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한국의 포스트 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포스트 식민주의)이 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오면서 애당초의 푸랑쓰 담론의 맥락이 탈각돼버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고 계시는 데… 어쨌든 내가 막 페미니즘 읽으면서 계속 으잉? 주체가 죽으면 그만입니까? 언제는 나보고 주체가 되람서. 난 주체(서울사람ㅋㅋ)이기 싫었는데. 징징. 이놈의 주체. 주체… 투덜투덜에 한줄기 빛처럼. 주체의 자율성의 조건으로서의 타율성이라는 문장을 만나버림. 네에- 이거였음 ㅋㅋㅋㅋ (이미지)

할튼 글의 요지는 ‘주체의 죽음’을 그렇게 훑어내듯 간편하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며 ㅋㅋㅋㅋㅋ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모듈화에 능한 일본인의 책과 (아마도 대체로 페미니즘이었으므로 페미원산지) 미국 특유의 기능/실용주의적(?) 관점으로 한번 걸러진 글들로나마 포스트 담론 퉁쳐 이해하고자 한 신자유주의적ㅋㅋㅋㅋㅋ (드라마 10분 몰아보기처럼 잘 다듬어진 입문서로만 읽고 싶은)독서인 아닌가? 지난 나의 읽기 과정을 고려해 봤을 때ㅋㅋㅋ 조금 뜨끔합니다만… 실은 제가 주체가 되지도 못했는데 죽기가 아깝긴 했었거든요…….ㅋㅋㅋㅋ 뭐 나 정도의 읽기는 반지성주의 중에서도 반(半)지성으로 쳐주면 안될까요? 누구한테 물어보냐.ㅋㅋ

포스트 담론에서 (특히 프랑스) 포스트 구조주의가 가지는 특징.을 눈여겨보는 중에 만난 책. #애도의애도를위하여

매우 재미지다. (😞중증임)
잠깐 야전 홀딩하고 얘 먼저 찍고 가야겠다. 주체에서 주체화(들)로. 우리의 연장통 푸코가 등장합니다. (이미지 참고)

“(65) 요컨대 주체가 자율적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체 생산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것, 따라서 주체의 자율성의 조건으로서 타율성을 설명하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
“(66)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예속화-주체화라는 문제 설정은 신자유주의를 경제정책이나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을 넘어 새로운 종류의 주체 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대안을 모색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얘는 사상이 아니라고 엊그제 희진 샘이 말씀하시었다 ㅋㅋㅋ) 통치 시스템에 걸맞은 인재로서 부단히 주체화된 신자유주의 페미로서…(신자유주의 덕분에 긱 노동이나마 가능해져 개인의 위치를 부여받은 탈여성이 되어버린고로 독서시공간 확보한 1인가구)… 이렇게는 통치당하지 않는 저항을 한번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일들 : 권력, 권위 있는 말은 잘 못 알아먹는 척하기. 실은 농땡이 치면서 열심히 고생하는 척해서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떨어뜨리기. 그리고 이딴(?)거 적어서 내일 일하러 가는 사람들 근로의욕에 초 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눈치껏 대충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주체가 자율적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체 생산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것, 따라서 주체의 자율성의 조건으로서 타율성을 설명하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 P65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예속화-주체화라는 문제 설정은 신자유주의를 경제정책이나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을 넘어 새로운 종류의 주체 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대안을 모색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 P66

따라서 두 번째 중요한 효과는 이러한 상호 무력화로 인해 포스트 담론의 이론적·실천적 지향에 대한 맹목이 일반화되었고, 포스트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포스트주의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새로운 이론들 사이의갈등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역시 장애를 겪게 되었고, 포스트 담론이 제기하는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과제들에 대한 모색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포스트 담론이 대결했어야할 과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종류의 갈등과 적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였으며, 또한 포스트 담론을 통해 역사적 마르크주의 (및 좀더 넓게는 근대성 일반)의 한계들을 성찰하고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지만, 국내에서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 P51

그 대신 포스트 담론은 주로 애도와 청산의 알리바이로 기능했으며, 이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이행‘시도가 산출되었다. 가령 거대서사에서 작은 이야기로, 계급 내지 민중에서 소수자로, 보편성에서 차이로, 민족에서 탈민족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정치에서 문화로의 이행등과 같은 이행의 논의들이 그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문제는 대립의 두 항 사이의 관계가 배타적인 대립이나 선형적인 이행의 관점에서 파악된다는 점이다. 곧 거대 서사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거대서사의 폐기와 작은 이야기들의 특권화를 낳게되고, 노동자계급 중심 정치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자유주의 정치의 전면적 수용으로 나타나며, (중략)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요된 청산으로 이어졌으며, 그와 결부된 계급론의 문제나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 설정의 소멸을 낳게되었다. - P52

