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김해는 미국 빅아일랜드 하와이 코나에 살면서 <사자와 생쥐가 한번도 생각 못 한 것들>에 이어 두 번째 그림책을 작년 3월에 발간했다. 둘 다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진행했고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숨막히던 시기에 좋은 그림책을 받고 기뻤는데 게으르게도 이제 페이퍼를 쓴다.

사자는 작가에게 특별한 대상이다.

_ 나는 동물의 왕 사자를 볼 때마다 지루한 쓸쓸함, 삶의 권태, 허무를 읽는다. 그래서 모든 걸 가졌음에도 여전히 슬픈 인간의 모습을 닮아버린 사자는 내 가슴에 아련한 연민으로 남아 있다. 하여, 사자를 그리는 일은 나와 세상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작업 같았다. - 작가의 말, 중

이 그림책에서 사자는 마치 우리의 초상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강하지만 나약하고 불온전한 존재로서 작은 풀, 바람, 거미, 칼 같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수다를 나누며 세상을 알아간다. 안온하고 냉철하며 충실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글의 내용도 다감하고 사려 깊고 무엇보다 사자의 다양한 표정에서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된다. 그림이 개성 넘치고 개구쟁이 같이 우스꽝스럽고 귀엽고 멋지다.

총 다섯 장으로 나누어 작가의 사유를 짧은 대화체로 혹은 시구로 풀었다. 1장 함께, 2장 괜찮아 괜찮아, 3장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4장 불운한 영혼들의 노래, 5장 공평하지 않은 그러나 아주 공평한.

#
“칼로 벨 수 없는 게 무엇이지? “
사자가 물었다.
“미소 짓는 거
뉘우치는 거
용서 하는 거
감사하는 거
품고 있던 칼날도 거두게 하지. “

- 3장 칼로 벨 수 없는 것들, 중


특히 4장에서는 세상살이 진리와 세상 사람들의 내면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한다.

“시기의 얼굴엔 구질구질이 덕지덕지하다.” 라든지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온 바람이 힘을 사랑하는 사자에게 하는 말 “크든 작든 휘두른다면 똥파리만 붙는다. “

(power-권력, 중)라든지…

그러면서 결론은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았고
또 누구에게나 공평하였다. “
라고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전김해 작가이다.

이 말의 표피만 읽으면 반박하고 싶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끄덕끄덕 공감하게 된다. 질풍노도를 지나 삶을 수용하고 자성하는 태도로 삶에 진심이 된다면… 누군가의 희생과 불운에 나의 기쁨과 행운이 빚을 졌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게 된다면…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여전히.

읽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이 오갈 그림책이다. 내용이 다소 철학적이고 어려울 수 있지만 아이와 한 장씩 읽고 대화를 끌어내면 사고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은 복잡해 보이는 것에서도 순수결정체를 끌어내는 단순함의 마력이 있기에 본질을 더 잘 꿰뚫어 본다. 이야기의 중심으로 에두르지 않고 갈 줄 아는 힘이 있다. 그림책은 아이와 어른이 같이 보고 이야기 나누고 그럴 때 효과가 배가되는 듯하다, 경험상. 작가도 그런 표기를 하지 않았듯이 굳이 어른그림책이라고 한정하고 싶지 않다.

세번째 그림책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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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9-28 0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은 공평하지 않으면서 공평하기도 하네요 글을 보고 좀 생각해야겠습니다 사자가 다 가진 듯 보여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때문에 쓸쓸할지도... 다 가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다 겉만 보면 잘 모르기도 하네요 그게 다기도 하고 다가 아니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2022-09-28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롯하루 2022-09-29 0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가, 멋진 그림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온하고 냉철하며 충실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사자를 얼른 만나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22-09-29 08:37   좋아요 3 | URL
오롯하루 님 반갑습니다 ^^
사자 표정이 풍부하죠. ^^
 

김연수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예약 장바구니행.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작가가 최근 2~3년간 집중적으로 단편 작업에 매진한 끝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김연수의 변화된 시각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김연수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것으로만 여겨지는 시간을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우리가 현재의 시간을, 즉 삶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언어로 설득해낸다. 특별한 점은 그 가능성이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 알라딘 책소개 중



#
4년전 겨울 그러니까 그 해의 첫달에 세종시에서 한 김연수 작가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순한 인상이었다. 작가는 대만 스펀에서 천등을 띄워 올린 경험을 꺼내며 강연을 시작했다. 한마디 한마디 사려 깊은 어조였는데 그때 말한 작가의 내적 경험은 구체적이고 세밀했다.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은 소설가에게 질료가 되기 이전에 뭔가 본질적인 감정을 떠올려 주었다.

