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148)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괴상한 동기라도, 동기가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범죄의 거대한 규모를 뒷받침하는 극악무도한 악이 존재하는 효과가 생긴다. 반면 동기가 없다고 가정하면(혹은 아이히만의 출세욕처럼 부적절한 동기를 상정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자체가 진부해지고 평범해진다.* 대량학살의 배후에 혐오스러운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편이, 아무 이유도 없을 때보다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실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통은 애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이 말은, 이 태도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나몰라라 하겠다는 것 역시 당연히 아니다. 


현실직시—아렌트는 현실을 직면하자고 했는 데,—물론 나는 동의하지만— 그녀의 요구와 이미 벌어진 고통 사이에는 어떤 심연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래서 감정을 떼어 낸다는 것이 불가해 할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것도 같)지만, 그렇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주문이 끝끝내 모두가 저지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심오한 윤리적 태도라는 것을 감히 이해한다. 


내 생각에 … 그녀는 ‘진짜’로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나는 거칠게 이렇게 해석한다. 아렌트를 비정하다고 공감 능력이 없다고 짜증스러워했던 (당시의 남자) 평론가들은 고통의 곁에 가까이 있어보마한(뭐 그것도 어느 정도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해두기로 하자. 한국의 현실은 좌우를 막론하고 아이히만만 드글드글 하니까.)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150)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아이히만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존재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막을 둘러치고 ‘현실’ 자체를 차단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비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왜곡이나 회피 없이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만큼은? 그러니까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결국 나를 당신을 지켜보는 모두를 … 어떤 사유의 지평으로 떠민다. 동정과 연민에의 호소보다 불편하기에 무정하다 욕하지는 말자. 감정은 편하다(이건 자동 반응이니까) 사유는 불편하다(이건 노동이니까) 그러나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고유한 인식 방법이 있고 가끔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보기’라는 방식으로 연대를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너무도 불편하면 사유라는 불편한 노동을 해야 한다. 단 쉬운 사유방식이 아니라 안 해 본 방식의 사유(사유 자체에 대한 사유?)를 해보아야 한다. 그게… 그게 어쩌면 이 고통의 의미일지도. 감히.


그러므로 이 무정하고 터프하고 강인하고 멋있어서 죽겠는 아렌트를 꼭 읽어야겠다. (요 며칠 간의 나는 심각한 정신적 치임에 성 정체성까지 위협받았다. 언니, 날 가져요. 엉엉) 


다시 돌아와서.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고통 자체의 참담함 앞에 가해자의 비인간성을 지목하며 이것을 우리 모두는 반복하지는 맙시다라고 말하며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혹은 이 구조가 나쁩니다, 이 구조를 바꿉시다 하며 연대를 공감을 싸움을 촉구(대체로 매우 추상적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만이 고통을 직면하는 태도인가? 그것은 정말로 고통에 필요한 감정 이입인가? 


내가 아는 한 현재진행형인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는 용기와 결단이야 말로 오만이고 위선에 찬 나르시시즘이다. 모든 자아를 타자를 위해 통째로 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테레사 수녀라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 고통이든 욕망이든 상관 없이 유아론이다.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입하는 태도를 가져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환장하겠게도. 


현재 진행형인 고통. 리얼리티로서의 고통. 은 통째로 고통이므로 그냥 견뎌지는 것이지 어떤 함량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더 수월해지는 것도 까닭이 있다고 해서 더 참을 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매는 그 이유를 알고 맞아도 아프고 모르고 맞아도 아프고 첫번째로 맞아도 아프고 마지막으로 맞아도 아프다. 아프다. 아픈 거다.


그리고 그것은 끝났다. 다른 종류의 고통이 시작된다. 

왜.

상황이 심각해지면 육하원칙까지 간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왜 그랬던 걸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돌아와버리는 같은 질문들이 무한대로 반복되고 고통은 리플레이 된다. 때때로 나는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잊으라고 말하고 아직도냐고 묻고 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 곁을 괴롭히는 것 까지도 고통의 연장선일까. 나의 고통이 정말로 벗어날 수 없는 것 처럼 여겨지는 극점은 내 상처가 내 곁을 상처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다. 


어쨌든 나는 살아야 한다.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씻어야할 설거지가 있고 벌어야할 돈이 있다. 

