔지 예감케 해주는 지난 100년 전 지구화(흔히 '제국주의'라 불리는)는 1914년 세계 전쟁을 통해 그 모순을 폭발시켰다. 그 동안 일국 단위에서 사회주의 개혁 혹은 민주 혁명을 추진하던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사태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 계급의 전쟁 수행에 공범이 되어주든가 시대에 절망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당시 좌파의 맹목(盲目)이 재앙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절망하기보다는 시각을 전환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세계 전쟁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효과들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 즉 러시아에서부터 세계 혁명이 폭발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었다. 자본주의 지구화가 낳은 모순을 바탕으로, 그것을 극복할 또 다른 전 지구적인 연계(북반구의 노동자 혁명과 남반구의 민족 해방 혁명 사이의 연대)가 구축될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희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 미친 듯한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그는 1917년 2월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공간이 열린 조국 러시아에서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재촉했다. 본래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의 이론가이자 지도자였던 그가 귀국하자마자 그 일성으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외친 것이다('4월 테제'). 다들 그의 정신 건강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소속 정당인 볼셰비키당 간부들조차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 10월에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세계는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의 거대한 균열선을 현실로서 마주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지구화의 시대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레닌이 마주한 순간들을 되새기려는 시도들
<레닌 재장전>도 이 시기의 레닌에 관심을 집중한다. 안 그런 글들도 있지만, 적어도 2장과 3장의 글들은 그렇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것이 이 2장(철학에서의 레닌)과 3장(전쟁과 제국주의)이다. 2장, 3장은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저자들의 글로 채워져 있다. 사실 가장 저명한 저자들의 글은 1장(레닌을 복구하기)에 모여 있다. 알랭 바디우, 알렉스 캘리니코스, 테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 우리 시대 좌파 저술가로서는 더 이상 호화로울 수 없는 캐스팅이다.

하지만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모은 책이라 그런지 글의 완성도는 천차만별이다. 특히 스타급 필자들 중에서 몇몇은 뜻밖의 실망을 안겨준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그렇다. 1935년에 트로츠키가 꾼, 레닌이 나오는 꿈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뭇 비장하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글로 끝난다. 4장(정치와 그 주체)에 실린 안토니오 네그리의 글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네그리는 레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가 레닌에 대해 쓴 글이 더 흥미를 끌 수밖에 없는데, 막상 읽어보면 레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평소 자신의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장과 3장의 필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과 2월 혁명, 10월 혁명에 이르는 시기의 레닌의 사상적 고민과 발전을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가령 미국 사회과학자 케빈 앤더슨의 글은 레닌의 전망이 남반구 민족 해방 운동 및 유색 인종 해방 운동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을 잘 보여준다. 지젝과 함께 이 책의 공동 편집자인 스타티스 쿠벨라키스도 레닌의 헤겔 <논리학> 연구와 이 당시 정치 실천 사이의 연관을 분석하면서 레닌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다분히 철학적이라 읽기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말이다.  



2장, 3장 필자들 중 국내에 어느 정도 알려진 이들인 다니엘 벤사이드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글도 많은 시사와 영감을 던져준다. 벤사이드는 레닌의 성취뿐만 아니라 그의 시대적 한계도 가감 없이 지적하고 있으며, 발리바르의 글도 마찬가지로 냉정한 접근을 보여준다. 특히 벤사이드(68세대로서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 운동가였고 반자본주의신당의 산파 중 한 명이었다)는 지난 달 작고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느낌이 남 다르다.

이들 필자의 글들에서 일관된 것은 레닌의 특정한 주장을 반복하거나 그의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그가 1910년대(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이다)의 시간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이와 대결했는지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순간들, 그 속에서 레닌이 취한 포즈를 되새기려 한다.

이것은 곧 지젝이 "레닌주의적 제스처"라고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지젝은 다른 공동 편저자들과 함께 쓴 '서문'에서 이를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결단"이라고 풀어 말한다. "필요한 타협을 하고 현실적인 요구에 이론을 맞추려는 실용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을 물리치고, 오직 일이관지하는 급진적 입장(이를 통해서만 우리의 개입이 상황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 개입한다는 결정.

신자유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치적 선택 자체가 금기시돼온 지난 30여 년간의 시대를 끝내려면, 바로 이러한 제스처를 통해 한 시대를 갈라야 한다는 것이다. 100년 전 그것이 1917년 10월 러시아 민중들을 통해 작렬했다면, 우리 시대에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분출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금 '돌파'의 시대를 꿈꾸며
<레닌 재장전>에 실린 여러 글들에서 반복되는 한 단어가 있다. '돌파'라는 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레닌 자신이 1917년의 뜨거운 논설들 중 하나에서 이 말을 인상 깊게 쓰고 있다.

"1917년 2월에서 3월에 걸친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이 내전으로 전화된 시작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을 끝장내는 최초의 일보를 내딛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2보, 즉 국가 권력의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전 그리고 전쟁의 종결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의 '돌파(break-through)',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전선에서의 돌파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 전선의 돌파에 의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공포로부터 구해내고 인류에게 평화의 은총을 내릴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창조함으로써 이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것은 바로 자본주의 전선에서의 '돌파'로였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

'돌파'는 교착 상태를 깨는 행위다. 기존의 전선에 머물고 적의 강점과 우리의 약점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전선을 이동시키고 적의 강점을 약점으로,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탈바꿈시키는 행위다. 이것은 판박이를 벗어나기 위한 판갈이의 정치이고, 우선은 '판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지구화, 금융화된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흔들리고 있지만 정치적 선택지는 여전히 과거 그대로인 우리 시대, '반MB의 시간'이 '진보의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우리 시대 역시 하나의 교착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돌파'의 정치, '판을 깨는' 정치다. 다시 '레닌'을 꺼내는 게 느닷없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과거 레닌주의의 복고(復古)가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어떤 정치의 시의적절한 반복에 대한 대망이라면 말이다.(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10. 02. 08.  

P.S. 참고로, 지젝 등이 쓴 서문에서 '레닌을 반복하기'란 말의 의미를 밝혀놓은 대목을 옮겨놓는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 - 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되고 난 뒤 - 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오랜 평화로운 확장이 끝난 1914년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난 1990년 사이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레닌이 1914년에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해야만 한다.(23-24쪽) 

  

더불어, '레닌의 반복' ' 레닌 재장전'의 구호는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마지막 문장이다(아직 국역본이 없다). '레닌과 변증법의 길'의 필자 사바스 미카엘-마차스가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도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다. 말하자면 캐치프레이즈이다. 

"너는 계속해야만 한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다, 계속하고야 말겠다." 
"You must continue, I cannot continue, I will continue."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토르넬르 2010-02-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캐치프레이즈가 인상적이군요. You, not I , Yes I

로쟈 2010-02-09 12:17   좋아요 0 | URL
지젝이 좋아하는 베케트의 문장은 <최악의 방향을 향하여>에 나옵니다.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카스피 2010-02-0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레닌이 다시 돌아오는군요^^

로쟈 2010-02-09 12:15   좋아요 0 | URL
20년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