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가 임승수 : 저술로 세상과 ‘맞짱뜨는’ 글치 공학도
임승수는 저술가로서 여러 방면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학부에선 전기공학, 대학원에선 반도체소자를 전공하고, 벤처 회사를 5년 동안 다녔다. 회사에 다닐 때 ‘양심적 직장인’이 되겠다며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2006년엔 진보 정치 활동에 전념하려고 회사를 관두고, 첫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냈다. 임승수는 이 책을 두고 “출판사 편집자가 거의 모든 문장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빨간펜으로 바로잡아 보내왔는데, 마치 북한의 혁명가극 <피바다> 같았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자본>좀 안다고 폼 잡으려고 낸 게 아닙니다. <자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목적 달성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문장이나 문체도 고민하지 않았죠. 제가 목적의식적으로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내 글엔 욕심이 없어요. 문장력이 달리고 글이 후즐근해도 <자본>만 이해시키면 되지 않나요. 거침없이 두려움없이 막 써요. 문학적 가치 같은 데는 심혈을 하나도 안 기울입니다.”
글 쓰는 태도, 지식을 대하는 태도에도 거침이 없다. 임승수는 지식을 하나의 ‘사치재’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영 못마땅하다. 그는 이런 지식인들이 누구나 그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가치가 높아지는 ‘사치재’를 소유함으로써 스스로 ‘격’이 올라간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학계에서는 대중서를 쓰는 것에 대해 전혀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죠. 지식을 배타적으로 소유해 기득권을 유지하던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식을 사치재로 여기고 그 사치재로 격이 높아진다고 믿는 건, 신과 배타적으로 접선할 수 있고 자신만이 전승지식을 가졌다고 자부한 ‘샤먼’의 현대 버전일 뿐입니다.”
그는 몇 가지 글쓰기 소신도 갖고 있다. 글은 무조건 ‘남’이 보라고 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는 것을 그저 써 내려가기만 해서는 ‘남’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소통이란 것이 그리 쉬웠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나의 문장을 쓰더라도 철저하게 독자 중심으로 써야 해요. 그리고 용감하게 써야 합니다.”
임승수는 ‘문장론’이나 ‘글쓰기 방법론’으로 글에 접근하지 않는다. 글은 도구일 뿐이다. 사고와 사상을 풀어내는 도구말이다. 세상을 진보시키고,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글은 꼭 필요한 도구다. 하지만 도구의 사용법보다도 ‘사고와 사상’ 그 자체가 더욱더 중요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솔직담백함, 겸양의 유머, 삶의 충실함 그리고 사랑은 저자 임승수를 더 강하게 만드는 요소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최고품으로 여긴다. 그러면서 로또 1등에 당첨돼 주변 물건들은 죄다 최고급품으로 바꿔도 책 쓰고 강의하는 삶은 바꾸지 않을 것이라 확언한다. 돈에 시간을 팔지 않으면서부터 행복해졌다는 임승수. 그에게 행복한 삶은 바로 ‘책 쓰기’다.
과학철학자 장대익 : 두 가지 렌즈로 세상을 보는 통섭 1세대.
허걱, 그러고보니 최재천 책은 읽어보았지만 장대익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이럴수가.
리처드 도킨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대익이 한국 사회에서 하는 역할은 도킨스가 서구 사회에서 하는 역할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는 종교와의 다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때 그는 포털 사이트에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려는 종교인들의 움직임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장대익은 창조과학의 억지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칼 포퍼, 토머스 쿤 등을 인용해 과학의 정의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 과학자들은 대체로 종교를 건드리지 않는다. 건드려봐야 시끄럽고, 어떻게 해도 결판나지 않을 싸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대익은 달랐다.
“피곤하죠. 하지만 저만이 할 수 있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지식인으로 살아감녀서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까요.”
장대익이 종교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그는 도킨스와 다르다. “종교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 틀립니다. 하지만 사회의 공동체성이나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도킨스는 종교를 박멸하자고 하지만, 장대익은 잘 길들이자고 주장한다. “종교가 그 자신의 증식을 위해 인간의 심신을 갈취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종교를 잘 순화시켜야 합니다.”