더는 리플레이를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건 나에게 밥을 주지도 않고, 위안을 주지도 않으며, 답을 주지도 이미 벌어진 고통을 없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자기 혐오와 인간 혐오의 상태만을 부추길 뿐이다.


이제 사유의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이유를 찾지 않는다. 같은 말로 의미 역시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이유와 의미에 원인과 결과에) 내 생각에 고통의 핵심으로 곧장 진입하면 결국엔 이유가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붙잡는 것은 좀 서글픈 기대이고 어쩌면 최면이다. 그거 없이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환상과 판타지 없는 인생이란 황량하기 그지 없을 것과 같다는 비유까지 들어가며. 현대의 뇌과학은 인간의 뇌가 인과론에 얼마나 익숙하고 음모론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려준다. 고통으로 변해버린 뇌가 정당한 이유를 찾다가 결국 음모론으로 안착해버리는 것 까지도—고통의 효과라고 생각하면 고통에 치가 떨리지만. 


나에겐 아렌트가 있다. (그리고 푸코도 있는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하자. 현실을 직면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기운내 서 생각하고, 타자와 현실을 공유하고 논쟁하자. 나를 보호하는 것은 맞지만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보호하진 말자. 


이유를 묻지 않고 까닭을 찾지 않으면서도 고통에 취해버린 뇌의 운동 방식을 끊어내는 방법.

취하지 않는 방법. 도피하지 않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 혹은 사랑하는 방법 어쩌면 아렌트가 승리한 방법. 


나는 한나 아렌트를 읽을 것이다. (!!!)


먹고사니즘에 팍팍한 만국의 노동자(ㅋㅋㅋㅋ)들이 기를 쓰고 읽고 쓰는 것들이 지적 허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우리들이 읽고 쓰자. 살아야 하는 거니까. 쉬운 이유와 연민에 안도해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으니까.


덧붙임, 아래의 인용문의 아이히만에 조주빈을 넣어보자. ㅋㅋ



그러니까 이는 결코 "공감능력empthy이 아니다. … 다른 사람의 관점을 가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견해로 보면, 그건 아이히만이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물론 그의 증언만 봐서는 그에게 감정을 느낄 능력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아이히만이 마비된 양심으로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건, 유대인에게 자기 자신의 입장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가 있다는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아이러니는 비록 조롱을 통해서라도 복수성을 실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말 자체를 꼬투리 잡음으로써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누구나 볼 수 있을 거라는 전제를 깔았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무감정한 수사라는 점은 복수성과 공감능력 사이의 간극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렌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간극을 넘지 못했다.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괴상한 동기라도, 동기가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범죄의 거대한 규모를 뒷받침하는 극악무도한 악이 존재하는 효과가 생긴다. 반면 동기가 없다고 가정하면(혹은 아이히만의 출세욕처럼 부적절한 동기를 상정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자체가 진부해지고 평범해진다. *대량학살의 배후에 혐오스러운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편이, 아무 이유도 없을 때보다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 P148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현실과 접점을 유지하고 타자와 현실을 공유하고 논쟁하는 데 철저히 실패한 원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렌트가 정의하는 "공통감"이다. "아이히만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그의 무능력은 ‘사유’의 무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아이히만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존재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막을 둘러치고 ‘현실’ 자체를 차단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현실에 직면하게 만드는 부류의 사유에 저항하기 때문에 독일의 도덕적 붕괴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 아이히만이 봉사했던 체제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무사유가 지적능력의 결핍 또는 교육의 결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아렌트는 무사유가 천성이나 사회화보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이 구분은 《정신의 삶》에서 핵심적 개념으로 발전한다. 사유가 도덕의 보루가 되고, 따라서 당연히 교육받은 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질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언어 안에서 복수성과 구체성은 현실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방어막으로 함께 어우러져 작용한다. 복수성은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그 거울상만을 보여주지 않으며, 구체성은―아렌트가 진델 그린즈판의 증언에서 보았듯―인간이 왜곡이나 회피 없이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하게 해준다. - P150