그전 해 구월 여름같던 날, 나는 소박한 스펀역에서 기차를 타고 탄광마을로 들어갔다. 낡은 철로가 이어진 마을에서 커다란 천등과 소망의 글귀를 써서 함께 하늘로 올려 보냈다. 난 소망이랄 게 딱히 없었지만 사람들이 다함께 그렇게 하는 데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어 보였다. 사람들이 가족 건강과 행복 어쩌고 적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소망을 적는다는 건 부끄럽고 쑥쓰럽고 뭐 그런 일이다, 내겐. 고개를 한껏 들고 하늘로 날아가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등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벅차면서도 아련하게 무언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명명하기 어려운 충만한 감정. 시간이, 순간이 저만치 날아가 어디에서 내려앉을 것 같았다.

김 작가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며 그런 이야기를 찾아 쓰는 데에 있어 상상력보다 언제나 더 중요한 건 경이감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인상 깊었다.
내게 있어 경이감은 고양이의 눈 같은 것이다. 그땐 함께 살진 않아 잘 몰랐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고양이가 내게 왔다. 나를 관찰하고 창밖을 감상하며 견자인 듯 몽상가인 듯, 그런 고양이의 눈에 빠져 버렸다. 똑 같아 보이는 하루하루, 빛나는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고양이. 일주일치를 하루에 살아내는 기적적인 생명체. 유리구슬 같은 눈망울로 무얼 생각하니? 책상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요 녀석!

시간이 흘렀고, 저만치 날아간 그 때 그 순간이 돌아온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가끔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나를 세워두고 현재를 바라보게 하자고 생각하곤 한다. 그게 작가가 염두에두고 쓴, “시간과 삶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에 닿아 있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시간을 벼려 쓴 이번 소설집도 각자 또 함께 잘살기 위한 소망을 하늘로 올리는 일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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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6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6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9-26 1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 금방 예약주문하면서 땡투 어쩌지? 고민했었거든요.^^
땡투 누를 수 있게 해 주셔 감사합니다. ㅋㅋㅋ

프레이야 2022-09-26 12:36   좋아요 3 | URL
그랬군요 ㅎㅎ 저도 땡큐에용

호우 2022-09-26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상상력보다 경이감.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작가가 되는 사람들은 확실히 좀 다르네요.

프레이야 2022-09-26 12:37   좋아요 2 | URL
네. 호우 님 그때 그 말을 들은 후 경이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잊을 만하면 떠올리기. 그 눈을 잃는 순간 우리는 늙는 것이겠지요^^

거리의화가 2022-09-26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김연수 작가님의 신작 기대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작가분들 중 한 분이에요~^^
프레이야님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신간을 기대해봅니다.

프레이야 2022-09-26 13:54   좋아요 2 | URL
두둥실 ~~
화가 님 저도 같이 설레네요.
10월 7일이 곧 오겠죠^^

페넬로페 2022-09-26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 신작 엄청 기대되네요~~
좀 어렵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요
전작들이 어렵더라고요^^
워낙 깊이 있게 들어가서 그렇겠지요~~

프레이야 2022-09-26 14:22   좋아요 3 | URL
전 어떤 건 좋았고 어떤 건 좀 내려놓고 그랬는데 생각해보면 시절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책도 사람도 그런 면이 있지요. 에세이도 좋았어요. 지지 않는다는 말. ^^

얄라알라 2022-09-26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껴두셨던 4년전 사진을 방출해주셨네요^^ PPT 서체랑 느낌이 매우 특이하네요^^ 그것 역시 순한 느낌

프레이야 2022-09-26 14:29   좋아요 2 | URL
ppt도 재미있게 만들어 왔더군요
동글동글한 서체로 보기 좋게요 ^^

blanca 2022-09-26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기대되는데 너무 늦게 나오더라고요. 어떻게 기다리죠? 대만에 가보고 싶어요. 대만, 김연수 작가 강연회 경험 다 부럽습니다.^^

프레이야 2022-09-26 20:09   좋아요 0 | URL
저 그때 어쩌자고 세종시까지 한달음에 달려갔을까요. 세종도서관도 들르고 호수 주변 한 바퀴 걷고 그랬네요. 한번씩 자극 되는 강연 들으면 좋은 거 같아요 ^^

바람돌이 2022-09-26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작가 책 장바구니 넣었어요. 너무 오랫만에 나왔잖아요. ^^
스펀에서 저도 천등 띄웠는데 저는 친구들이랑 가서 진짜 하나도 안 진지하게 대충 띄웠던 기억이.... 저는 그 때 이 동네에서 먹을 닭날개 볶음밥이랑 맛있는 커피집 생각밖에 머리에 없었던것 같네요. 역시 김연수작가님이나 프레이야 작가님 같이 작가인 분들이랑 저같은 평범이랑은 생각의 중심이 다른듯요. 그래도 스펀에서 먹은 닭날개 볶음밥 맛있었어요. ^^

프레이야 2022-09-26 20:07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라 더 반갑죠^^
저도 안 진지모드였어요. ㅋ 좀 들떠 있었고요.
낡은 기차가 신기해 구불렁한 기찻길에 서서 그거 바라보는 게 더 신나기도 했고요. 하늘 높이 올라가는 등이 비현실적으로 보였어요.
뭘 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었나 기억에 없고 커피는 맛있어요. ㅎㅎ 기억도 이리 가물가물.

