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때, 친하게 지내던 선배 언니가 결혼을 했다.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냐는 질문에,
제주도 OO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푹 쉴꺼라고 했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난 이렇게 말했다.
" 제주도? 그럼 차라리 서로 운전하면서 전국일주를 한번 하지 그래? "

아...그 언니의 황당한 눈빛이 아직도 생각난다.또렷하게.
" 야...무슨 사서 고생할 일이 있냐? 신혼여행이 무슨 극기 훈련이냐?"
언니는 기가 막힌 듯 날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오늘 오랜만에 일찍 들어와서 엄마가 애청하는 일일드라마를 같이 봤다.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KBS 1TV 일일 드라마의 특징.
너무나 "건전(?)"하고 시청자를 선도 또는 계몽하려 한다.

어쨌거나 이제 막 결혼한 드라마 속 커플의 신혼여행은?
둘이 핑크색 커플 티를 입고,
자전거엔 풍선을 가득 달고,
커다란 배낭을 매고,
자전거 전국일주를 떠났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흥분하며 말했다.
" 저게 무슨 신혼여행이야? 고생을 사서 하는구만."

그 커플이 신나서,좋아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 야~ 너무 좋다!!" 소리 지를 때,
난 신입사원 때 선배언니가 날 쳐다보던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헉....돈 주고 하라 그래도 못하겠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노래처럼 나도 변했나 보다.

그렇게 무거운 배낭을 매고,
매일매일 바뀌는 숙소에 짐을 풀고 싸고 하면서 강행군을 하는 여행.

지금은 할 자신이 없다.
솔직히....하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서울에 있는 호텔에 며칠 틀혀박혀 쉬고 싶다.
늦잠 자고, 게으름 떨고, 느긋하게 한잔 하고 하면서...

작년 여름인가?
20~22살 어린 후배들이 금요일 밤에 동해에 놀러 간다고 했다.

애들의 일정을 듣고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금요일 밤차를 타고 토요일 새벽에 도착.
하루 종일 돌아 다니고, 해수욕 하고 놀다가
토요일 밤은 젤로 싼 민박에서 자고,
일요일 오후에 해수욕 한번 더하고 저녁에 올라 온다고 했다.

그들의 강철체력과 힘들게 놀아도 그저 좋기만 한 그 혈기왕성함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 너 그때로 돌아 가고 싶니? 그때로 보내줄까?" 하고
산신령님 또는 요정이 뿅하고 나타나서 묻는다면
선뜻 대답을 못하겠다.

너무도...편안한 것들에 익숙해 졌다.
작은 불편함도 견디지 못한다.

2년 전 여름에는 작은 사찰로 명상수련을 갔다가
열악한 시설과 커피/콜라 금단현상을 극복하지 못해 3일만에 뛰쳐 나왔다.
탈출한 날 저녁에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와 콜라, 파스타에 디저트까지 실컷 먹었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너 왜 이렇게 변했니?
너 왜 그렇게 작은 불편함도 못견디니?"
하고 스스로를 다구치고 싶지 않다. 괴롭히고 싶지 않다.
그저 좀...편하고 싶다.

신혼여행을 간다면,
좀 비싸도 한적한, 조용한 리조트로 가고 싶다.
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세상에서 젤로 게으르게 뒹굴뒹굴하다 왔으면 좋겠다.

언젠가....지금은 내게 없는 "치기 어린 열정"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제는 할 수 없는, 또 하고 싶지 않은 가난한 여행에 대한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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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0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혼여행은 극기여행이 아니라는데 동감해요. 이십대 초반에 결혼한다면 또 모를까. 한가한 리조트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서로 대화하는게 최상이 아닐까요. ^^

이매지 2006-04-0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살임에도 전 벌써 혈기왕성함을 잃었습니다. 쩝. 그냥 점점 더 정적인게 좋아져요

코마개 2006-04-0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신혼여행은 전국일주 이런거 하면 죽습니다. 그 전에 이미 진을 다 빼놓아 버렸기 때문에. 전 돈 없이 하는 여행도 잘하고, 더러운 것도 잘 참고, 더러운 식당에서 밥도 잘먹고...다 잘하는데 딱 하나. 욕실이 공용이건 개인이건 깨끗해 주기만 하면 ok.
그런데 한겨레 21에 수선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필자의 글이 있는데, '휴가'그러면 피피, 리조트, 발맛사지, 스파...이런 것만 온통 머리에 떠오른다며 나도 늙었다고 자학하더군요.