현실은 언제나 복수성과 공통감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와 세계를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은 ‘무언가가 전체주의로 이끄는가 아닌가’라고 믿었기에,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숙고에 대한 아렌트의 처방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으리만큼 명징했다. *바로, 모두 함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있는 그대로 공유하려는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아마 더 중요한 점은, "미리 숙고하지 않은 주목"으로 현실을 보기 위해서는, 잠시 참여를 멈춰야 할 만큼 불편한 수난의 양식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타인의 관점에 대입해 현실을 시험하는 일 역시, 우리 자신의 관점을 보강하고 확장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는 가치를 내재하면서도 위험성을 지닌다. 복수성에 가치를 두는 사유자는 그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정성 또한 포용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성은 현실을 인지가능하게 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해주지만, 현실의 사실성 자체는 우리를 지독하게 견디기 어렵게 할 수도 있다. 현실을 지키는 방어막(복수성과 구체성)은, 그렇다면, 아렌트의 사유와 감정의 철학에서 가압지점이기 때문에 더욱더 투철한 검증을 받아 마땅하다. *방어막 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도덕적·정치적·심리적 위험성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실패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아렌트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수양해야 할 자질보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데 실패할 경우의 위험성을 훨씬 더 힘주어 상술한다. - P152

요점은 *정신이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은 감정이 드러나는 방식을 통제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격정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자제력을 수련해 길러야 한다".(LOTM, 72) 공적 삶을 감정으로 오염시키거나 도덕적으로 위험이 다분한 무사유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고통을, 그게 아무리 압도적인 고통이라도 그저 순수하게 참아내야만 한다. 암묵적으로 오로지 시간만이 격정을 잠재울 테고 압도하는 감정을 잦아들게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요를 기다리는 행위를 무사유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보기에 무사유는 고의로 생각을 하지 않는 행위다. 아니, 그보다 사유를 ‘미루는’ 짓이다*. 무사유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며, 대체할 만한 사유의 양식으로 위로하고 달래주는 사유를 제시한다. - P173

"현실 직시"는 클리셰처럼 들리고 또 실제로도 아렌트와 매카시가 생각한 과정의 역동성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클리셰로 전락한다. 아렌트의 현실 직시 개념은 칸트의 ‘공통감’에 근거한다. 합리적 존재는 그 자체로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진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시각을 능동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공유한다는 개념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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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대가 아닌 고독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강인한 우정(혹은 이상주의)에 대하여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2-06-07 01:55 
    자리에 앉자마자 왜 한나 아렌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각자의 빠짐 포인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이데거 쓰레기 자식을 도합 열 번 씩은 외치고… 벤야민 이야기를 하다 갑작스럽게 도나 해러웨이로 대화의 주제가 이어지면서 우리 앞에 구워지고 있는 것이 삼겹살이라는 사실에 잠깐 아이러니를 느끼다가… 또… 에 … 그러니까 도나의 심오함은 너무도 심오해서 육식의 성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입장과는 핀트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 않느냐고 뭔지는
 
 
바람돌이 2022-06-04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읽고 있는데 왠지 진짜 멋진 언니들의 모습이 잔뜩일것 같은..... 그렇네요. 뭐 한나 아렌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니까 말이죠. 공쟝쟝님의 한나 아렌트 읽기와 푸코 읽기를 모두 응원합니다.

공쟝쟝 2022-06-04 13:08   좋아요 2 | URL
네.. 베유로 맛보고 아렌트로 정점찍고 메리 매카시로 미학으로 승화시킨담에 조앤 디디온으로 반성까지 해버리는 진짜 너무 좋은 책인데… 번역을 좀 너무 어렵게 해놓은 것 같아요 ㅠㅡㅜ! 응원받고 독려갑니다! 바람돌이님두 열시미 읽고쓰시긔😍

다락방 2022-06-04 1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미 이 책 갖고 있지롱요~ 읽기만 하면 된다!! 😤

공쟝쟝 2022-06-04 14:1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이미 터프하신데 또 뭘 더 읽어서 터프하실라고 ㅋㅋㅋㅋ

2022-06-04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4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4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4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5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6 0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6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6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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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왜, 세 번째 탈출이어야 했는지. 신앙-철학-사랑. 그러니까 삶의 코어와 맞닿은 심각하게 중요한 무엇에 대한 철저한 배교. 그것은 아무나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니고, 단독자 아렌트는 이 모든 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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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살다보면 개인문제와 맞닥뜨려져 완전히 함입되어 읽게되는 속이 뻥뚫리는 책을 만나곤하는데, 내겐 이 책이 그랬다. 아렌트를 비롯 심리적 위안을 거부하는 드럽게 멋지고 터프한 사유를 전개한 여자들을 만났다. 아아, 읽어야할 책이 많다. 번역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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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02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집어치우고 아렌트랑 사귈까..?