mini74 2022-09-26 1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천이 낳은 작가 김연수와 김중혁 ㅎㅎ 진짜 넘 반갑네요. 저도 찜해갑니다 ~

stella.K 2022-09-26 19:05   좋아요 1 | URL
김천이 나은 작가 또 한명 있는데.
그레서 김천 삼총사라고... 이 모라는 작간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군요. 아, 이놈의 건망증은 고질입니다. ㅠ

stella.K 2022-09-26 19:13   좋아요 1 | URL
아, 이문재였던 것 같습니다. 아닌가...?ㅋㅋ

프레이야 2022-09-26 19:57   좋아요 2 | URL
스텔라 님, 문태준이랍니다 ㅎㅎ
이문재 시인은 김포 출생요.
김중혁 소설집 예전에 악기들의 도서관
낭독녹음 했는데 이후 티비에서 보이더만 요샌 안 보이네요. ^^

stella.K 2022-09-26 20:0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이거 끝까지 모른 척 했어야 하는 건데. 왜 헷갈렸을까요?ㅠㅠ

프레이야 2022-09-26 20:14   좋아요 2 | URL
ㅋㅋ 스텔라 님 귀여우셔라.
김천 김포 헷갈리죠. 문태준 이문재 모두 시인이고요. 김천역까지 고속철 타고 가봤네요. 아는 게 너무 많으면 막 섞여요. 이제 기억도 가물거리고요 ㅎㅎ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stella.K 2022-09-26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15년전인가? 무슨 문학 좌담회 때 게스트로 나온 걸
본적이 있습니다. 단단해 보이고 아직 청년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많이 중후해졌겠죠? ㅋ
김연수 팬들 많죠. 근데 전 소설은 그닥 잘 모르겠고, 에세이는 읽을만하더군요.
<소설가의 일>과 <소설가의 산책>은 좋게 읽은 기억이 있어요.
고양이 같이 경이감을 가져라. 그렇군요.
갑자기 저희 집에도 고양이 한마리 들여놓고 싶네요.ㅠ

프레이야 2022-09-26 20:01   좋아요 2 | URL
고양이는 제 느낌이에용 스텔라 님. 김 작가는 고양이 얘긴 안 했구요. 조근조근 부드럽게 이야기하더군요. 15년 전이면 완전 청년이었네요. 제가 본 작가는 적당히 나이 든 표도 나고 수수했어요. ^^
고양이 생각해 보세요 님. 반려견과 이별하셔서 마음 안 좋으신데 강아지와 성격은 달라도 위안이 될거에요.

stella.K 2022-09-26 20:12   좋아요 3 | URL
그니까요.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키웠는데도
막상 마지막 때는 좀 허물어져 정말 다시 키울 자신이 없더군요.
모든 건 생로병사를 다 거치게 마련인데 이게 왜 이리도 익숙치 않은지
모르겠어요. 그동안은 더워서 하루하루 버티며 사느라 별 생각도 없었는데
바람이 스산하게 부니 다롱이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ㅠㅠ
미안해요. 고양이 예쁘게 키우고 계신데 웬 주책인지 모르겠어요.ㅋ

프레이야 2022-09-26 20:23   좋아요 1 | URL
제가 페이퍼를 그렇게 오해되게 썼나 싶어서 조금 보강 수정했어요. 스텔라 님 고양이 입양하시면 다롱이라고 이름 불러주면 좋을 것 같아요. 다롱아~ ㅎㅎ

stella.K 2022-09-26 20:29   좋아요 1 | URL
아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괜히 부담 드린 것 같아 미안하네요.ㅠ
뭐 다롱이도 좋긴하죠. 그런데 고양이는 고양이스러운 이름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들면, 암컷이라면 춘희나 몽희.
수컷이라면 춘식이나 몽식이쯤 될 수도 있겠군요.ㅋㅋ

프레이야 2022-09-26 20:43   좋아요 2 | URL
ㅋㅋㅋ 암튼 춘. 몽. 이네요
울집 냥느님은 모꾸입니다. 고양이답지요 ㅎㅎ
오늘 목성이 아주 가까이 지구에 다가온다고 하는데 보이려나요. 이번에 못 보면 2100년에나 온대요.

stella.K 2022-09-26 21:0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모꾸였죠? 그 이름도 좋은 것 같아요.
모꾸도 제 이름 불러주면 알아 듣나요?
저는 고양이는 거의 키워 본적이 없는지라...
우리 다롱이는 알아 듣는 것 같긴했어요.

프레이야 2022-09-26 21:24   좋아요 2 | URL
네. 완전 알아들어요. 영리해요 고양이. 먹돌이여서 먹꾸에서 모꾸로 ㅎㅎ 작은딸이 지었는데 정감있는 이름 ㅋㅋ 일명 꾸돌이, 꾸꾸, 박 사장… 수컷이거든요.

