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흑인 여성은 위험하다. 그녀들은 인종적 억압에 성적 억압까지 중첩된 이중의 억압 속에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 흑인 여성이 처한 문제에 민족주의 문제까지 겹친다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인권 존중을 호소했던 흑인 민권 운동 조직 내부에서조차도 흑인 여성 억압은 항상 있었다. 196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흑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들과 함께 시민으로서 살 수 있는 평등권을 획득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은 흑인 공동체 내부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억압인 성차별을 인식했다.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가부장적 억압은 인종차별주의와 비슷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책세상, 2017)

* [절판]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문학동네, 2011)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백산서당, 2002)

    

 

 

하나의 사회집단 안에서 대부분 남성은 기득권이며 통제와 지배에 집중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지식 인증체계가 전제하는 이성적 존재기준은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남성 편향적일 수밖에 없고, 여성의 경험을 왜곡하거나 배제한다. 19세기 백인 남성 지식인의 경우 흑인 여성은 머리가 작고 당연히 지능도 낮다는 걸 입증하려 했다. 사르키 바트만(Saartjie Batman)은 남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간 뒤 런던에서 반라의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아프리카 희귀종으로 전시됐다. 죽은 뒤에는 뇌와 생식기가 박제돼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됐다.

 

필리스 위틀리(Phillis Wheatley)는 아프리카계 흑인 출신 시인이다. 흑인 비평가들은 그녀의 시가 노예제도에 대한 저항 의식이 드러내지 않았다고 비판했지만, 그녀는 시를 통해 흑인 차별 문제와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언급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자신들이 창간한 잡지에 위틀리의 시 몇 편을 공개해서 노예제 폐지 여론의 불씨를 댕겼다. 그런데 위틀리의 시집이 발표되었을 때 총 열여덟 명의 남성 지식인들이 그녀의 재능을 검증하려고 했다.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지식인 집단 또는 학문 공동체는 흑인 여성은 열등하다는 편견이 있다.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자신의 인종적 편견을 기본적이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준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그들만의 기준때문에 흑인 여성의 새로운 주장 또는 특출한 재능은 예외로 취급되거나 가차 없이 외면받는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백인 남성의 기준으로 설명되는 세계와 그들의 통제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흑인 여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드러낸다. 그러나 지식인 집단에 소속된 몇몇 흑인 여성 학자들은 흑인 여성에 대한 백인 남성 지식인의 통제 방식에 동조하기도 한다.

 

 

 흑인여성 학자가 학계에서 인정하는 자격을 갖춘 이후에 흑인여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려고 하면, 그녀는 대부분의 흑인여성을 배제하고 폄하하는 체계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라는 압력에 부딪힌다. 흑인여성과 같은 외부인 집단이 엘리트 백인남성을 비롯한 내부인 집단의 특권을 인식할 때, 권력자들은 외부인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외부인들이 절차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안전한외부인 몇몇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권력자들은 지식인증절차에서 대다수의 흑인여성을 배제하기 위해 소수의 흑인여성에게 지식인증제도 내부의 자리를 허락하고, 이들에게 학계와 사회 전반이 공유하는 흑인여성의 열등함을 가정하고 작업하도록 권유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419~420)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종속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서구의 지식 인증체계에 종속된 소수의 흑인 여성 학자들이 흑인 여성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데 한몫했다고 지적한다. 흑인 페미니즘을 종속된 지식이라고 명명하는 그녀의 입장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한 것이다. ‘종속된 지식이 된 페미니즘은 비단 흑인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로 알려진 일제 강점기에도 종속된 지식으로 변질한 페미니즘이 있었고, 여성 해방에 대한 희망을 품은 일부 여성 지식인들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인문서원, 2016)

*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책으로보는세상, 2011)

    

 

 

 

 

 

 

 

 

 

 

 

 

 

 

 

* 김재용 외 친일 문학의 내적 논리(역락, 2013)

  [이 책에서 필자가 참고한 글] 이선옥 여성해방의 기대와 전쟁 동원의 논리 : 여성의 친일 작품과 논설이선옥 우생학과 제국주의의 성정치 : 채만식의 여인전기와 이기영의 처녀지』」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0년대에 우리나라 여성 박사 1호인 김활란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교) 교장은 친일 잡지에 조선 여학생에게 징병을 독려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김활란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여성계 민족단체 근우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친일 인사로 돌변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가정의 개선과 부인 교화 운동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을 주도한 단체는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밖에도 김활란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의 주요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강연과 방송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을 옹호했다.

