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감기가 더 심해졌다.
하루 종일 콜록콜록. 기침이 폭발적이었다.

조퇴를 할까...생각했지만,
분위기도 안 좋은데 연초부터 조퇴하고 그러면
영업사원이 "naive"하다는 말 듣기 딱 좋다.

오전 내내 참고 있다가
오후에 안되겠다 싶어서 회사 앞에 있는 내과에 갔다.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의사 샘도 대답했다.
"새해엔 좋은 일 많으셔야죠. 결혼도 하시고!"

난 깜짝 놀랐다.
Chart에 결혼 여부도 써 있나?
이 병원에 몇번 간 적이 있어서 얼굴은 서로 알고 있다.

난 그냥 슬쩍 웃어 넘기며 대답을 대신했다.
의사 샘의 말이 이어졌다.(40대 후반의 여자 의사다.)

" 요즘 결혼을 많이들 늦게하쟎아요.
그런데....아이를 생각하면 빨리 하는게 좋아요.
저도 아이를 서른 넘어서 낳았거든요.
그런데 아이랑 나이 차가 많이 나니까 애랑 놀아 주기도 힘들고
체력도 딸리고 안좋은게 많아요. 얼른 결혼하세요!"

난...솔직히 기가 막혔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빨리 진료를 하기를 기다리며...

곧 증상을 묻고는,
몇가지 약 이름을 종이에 휘갈겨 쓰셨다.

"5일치 처방해 드렸으니까, 약 잘 챙겨드세요."

이것도 잘못된 의학상식이겠지만(마태님께 물어봐야 겠다.)
감기엔 주사가 직빵이라는 오랜 믿음이 있는 나는
질문을 했다.

" 선생님...주사는...?"

샘이 또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 감기에 처방하는 주사는 해열제예요. 맞을 필요가 없어요.
주사가 몸에 좋은게 아니예요.
결혼하고 애기 데리고 소아과 다니게 되면
주사 쓰지 않고 치료하는 의사를 찾아 다니세요!"

샘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얼떨떨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네...안녕히 계세요."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면서 생각했다.

그런데...왜...그런 말을 하지?
결혼이라는건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건데,
몇번 본 사람에게 그렇게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처럼 해도 되는걸까?

또 결혼, 더 나아가 삶의 방향성과 목표가 오직 애한테 있는것 처럼 그런 말을....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노력하면) 생각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나한테만 그런 말을 하는지,
평소 친하다 싶은 환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의사 샘은 그저 심심하셨던걸까?
아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충고였을까?
진지한 충고였다면 왜 받아 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충고를 하실까?

오늘 상태가 좋았다면(감기로 말할 기운이 없었다),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그건 나이 보다 부모의 성격이나 에너지 수준에 달린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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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1-0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 후반의 여자의사 선생님 - 그리고 뭐 자주 가니까 얼굴도 알고 그냥 친근하게 말씀하신거겠죠 뭐.... 근데 저도 나이많아서 애 낳았는데 에너지 딸리는거 맞아요. 애들 에너지 못 따라가겠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낳은 애는 이렇게 안좋은 점도 있지만 또 훨씬 부모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측면도 있지요. 예린이랑 해아 키우면서 든 생각- 아마 내가 20대에 얘들을 낳았다면 아이들때문에 희생되는 내 생활이 아까워서 무지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근대 20대에 실컷 놀고 30대에 낳으니까 그런 생각은 아무래도 좀 덜해요. 세상사 다 좋은 면도 있고 안좋은 면도 있는거니까.... ^^
근데 감기 빨리 나으세요. 요즘 감기는 어찌나 오래 가는지....

하이드 2006-01-04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라부 선생이 생각나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선택한 삶에 후회가 없기를 바랄뿐이에요.
(내심 속으로는 후회 절대 안하지, 라고 생각 하고 있지만서도;;)
남들 신경 안쓰면 삶이 완전 편해진다고 마돈나언니가 그랬어요.

mong 2006-01-0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 얼렁 나으시길~
저는 지금 인후염 걸려서 고생하고 있어요 ㅜ.ㅡ
새해 초부터 감기바람이네요~

BRINY 2006-01-0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나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매일 보는 사람도 아닌 데 그냥 그러려니하고 한번 싱긋 웃어주세요.