장대익은 지도교수였던 대니얼 데닛을 자신의 지적 우상으로 꼽는다. “데닛 교수는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최고의 인지철학자이며 용감한 지식인 운동가로, 과학과 철학, 문학, 예술 등 모든 지식을 동원해 화두를 풀고 소통하는 분입니다.”
진화심리학자 전중한 : 드라마, 예능을 소재로 진화를 이야기하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글을 잘 쓰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전중환은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에드워드 윌슨 같은 대중적 글쓰기에 능숙한 과학자들의 책을 자주 읽으면서 이들의 글쓰기를 따라 해야겠다고 노력했단다. 그러면서 대학 지도교수인 데이비드 버스에게 들은 조언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바로 ‘Vigorous writing is concise’ (힘 있는 글쓰기는 간결하다.)라는 말이다.
한국 대중에게 진화심리학은 많이 생소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진화심리학은 쉽게 말해 ‘인간의 마음이 곧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게끔 진화한 것도, 헤겔이 말한 절대이성을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고 디자인된 것도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디 수렵, 채집 환경에서 부패했거나 독이 있는 음식을 어떻게 피할 것인지, 잠자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게끔 만들어졌을 뿐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마음이 어떠한 목적을 수행하게끔 자연선택이 다듬어졌는지를 이해하면 사회현상이나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컨대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폭력적인데, 기존의 과학은 흔히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어서 그렇다는, ‘어떻게’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진화심리학은 왜 하필 남성에게 테스토스테론이 더 많이 분비되어 여성보다 더 폭력적인지, 왜 여성에게 테스토스테론이 더 많이 분비되는 현실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는지 하면서 ‘왜’를 설명한다.
그는 현재 권력을 진화심리학 연구 대상에 올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예컨대 2013년 5월 당시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파문이 커졌을 때 이남기 홍보수석은 긴급 브리핑을 갖고 “국민 여러분과 대통령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에 전중환은 <한겨레>칼럼에 이런 말을 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먼저 배려하고 피해자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원칙은, 남성과 여성의 마음은 다르다는 진화적 인식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왜 청와대 홍보수석이 피해자는 제쳐두고 대통령에게 먼저 사과했는지는 진화의 미스터리다.”
문학평론가 정여울 : 삶의 모든 문학적인 순간을 포착하라.
세월호 이후, <성난얼굴로 돌아보라>의 기라성 같은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나는 정여울의 글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그때부터 정여울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읽는다.
무엇보다 정여울은 글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내용이 있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해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의 도구일 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지고지순한 목적은 아니다. ’글을 쓰면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게을리하면, 그 순간 글쓰기는 그 자체로 맹목적인 행위가 되어버릴 위험이 크다. 글이 막히는 이유는 쓸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글 쓰는 과정에서 막힐 때도 있다. 그럴 때 그녀는 글을 오래오래 포기하지 않고 쓰기 위해 스스로를 즐겁게 해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 글만 다 쓰면 영화 보러 가야지’하는 식으로 글을 다 쓰고 나면 스스로에게 상을 줬는데, 지금은 포상 먼저 주고 글은 나중에 쓰는 무리수를 두고 있어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막혔던 글쓰기가 풀여요.”