희선 2022-09-28 0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작가인데, 저는 소설 보면서도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좀 다를지...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소설이 어려운... 한국 단편소설은 왜 그렇게 어려워 하기도... 김연수 작가 단편소설에 제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군요 메일 보면서 새로운 소설집 나왔다는 거 알았어요

모꾸 늘 건강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9-28 07:59   좋아요 2 | URL
착한 모꾸는 요즘 사람으로 치면 청년이라 혈기왕성하고 건강해요. 차츰 나이 먹고 아프고 그럴거라 생각하면 애잔해져요. 우리가 하루를 살면 모꾸는 일주일을 사는 거라. 놀아달라고 보채는데 ㅎㅎ 녀석 에구. 다묘인은 어떻게 다 놀아주고 그러는지 몰라요.
소설에 이름 나오면 왠지 반갑지요.
소설가는 아떻게 인물의 이름 지을까요.
그냥 떠오른대로 혹은 의도적으로.
 

세상 아가씨들에게!

그래서 초고가 어땠냐고? 난 웃었징… 밑그림이나 좀 그려 두랬더니 채색까지 적잖이 해놓았으니까, 사람 당황스럽게시리…

작가가 워낙 단순한 기교를 능가하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재능을 가진 덕분이었다. 읽자마자 "거의 다 익은 것 같아!"라고 뇌까린 다음 이 각본에 내가 한 일이라고는 뭐랄까, 스토리에 입체감을 좀 더해준 정도? 그 비슷한 어떤 것.
(중략)
그래도 따지고보면 나란 놈은 정말이지 운도 좋지 뭔가, 팬들이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아가씨>에게 와주었잖아. 그래....그랬기 때문에 <아가씨〉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 건 맞다. 모름지기 영화란 관객 하나하나와의 사적인 만남을 통해 무수히 새로 태어나는 법이 아니던가. 나는 참 행복하다, 감독이란 뭐니 뭐니 해도 손님들이 영화에서 좋은 냄새 난다고 그럴 때가 제일로 기쁜 법이니까. 나는 뿌듯하다, <아가씨>는 내 아기씨니까. 그리고 또 나는 든든하다, 이렇게 <아가씨〉를 사랑하는 이들이 <아가씨>를 지켜줄 힘까지 가졌으니까.

박찬욱 - P8

그래서 이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이면서 성장담이다.

한 여자아이가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얼마나 엄마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감탄하게 되는지, 그런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나에게도 있는지 거울을 비춰보게 되고, 다른 여자아이를 아기처럼 돌보는 일에 얼마나 만족감을 느끼는지, 그렇게 돌봄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그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얼마나 강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사납게 싸울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쓰고 싶었다.

정서경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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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력 함양. 자기 보존 과정 장려. 즐거움과 기쁨.
스스로 탐구하고 추리할 수 있도록 지도.
신체와 정신 모두 아우르는 생명의 법칙 알기.
구체적 대상과 경험이 추상적 대상과 과학적 개념을 앞선다.

_ 생명의 법칙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동일하며, 나아가 단순한 개념을 연구하지 않으면 복잡한 개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 124쪽

두뇌에 최초로 새겨지는 인상은 분석이 불가능한 감각, 이를테면 저항과 빛과 소리 등을 통한 것이다. 무언가를 명백히 분석할 수 있는 의식상태는 이를 구성하는 의식 상태가 있기 전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즉, 농담이 어우러진 빛과 질감 혹은 강도가 다른 저항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형상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은 다양한 빛을 통해 가시적인 형상을 감지하고, 저항이라는 수단을 통해 손에 잡히는 형상을 감지한다. - P115

아울러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는 그러지 못한 소리가 습득된 후에야 인지할 수 있고, 다른 경우도 비슷하다. 따라서 단순한 데서 복잡한 데로 인지가 발달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저항의 정도와 종류가 다양한 물체를 쥐여 주고, 서로 다른 빛깔의 물체를 보여 주고, 음색과 높낮이가 대조되는 소리를 충분히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 P116

사람이 단지 시민이나 장부만 뚫어져라 보는 상인으로 만족한다면, 예를 들어 그저 농원에 앉아 담배를 물고 맥주를 들이키는 즐거움밖에 모르는 런던 토박이나, 숲에서 사냥을 해야 제격이라 생각하고 자생하는 초목은 잡초에 불과하며 동물은 사냥감과 해충과 가축으로 치부하는 지주로 산다면 금고와 창고를 채우는 데 직접적인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을 전혀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 중요한 목표가 우리에게 있다면, 즉 소욕과 정욕을 채우는 것보다 좀 더 숭고한 욕구가 있거나 시, 미술, 과학, 그리고 철학이 주는 희열이 정말 중요하다면 자연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성향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아이라면 누구나 그런 성향을 보인다. - P123

뭔가 색다르다 싶은 대상을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은 본능적인 인지력 훈련으로, 관찰력의 정확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촉매가 된다. 또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의 특성을 발견하고 이를 묘사함으로써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을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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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24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찰력은 글쓰기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삶에서도 필요한 것 같아요.
관찰력이 없으면 중요한 걸 많이 놓치죠.