잠자냥 2022-06-02 13:11   좋아요 1 | URL
일단 아렌트 언냐 머리를 싹 밀어주고…

다락방 2022-06-02 13:14   좋아요 2 | URL
푸코 아렌트 다 사귀어요! 스리섬? 🙄

공쟝쟝 2022-06-02 13:32   좋아요 0 | URL
잠냥// 아렌트에게서 진정한 심오한 개 멋짐 개 셈을 느껴버림요ㅋㅋㅋ
다락방 //스리섬 여기에 인용하지뫗!!!!ㅋㅋㅋㅋ
근데 푸코 m이면 아렌트 s…. 앍ㅋㅋㅋㅋ 나여그만햌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6-02 1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읽었어요? 이거 그래픽 노블인데 좋아요. 아직 안읽었다면 이렇게 먼저 한나 아렌트를 만나도 좋을것 같아요!

공쟝쟝 2022-06-02 13:43   좋아요 2 | URL
좋아요 ㅋㅋㅋ 일단 다락방님 아렌트 태그 찾아서 다 읽을 꾸예요 ㅋㅋㅋㅋ 진짜 아렌트 너무 좋은데…? 🫡

단발머리 2022-06-02 15:36   좋아요 1 | URL
근데 읽을 거 너무 많을걸요? ㅋㅋㅋㅋㅋㅋㅋ 푸코 2일째에요. 당분간 한눈 팔지 마시고!!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6-03 23:53   좋아요 0 | URL
스리섬ㅋㅋㅋ 해버리는 나란 여자 문란한 독서가 ㅋㅋㅋㅋㅋㅋㅋㅋ (푸코 만화도 같이 빌려다 봄 ㅋㅋㅋ)
 
chemistry reading

푸코와의 케미스트리 리딩 1일 째... ㅋㅋㅋ 🤷🏻‍♀️ 애석하게도 그와 케미가 맞아버렸으므로(단발머리님 페이퍼 참조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639537 ) 변호를 좀 해야할 것 같다. 

이이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 처럼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외모는 대머리에 부정 교합(말과 사물 책 표지 보니까 턱이..?)까지 있는 듯 하지만... 

저명한 교수였음에도 경찰한테 처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ㅋㅋ 몸빵 시위를 즐기는 용감한 좌파였으며ㅋㅋㅋㅋ 

자신의 철학을 살기 위해 자기 변형(transformation of the self)을 위한 다양한 성적 실천(m..ㅋㅋㅋ...?)도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철.학.을 하셨던 분이신 거죠...

(255) 푸코에 따르면 철학은 현재의 진단학, 오늘의 진단학입니다. 철학은 이렇게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오늘 - 여기 -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데카르트, 칸트 등으로 대변되는 ‘고전철학’과는 다른 ‘니체 이후’ 철학의 특징입니다. 푸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이란무엇인가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문제를 탐구했던 고전철학과 달리, 자신은 오늘 - 지금 ‘우리’의 문제, 곧 오늘 우리는 누구인가? 오늘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라고 말합니다.


<상당한 위험>역자 허경님도 나 같은(?) 마음이셨던 듯. (이 사람 글케 이상한 사람 아녜효....) 책 각주에 붙어있길래 <처음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찾아읽었는 데, 푸코에 대한 오해를 안타까워하면서 글을 시작하신다 ㅜㅜ 이 글은 생각보다 더 친절하고 쉽게 푸코의 철학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셸푸코와 자기변형의 기술' 부분나중에 복습하려고 갈무리,,,


신자유주의페미인 나는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푸코를 읽어보려고 한다... 라고 말하면 거창하지만... 

이젠 못 살아남아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이 인간의 고약한 문체와 문제 의식을 즐겨보마 싶다. 


나에게 있어 철학이란 나 자신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살기, 읽기, 쓰기, 친구들과 대화하기라는 도구로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했)고, 이건 삶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언제나 세계와 협상하는 문제였다. 나의 철학함이 일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만나는 전선(?)은 투표를 하거나 재테크를 하는 것이 아닌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것 이다. 


어차피 독서란 나 혼자하는 거고, 결국에는 글쓰기도 나 혼자하는 거였는 데, 그걸 깜빡할 뻔 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니까, 푸코 어렵다고 엄살 부리지말고 방법을 찾자. 방법을!  



