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들을 식별하는 일이 이 서재의 주된 역할 중 하나인데, 가끔은 손이 놀 때가 있다. 관심도서에 대한 리뷰가 아직 뜨지 않거나 뜨더라도 책이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경우다.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는 스튜어트 켈리의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민음사, 2011)가 그런 경우인데, 이상하게도 알라딘에서는 '잃어버린 책'이다. '우리가 읽고 싶어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위대한 책들의 역사'란 부제를 좀 비틀면 '우리가 읽고 싶어도 알라딘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책'이다. 적어도 오늘 월요일 아침까지는. 하여 이 책 얘기는 나중에 적기로 하고, 지난 주말 리뷰 가운데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소명출판, 2011)에 관한 것을 옮겨놓는다. 요즘 대기업에서 불고 있다는 <논어> 바람과 관련한 칼럼과 함께. 시부사와 에이치의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 2009)이란 책의 존재를 알게 해준 칼럼이기도 하다.      

한겨레(11. 01. 22) 정약용도 감탄한 일본 ‘소라이학’의 진수

에도 막부 시대 일본 유학의 혁신자 오규 소라이(1666~1728·그림)의 주저 <논어징>이 한국어로 처음 완역됐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임옥균·임태홍·함현찬 박사가 함께 옮기고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가 감수했다. <논어징>이 완역됨으로써 그동안 주로 2차 문헌을 통해 소개되던 ‘소라이학’의 진수를 한국어로 직접 느껴 볼 수 있게 됐다. 



오규 소라이는 흔히 앞세대 이토 진사이(1627~1705), 뒷세대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와 함께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를 연구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는 ‘고의학’을 창시했고 노리나가는 <고사기>라는 일본 역사책을 연구해 ‘국학’을 집대성했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주자학 비판을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송대 유학과는 아주 다른 독창적인 반주자학 사상을 세운 사람이다.

소라이의 사상을 국내에 알린 저작으로는 일본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노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가 먼저 거론된다. 일본 정치사상 연구에 획을 그은 이 저작에서 마루야마는 소라이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로 주목했다. 그는 동서양을 동시에 관조하는 눈으로 송나라 유학의 완성자인 주자를 동시대 서구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선상에 놓고, 주자학을 비판한 소라이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가 된 마키아벨리에 견주었다. 마키아벨리가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 근대 정치학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도 주자학의 도덕관념에서 벗어나 정치 자체를 발견함으로써 근대성의 싹을 틔웠다는 것이 마루야마가 포착한 소라이학의 핵심이었다.

소라이의 삶 자체도 마키아벨리의 삶과 유사한 면이 있다. 소라이는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의 시의였던 오규 가게아키의 둘째아들로 에도(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쇼군의 문책을 받아 유배를 당하자, 아버지를 따라간 소라이는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독학했다. 27살 때 아버지가 사면을 받자 소라이도 에도로 복귀해 유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5대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발탁돼 17년 동안 그의 정치 고문 노릇을 했다. 1709년 5대 쇼군이 사망하자 야나기사와는 실각했고,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정에서 14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다 쫓겨난 뒤 <군주론>을 저술했듯이,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 작업을 본격화했으며 대표작 <논어징>은 죽는 순간까지 가필을 거듭했다.

소라이는 관직에 있던 시절 주자학적 도덕보다는 막부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는 관점을 취했는데,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702년에 에도를 발칵 뒤집어 놓은 ‘46인 사무라이’ 사건이다. 주군을 잃은 낭인 46명이 주군의 원수인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해 원수의 목을 벤 뒤 막부의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주군에 대한 가신의 충성이라는 봉건적 주종관계와 막부 통일정권의 정치적 지배가 충돌하는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정치 고문으로서 소라이는 이 사태를 충성이라는 사적인 도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천하의 법도를 세운다는 정치적 관점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소라이의 조언대로 사무라이들의 할복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종결됐다.

이 에피소드에서 엿보이는 정치 우위의 사상을 <논어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논어징’(論語徵)이란 공자의 말씀을 모은 <논어>에 대한 해석들을 ‘밝히고 검증한다’(徵)는 뜻이다. 소라이는 선진시대에 성립된 육경에 입각해 <논어>를 해설하면서, 주자의 논어 해설이 불교와 도교에 사로잡혀 있다며 <논어집주>를 반박하고,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가 주자학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런 비판작업을 통해 고대 육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소라이의 사상은 순자의 학설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옮긴이들은 말한다. 고대의 육경, 곧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가 대부분 순자의 문하에서 경전으로 성립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맹자의 성선설이 아니라 순자의 성악설이 소라이 사상의 바탕을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논어>를 해석하는 데서 드러나는 정치적·현실적 태도다. 이를테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을 ‘사랑의 이치이며 마음의 덕’이라고 풀이하는 주자와 달리 소라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독해한다. 또 ‘학이’ 편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不溫)라는 주자의 해석을 거부하고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해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한다. 구체적인 정치적 해석인 셈이다. 소라이학은 뒷날 그의 제자 다자이 순다이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조선의 다산 정약용에게도 전해진다. 다산은 처음에는 소라이학을 괴이쩍게 생각했으나 후에는 “찬란한 문채”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어고금주>에서 깊이 살펴 많은 부분을 취했다. 나아가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소라이학의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평가다.(고명섭기자)  

경향신문(11. 01. 12) [서재에서]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부는 진짜 이유