코마개 2006-01-0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에 결혼 여부 여자는 써있어요. 약을 쓸때 중요한 사항이거든요. 임신가능성.
그냥 그런말 그러려니~~흘려버려야지 아그럼 정말 못살아요.
그리고 주사는 되도록 맞지 않는게 좋은거라더군요. 되돌리기에는 약물 보다 어렵고, 부작용 측면과, 기타 등등

moonnight 2006-01-0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가 더 심해지셨군요. 이를 어쩌나. 오늘은 좀 괜찮으신지. 그 의사 선생님. 나름대로 친절하고자. ^^; 하신 말씀인데 듣기에 따라선 좀 기분나쁘셨겠어요. 몇년전 1년정도 진단방사선과에 다녔었어요. 거기 원장님(남자), 마지막 진료날에 저한테 얼른 결혼하라시며 지금 당장 결혼해서 임신해도 이미 노산-_-이니 아기가지면 꼭 와서 3차원 초음파 찍어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흐흐 ^^ 따뜻한 거 많이 드시고 식사 든든히 하시고 감기 얼른 나으셔요. ^^

2006-01-0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리향 2006-01-04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의사 샘은 그저 심심하셨던걸까?"
: 네, 3평 남짓한 진료실 안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참 지루하지요.
그래서 그 심심함을 아는 다양한 환자들이 이런 저런 인생상담을 받으러 옵니다.
성생활이 잘 안된다는 60대 할아버지부터 술 퍼먹고 행패부리는 남편때매 홧병난 아줌마에, 여친의 사후 불임약을 지어달라는 까까머리 중학생까지...
그래서 이런 저런 상담을 몇 년씩 해주다보니 인이 베겨서
전혀 상관없는 감기 환자의 인생까지 함부로 간섭하려고 하는 버릇이 생긴 거 같습니다. 근데 요즘은 수선님같은 감기환자들이 넘 많아서리 심심할 틈이 없을텐디......히히 장사가 잘 안되나 봅니다.

참, 저는 환자가 '으사님, 며칠 전에 우리집 벤지가 새끼를 낳았어요' 라고 하면
챠트에 '벤지가 새끼를 낳았다고 함' 이라고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에 그 환자가 오면 '벤순이는 잘 커고 있나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환자가 참 좋아합니다. 히히
(이런 것을 '상업적 수단' 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2. 감기
는 아시다시피 "바이러스의 침입" 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아닌 다음에야 증상을 좋게하는 약을
쓸 수 밖에 없는데 의사마다 약 쓰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습죠.
위의 경우처럼 '해열진통제 주사는 맞을 필요가 전혀 없어요' 하면서 먹는 약에만 해열진통제를 넣어주는-이거까지 안 넣어주는 의사는 아마 없을 듯- 양심적인 의사가 있는가 하면 '오죽 힘들면 병원까지 왔겠냐' 싶은 생각에 '어차피 시간 지나야 낫는 거니까 몸이나 편하게 주사 한 방 맞고 가시오' 하는 해열진통제 주사 남용형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후자에 속하는데 해열진통제 한 방 맞았다고 무슨 진통제 중독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부작용이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사를 놔주나 안놔주나 환자가 내는 돈은 3000원으로 똑같고 병원에서 버는 수입은 의료보험공단에서 300원인가 더 받는데 주사 놔주는 간호사의 임금비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 돈때문에 주사 놔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kleinsusun 2006-01-04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저는요.... 에너지는 넘치는데 심리적 안정이 안되요.ㅎㅎ
전 갈수록 더 에너지가 넘치는 거 같아요.^^

하이드님, 맞아요.남들 신경 안쓰면 정말 삶이 편해지죠. 마돈나 언니는 정말 배울 점이 많다니깐...^^

mong님, 인후염 걸리셨어요? 우째.... 이빈후과 다니세요?
이번 감기 정말 독하네요. mong님도 푹 쉬시고 감기 빨리 나으세요!

kleinsusun 2006-01-0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네...안 그래도 빙긋 웃으며 인사하고 나왔어요.ㅎㅎ

강쥐님, 도대체 직업이 뭐예요? 궁금타... 강쥐님은 정말 모르는게 없다니깐요.^^
알라딘 마일리지 계산할 때는 수학샘인지 알았어요.음하하

moonnight님, 진단방사선관에 다니셨다는게 거기서 일을 하셨다는거죠?
전 아파서 일년이나 다니셨다는 말로 첨에 읽고 놀랐어요. ㅎㅎㅎ

kleinsusun 2006-01-0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노님, 아....지노님 설명을 들으니 상황이 이해가 되는군요.
평소에 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습관이 되고, 덕담으로 새해 결혼도 하고 복 많이 받으라고 하다가 말이 길어졌다....아하!!! 역시..."알면 사랑한다"고 이해가 되네요.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에 지노님께 진료를 받으러 한번 가야 겠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