푸코를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원으로 간단히 규정해버리는 시각은 푸코를 전공하지 않은 미국학자들의 관점을(본의든 아니든) 무비판적으로 흡수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략) 사유의 대부분을 거의 늘 근대에 대한 연구로 일관했기에 푸코에게는 ‘탈구축‘이 아니라 오직 ‘문제의 재구성 reconstruction‘ 혹은 ‘재再문제화 reproblématisation‘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탈구축이라는 말은 데리다와 데리다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상가에게 엄격히 한정해 써야 하는 용어이지 푸코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한편 용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이 역시 이른바 ‘탈구축주의 =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국 학자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범주로 묶기에는 좀..) 해체주의 아님 - P246

푸코의 사유가 어떤 의미로든 ‘구조주의적 함축’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넓게 잡아도 1969년에 나온 《지식의 고고학》까지이며, 1970년에 행한 강연 ‘담론의 질서’에서 푸코는 명시적으로 언어학적·기호학적·구조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 니체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담론 분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1975년에 나온 《감시와 처벌》을 구조주의적 저작으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요약하면, 푸코의 사유를 포스트 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은 우선 적지 않은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지칭 방식이고,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푸코에만 엄격히 한정해 불러야 합니다.
😫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포스트 구조주의는 <지식의 고고학> 까지만 - P248

푸코는 일단 우파 곧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중략) 푸코가 평생 지향했던 정치적 노선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좌파적 테제의 정립’ 입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좌파 자체의 몰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푸코는 잘 아시다시피 1970년대 이후 사르트르를 잇는 저항적 지식인의 대표이자, 엄청난 양의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는 등 지식인 투사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이는 푸코가 이론적으로는 좌파와 입장을 달리했지만, 실천의 측면에서는 늘 상당한 연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중략) 결론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마르크스 이후의 사유’라는 식으로 본다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은 옳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푸코의 사유를 ‘후기마르크스주의’라는 식으로 푼다면 어떤 경우에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은 그릇된 것입니다.
😫 푸코 당연히 우파 아님. 마르크스주의 아닌 좌파라서 그래ㅋㅋ - P249

푸코는 하버마스가 자신을 ‘비합리주의자’로 바라보는 게 자신이 하버마스가 유일한 합리성의 형식으로 생각하는 헤겔적 혹은 의사 소통적 합리성을 유일한 합리성 자체의 양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보고, 이를 ‘계몽주의의 협박‘이라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결코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며, 다만 합리성의 객관성, 보편성, 절대성, 유일성만을 부정하는 것이죠. 따라서 푸코에게 합리성의 형식은늘 복수複數이자, 다수多數의 형식, 곧 합리성‘들‘이라는 형식 아래에서만 나타납니다.
😫 하버마스 거부ㅋㅋㅋ 비합리주의 아님 ㅋㅋ - P251

그렇다면 니체와 푸코는 상대주의자 아닌가? 상대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수 있는데요. 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는 이미 고등학교나 어딘가에서 배운 ‘상대주의는 나쁘고 우리는 상대주의에 머무를 수 없다‘는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학습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니체의 주장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구분 자체를 공격하는 니체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아닙니다. 즉 니체에게는 절대와 상대의 구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인데, 니체의 주장을 이러한 논의가 옳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유의미한 말이 될 수 있는) ‘상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논점 선취의 오류라는 것이죠.
😫 니체의 관점주의 방식을 채택함, 진리는 구성된 개념일 뿐 - P259

우선 유의해야 할 점은 ‘권력의 계보학’이 이전 시기의 ‘지식의 고고학’을 다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푸코는 이전의 지식을 버리고 권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 - 지식’ pouvoir-savoir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늘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권력 - 지식의 복합체를 말합니다. 이렇게 푸코는 어떤 하나의 이전 개념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 이전 개념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기존의 개념을 부분 집합으로 넣습니다.
😫 푸코는 사유의 가성비를 추구...(응?) - P263