알튀세르나 푸코(또는 들뢰즈 가타리)가 해명하려고 했던 문제는, 근대철학의 기본 원리이자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핵심 전제이기도 한 자율적 주체가 사실은 이데올로기나 규율권력에 의해 예속적으로 생산된 주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예속적 주체 생산의 문제는 항상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나 규율권력의 메커니즘 같은 구조적이고도 제도적인 실천의 차원과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속적인 주체화 양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길이 어떤 것인지 해명하기 위해서는 국가장치들이나 권력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역으로 생산양식이나 국가의 변혁이라는 과제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사고될 수 없다. 내가 볼 때 포스트 담론의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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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5-17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나도 있는 책인데 왠지 평생 안 읽을 것 같다…밑줄을 책 색깔이랑 깔맞춰서 되게 이쁘게(?)치시네요? 은은…

공쟝쟝 2024-05-18 12:59   좋아요 1 | URL
반님 사회학 교육학 전공이랬던가요? ㅋㅋㅋ 사회학자들 멋지다!!! 저는 플래그 및 밑줄 전공입니다!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5-18 14:35   좋아요 1 | URL
나 사회교육(비슷한 듯 다른 ㅋㅋㅋ사회학도 교육학도 오롯하진 않고 사회학 경제학 법학 문화인류학 정치학 교육학 철학 다 썪어 놓은 그래서 거시기 혀…)이요 ㅋㅋㅋ사회학만 했으면 밥도 못 먹고 살았겠지요… 이과 전공 하고 싶다…ㅋㅋㅋㅋㅋ 플래그 및 밑줄 맛집이네 여기 저는 그 과목은 낙제요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5-17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치껏 대충 살다‘가 제 전공인데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되기에는 너무 빡쎈!!! 페이퍼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5-18 13:02   좋아요 1 | URL
출처 : 단발머리 꽝꽝 박고 싶지만 진심을 다해 눈치껏 대충살자는 푸코의 권력관에 기반한 후기 철학을 공쟝쟝너낌으로 해석한 것이니ㅋㅋㅋㅋ 공부를 통해 얻어낸 평갱 개미여떤 제게 일종의 인생태도의 전회로 읽어주면 감사…😉 친구는 닮게 마련!!
 

“(48) 나는 애도가 언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애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이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꿨다. 그는 성공적 애도가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는 의미라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원래 우울증과 관련되어 있는 incorporation이 애도 과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나는 대상의 완전한 대체 가능성을 우리가 지향하기라도 하듯이 다른 사람을 잊는다거나 다른 무엇이 대상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아마도 애도는 미리 그 변화의 본격적인 결과를 알 길이 없는데도 그런 변화를 겪겠다고 (어쩌면 변화를 감수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동의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뭔가를 잃는다는 경험이 있는가 하면 또 상실이 초래하는 변화라는 결과가 있다. 후자는 그려질 수도 계획될 수도 없다.”

“(85) 내가 ‘너’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너를 알려면 나의 언어가 부서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내가 ‘우리’를 소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너는 이 방향감각의 혼란과 상실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다. 다시 또다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서.”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폭력, 애도, 정치>


사랑해서 아픈 거였더라고. 아픈 거 보기 싫다 치우라는 마음이 사랑을 없던거라 밀어내버리는 미운 마음이라 어찌나 분노했던지. 애도할 겨를도 없었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더 미안했어. 10년 전 그때는.

삶이 사랑과 이별과 애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슬픔과 고통을 쉽게 몰아내는 게 아니라 느끼고 인정하고 내 안에서 숨쉬게 살려둘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많이 변했어. 내 세계는 변했고… 그래도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면서 그렇게 기억하는 중이야. 어쩌면 온전히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고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은 순간에서 또 나는 변하겠지만.

