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미니 회식"을 했다.
※ 미니 회식 : 전원이 모이는 공식 회식은 아니지만, 불참하기엔 약간의 의무감이 느껴지는 자리.할 일 없는 S과장이 지어낸 말임.

삼겹살을 먹고(맨날 다이어트, 다이어트 하면서 미친 듯이 먹었다. "처음처럼" 도 정말...처음 마셔 본 것처럼 많이 마셨다.), 맥주나 한잔 더 하자며 호프집에 갔다.

인원은 다섯 명이었다.
상무님, K차장, K과장, S과장, 이제 막 신입사원 딱지를 뗀 2년차 사원 Y.

원래 맥주 한 병씩만 가볍게 마실 생각이었기 때문에 곧 끝날지 알았는데
얘기가 길어지고, 그래서 한병 더 시키고,
얘기가 길어지고, 그래서 또 한병 시키고 하다보니
꽤 오래 있게 되었다.

Y는 예상 외로 시간이 길어지자 초조하게 시계를 봤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친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며...
※ Y의 여친은 회식할 때 마다 데리러 온다.

그런데....곧 끝날 것 같은 분위기에서
화장실에 갔는지 알았던 Y가 여친을 데리고 들어왔다.
Y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씩씩하게 말했다.
" 상무님, 제 여자친굽니다."

난 순간....짜증이 났다.
Y의 여친은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상무님도 계신데 신입사원이 여친을 데리고 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수직사회에 익숙해졌나?
내가 이상한 건지, Y가 대담한 건지....

밖에서 여친이나 남친이 기다리고 있는데
회식이 곧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 길어지는 상황.
아주 흔하디 흔한 일이다.
물론....나도 겪어 봤다. 옛날 얘기지만...

이런 경우에 난

1. "회식이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 안 끝나.
미안한데 좀 더 기다려 줘. 미안미안!"
이렇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고, 회식이 끝나고 나간다.
2. "회식이 이상하게 길어지네.
미안해,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정말 미안해서 먼저 가라고 하지만(빈 말 아님), 대부분 기다린다.
3. 화장실 가는 척 슬쩍 사라져 도망간다.

1~3 중 하나의 방법으로 대처했다.
Y가 택한 "기다리지 말고 들어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난 Y처럼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날 잡고, 결혼식장까지 예약한 Y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친을 소개하고 싶어한다.
만약 나도 그런 "확실한" 상황이었다면 Y처럼 "자기야, 기다리지 말고 들어와!" 그랬을까?
음....겪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어제 Y가 여친을 데리고 들어 왔을 때는 그닥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거의 파장 분위기였는데
"new face"가 등장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과일 안주도 하나 시키고,
돌아가면서 Y의 여친에게 뻔한 질문도 하고 하는 썰렁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 지금 박사과정이라고 하던데, 전공이 뭐예요? "
" 논문만 쓰면 된다구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
" 집은 어디예요? " 등등.

나도 말을 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및 부담감에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아...한참 어린 후배의 여친까지 접대해야 하나....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제는 두 사람의 우여곡절 "결혼 성공기"로 이어졌다.
처음에 반대하던 여친 아버지께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신나서 침이 튀게 말을 하는 Y를 보면서 슬금슬금 짜증이 났다.

K차장이 말했다.
" 성과장은 언제 보여주실 꺼예요? 그런 날 빨리 오길 바래요."

오늘 아침, 친한 Bruce 과장한테 어제 기분 안 좋았었다고 얘기했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 좋아 죽겠다는데 어쩝니까? 우리가 이해해야죠.
성과장님이 기분 안 좋은거 티 내면,
오히려 성과장님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거 아시죠? 허허허"

무슨 말인가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렇게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제 일에 짜증내는걸
"노.처.녀의 히스테리"로 주변에서는 받아 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아......
아......
막 억울하고 그런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절대 기분 나쁜 티를 내면 안되겠다.

