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에게는 고향이 따로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시인이 호기를 부렸다. 산하 전체가, 온 세상이 그의 몫이라고.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평화로운 마을 게르니카가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한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자 격노한 지식인이다. 그는 게르니카의 승리」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인민전선 공화군을 지원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멕시코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민중의 투쟁을 지원하며 자신에게는 고향도 고국도 없다고 공언했다. 민족보다 계급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음화로만 다가오는 그의 시구는 그가 자란 고향과 만난 사람들이 더해져야만 온전한 채색이 가능하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국제공산주의도 결국에는 국가와 민족 단위로 분화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고향과 조국은 정신적 삶의 버팀목이다.
고향이란 떠나서 그리워하고 이따금씩 되찾곤 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 숫제 평생토록 가슴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문득 돌아다보니 세계의 명작소설들은 모두 향토문학이었다. 어린 눈에 비친 고향의 산천과 풍물, 세속과 인간의 모습이 후일 문학작품으로 재현되어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여 가슴에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고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지성의 자격이 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신비주의 철학자, 생빅토르의 위그(Hugo von Saine Viktor, 1097년경-1141)의 말이다.
대한민국 소설가 이병주의 고향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그를 작가로 키워낸 정서적 자양분은 모두 지리산과 섬진강, 남해바다 하동 포구가 배양한 것이다. 하동은 산과 강과 바다를 함께 어울러 안은 넉넉한 땅이다. 지리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요, 섬진강은 대천의 반열에 세워도 무리가 없다. 한려수도를 안은 남해바다는 실로 아름다운 물이다.
- <이병주 평전> 첫 부분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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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 나림 이병주(1921-1992)
저자 안경환은 조영래 평전도 썼던 분. 내가 갖고 있는 책은 <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이다.
법학자 안경환 선생이 쓴 새로운 평전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병주 작가 타계 30주년이 되는 올해, 지난 금요일 저녁 외출 준비를 하고 나섰는데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부상 후 처음으로 전철을 타봤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많이 나아졌구나.
”나림 이병주 문학콘서트”에 동행한 글벗이 지하철역 안에서 커피처럼 따끈따끈 갓 나온 두번째 수필집을 내게 처음으로 내밀어주어서 더욱 기뻤다. 이 두꺼운 평전도 나중 행사 마지막에 같이 받게 되어 기뻤다. 이런 행운이!
김종회 문학평론가, 하태영 형법학자, 남송우 국문학과 교수의 핵심 있는 강렬한 강의에 이어 이병주 작가의 아드님 이권기 교수가 나왔다. 외모가 너무 닮아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절친한 분들 말로는 목소리까지 똑같다고 한다. 목소리 유전되는 것, 사실. 목소리가 지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누구였더라.
1965년 아버지가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간할 당시 아홉살 아들은 이곳, 지리적으로 부산의 가운데 지점인 서면 이 동네에 복개천이 생기기 전에 살았다고 한다. 데뷔작이라고 하지만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서도 오래 글을 써온 작가 스스로 소설을 작심하고 쓰겠다는 선언으로 본다. 이후 이병주 작가는 발자크를 롤모델로 괴력이라 할 만한 필력을 발휘해 소설, 에세이 막론하고 많은 작품을 써냈다.
인권언론인으로도 재조명이 필요한 이병주 작가의 유니크한 문체와 박학다식함을 재론할 필요 없이 그날 특별히 마음에 들어온 강의는 두 번째의 “20분”을 꽉 채운 하태영 형법학자의 강의였다. 현재 동아대 로스쿨 교수이면서 <밤이 깔렸다>로 올해 이병주문학연구상을 수상했다. 제목의 문장은 인간의 자유정신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첫문장이다. 어둠, 혼돈, 자주 등장하는 이런 단어와 함께 ‘밤’이 깔린 세상을 영문도 모른 채 걸어가는 사람들을 빗댄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예언자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산문은 머리칼에 홈을 파듯 써야만 비로소 문장이 되는 것인데”라는 이병주 작가의 말로 시작해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다. 이 더러움에 섞이지 않으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라는 <쥘부채>의 마지막 문장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작품속에서 사형제도 폐지를 꾸준히 주장해 왔고 소설로 행위형벌의 정당성과 한국 형법의 근대정신을 보여준 이병주 작가는 “역사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오래전 이병주 작가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며 던진 질문에 이병주 작가는 하태영 교수의 눈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간단히 답했다고 한다. 이병주는 역사는 성긴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버린 인간의 삶을 쓰지 않기에 소설이 즉 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일을 해냈다.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한 작가에 대한 존경을 담아 가상대화로 짧고도 긴 강의를 마무리했다. 가상대화에서 이병주 작가는 분단소설이 아닌 통일소설, 노인여성의 사랑 즉 “돌아보지 마라”가 아닌 “돌아보라“ 이런 걸 쓰겠다고 말한다. 같이 머리를 팽팽 돌려야하는 재치있는 강의였다. ”뒤돌아봐!“ 라는 말에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떠올랐다. ^^
첨부한 사진 중 두번째는 <이병주 평전>에 실린 작가와 젊은 아들이다. 황성옛터와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이국에서 선물로 보낸 클래식 음반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청중으로서 뭉클했다. 남기고 가는 것과 남기고 가는 이, 남아서 오래 노래가 되고 언어가 되는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숙연해졌다.
음악유목집단 젊은 연주자 무대, 반도네온과 바이얼린의 협연도 듣고 책선물도 받고 행사장을 나오며 하동 이병주문학관으로 가는 길의 북천역, 코스모스 하늘거리던 가을풍경을 떠올렸다. 글벗이 추천한대로 내년 가을즈음엔 부전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북천역에 내려 느린걸음으로 다시 가볼 수 있기를… 우리는 뜨끈한 국수를 먹고 돌아왔다. 작은 바람이 이루어진 것도 신기한데 그날밤 우리축구팀이 16강 진출의 기적을 이뤄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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