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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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창 들뢰즈 원전 스터디를 할 때였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다는 흉흉한소문이 돌았다. 멤버 중 한 명이 갔다 왔다고 했다. ‘수유너머라고 했다. “수유리에 있는 거야? 저 잘났다는 사람들끼리 모여 오래 가겠나?”하며 피식 비웃는 척 했지만 속으론 몹시 부러웠고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이 책을 보고서야 수유너머가 해체됐다는 걸 알았다. 고병권의 말대로 수유의 해체를 부끄러워하기 보단 수유가 1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역량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라. 수유라는 이름은 없어졌지만 수유는 우리에게 꽤나 성실하고 유능한인문학자를 선물로 주었다. 고병권, 고미숙, 이진경, 등등.

 

어느 날 철학자 탈레스는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하녀가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고병권은 하녀를 가난한 사람의 기표로 차용한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철학자와 가난한 사람의 변증법적 일깨움을 모색한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 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정여울이 인용한 윗 문장 때문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가볍게 읽으려했으나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었다.

 

곁에 있어줌의 존재론

 

며칠 후 한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 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글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힘든 사람 옆에서 위로한답시고 누가 봐도 현명한 소릴 하느니 차라리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게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 ~’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라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초조함은 죄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 카프카, <,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

 

고병권은 신화 속의 인물들의 예를 들어 그들의 비극이 초조함에서 연유되었다고 말한다. 아크리시오스 왕은 페르세우스의 원반에 맞아 죽고,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칼에 죽는다.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정권들의 초조함도 흔히 몰락을 자초한다. 부마사태가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는 초조했다. 부산, 마산 시민 백 만명 정도 죽이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던 차지철의 계획을 듣고서야 마음이 흡족했다. 오늘날 청와대, 집권 여당, 검찰, 경찰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다. 온갖 SNS, 카톡을 훔쳐보거나 언로에 재갈을 물리고, 경찰들은 부자감세로 부족해진 세수를 메꾸기 위해 지금 이순간도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병실에 누워 죽어가는 국민이 숨을 쉬건 말건 목젖을 찌를 만큼 우리들 입속에 음주 측정기를 쑤셔 박는다. 수치가 안 나온다고? 나올 때까지 불게 하면 된다. (죽으면 좆 되는데. 실적 쾅 인데, 하긴 호갱들이야 널렸으니)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위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피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스스로가 초조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달 카드 값은 막을 수 있을까, 월세는 낼 수 있을까매일 이런 일차원적인 고민만을 하고 있으니 초조하지 않을 리가 없다. 초조함을 지울 순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이상 조금 덜 초조해하지 않을까

 

갈림길과 막다른 길

 

루쉰이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제자 쉬광핑은 군벌과 결탈한 총장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의 대표였다. 쉬광핑은 스승이자 후에 연인이 될 루쉰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루신은 자신 역시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므로 백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고백한 후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철학을 참고하라고 말한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난관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묵적(묵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리띠로 몸을 묶어서 설령 그대로 죽는다 해도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그러면 별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가야지요. 온통 가시덤불로 뒤덮여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군요.”

 

- 루쉰, <루쉰의 편지>

 

고병권의 충고 : 그러니 당신이 길을 걷다가 난관에 봉착했다면 한숨 자는 것도 괜찮다. 애초에 먼 길을 갈 것이라고,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면 말이다.

 

수익모델로서의 인간 수용소

 

나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교도소가 민영화되었다는 걸 알았다. 1983년에서 세워진 미국 최대의 민영교도소가 된 미국교정기업CCA, Correctinons Corporation of America1990대 후반 뉴욕 증권시장에서 수익률이 가장 높은 미국 5대 기업에 3년 연속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펜실베니아 주에선 두 명의 판사가 소년 교도소인 피에이 차일드 케어로부터 260만 달러의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두 판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교장을 놀렸다는 이유로 소년을 1년 넘게 소년원에 수감시켰다. 빈 건물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혹은 월마트에서 시디 한 장 훔쳤다는 이유로 소년들은 장기 수감되었다.