그런데....
설마 내가...
어제 짜증났던 게....진짜 그런 이윤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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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4-27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직 사회물을 덜 먹은건가요... 제 또래지 싶은 Y가 귀여워 보이는데요.
여자친구 손 잡고 술집 문 다시 열 때, 많이 떨렸을 거에요.
속 넓은 누나니깐 그 밝은 얼굴 보고 구여운 것. 하고 그냥 한 번 웃어주세요.
한 발자욱만 물러서면 뭐. 구엽잖수. 맘넓은 수선누나 화이팅 ㅎㅎ

2006-04-27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4-2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츠녀의 히스테리 맞아요, 수선님.=3=3=3

사실 저 상황은 저도 잘 이해 안되네요.
수선님과 비슷한 마음.^^

드팀전 2006-04-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의 여자친구가 와서 회식이 길어진게 열받겠네요.전 회식하면 앉을때 부터 갈 생각만 하는 -그래서 가끔 술 취한 부장에게 상당히 기분나쁜 소리도 듣는-그런 사람이라서 여자를 데려오던 어머니를 데려오던 상관은 없는데 파장 나는 분위기에 다시 시작이라니..이건 좀 짜증나죠...전 그럴때 이래요..."자...여자친구도 왔구.제가 폭탄주를 한 잔 드리고 저두 쭈욱 먹고....저 먼저 나갈께요."

릴케 현상 2006-04-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번 맘에 드네여^^ 파장인데, 다시 시작하는 거 정말 싫죠~소개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지만

코마개 2006-04-2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저는 그냥 이뻐보이는데. 저 같은 경우는 "어머 어서와요~~"그럼서 막 먹이는데요. 별로 경우 없어 보이지도 않고...나만 그런가?
그런데 회식때 마다 와서 기다리는건 좀 엽기네요. 미저리가 연상됩니다.

플레져 2006-04-2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친을 무지 소개하고 싶었나봐요. 남자건 여자건 확신있는 사람만 소개하게 되니까^^ 결혼전에 저도 남편 회사 회식자리에 본의아니게 낀 적 있어요. 고맙게도 저한테 많은 질문을 안해서 편했습니다 ㅎㅎ 저라면, 밖에서 기다리는 거 안해요. 그냥 회식해라, 다음에 만나자! 미래를 위해선 이 방법이 더 좋지 않을까요? 결혼 후에도 그런 일 생기면?? 으... 암튼, 수선님,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예민한 사람 취급당하면 엄청 골치아파져요.

kleinsusun 2006-04-2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야, 난....밴뎅이 속인가봐.ㅎㅎㅎ
맞어, 마음을 넓게 가지고, 귀여워 해야지.^^

속삭이신님, 이해해 주시는군요. 오늘 그 후배 보니깐 괜히 미안하더라구요.ㅎㅎㅎ

로드무비님, 노츠녀의 히스테리 맞는거예욤? 우째.... ㅎㅎㅎ

드팀전님, 어제 Y의 여친은 차를 가지고 와서 술도 한 방울도 안마셨어요.괜히 과일 안주를 시켜서 또 제가 먹고 말았다는...ㅎㅎㅎ

kleinsusun 2006-04-27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3번은 제가 자주 하는거예욤. ㅎㅎ 님도 잘 하시나요?

강쥐님, Y의 여친은 거의 맨날 회사 앞으로 와서 Y를 태워가요.
어쩔 땐 Y랑 같은 동네에 사는 회사 사람들까지 다 태워다 주는 모범운전사랍니다.ㅎㅎ 지극정성이죠?

플레져님, 저요...이미 "예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요.ㅠㅠ

다락방 2006-04-2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말이죠.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기보다 참게되요. 주변에서 노처녀히스테리 라고 할까봐.
그말을 듣기는 또 어찌나 싫은지요.
정말 싫다, 이런 현실이. 그쵸?

kleinsusun 2006-04-28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다락방님이 제 맘을 아시는구나.....^^
나름대로 "정당하게" 화를 낼 사유가 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말했다가 오히려 귀찮은 일이 생길까...해서 차라리 침묵하자...는 마음.ㅎㅎㅎ

그런데요...오늘을 견디면 3일 연휴예요. Let's be happy!

2006-04-28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6-04-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전 남자고 애인도 있지만, 공감이 많이 갑니다. ^^;;

kleinsusun 2006-04-29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ㅎ

2006-04-29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