관련된 또 하나의 오해는 이러한 푸코의 관점이 미시적인 작은 권력들에만 사로잡혀서 정작 중요한 권력의 거시적 차원을 방기한다 혹은 그러한 차원에 대해 무력하다는 비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푸코의 미시 권력관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푸코의 미시 권력관은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이 탄생한다고 주장하며, 거시적 것은 이러한 무한하게 작은 미시적 권력들의 효과로서 드러나는 권력 현상의 가장 가시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푸코에게 거시 권력은 미시 권력이라는 보다 커다란 권력에 모두 포함되는 가장 가시적인 영역입니다. 마치 뉴턴의 거시 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완전히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한 함수로서 일정한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있는 것 처럼 말이죠.
😫 거시 정치를 바꾸려는 이유는 일상의 미시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관점에 기인한다 + 권력의 경제주의적 관점 비판 +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ㅎㅎㅎ) - P264

"나는 지식과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1960년대 내가 지식의 고고학이라 이름 붙인 작업을 통해 수행했다. 그리고 권력 문제에 대해서는 1970년대 초중반 이른바 권력의 계보학을 통해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주체가 어떻게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게 되는가라는 주체화의 문제를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윤리의 계보학은 하나의주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 권력관계에 대한 푸코의 시선은 당연히 개인들의 도덕/윤리에 대한 사유를 배태하고 있었던 거다.... 아.... - P267

푸코의 윤리의 계보학은 한마디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혹은 됐는가?라는 주체화subjectivation 곧 주체의 역사적 형성historical formation of the subject이라는 문제를 다룹니다.(중략) 다시 개인의 주체화로 돌아오면, ‘성의 역사’ 시리즈에서 푸코는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설립하는 방식의 역사, 곧 윤리적 문제화의 역사를 분석합니다. *문제화problématisation란 주체가 만들어지는 방식인 주체화, 대상이 설정되는 방식인 대상화objectivation, 그 사이의 인식이 확립되는 과정인 인식론화épistémologisation를 모두 합해 부르는 푸코의 포괄적 용어*입니다.
😫 아. 이렇게 자기에의 배려로 나아갔던 것... . - P268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보다는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가령 푸코가 묻는 질문은 ‘대한민국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는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되었는가?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과 같은 사회로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입니다. 푸코의 탐구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계기들, 지점들, 문제화, 문제설정들을 분석하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화 혹은 문제설정에 대한 분석은 또 왜 하는 것일까요? 푸코에 따르면 자신의 이러한 모든 작업은 자기 변형 transformation of the self 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푸코는 트랜스포머입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것, 철학 활동의 목적은 자기가 배우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삶에 자기 몸을 다 던져서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 앍ㅋㅋ 미셸푸코 트랜스포머설 ㅋㅋ 모순적이어 보이지만 일관된 사상가 푸코 되겟슴.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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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1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푸코 어려운데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더 어려운데....ㅠ.ㅠ
그래도 푸코까지는 열심히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던듯요. 그래서 푸코 너무 멋지다 했던 기억이 저도 있네요. 하지만 푸코 이후 데리다, 들뢰즈 라깡 뭐 이런 사람으로 가면 내가 읽는 것이 한글이 맞는것이냐하던.....

공쟝쟝 2022-06-01 11:20   좋아요 1 | URL
안냐세요 바람돌이님... 어렵겠죠..? (저 쌩모른 채로 후기 저작 부터 읽은 사람ㅋㅋㅋㅋ) 그런데 뭐... 흑흑ㅜㅜㅜㅜ 일단 덤비려고요.(하다가 안되면 말자 싶은 느슨한 맘으로) 독서는 항상 어려웠는 데 제 기준엔 이리가레가 가장 어려웠어요. (푸코는 참고문헌이라도 많지...ㅠ_ㅠ)
제가 믿는 건 저 자신인 데, 10년 전에 저는 정희진 선생님이 어려워서 울고 싶었는 데, 지금은 꽤 많이 이해하거든요.... 거기엔 읽고 읽고 또 읽은 과정이 있어서 그렇게 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일단은 좋아하려고요. 좋아해야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데.들.라 는 좋아할 맘이 없...)

단발머리 2022-06-01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십만년 전에 어디선가... <말과 사물> 첨 나왔을 때, 프랑스 대학생 가방에는 모두 이 책이 한 권씩 들어있었다, 뭐 이런 이야기 어디선가 전해 듣고, 두 번 시도해 보았으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처참한 패배의 아픈 기억만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푸코와 친해질 생각은 별로 없으나 <광기의 역사>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서 그건 읽어볼 생각이에요. <말과 사물>은 쟝쟝님이 나 대신 읽는 걸로 하고요.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공쟝쟝 2022-06-02 12:38   좋아요 1 | URL
기묘한 행복…. 저도 이 자의 글쓰기와 문체에 대한 정복욕이 들어 읽어보마 하다가 왜 읽고 있지? 이러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잔혹한 패배 예상 ㅋㅋ

다락방 2022-06-02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의 철학함이 일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만나는 전선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것‘ 이라는 공쟝쟝 님의 문장에 고개 끄덕이며, 저는 오늘도 저의 철학함을 깨닫습니다!