작년에는 <너와 나>를 봤어. 영화 보고 나서 그냥 그 말 해주고 싶더라고. 나도. 나도 사랑해🎗️


마지막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이 되게 해주는가? 우리의 위치와 역사가 다르다 해도, 내 생각에는 "우리"라는 말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어설프게나마 "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상실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뭔가 소유했다는 것,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욕망을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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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4-16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틀러 책, 참 좋네요. 저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러고 다시 봤더니 맨 마지막 페이지는 마리 루티 문장인가보다 ㅋㅋㅋㅋㅋㅋ맞나요? 고통에의 직면, 정면승부는 어려운 일이죠. 제대로 해내는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난, 생각합니다.
단지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의 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겠죠. 다시 쓰지만....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쉽게 만나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쟝쟝 2024-04-16 22:49   좋아요 2 | URL
고릿적 ‘우울증적 이성애‘ 때 부터 버틀러의 애도와 기입(incorporation, 합체라는 번역을 참을 수 없다)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 데... 그걸 이렇게 정치철학적 비평으로 풀어내니... 버틀러... 넘...🥹🥹😩😩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의 재난이란 911이란 말이죠. 911이후의 미국의 왜곡된 애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엇나갔는 지 어렴풋한 기억이 있고... 당시 ‘느닷없이 공격 받았다는‘ 미국 내의 정서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직면하기 힘든 미국의 어떤 징후(피해자의 오만..이라고 정희진의 워딩가져와봅니다)를 드러내는 버틀러의 정치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온전해지자.‘ 가 아니라. ‘우리 모두 상처 입었으므로 취약함을 살피자‘고 하는. 것은. 사실 고차원 적이죠. 아름답다와 별개로.

맞습니다. 마지막 검은 캡처는 루티(ㅜㅜ 그를 애도중인 나)입니다. 마리 루티나 제가 고통에 정면 승부 하자는 아니고요. 저는 10년 전의 ‘세월호‘를 떠올리면 일베와 장례 자체를 유난 떤다고 하던 어떤 사람들의 신경질적임이 생각 나거든요. 애도할 겨를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 조차 참을 수 없어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문장이라 가져왔어요.

고통 혹은 고통의 곁의 곁까지는 사실. 엄두 안나고. 다만 저는 애도요.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과 충분히 헤어지면서 혹은 간직하면서 다른 내가 되는 것요.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애도하는 일에 가혹해지지 않고 싶습니다. 음. 헤어짐의 고통은 소중합니다. 몸에 기입된 사랑의 흔적이니까요. 그건 재난이나 참사가 아니라도 언제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이기에. 거기서 ‘어설픈 우리‘를 도모해보자고 하는 버틀러의 제안을 찬찬히 따라 읽어가도록 해보겠스읍니다.
 


그 문장이 왜 나를 불러 세우느냐면.
그 목소리가 왜 들리느냐면.

불렀으니까. 나를. 쓰는 그 사람이.
들렸으니까. 나는. 쓰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어떤 마음으로 누구를 부르는지.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더 잘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당치 않게도 내가 불렸다고 느끼는 사람은.

글씨의 사실은
비어있음을. 행간을. 백지를. 그 공백을 읽어보려 애를 쓰지.

그러므로 베유의 이 문장은 정말로 베유가 부르는 까닭에 가깝다.
비어있다면.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 달라는 말. 그가 간절하게 부르는 사람.
실은 그것이 읽는 이의 엉큼한 쾌락이라는걸.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적어 보낸 편지들을 모조리 도둑질해서 쪽쪽 빨아먹는 기분. 아니, 그가 부르는 것이 나라고 착각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면서.


#그렇게읽어도되냐고물으시면
#그렇게읽을때잘읽힌다
#도둑맞은편지가아니라도둑질한편지ㅋ


라캉이 기독교는 ‘진정한’종교라고 설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모든 것과 관련해 탈-존 한다. "그는 탁월한 탈-존입니다. 즉 간단히 말해 사람으로 나타난 억압이며, 심지어 억압 속에서 전제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진리인 것은 이와 관련해서 입니다." - P203

라캉은 여기서 "나는 ‘스스로 있는’ 나", 즉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가시덤불이 들려준 대답을 가리키고 있다. 라캉은 이것을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는 지점, 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있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고 있다. — 그리고 이것은 강력하게 재귀적인 의미로, 즉 신은 우리의 언어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는 심원한 현실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은 단지 상징적 질서(큰 타자) 안에 있는 이 결여일 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성한 ‘나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실제로는 데카르트적 코기토, 빗금 처진 주체를, 언표된 모든 것에 의해 드러나는 언표의 이러한 순수한 망실점evanescent point을 예시하고 있다. 이 아무것도 없음無 — 그것의 대리인(또는 플레이스 홀더 place-holder [빠져 있는 다른 것을 대신하는 기호나 텍스트의 일부])가 *대상a*이다. - P204