프레이야 2022-09-24 17:53   좋아요 2 | URL
네. 동감이에요. 인간관계에도 적용되구요. 스펜서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찰력을 강조하고 어떻게 필요한지 쉽게 설명하네요. 디테일에 많은 게 담겨 있는데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 중요한 걸 덮으려는 의도이거나 중요한 걸 안 보려는 선택이거나.
 
박쥐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그책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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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월 개봉관에서 영화 <박쥐>를 보았고 각본집은 2022년에 읽었다. <헤어질 결심 각본>의 영향으로 정서경의 각본집을 더 읽고 싶어져 <박쥐 각본>과 <아가씨 각본>을 구매했다. 읽기를 잘했다는 결론.^^ 

박 감독 개인적으로는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고 성당에서 느낀 어린 시절 내면의 경험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각본집에서 정서경 작가의 말과 박찬욱 작가의 말이 서두에 있는데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밀한 심적 동기가 어디서든 중요하다. 그것은 감추려 해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잘 녹여내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완수하고 나서도 계속 내적 흔들림은 있게 마련이다. 


당시엔 내가 감독님보다 죄의식을 덜 느끼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은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경험히 쌓이면서 생겨나는 게 아닌가 싶다. <박쥐>는 내가 참여한 다른 어떤 각본 작업보다 감독님이 먼저 시작하고 감독님이 완결하신 작품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외적인 결과와 상관없이 감독님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 영화에 가장 많은 감독님의 살과 피가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자기 삶의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로서 감독님께 경외심을 느낀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 정서경 작가의 말, 중(5쪽)


 제도화된 종교를 더는 존경하지 않지만 어떤 종교인들은 지금도 충분히 존경한다. 천주교 신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로 나는 - 비록 그가 흡혈귀가 됐어도, 아니 흡혈귀가 됐기 때문에 더욱 - 내가 아는 몇몇 경건한 신부님들을 향한 내 존경심을 표현하려고 했다. - 박찬욱 작가의 말, 중 (7쪽)


영화장면을 떠올리며 각본집을 읽고 장면이 더 생생해졌다. 거의 같은 느낌으로, 영화를 보고 썼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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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 책 전체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려고 노력했다.   

  - <테레즈 라캥> Emile Zola, 서문 중


 10년을 준비해 만들었다는 영화 <박쥐>는 감독 자신의 말대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에서 상당한 영감을 받았다. 두 주인공을 비롯해 조연들에게서 보였던 모종의 이해하기 어려울 듯한 기질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공포와 혐오감 그리고 죄의식의 근간을 이해하기에 소설이 좀 더 도움이 되었다.


동물을 해부하듯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여 펼쳐 보이고 싶었다는 에밀 졸라의 서문처럼 영화는 인간 내면의 갈증을 박쥐라는 동물로 환치했다. 박쥐는 밤과 낮, 흑과 백, 어둠과 빛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다. 궁핍과 결핍을 떨쳐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 즉 인간의 자화상이다. 그런 동물(인간)에게 Thirst - 갈증, 갈망, 갈급, 갈구 그리고 갈등 - 는 숙명이다. 실재와 환상, ‘이다아니다’, 은폐와 노출 등 수많은 상극의 단어가 맞닿아 있다.


지고지순한 어떤 것, 아름다운 것, 불멸의 것. 다다를 수도 획득할 수도 없이 그것들 앞에 인간은 한낱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도 믿고 싶어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것은 이데아로서의 지고지순함, 이데아로서의 아름다움, 이데아로서의 불멸성, 즉 최고선으로서의 일자一者를 믿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덜함혹은 '없음'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지 않은 완전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존재할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 죽음을 수시로 연습하며 산다. 지금 숨을 쉬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죽음은 혼이 육체에서 이탈하는 것, 육체를 죽이고 혼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부활이다. 상현의 자발적 자살 의도(박테리아 실험에 자원함)는 순교(이타적 자살 중의 하나)의 의미로 갱생하고 이것은 뱀파이어로의 부활에 이른다.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에밀 졸라가 탄생시킨 로랑이라는 남자, 피의 기질로 사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로랑과 테레즈의 기질이 뒤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어 기질의 변화가 오듯 상현과 태주는 서로 피를 나누며 죽음과 부활을 거듭한다.


둘은 공범의식으로 괴로워한다.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서로 위무하면서도 돌덩이를 달아 수몰시킨 죄의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분히 자발적으로 보인다. 공포와 혐오감을 망각하기 위해 각자가 끌어들이는 제삼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식물인간이 된 라여사를 (표면상으로) 극진히 모시는 태주와 상현. 그들의 죄의식은 거울에 반영되고 고통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그들 사이에 죽은 자가 늘 끼어 있다. 세 명이 누워있는 침대의 침구는 온통 뱀을 연상하게 하는 문양이다. 뱀은 치유를 상징한다. 그들의 지극한 바람이 투영된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또 한 명,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분노하는 라여사가 앉아 있다. 그녀는 반죽음 상태로 마치 전지자적인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단죄하려 든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 별로 없고 무능력해 보인다.