공쟝쟝 2022-06-02 12:44   좋아요 2 | URL
철학은 철학인데 정치는 정치인가봐요 … 지방선거 결과를 보며 한나 아렌트를 반드시 읽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점심입니다. 대중이나 정치 엘리트나 현실의 고통을 직면하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 인가봅니다. 자꾸 이러면 더 고통스러울텐데… 고통을 이기는 내성을 견디기 위해 매운 카레 먹는 중 ㅋㅋㅋ

scott 2022-06-06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싫습니다(유아성애자 !) 그러나 장쟝님의 푸코글은 스킵 할수가 없어요 ㅎㅎㅎ

공쟝쟝 2022-06-06 10:14   좋아요 1 | URL
사아실ㅋㅋㅋ 스킵해도 되지만 스콧님은 읽어줘~!!!
그 유아성애자가 가짜뉴스라는 보도도 있더라고요. 저도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 읽지 않으려 발버둥쳤으나.... 읽다보면 그의 무의식까지 알 수 있어질랑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해지려고 끝까지 노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알아가봐야겠죠... 케미리딩 6일째인데 진도는 처참하고.. 제 눈엔 실핏줄만 터져있고... 오늘은 일 빨리 끝내고 열심히 읽을거(라고 써놓고 일하기 싫어서 북플에서 놀고있네요.)

난티나무 2023-04-15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이 글 본 기억은 있는 듯한데 내 흔적이 없네요???@@
글고 으아니! 재밌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6 12:58   좋아요 0 | URL
재밌떠용? >_<
 

*캐런 버라드*
행위적 실재론 혹은 신유물론 페미니즘
물리학자. 양자 물리학의 철학적 함의를 본격적으로 논하면서 버틀러와 푸코를 통해 보어를 독해하심 ㅋㅋㅋ 

(엥? 그런데 유물론??) 페미니즘이 과학과 맺는 새로운 방식 제시. 현재 한국에 번역된 책은 없는 듯.
하지만
양자물리 좋아하는 단발머리님이 좋아할 것 같은 사람이라 밑줄 그어둠. 윤리-존재-인식의 분리불가능성..
해러웨이랑 친하신 분인 듯🫢


버라드에게 낙태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 현상 속에서 특정한 내부 작용이 낙태를 태아 대 임신한 여성의 문제로 뚝 잘라 냈을 뿐 태아와 여성이 원래부터 대립적 존재로 실재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특정한 내부 작용, 특정한 장치, 특정한 자름을 통해 만들어진 태아 대 여성은 존재의 문제이자 인식의 문제이며, 또한 무엇보다 윤리의 문제다. 낙태와 관련된 윤리는 태아와 임신 여성이라는 물(物)에 나중에 더해지는 관심사가 아니라 이들 존재가 물(物)이 되는 과정에 이미 내재해 있다. 버라드는 이 윤리와 존재, 그리고 *존재에 대한 앎의 분리 불가능성을 ‘윤리-존재-인식-론(ethico-onto-epistem-ology)’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어떤 윤리를 요구할 것이냐는 질문은 너무 늦다. 그 대신 태아 대 여성이라는 경계를 만든 내부 작용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낙태라는 현상으로부터 이 두 존재를 잘라 냄으로써 어떤 결정이 가능해졌고 어떤 존재가 배제되었는지를 해명하고 이 현상에 어떤 실천, 기술, 정책, 제도 등이 얽혀 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여성은 낙태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유일한 존재일 수 없다. 낙태의 책임은 태아를 독립적 생명체로 시각화하는 기술적 실천에도 있고, 보건 정책이나 의료 체계에도 있고, 빈곤을 재생산하는 사회 구조에도 있다. 우리가 이들 중 무엇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가는 그 자체로 윤리적 선택이자 새로운 지식과 존재를 만드는 행위다. 낙태는 이 반복되는 내부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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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분법 탈피와 빨대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2-06-06 15:58 
    캐런 버라드에 대해 임소연이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읽고 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프랑스 철학의 대가 미셸 푸코와 알콩달콩 6일째인 쟝쟝님이 이 책을 읽으며 나를 떠올린 이유를 133쪽에서 찾았다. 버라드의 독특한 철학은 닐스 보어의 양자 물리학을 근간으로 한다. 보어는 관측 대상과 관측 장치의 분리 불가능성 및 얽힘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133쪽) 양자역학을 읽으며 나를 생각하다니
 