로드무비 2006-04-06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부터 비데 없는 곳에 가서 하룻밤 자는 것도
불편해졌어요.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구호활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봉사 내용을 떠나서 개인적인 불편함을 감수한
그의 구체적인 실천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집니다.
수선님, 그래도 너무 단정적으로 말할 건 없어요.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니까요.^^

드팀전 2006-04-0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날 꽃 색깔이 한 빛이 아니듯이 여행의 목적과 방법 역시 하나이진 않겠지요,저도 어제 그 드라마 보면서....웃긴다고 했어요.자전거 타는 씬은 내리막길 이데요.차도 하나도 없고...자전거로 오르막길 올라보삼...신혼은 무슨 신혼...그리고 자전가 오래타면 허벅지 안쪽이랑 엉덩이...종아리 팅팅 부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ㅍㅍ
10대 아이들 보면 혹하는 만화같은 장면이더군요.예고 보니까...여자 주인공이 좀 가다 못하겠다고 그러더만요...ㅎㅎ
결혼 후 첫 여름 휴가때 강원도 평창에 있는 팬션에 사흘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주인 집 은 한옥이고 팬션 사이에 작은 길을 두고 호박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지요.주인 집 아이는 팬티도 안입고 맨발로 자갈길을 뛰어 다녔습니다.팬션 앞에는 작은 밭이 있어서 점심때는 고추랑 상추 따먹었습니다.그집 꺼는 아닌데..밤에 몰래 와이프랑 옆집 당근밭에서 당근 두개 뽑아왔습니다.어찌나 귀엽고 맛있던지...낮에는 오대산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오면 매미 소리 들으며 여름 오후를 보냈지요.... 내려올때는 태백,봉화,안동 이렇게 내려 오다 새로지은 여관있으면 들어가서 자고..ㅋㅋ 아...다시 그 조용함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라.

mannerist 2006-04-0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지금도 뱅기값 포함 토탈 270만원으로 5주동안 유럽 싸돌아다닐때가 그리운데... 앤하고 만나도 심심하면 걸어댕기구... 평생 이리 살아봐야지... 귀찮아질때꺼정. ㅎㅎㅎ

moonnight 2006-04-06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고생고생 가난한 여행 했던 것이 좋은 경험이긴 하지만 저역시 다시는! 다시는! 그런 여행은 안 할꼬에용 ^^; 이젠 한적하고 조용하고 깨끗한(매우 중요;;) 숙소에서 조용히 산보나 하고 책읽고 맛난 거 먹으며 휴가를 보내고 싶지요.^^ 하물며 신혼여행에 극기훈련? 안 되지요. -_-;

2006-04-06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4-06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그죠? 리조트에서 느긋하게 쉬고 싶죠? 아....지금 당장 공간이동을 하고 싶당.^^

강쥐님, 저도.....스파, 마사지 이런거 생각나요. 아....지금도 누워서 아로마 마사지 이런것 좀 받으면 좋겠당.ㅎㅎㅎ 강쥐님은 신혼여행은 어땠어요? 궁금...

이매지님, 제게 위로가 되는군요.ㅎㅎㅎ

kleinsusun 2006-04-0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호홋, 아주 솔직하고 적나라한 표현인데요. 비데 없는 곳. ㅎㅎㅎ
오지로 떠난 젊은 부부(무슨 책이드라?) 얘기를 들으면서 푸세식 화장실을 생각했어요. 전 산이나 계곡에서 텐트치고 야영할 자신이 없어요. 화장실 때문에....ㅎㅎㅎ

kleinsusun 2006-04-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드팀전님도 어제 그 드라마 보셨군요.ㅎㅎ
저도 기가 막혔어요. 차 한대도 없는 곳에서 비탈길을 경쾌하게 내려가는 모습이...
근데 요즘 중딩, 고딩들은 그런거 멋있다고 생각안해요. 애들이 얼마나 럭셔리한데요. 요즘 대딩들은 옛날처럼 대성리에 큰방 하나 빌려서 바글바글하는 MT도 안가요.콘도로 가더라구요.ㅎㅎㅎ

참....그 평창 펜션 어딘지 좀 알려주세요. 저도 가고 싶어요. 아....쉬고 싶어라.

kleinsusun 2006-04-0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 너의 유럽 사진이 생각나는구나.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뭘해도 좋지.하이힐 신고 하루 종일 걸어도....그래도...신혼여행으로 자전거 여행은 체력적으로 못가겠당.강철체력 매너가 한번 도전을? ㅎㅎㅎ

달밤님,그죠...깨끗한 숙소가 중요하죠. 또 조용한 곳. 가끔씩은요...그냥 주말에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아무도 몰래 푹 쉬고 싶을 때가 있어요.꽁꽁 숨어서...한번 해보고 말씀드릴께요.^^

속삭이신님, 아...님도 그 드라마 즐겨 보시는군요.^^
근데, 님이라면 두명의 남자 중 누구를 선택하겠어요? 그 착한 허브 사장이랑 말썽 많은 홈쇼핑맨 중에서? 님의 의견이 궁금해용.^^

kleinsusun 2006-04-0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호홋...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몇살때였어요?
어릴 땐 친구들이 반응 안하면 맘 상하고 그러쟎아요.^^
근데...정수라가 예쁘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어요. 어른들은 통통한 여자 좋아하시쟎아요.ㅎㅎㅎ

2006-04-08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