이처럼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다른 일에 몰두하고 나면, 막혔던 생각의 물꼬가 터진단다. 마찬가지로 조금 거리가 있는 분야의 논문을 읽거나, 엉뚱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여성학자, 평화학연구자 정희진 : 주류적 시각을 거부하는 ‘소수자’를 위한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는 ‘주류적 시각으로부터의 탈피’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울, 남성,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등의 정체성이 지배하는 한국 주류 사회의 관점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글쓰기다. 그의 글이 한편으로 낯설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희진은 ‘빤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빤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그는 소재가 떠오르면 첫 번째로 그 소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들을 노트에 목록으로 만들어둔다. 예컨대 글의 소재가 복지라면 ‘복지가 늘면 게을러진다’, ‘복지가 늘어나면 성장이 둔화된다’같은 말들을 적어놓는다. 그런 다음 통념적인 생각들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세 번째로 자신이 몰랐던 것에 대해 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는 글은 낭비라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배우거나 내가 변화할 수 있어야 해요. 이미 아는 걸 쓰면 글이 진부해져요. 그래서 저도 한국 사회의 통념이나 기존의 논쟁 구도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는 몰상식한 보수를 혐오하는 꼭 그만큼, 관성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진보도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평화주의자가 징병제에 반대하면서 모병제를 대안으로 내세운다면, 정희진은 징병제에도 반대하지만 똑같이 모병제에도 반대한다. 실제로 그는 차라리 징병제가 낫다고 보는 쪽이다. 모병제를 시행할 경우 오히려 하위 계층 젊은이들을 군대에 격리시키는 제도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쓰면서 배워요. 쓰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죠. 애초의 생각이나 기존에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 곧 글쓰기예요. 이때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새롭고 생소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사실이에요. 아는 것을 쓰면 망해요.”
글이 막히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생각의 출발 자체가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때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 측면에서 글쓰기는 곧 ‘생각’이라는 것이 정희진의 지론이다.
정희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며 대중에 영합하지 않는, 스스로 고통과 혼란 속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어빈 얄롬, 앤드류 솔로몬, 올리버 색스, 후지타 쇼조, 도미야마 이치로, 이동진, 초기 조갑제, 장정일, 최승자, 노희경, 나혜석, 김혜리, 정성일, 허문영, 정한석, 프리모 레비, 카렌 암스트롱, 프로이트, 주디스 버틀러, 도나 해러웨이 등이 그가 좋아하는 저자 가운데 일부다.
“일하지 않고 예술만 즐기고 싶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열 받지 않아도 되는’ 영화와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름다움만 소비하고 싶다.”
대개 독자는 저자 입장에서 읽기 마련이다. 정희진은 그런 독서를 배격한다. 그는 저자의 생각과 대결하기 위해 읽는다. 매순간 독자와 저자와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그가 책을 통해 어떤 생각을 했는가이다.
철학자 진태원 : 오역 때문에 철학자를 탓하는 현실을 바로잡다.
진태원이 공격적 비평을 하는 이유도 제대로 된 번역 텍스트를 읽고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역이 많은 번역본을 읽으면 ‘이게 무슨 철학자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같은 반응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가 가장 큰 문제라 여기는 부분이다. 철학자의 문제라기보다 오역 문제인데도 철학자를 탓하는 현실을 바로잡고 싶었다.
20년 중 7년 가까운 시간을 발리바르 번역에 매달린 것을 두고 인문학자 고병권도 매우 인상적으로 바라봤다. “한 사람을 번역하는 데 6~7년을 매달리는 진태원 선생의 공부를 보면서 천천히, 묵묵히 갈 길을 걸어가는 게 급진적 근본적으로 혁명을 이루는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혁명은 빠른 발걸음이 아니라 단호한 발걸음이죠.”
책을 쓸 때는 주제부터 분명히 정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러한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지 방법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 일을 할 만한 능력이나 시간이 되는지도 따져봐야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업이 자신에게 가치 있고 보람되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냥 돈이나 좀 벌어보자, 이름이나 내보자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교양 대중이나 다른 연구자들에게 동움이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한다는 목표, 또는 새로운 지적 탐구의 장을 열어본다는 태도를 가져야 좀 더 진지하게 전력을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데리다의 사회정치 철학도 그에게는 좋은 사유의 대상이다.
“데리다의 사회정치 철학은 ‘혁명 이후’, ‘해방 이후’를 지향합니다. 혁명이나 해방 같은 급진적 정치 운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혁명과 해방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데리다는 묻고 있죠. 혁명과 해방을 이루면 전복한 것들을 지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적들, 즉 혁명과 해방 이전 지배자들이 행했던 폭력과 똑같은 폭력을 가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해요. 해방, 혁명이란 것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회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혁명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새로운 지배자를 세우는 일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데리다 철학이 묻는 질문입니다. 저한테도 굉장히 중요한 화두지요.”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서발턴 역사학을 주도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나 파르타 차테르지도 훌륭한 작가로 꼽는다.