신자유주의 정권은 법치를 강조한다. 한국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아무 관련성이 없다. 법치란 법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다스려짐을 뜻한다. ‘형제 복지원은 신자유주의라는 옷을 입고 이 땅에서 민영교도소로 부활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보곤 치를 떨었다. 신자유주의가 진리라 주장하는 자본가와 집권여당, , 검사의 이익이 맞아떨어진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에선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이외에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나처럼 이 책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런지도.

 

 

광기의 반대말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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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10-1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 위 인용문이 고병권 씨의 것 맞는가요? 저한테는 무척이나 공허하게 들립니다. 우물 안에서 홀로 수도하는 유사 현자 혹은 진지병 환자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고병권 씨가 실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전반적으로 한국 지식인들의 얘기는 모두 공허하고 영양가 없는 빈소리 혹은 빈말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지금 21세기 백주대낮인데요. 아직도 저런 공염불식 철학으로 대중들을 가르치려 드는 한국형 철학자들, 정말 한심스럽고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따지고 보면 공자왈 맹자왈 철학의 반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영원한 고전, 인간 사고의 원형, 기본 중의 기본인 공자왈 맹자왈에 끊임없이 회귀하고 자문해야 하겠지만, 그건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 파악과 미래에 대한 투시/전망이 주가 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물 안에서 아무리 통찰적이고 수준 높은 담론을 읊어봤자, 말짱 소용없다고 봅니다. 지금 21세기 인터넷 혁명 시대는 전지구적으로 모든 것이 공개/공유/토론과 논쟁의 장에 ‘부쳐지는’ 시대입니다. 우리 학자들의 저작들이 영어로 ‘쓰여지거나’ 번역되거나 출간되는 사례가 과연 있는가요? 그런 사례는 몇몇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완전 제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지식인들이 우물 속에 갇혀 혼자만의 담론을 읊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철학 분야 세계 유수의 학술지들을 살펴보면 한국 학자들의 논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가뭄에 콩보다 찾기 어렵습니다. 철저하게 우물 속에서 나홀로 철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나마 나홀로 철학이라도 하면 다행일 것입니다. 한국 학자, 지식인,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음주가무나 주색잡기, 권력놀음이 대다수 한국인들한테는 적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쪽 방면이 예술 분야하고는 그래도 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해서 한국이 문학 쪽에선 (언젠가라도) 노벨상 하나쯤은 기대함 직하다고 봐요~

시이소오 2016-10-13 13:04   좋아요 0 | URL
퀼리아님, 비판에 동의합니다. 그래도 고병권씨는 현장을 바탕으로 철학하시는분인데 ^^

마립간 2016-10-1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비유 ; 그 뜻은 알겠는데, ... 마치 기독교의 믿음(로마서 3:28, 5:1 과 갈라디아서 3:24)과 행위(야고보서 2:24)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버이날 부모님이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 ; `마음`만이라는 것이라 하더군요.

시이소오 2016-10-13 13:05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지장보살보다 좋은건 그저 지폐겠네요. 지폐보살 ㅎ ㅎ

고양이라디오 2016-10-13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미국의 교도소 민영화이야기는 충격이네요...

시이소오님 항상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10-13 23:23   좋아요 1 | URL
한국도 이미 민영화 교도소가 있다네요. 이 책읽고 찾아보니. 헐

저도 고양이라디오님 리뷰에 항상 감사드려요^^

고양이라디오 2016-10-13 23:31   좋아요 0 | URL
신자유주의의 힘은 정말 무섭네요...
서글프네요ㅠ 무력감을 느낍니다.

시이소오 2016-10-13 23:37   좋아요 1 | URL
지금이라도 민영화 추진하는 정권은 퇴출시켜야 겠죠. 안그러면 오바마 이전 미국처럼 돈없는 환자들 병원앞에 버리는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질수도 있거든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