에밀 졸라의 서문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 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그들에게 영혼은 정말 완벽하게 부재할까. 그렇다면 구원이나 불멸을 바라는 마음 또한 부재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좀 다른 이야기로 나아간다. 영혼의 부재를 의심하고 영혼의 재림 혹은 갱생으로 치닫는다. 그것 또한 갈증으로 우물을 찾는 일종의 허기진 질주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와 상현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생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존재양식이다. 불안을 떨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빛의 의식'이 행해져야 할 차례다. 또 다시 살기 위해서다. 습기 차고 침침한 집안을 온통 백색으로 칠하여 빛을 끌어들인 것 같지만 그들의 핏빛 욕망과 죄의식은 날로 깊어질 뿐, '행복한복'이라는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백색은 더욱 살기등등해지는 그들 심리를 차갑게 반영해주는 역설적인 색깔이 되어버렸다.


결국 태양빛 아래 그들의 육신을 하얗게 태움으로써 불멸의 약속을 한다. 육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상현과 태주는 차라리 태양 아래에서 육신을 사그라지게 하는 제의를 치른다. 상현의 커다란 신발을 다시 신는 태주는 그것으로 대속받으며 치유와 회복의 기운을 얻는 셈이다. 그 신발이야말로 말로 하는 어떤 기도의 말보다 신실해 보인다. 신발은 땅, 지옥을 딛기 위해 필요한 것, 이 세계에 몸 담고 있는 물건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론 하늘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땅을 말한다. 하지만 태양 아래 저들의 두 눈은 하늘을 열망하듯 올려다보고 있다.


행복한복에 감금된 태주의 육체는 영혼과 함께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한복은 은폐의 공간이다. 가장된 평화와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음습하고 억압된 공간이다. 모든 죄악을 가둬놓은 육의 공간이다. 상현의 표현으로는 태주에게 그곳은 지옥이다.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게요라고 말했던 상현은 이제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우리 지옥에서 만나요라고 담담하고도 비장하게 말한다. 종교가 없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던 태주도 상현을 따라 지옥길에 동행한다. 지상의 지옥을 벗어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옥도 천국도 가름이 무의미하다


상현은 지옥을 말하지만 천국을 동시에 말한다. 수많은 밤의 자식들(, 죽음, 나이와 질병, 착각과 망상, 오류와 거짓, 망각 등)을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은거하는 빛의 존재들을 인정한다. 모든 악덕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왜곡시킨다 해도, 자신 안에 갇히는 땅에 발 딛고 산다 해도 우리는 그 너머 어느 곳에 먼 시선을 두고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한다. 허망하게도, 영생을 꿈꾸는 것이다. 육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함께 살 수 없음이다.


이즈음 클라우스 헬트가 쓴 <지중해 철학기행>을 낭독 녹음하다가 영화 <박쥐>를 나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읽혀 반가웠다. - 만일 인간이 지속적인 행복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영혼은 피안에 자리한 이데아들의 세계에서 참된 고향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혼이 정화되어야, 다시 말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데아들을 인식하면서 지속적인 행복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감각이 일어나는 바로 육체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들을 순수하게 바라보기 위해 혼은 육체로부터 떨어져야 한다.... 철학은 죽음의 훈련이다."


 



22살의 빛나는 원석, 김옥빈.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후 아쉽게도 멋진 역할이 안 주어졌네.



<박쥐 각본>에서 다시 선명히 들어온 것들



1. 고향

각본집을 읽고 다시 들어온 첫 번째 단어는 역시 고향이다. 영화에서 라여사와 강우가 자주 듣는 남인수와 이난영의 노래가 단초였다. 영화에선 흘려듣게 되는데 각본집에선 두드러지게 가사까지 적어놓았다. 아마도 박 감독의 아이디어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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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낚싯배 ()

태주를 가운데 두고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강우와 상현. 보름달 보며 [고향 그림자]를 제법 구성지게 부르는 강우.

   강우

똑딱선 푸로페라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은 어린다

- 69

 

내 고향 꿈이 어리듯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어리는 이미지로 각본집 표지를 삼은 듯 아름답다.

 

각본집의 마지막은 이렇다. 영화의 첫 장면, 나뭇가지 그림자 어른대는 하얀 벽면만큼이나 압도적 영상이 연상되면서 대조적으로 강렬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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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들석이며 숯덩이가 되어가는 남녀, 깜빡거리지도 않고 이 소멸을 관찰하는 라여사의 싸늘한 눈동자. 그러거나 말거나 옛 노래는 무심히 흐른다.

