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편한 나라가 없지."
엄마는 무슨 근거에서인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권 두 권에 더 이상 도장 찍힐 자리가 없이
구두 뒤축이 닳도록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 다니면서
이 말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말은 이렇게 정정되어야 한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 어디를 가든 살기 불편한 나라가 없지."

그렇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 어디를 가든 살기 불편한 나라가 없다.
돈만 있으면.
문제는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돈을 욕망하는 사람은 넘쳐 난다는 것 뿐.

오늘 아침, 게이트가 세 개 밖에 없는 조그마한 HILVERSUM역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아니라
이 세상 자본주의의 끝에 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추적추적, 칙칙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날이 추운 건지 마음이 허한건지 사람들은 벌써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나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무당이 칼 위를 걷듯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 곳에는 "꽃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서울 곳곳에 널린 무수한 편의점처럼 수많은 자판기를 봐왔다.
커피부터 컵라면, 생리대, 콘돔까지 안 파는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 자동판매기"는 처음 봤다.
A,B는 10유로, C,D는 6.5유로.
A에서 D까지 네 칸으로 나뉘어진 자판기에는
번호를 단 꽃들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난 촌스럽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꽃들을 구경했다.
마침 오늘 미팅이 있었던 거래선의 구매 담당자 Sjoerd가
지난주에 아빠가 되었다고 자랑했던 게 생각났다.
축하도 할 겸, 자판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꽃을 사기로 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자판기를 쳐다 보다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선택했다.
번호는 A21.
오른손 검지로 A21을 꾹꾹 눌렀다.
LCD창에 Euro10을 넣으라는 문장이 오락실의
"insert coin to continue" 처럼 툭 튀어 나왔다.

시키는 대로 10유로 한 장을 넣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것처럼 비~잉 소리가 나더니
캔 자판기에 콜라가 툭 떨어지듯이 장미꽃 한 다발이 떨어졌다.
냉장 보관한 싱싱한 장미꽃 다발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난 수고스럽게 장미 다발을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싱싱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한 장미 다발을 들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꽃도 자판기로 사다니... 정말 신기한 세상이구나!
동시에 번호표를 달고 홍등가 쇼윈도에 앉아 있는 여자들이 떠올라 어지러웠다.
뭐든 번호로 선택하는 세상!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정말 그런가....
유치한 회의가 불쑥 튀어 올랐다.

"회장님을 존경해요."라고 당당하게 인터뷰를 하고
늙다리 재벌회장이랑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뇌를 뜯어 본다면,
CF 하나 찍어도 몇 억씩 벌면서 애 딸린 이혼남 재벌 2세랑 결혼하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연자 연예인들의 뇌를 해부해 본다면,
쓰레기 버리듯 자신의 일을 사전 통보 없이 때려 치고 결혼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아름답고도 명석한 두뇌를 분석해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자판기에서 산 꽃을 선물하고
피자헛에서 시킨 피자를 사이 좋게 나눠 먹고
들어오는 길에 자판기에서 뽑은 콘돔을 착용하고 사랑을 나눌 연인들이 떠올랐다.

아....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자판기의 꽃들이 빙빙 돌아가듯
내가 서 있는 세상도 빙빙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허접한 감상을 써 내려가며
맥주를 두 잔 마셨더니 머리도 빙빙 돈다. 맴맴.

난 어디에 있는 걸까?
When will I accept where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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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6-09-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20대였을 때, 엄마가 '너는 세상 어디에 떨어트려놔도 잘 살거야'라고 몇번이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생각했죠. 응, 그런데 현금으로 가득한 지갑과 신용카드도 같이 떨어트려줘야하는데.

이리스 2006-09-2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을 자판기로 팔다니 -.- 낭만이 없네 낭만이. 돈만 있으면 남극에서도 편하게 살 수 있는거야? 그런거야? ㅎㅎㅎ
언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구 일단 현재를 즐기셈!!

마늘빵 2006-09-2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낭만이 없네. 이런건 이렇게 하면 안돼요. -_-

로드무비 2006-09-20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페이퍼로 보여주셨던 그림이 생각납니다.
저 영문 문구가 적혀 있던.......
지금 수선님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고
곧 말씀하실 거예요.^^

코마개 2006-09-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예요. 좋은 곳에 가 계시는군요. 부러워라
저도 그 아나운서, 다른건 관심없는데 어떻게 직장인이 저렇게 '나 그만둬'그러면서 그만둘 수 있는지 놀라웠어요. 그래서 다른 선량한 여자들을 욕먹이는 거라구요. '여자들은 결혼하면 다 그만이야'그럼서...

끼사스 2006-09-2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신 곳에서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가면 드디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펼쳐지는 것 아닐까요? ^^

2006-09-23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10-0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꽃자동판매기라니. ^^; 정말 신기하네요. 힘내세요. 술이나 한 잔 해요.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