이 사랑의 초점 또는 베유(Simone Weil)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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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자의 분열…

나으분열… (읽어말어) 지젝어렵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은 실재계의 자리에 서서 라캉 정신분석학을 사회학으로 도약시키고 있다. 라캉이 주체와 욕망의 문제에 머물러 있는 사이, 지젝은 그 주체들을 둘러싼 상징계의 구조적 배제를 다룬다. "라캉이 말하는 주체화는 철저하게 순수 욕망과 연관되며 소외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정립하는 과정인 데 반해, 지젝의 주체화는 결국 정치적 주체화, 즉 프롤레타리아 주체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김석, 2014:34). 지젝이 정신분석학 가운데 라캉의 이론을 따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라캉은 주체의 분열뿐만 아니라, 주체를 분열시킨 그 대타자조차 분열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2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징계의 이데올로기가 실재계에 의해 전복되는 근거를 밝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의 이성이나 인식, 합리성의 문제를 넘어 실재계의 욕망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비록 ∼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인 듯이’ 행동하는 이유는 무의식과 실재의 문제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구조화하는가를 주로 다루었지만, 개인의 심리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루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답을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찾은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실천 없는 냉소주의만 난무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씌어졌다. 책의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결국 지젝은 ‘행동하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멀리서 마르크스를 불러들이고, 포스트주의자들의 냉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헤겔과 라캉을 동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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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01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짓뿌렁~!! 🤣🤣

공쟝쟝 2024-04-02 09:15   좋아요 0 | URL
라고 뻥치고 싶지만 진짜라서 한숨..

단발머리 2024-04-02 0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 페이퍼도 만우절 이벤트? ㅋㅋㅋㅋㅋㅋㅋㅋ 어렵다! 뻥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4-02 09:20   좋아요 1 | URL
아…. ㅠㅠ 철학 입문서들과 원문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아는 데… 하우투 리드는 너무 재밌어서… 지젝은 날 괴롭히지 않을 거라 믿었는 데….. 레스토랑에서 한잔하면서 지젝은…… 나는 이 돼지감자놈이!!!! 야 그만해… 그만ㅋㅋㅋ 이러면서 읽고 있고 내일 반납일이고… 승부 본다… 남자가 어려워봤자.. 푸코만 하겠어… 현대 철학 대부분이 푸코보다 더함ㅋㅋㅋ 푸코 제일 나음ㅋㅋㅋ 어렵다 = 진심
그러나 난이도 지젝 <<<<<<< 내 인생
ㅋㅋㅋㅋㅋ 투덜투덜… 완독 일독에 체크합니다! 단발님 기다려영🚶🏽‍♀️
 

동생들한테 심심하다고 깨똑을 남겼지만 돌아오는 건 눈물의 여왕이나 시청하라고. (이미 다 했다는 말은 차마 못 남기고….) 고독해서 사유와 이해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그러나 날씨 너무 좋은 주말 투데이 오후 3:48분:
“칭찬받고 싶지 않아요. 이해받고 싶을 뿐이죠.”
하지만 누가 나를 이해해 주나. 그럴 땐 나도 이해 안 되는 지젝이나 읽자. 😩 #헤겔레스토랑 가야지.. 터덜터덜…!!🚶🏽‍♀️🚶🏽‍♀️🚶🏽‍♀️

“(21) 한나는 고독해야만 사유와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22) 한나는 이념적 사고라면 깡그리 거부했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적 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과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몸소 알려주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려고하기보다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결과 한나의 저서를 읽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정치 전통의 틀 안에서 한나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인데, 사실 한나의 관심은 오로지 ‘이해‘였으며 이처럼 규정하려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멀리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복잡한 과정으로 올바른 정보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활동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현실을 감내할 수 있다.”
“(25)“제 생각으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와 닮은 점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 한나는 사유하는 방법, 즉 행동을 멈추고 최근의 경험과 내 마음속 두려움, 욕망을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을 뿐이다.”

#한나아렌트평전 #사만다로즈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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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3-31 2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렌트의 관심이 ‘이해‘였다는 것에 저도 밑줄을 긋고 싶네요. 오로지 ‘이해‘. 필요한 건 ‘이해‘.....

공쟝쟝 2024-04-01 09:52   좋아요 1 | URL
그리고 그녀는 우리들의 이해의 대상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