 
단발머리 2022-05-29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양자물리 좋아하는 단발머리가 좋아할 만한 책이고 밑줄도 감사한데....
이렇게 어려워서야.... 대략난감🙄🙄🙄

라파엘 2022-05-30 00:09   좋아요 3 | URL
해당 분야의 고전이어서 이미 읽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양자역학의 철학적 함의에 관해 좀 더 쉽고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는 책으로는 (페미니즘 관련 서적은 아니지만)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있습니다 😃

단발머리 2022-05-30 07:15   좋아요 2 | URL
라파엘님! 감사합니다. 해당 분양의 고전이지만 첨 듣는 제목이에요. ㅎㅎㅎㅎ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댓글 감사해요. 이렇게 저는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공쟝쟝 2022-05-30 11:23   좋아요 1 | URL
라파엘님의 대천사이미지와 프로필사진의 한자(ㅋㅋㅋㅋ)와 동양사상에 현대 물리학의 만남... 어울리네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공쟝쟝 2022-05-30 12:06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 버틀러가 본질주의 싫어하면서 담론적 실천/수행을 주장한 게 <젠더 트러블>이고 제가 잘은 모르지만... 90년대 2000년대를 풍미한 것(?) 같은 데.. 그러다보니 여성없는 여성주의ㅋㅋ 해버렸잖아요. 저는 그거야 말로 언어/이론에 현실을 맞추는(?) 극단적 관념론 처럼 느껴져서 답답했는 데(그렇지만 수긍하는 지점도 많았고요, 제가 버틀러를 오해하는 걸 수도 있고요, 사실 현실에서 주요 전략으로 채택하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젤로 큼) 일단 이걸 크게 대 괄호 치고~ / ----- / 양자역학은 언어로 설명이 안되는 거라 어려운 건데 그걸 버틀러!!!(이분 언어, 담론 중요하신 분) 로 독해 한다니까 제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을 구성하는 담론 중의 하나가 신유물론이래요.~ 이 신유물론자 중엔 신을 믿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해가지고 ㅋㅋㅋ 단발님이랑 라파엘님 생각났어요ㅋㅋ 저도 너무 어려운 데.. 음...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뭔지 아직 모르겠음 ㅋㅋ

난티나무 2022-05-30 0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은 많이 없으나 밑줄 올려주신 부분 가장 강렬하고 적확하게 말하는 것 같아요. 제가 안 읽은 책 늠 많아서 그런 걸지도….^^;;;
보관함 슝 ~~~~~~~

공쟝쟝 2022-05-30 11:33   좋아요 1 | URL
네. 뭐 저렇게 어렵게 말 안해도... 무엇을 보느냐 어디에 서 있기에 무엇이 더 잘 보이느냐,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어떻게 살아가느냐랑 다르지 않다... 그게 내 존재를 만드는 행위다.. ㅋㅋㅋㅋㅋㅋ 우리 훌륭한 알라디너 여성주의 독서모임은 이미 다 그러고 살고 있잖아요? 좀 고급진 말들 가져와서 아는 척 하기 좋은 그런 책입니닷!

다락방 2022-05-30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용문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런데 대략 맥락적으로 이해는 되는바, 보관함에 넣겠습니다. 슝~

공쟝쟝 2022-05-30 11:31   좋아요 1 | URL
인간중심주의적 이분법 경계하는 해러웨이 류(?)의 사상가들이 지금 시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라고 하네요... (지구를 구하잣!) 흥미로워보이는 사상가들 중심으로 발췌독하였는 데 캐런 버라드와 버섯의 사상가(ㅋㅋㅋ 제가 버섯을 좋아합니다 아시죠?) 에나 칭이 기억에 남네요 ~ 나머지는 슬렁슬렁 읽었는 데 이름도 기억이 안나..~ㅋㅋㅋ

2022-05-30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30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