   이난영

정들은 고향 길에서 순정에 어린 그대와 나는

언제나 변치 말자고 손잡고 맹서했건만

그대는 그 어데로 갔는가, 잊지 못할 추억만 남기고

정들은 고향 길에는 구름만 흘러갔고나...

-121




2. 헤어질 능력, 뛰어내림의 희열


태주 : 당신은 날 죽여도 후회, 살려도 후회야...

       우리 인제 헤어져.

상현 : 나한텐 그런 능력이 없어.

       헤어질 수 있었으면 너를 왜 살렸겠어?

- 104

 

10년도 더 지나 정 작가와 박 감독은 헤어질 능력을 발휘해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고^^

고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 있냐고 묻는 태주를 안고 상현은 박쥐처럼 뛰어내린다. 그때 태주는 세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희열을 맛본다. 피를 나누어 준 후 재생한 태주에게 상현이 한 말 해피버스데이 태주씨!” (난 이 장면과 목소리가 제일 좋았다) 태주가 새로 태어난 이후 느끼는 환희는 잠깐이다.

 


3. 캄캄한 세상

영생의 욕망이 차올라 피를 나누어 달라는 눈먼 노신부에게 상현은 말한다.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노신부 : (벌컥 화를 내며)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 주는 건 아까워하느냐! (75)

 

윤동주 시인이 암담한 세상을 두고 병원이라는 시를 지었듯 세상은 아직도 밤이다. 헛된 믿음으로 기적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허상을 깨닫게 해주려고 한 신부. 병든 몸의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기분을 상현은 한때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느꼈다. 내쳐지지 않고 선택받았다는 기분. 하지만 그또한 허상이라는 걸 깨닫는다.

 


4. 물과 피

지속적으로 물과 피가 대조되어 흐른다. 물은 고향(귀향), 정화, 속죄, 구원, 소멸과 해방을 상징하고 피는 생명, 욕망, 죄와 고통을 상징한다. 상현과 태주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소멸하고자 밤길을 달려 새벽에 도착한 곳은 동해안의 개활지. 위압적인 해가 떠오르자 일제히 모세혈관이 눈에서 터지고 파랗게타오르는 거대한 태양을 바라본다. 각본집에 파랗게라고 씌어 있어 놀랐다. 파랗게라니! 영화에선 몰랐던 부분.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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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의 상상적 시점으로, 환상적으로 변용된 일출 장면. 파랗게 타오르는 거대한 태양에서 칼날처럼 뾰족하게 사방으로 뻗치는 햇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기묘한 빛깔들로 이루어진 뭉게구름, 피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고래들이 뿜어 올리는 피 분수, 날개 달린 거대 지네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하늘. 수십 명의 인간이 각기 다른 멜로디로 부르는 합창. - 121


 

5. 행복한복, 현상현

<헤어질 결심>에서 안정안, 엄마원전 완전안전,처럼 이런 말장난 좋아하는 개구쟁이 박 감독. 무거울 법한 이야기에 무겁게 빠지지 않도록,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권한다. 위트를 수시로 날려주는 깨알대사, 결정적 순간에 숨통을 틔워주는 특유의 스타일, 부조리한 대사 중 철학적 메시지와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에 대한 갖가기 이미지가 폭발적이다. 신발 장면은 작가와 감독 모두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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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 : (꼭 끌어안으며 담담하게)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 120

 

 

 




1. 병원 효성 입원실 (낮)
상아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벽과 문짝에 나뭇가지 그림자 어른거린다. 문 열리고 상현 들어선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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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09-21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박쥐 각본집까지!
저는 박찬욱 감독이 감독한 한국영화 중 ‘박쥐’만 안본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손이 잘 안가네요..
리뷰 보니 용기 내 한번 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22-09-21 22:42   좋아요 3 | URL
박쥐 안 보셨다굽쇼 햇살님^^
박쥐, 전 좋아하는 영화인데 아무래도 무장하시고 보시길 바랍니다 ^^ 좋은 영화입니다.
각본집도 좋아요~

scott 2022-09-22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님 담번 책내실때
울 프레이야님 이름
엔딩샷에 새겨주세요😎
고마워 영화😍

프레이야 2022-09-22 08:05   좋아요 2 | URL
@-@ 띠용 스캇님 우찌 ^^
한 장면 한 장면이 숨막히게 아름다워요. 기괴하고 우습고 과장되고 능청스럽고 지독하게 사랑스럽고요.

희선 2022-09-22 0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상으로 보고 놓친 걸 각본집을 보고 알기도 하는군요 태우는 건 정화의식이라고 한 말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네요 각본집을 보면서 다시 영화를 떠올렸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9-22 07:59   좋아요 1 | URL
네. 정화의식. ^^ 태양빛에 몸이 타들어갑니다. 고통이지만 희열. 최고의 엔딩 장면입니다. 각본집의 매력에도 빠져요.

새파랑 2022-09-22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쥐만 봤을때 이해가 안갔던게 테레즈 라캥 보니까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구요 ㅋ 영화가 좀 더 쇼킹했던거 같아요~!!