지난해 초반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기업에서도 인문학 바람이 거센데다 동양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논어>를 기업 임원들이 새삼 즐겨 읽는다고 이상할 건 없지만 유례 없는 현상이어서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몇몇 대기업의 경우 전 사원이 <논어>를 읽고 토론했으며,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국내 최고 글로벌기업인 삼성 그룹의 수뇌부와 핵심간부들이 이 책으로 ‘열공’ 중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2년 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논어>를 읽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s)는 취지라고 한다. 하긴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같은 지도자도 정국이 난마처럼 헝클어져 해법을 찾기 어려울 때면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세대교체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삼성이 그럴 법도 하다. 삼성의 경우 창업주인 이병철 초대회장이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삼았던 책이 <논어>여서 이해는 간다. 이병철 회장은 이에 관해 <호암자전>(중앙M&B)에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가장 감명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한국기업 간부들이 수많은 고전 중에서 왜 갑자기 <논어>를 유행처럼 많이 찾는 걸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가 있긴 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의 책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무려 84년 전인 1927년 추세도 출판사가 시부사와의 강연내용을 편집해 첫 출간한 이후 일본에서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전해내려 온다. 

 

시부사와는 <논어>를 해석하면서 경제나 상업과 관련된 대목은 정통적인 관점과는 각도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송나라 주자학파의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부자는 인의도덕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의 염을 버려라”고 해석했던 부분을 시부사와는 “도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빈천한 편이 낫지만, 만약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얻은 부귀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받아들인다. 시부사와는 ‘부귀와 도덕은 결코 모순관계가 아니어서 함께 추구할 수 있다’며 당시 부정적인 상인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옮긴이 노만수의 해제가 설명했듯이 ‘논어(도덕)와 주판(경제)’의 통일 즉 ‘도덕경제합일’이야말로 ‘진정한 논어’라는 게 시부사와의 생각이다. 



2006년 화제를 몰고 온 중국 CCTV 프로그램 <대국굴기>가 “한 손에는 논어, 한 손에는 주판을 든 시부사와의 유상(儒商)이야말로 일본을 굴기시킨 비결이고 중국 굴기의 출구는 <논어와 주판>에 있다”라고 극찬하는 바람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세계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시부사와 에이치에게 배웠다’고 고백해 전 세계적으로 한층 더 유명해졌다. 



시부사와의 <논어> 해석과 실천이 더 큰 빛을 발하는 부분은 드러커가 상찬한 ‘사회적 기여’다. 시부사와는 올바르게 번, 어마어마한 돈을 교육·의료·빈민구제 등의 공익·사회복지 사업으로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논어>를 늘 곁에 두었던 것도 시부사와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 회장이 고인이 된 터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맨주먹으로 최고의 삼성을 일궈내면서 일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점을 미뤄보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제국호텔,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등 500여 개의 기업 창립에 관여해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최고 영도자’ ‘일본 기업의 아버지’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한국 재계에 <논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1월 시부사와의 <논어와 주판>이 처음 번역돼 출간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시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논어>만 수백 번 읽고 <논어경영학>(청림출판)이란 책까지 펴낸 민경조 코오롱건설 부회장 같은 마니아도 적지 않으나 그때까지 기업에서 열풍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인 <논어와 주판>의 한국어 번역판이 1년여 전에 처음 나온 것도 의아한 면이 없지 않다. 불과 보름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된 두 번역본(페이퍼로드의 <논어와 주판>과 사과나무의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 지난해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14선’에 포함되면서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특히 <한 손에는 논어를 한 손에는 주판을>의 경우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에 선정된 뒤 그 전에 비해 몇 배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는 ‘출판계의 마법사’로 일컬어질 만큼 위력이 지대하다. 출판사 경영자들은 삼성경제연구소가 특정 책의 판매량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문화권력 역할을 한다고 부러움 반 불만 반을 섞어 평가한다. 과거 MBC-TV 프로그램 ‘느낌표’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문화관광부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등 권위를 지닌 다른 기관의 추천도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게 한결같은 얘기다.

이 연구소의 추천만 받으면 곧바로 책 표지의 홍보 띠지에 그 사실이 등장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추천한 책 중에는 좋은 책도 있지만 대기업의 논리를 반영한 책들도 적지 않아 책 읽기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기업인들의 <논어> 열풍은 이래저래 삼성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이례적인 풍조이긴 해도 4대 성인의 한 분인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 <논어>를 깊이 읽고 참뜻을 새겨서 나쁠 거야 없겠다. 시부사와가 강조한 ‘도덕적 기업’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에 방점을 찍으려는 자기합리화의 방편이 아니길 기대할 따름이다. 때마침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절에 너무나 당연한 ‘공자 같은 말씀’인가? (김학순 대기자) 

11. 0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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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11-01-27 20:08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요즘 직장 동료들과 '논어' 세미나를 하고 있는 중인데,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 완역판 출간 소식은 반갑군요!
고주, 신주, 정약용주, 소라이주등을 고루 살펴보며 느낀 점은 소라이의 '반주자적 독창적 해석'이 가장 쉬이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개념에 매몰되거나, 너무 고답적이거나, 초월적인 해석을 지양하고 현실적이며 살아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역동'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 소라이의 해석이 아마 제 마음의 어떤 부분과 만나는 지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논어 해석에 있어 제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소라이의 '논어징' 완역을 반기면서, 이 곳에 소개의 기사를 실어주신 '로쟈'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