“이 사람들은 역사가임에도 철학이나 이론에 조예가 아주 깊죠. 이들은 서양 철학이나 현대 인문학 인물들을 광범위하게 논의하면서도 늘 인도의 구체적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인도 역사에 관한 서사나 사회학적 분석, 또는 인도에 관한 문학작품을 원용하여, 인도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서양 철학이나 이론을 새롭게 평가하고 재구성합니다. 추상적인 이론이나 개념만을 논의하기 쉬운 저 같은 철학도에게는 귀감이 되는 글쓰기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사는 게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내 삶, 학문의 가장 큰 기준입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 정신분석에서 대중문화까지 아우르는 ‘매체중독자’
하지현이 가장 닮고 싶은 논픽션 작가는 김용석 영산대 교수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되 대중문화와 우리 사회를 소재로 깊이와 넓이를 모두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는 김용석의 글에서 ‘이종격투기적 글쓰기’를 배웠다고 했다....복싱 선수라도 때론 발차기를 해야 하고, 레슬링 선수라도 펀치를 날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점에 어떤 테크닉을 쓸지 정확하게 아는 일이다. 물론 선수마다 주종목은 있겠지만, 그것 외에 나머지 종목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 하지현은 ‘입식타격 하는 사람과 그라운드 기술을 쓰는 사람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책들이 재미있고 그런 책을 지향한다.
책을 구입하는 기준은 세 가지다. 일명 ‘333원칙’으로 30퍼센트는 전공과 관련해 공부가 될 책, 30퍼센트는 책을 쓰는 데 도움이 될 책, 30퍼센트는 개인적 흥미와 즐거움을 위한 책이다. 책을 구매할 때 이 세 가지가 골고루 섞이도록 안배한다. 그래야 질리지 않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처음 쓰는 사람에게는 다음 세 가지를 조언한다. 먼저 15장 분량으로 서문을 써보는 것이다. 책을 왜 쓰려고 하는지 스스로 정리가 된다. 두 번째는 비슷한 책을 참고하면서 22~25개 정도의 세부 목차를 작성하는 것이다. 과연 자신이 한 권의 책을 쓸 만한 거리를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감을 잡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재미있을 챕터를 실제로 써보는 것이다. 자신이 글발이 있는지 없는지, 공저가 필요한 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가능하면 제목까지 정해보는 것이 좋다. 제목 자체가 책의 콘셉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현은 일본의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자신의 책상 앞에 붙여둔 메모를 기억해냈다. ‘어려운 것은 쉽게, 쉬운 것은 깊게, 깊은 것은 유쾌하게’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저마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마련이에요. 미래에 대해 미리 10가지 이상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최악이 아닌 것만 확인하면 돼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고 최악을 피하면 돼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가 가장 재미있는 거예요.”
칼럼니스트 한윤형 : 청년 세대의 ‘웃픈’ 처지를 항변하다.
한윤형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될 만한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대와 <조선일보>가 주최한 논술경시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은 그는, 당시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임을 밝히며 <조선일보>의 인터뷰를 거절할 정도로 ‘발칙’했다. 2001년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간 뒤 안티조선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고 민주노동당원이 되어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집필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책은 <안티조선운동사>다. 팔릴 책도 아니면서 원고량이 2,200장에 육박했다. 원고지 600장을 썼는데도 진중권이 등장하지 않아 초반부터 지쳤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사장될 수 있겠다는 다급한 마음과, 우리 사회의 굉장히 중요한 순간을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어우러졌다. 하지만 책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2008년 촛불’이 지난 후 세상에 나왔다.
“ 제 글이 정서적 글쓰기는 아니라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판단하는 편입니다. 어떤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면 기사든 칼럼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봅니다. 그 가운데 나를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는 글이 있으면 똑같은 주제로 글을 쓰지 않아요.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없을 때 글을 씁니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