프레이야 2022-09-22 07:55   좋아요 2 | URL
보셨군요 새파랑 님 ^^
비틀어 놀라게 하는 게 감독의 의도인데 그게 한편 귀엽고 유머러스하기도 하고요. 김옥빈 배우 참 좋았어요. 역량이 다분한 배우라 생각하는데 후속 작품이 안 따라와주는 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9-22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옥빈 저도 참 아까운 배우라고 생각해요. 왜 작품이 없을까요?

프레이야 2022-09-22 11:36   좋아요 1 | URL
악녀, 있긴 해요. 액션 아주 잘하더군요. 몸매도 좋고 운동신경이 발달된 사람이라 잘 어울렸어요. 좀더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던데 아쉬워요. 요즘 삼십대 모습도 여유롭고 밝아 보여 참 이쁜 배우다 싶어요.

책읽는나무 2022-09-22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우는 감독을 잘 만나야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여배우들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죄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저도 박감독님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박쥐는 정말 오래전에 보았는데 영화가 좀 어려웠다고 기억하는데 프레이야님 설명을 들으니 조금 알 듯도 하구요?
졸라책을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려나요?^^

프레이야 2022-09-22 11:45   좋아요 2 | URL
졸라 책은 그냥 모티브이고 거기에 뱀파이어를 더해서 좋은 이야기를 담은 멋진 영화라고 생각해요. 박 감독은 디테일에 철학에 연출에 모든 게 천재 ㅎㅎ
이 영화에 태주 역을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 애먹었다죠. 옥빈 배우 보는 순간 한눈에 결정했다고 해요.

2022-09-22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2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9-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김옥빈 여기서 진짜 연기 우와!! 했는데 그 다음엔 영화들이 다 ㅠㅠ 박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난데 프레이야님 해석을 읽으니 아.! 다시 한 번 봐야겠어요 ~

프레이야 2022-09-22 13:32   좋아요 1 | URL
옥빈 배우 이 영화 후에 음산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매력적인 배우로 각인된 것도 같은데 실제 성격이 화끈하고 밝은 것 같더라구요. 어린 나이에 참 과감하게 연기한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나이 들어보이게 연출하려고 했다죠. 파란 원피스 입은 자태도 멋집니다.
각본집도 알흠다워요 미니 님^^

바람돌이 2022-09-22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박쥐 보면서 저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배우들은 너무 연기를 잘하는데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안와닿던....
이렇게 프레이야님 글로 읽으니 영화를 다시 보면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겟다는 생각이 드네요.

프레이야 2022-09-22 19:25   좋아요 2 | URL
박 감독은 박쥐가 어렵다는 말은 인정 못하겠다고 했어요. ^^ 오히려 명확한 메시지라고 보여요. 좀 격한 장면에서 힘들 수 있는데 조금 거리두기 하여서 보면 괴상하게 웃기답니다 ㅎㅎ 너무 진지할 필요없이 농담하는 것 같이요. 다시 함 보시와요.

꼬마요정 2022-09-23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스달 연대기를 보고 김옥빈이 너무 좋아져서 박쥐를 봤어요. 김옥빈과 송강호의 연기가 너무 좋더라구요. 박쥐에 나오는 배우들 연기가 다들 뭐 신하균이랑 김해숙이랑 다 너무 좋았어요. 하얀 공간도 인상적이었구요. 테레즈 라캥을 읽은 뒤라서 그런지 이야기는 예측이 되니까 다른 면을 좀 보게 되긴 했어요. 상현은 신부였다 보니까 좀 갇힌 느낌이 있는데 태주는 뭔가 날것처럼 다시 태어난 것 같았어요. 멕베스 생각도 나고 죄의식이라는 게 그토록 삶을 옭아매는가 싶더라구요. 그리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욕망,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건 죄일까 잠시 생각했어요. 그 노신부님이 눈을 뜨고 원하는 풍경을 보고 싶어 뱀파이어로 만들어 달라할 때 역시 사람이란… 생각을 했죠. 마지막 장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프레이야 님 글을 보니 박쥐 영화 다시 보고 싶네요. ㅎㅎㅎ 너무 설명 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22-09-23 09:29   좋아요 1 | URL
아스달연대기를 못 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옥빈 배우 요즘 모습도 여유롭고 밝고 좋아보였어요. 에너지가 많고 재능도 많은 배우. 박쥐에서 정말 연기자들 최고였어요 역량을 끌어내는 감독도 대단하지만요. 노신부 역 박인환 배우도 섬뜩하더이다. 김해숙 눈 부릅뜬 연기가 그렇게 어려웠다죠
결핍을 채우려는 건 살아있음의 증거겠죠^^
거꾸로 읽어도 바로 읽어도 현상현, 이것도 재미난 이름이죠. 오늘 날씨 넘나 화창하네요.
꼬마요정 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육냥이들에게도 안냥~ 인사 전해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