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평점 :
유리병에 든 편지는 언젠가 익명의 수신자에게 도래하기 마련이다. 에리히 프롬이 37년에 쓴 글이라는데, 이 글은 지금의 나를 위해 쓴 게 아닐까, 하는 미친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또 다시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백수로 살아가다보면 기어코 다다르게 되는 종착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민주는 논외로 하고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돈을 안 벌 자유는 없다. 소비할 자유는 있겠지. 돈이라는 사슬에 묶여 사는 삶이 자유인가?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P61)
무기력에 빠진 나에겐 자유가 없다. 자유롭기 위해선 열정을 되찾아야만 한다. 책에는 여러 신경증 환자들의 사례가 제시된다. 몰랐다. 프롬이 정신과 의사인줄은. 프롬이 신경증 환자를 분석하면서 열거한 ‘무력감의 합리화’ 중 ‘위로의 합리화’ 부분에서 마치 속마음을 들킨듯하여 깜짝 놀랐다.
“이런 위로의 합리화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형태는 기적에 대한 믿음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외부에서 온 어떤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자신의 무기력이 사라지고 성공, 능력, 권력, 행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이룰 것이라는 상상이다. ......위안을 주는 이 모든 상상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은 원하는 성공을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외부의 힘이나 상태가 갑자기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것이다.
.... 시간에 대한 믿음에서는 ‘갑작스러운 변화(변화의 돌연성)’라는 요소가 부재한다. 그 대신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갈등에 대해서도 직접 결단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P162)“
어떻게 이렇게 족집게처럼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시간이 흘러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적을 바란 거지.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 –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 –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용기, 즉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갈 용기다.“ (P203)
무기력에 대한 처방으로 프롬은 용기를 말한다.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에 따르면 아들러 역시 용기를 강조했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을 땐 고개만 끄덕였을 뿐, 눈곱만큼의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친구 ‘용기’와 술을 마셨넹. )
두 번 다시 우연에 기대지 않겠다. 기적을 포기하겠다. 오로지 내 힘만으로 이 위기를 헤쳐나갈 것이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