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던 동네 마트는 기어코 망했다. 포도알 스티커처럼 차곡차곡 모아둔 내 포인트 적립금을 가지고 토꼈다. 그래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에 갔다. 행사 상품 세일 가격 세척된 토마토 한 알을 2500원에 사 먹을 깜냥이 나는 아직 안 된다. 아침마다 당근을 갈아 마신다. 지난겨울부터니까 루틴이라면 루틴이다. 이날은 세척되지도 않은 흙당근이 하나에 천 원이었다. 나에겐 토마토를 기르거나 당근을 재배할 능력이 없으시다. 근대화 문명화된 8282 한국은 내게서 그런 능력을 앗아갔다.
그래서 편한 건 있었다. 분명 편했다. 하지만 편하고 싶어서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종종 자매들과 양육 중독이라고 놀리는 엄마 딸인 나는 농작물 재배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모른다. 그런데 이대로 토마토가 55,000원 당근이 10,000원이 된다면?
이제 막 독일군이 공습한 전쟁 중의 프랑스를 다루는 소설 <우리 슬픔의 거울>을 쾌활하게 완독하고 후련~했었다. (다음 장이 궁금해서 끊지를 못했다.) 소설 속에서는 (당연히) 다리가 불편하면 즉시 총이 겨눠지고. 피난민들이 된 부모들은 아이들을 놓고 사라진다. (물론 의도치 않게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ㅋㅋㅋ)
아마 대열의 후미에서 뒤처질 나는 즉시 총살 당하거나, 혹시라도 여주인공처럼 공습 중에 아가들을 느닷없이 떠맡게 된다면 (심약하여) 바로 내치지는 못한 채. 이를 어째 동동 발 구르다 같이 굶어 죽을 것 같다. 가스레인지 없는 곳에서 죽을 끓일 능력이 내게는 없으니까. 자급의 무능력, 생활의 무능력, 삶의 무능력. 배워야 할 게 많다. 가장 먼저는 눈치껏 남의 말을 절대 안 듣는 법을 배워야 하겠고(혹시 시간 여행을 하거나 불상사가 생기어 신변이 전쟁에 처할 경우, 가스실 안 가거나 총살 안 당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독서를 통해 알아낸 결론이니! 꿀팁! 저장!).
다리가 불편한 내가 망해버린 마트와 당근을 통해서 체감하는 물가 상승은 전쟁을 떠올릴 정도의 압박감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은 다 살만한 것 같으니, 이건 나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최악을 자동으로 떠올리는 불안 장애 일종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읽었다. 술 대신 책으로 현실을 도피했다. 그렇게 읽다 보니 또 읽는 동족(!)을 만났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번에 새 옷 입혀서 나온 모양이다. 대형 서점에서 눈이 가서 뒤적대다가 그대로 집으로 가져와서 끝까지 읽어버림.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매혹적인 썰을 푸는 것? 나는 그것을 필력이라고 부른다ㅋ 음. 필력에 대한 이야기는 아끼도록 하자.
자, 이 읽기 덕후가 *고작* 자기가 맘 편히 신나게 읽기 위해, 다른 읽기 덕후(계보학)들의 읽음을 노정하여 읽고, 쓰기를 인류 최후의 생존방식으로 격상시킨 마지막 클라이맥스만 보자. (나는 이런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사유 과정에 독서라는 행위로 참여하기를 권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이 안 읽을 걸 안다. 나만 좋을 일.)
“(213) 다시 한층 더 깊이 파고들어 봅시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법전을 비롯한 규범에 관련된 것으로서의 ‘정보’. 정보는 아니지만 정보와 결부된 형태로 권력 안에 포함되는 ‘폭력’. 그리고 아무래도 거기서 잔여로서 석출되는 사랑과 동경의 절대적 대상으로서의 ‘주권=국가’.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해왔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보와 폭력과 주권의 삼각형으로 구성되는 ‘세계’. 제도적인 것의 세계는 유럽의 한 버전version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따라서 ‘혁명’이란 정보도 폭력도 주권 탈취도 아닙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니까요.”
“(216)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 것입니다. 즉 고쳐 쓰는 것, 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기묘한 사태가 떠오릅니다. (…)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쓴다는 것에 대해서도 ‘신앙’은 사라집니다. 그 한 행을 믿지 않는다면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쓰는 것’은 지우고 고쳐 쓴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을 지우고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신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 같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거기에 무한한 회색의 투쟁 공간이 출현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습니다. “최후에는 고독한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것은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가 혁명의 장소입니다. 혁명의 시간입니다. 이 시공은 끝나지 않습니다. 정의상,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217)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물음 자체가 완전히 유럽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226)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겁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습니다.”
“(251)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271) 그것은―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하하. 최초의 혁명을 그저 성경을 *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져 버렸다는 사람. 하지만 달리할 것이 없으니 또 *읽어버리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내가. 설득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근대화되는 것이 너무 벅차서 도태된 김에 에라 모르겠다 읽어버린 나는 이이의 주장에 기꺼이 동의하고 싶었다.)
<4월 보름 동안 다리 부러진 김에 완독한 책들. >
읽고 쓰는 혁명까지는 (아이쿠 수줍다) 아니더라도 여기 이런 종족이 아직 살아(고)있어요! 라고 알리기 위해, 이거라도 라는 마음으로 오전에는 부단히 밀린 #백자평 을 적었다.
참, 잘난척 하는 것을 깜빡할 뻔 했다. 사사키의 책 거의 마지막 269페이지의 편집자 필리프 아리에스의 형안이 빛나는 언젠가는 세상의 빛을 봤을 테지만 당시의 프랑스 편집자들은 무시한 그 책은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가 아니라 <광기의 역사>다. 2쇄 찍을 때는 수정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