 

친일 문학의 내적 논리 (역락, 2013)에 수록된 여성해방의 기대와 전쟁 동원의 논리 : 여성의 친일 작품과 논설우생학과 제국주의의 성정치 : 채만식의 여인전기와 이기영의 처녀지』」는 일제 강점기 여성 지식인들이 남긴 논설을 근거로 친일 논리를 분석한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을 쓴 이선옥은 여성 지식인의 친일 행위가 여성 해방에 대한 기대감과 일본 제국주의 논리가 결합하면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김활란뿐만 아니라 시인 모윤숙, 한국 근대 여성주의 운동가로 평가받는 박인덕 등의 여성 지식인들은 여성해방론을 주장했으나 일제의 황국 신민 정책(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의 신하가 되는 것)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기회라고 파악했다. 이 세 사람의 여성해방론, 즉 페미니즘은 일제 논리에 종속된 지식으로 전락한다. 친일 여성 지식인들은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자식을 낳는 군국의 어머니를 예찬했으며 그렇지 못한 조선 여성을 열등한 여성으로 규정했다. 안타깝게도 친일 여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위가 조선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종속된 지식이 된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사의 오점이자 흑역사. 가끔 페미니스트는 그들이 직면해야 할 다양한 여성 억압 논리(가부장제, 군국주의, 민족주의, 계급, 인종차별주의, 성소수자 차별 등)에 자연스럽게 동조할 때가 있다.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불편하더라도 페미니즘 내부의 비판과 성찰이 요구되어야 한다. 여성 운동가, 페미니스트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은 여성 운동의 분열을 조장하여 페미니즘의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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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지음, 에스터 레슬리 엮음, 김정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것은 사진에 담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세계를 수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을 기록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하여 사진으로 찍어놓고 소유하고 싶은 게 사진 찍기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사진가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위즈덤하우스, 2018)는 사진에 관한 벤야민의 글을 엮은 것이다. 이 책에 ‘사진 읽기’의 가능성을 예견한 『사진의 작은 역사』 외 5편의 짤막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벤야민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에스터 레슬리(Esther Leslie)가 6편의 글에 해제(解題)를 붙였다.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내용은 다소 복잡하다. 벤야민은 수집한 자료를 한데 몽타주(montage) 하듯 배치하면서 파편적인 것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는 작업에 천착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글을 썼다. 그가 남긴 글 대부분은 온갖 사료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 채워져 있고, 그것을 빼면, 인용문 사이사이에 끼어든 짤막한 논평이 전부다. 그런 형식상의 불완전성 때문인지 벤야민의 글은 해석하기 거의 불가능한 난해함으로 악명 높다. 다행히 이 책에는 에스터 레슬리의 해제와 상세한 주석이 있어서 벤야민의 사진론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벤야민은 수집가였다. 그는 사소하고 쓸모없는 사물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수집가의 능력이라고 했다.

 

 발터 베냐민에게 진짜 수집가의 특성이란 물건들에 의한 도취, 즉 소유에 앞서 영감을 받는 능력이다. “수집가는 물건을 손에 쥐자마자 벌써 그것을 통해 영감을 받는 것 같다. 물건을 통해 마법사처럼 그것의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 같다.”

 

(한병철, 《땅의 예찬》, 86쪽)

 

사진을 찍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특정한 지식을 새로 얻은 듯한 간접 경험을 하고, 그래서 특정한 힘을 얻은 듯 느낀다고 한다. 우리는 사진기로 마주치는 순간을 찍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진은 단순히 순간의 현실성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 내면의 심상 혹은 발언의 주요 표현수단이 된다. 사진을 찍는 것이 ‘수집’의 과정이라면, 사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수집한 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벤야민은 사진 설명글이 ‘혁명적 사용 가치’를 만들 거로 확신한다.

 

 사진 설명글은 한창 잘 팔리는 사진으로도 혁명적 사용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사진가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찍은 사진에 그런 설명글을 붙이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39쪽)

 

예전 사진은 보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촬영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요즈음 사진은 설명을 붙임으로써 사진의 다중적인 표층으로 인해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하고 명확한 심층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제 사진은 보이는 것이 아닌 ‘읽히는 텍스트’다. 벤야민은 ‘사진으로 혁명하는 방법’으로 ‘사진 읽기’를 제시한다. 그는 사진을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해 발언하거나 사진 설명글을 통해 본다는 것에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기법인 포토몽타주에 주목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포토몽타주는 현실을 폭파한다. 사진과 글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포토몽타주는 사진 속 표층에 가려진 심층을 폭로하거나 표층으로 드러난 현실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한 장의 사진이 수십 개의 말보다 메시지 전달력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사진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진의 한계를 정확히 예언했다. 컴퓨터 합성, 연출, 도용 등의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사진은 진실을 감춘 채 허구를 전달한다. 또한 다른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마치 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대조적으로 사진 편집을 하거나 같은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해집단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상황을 표현한다.

 

사진을 오용하지 않으려면 사진을 보는 시선과 생각을 이동해야 한다. 사진의 의미가 피사체를 찍은 상황, 즉 표층을 넘어서 다른 의미(심층)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이미지가 현혹하는 힘에 가려진 사회의 진실과 허위를 간파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사진이 사회 속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사진은 진실 전달과 진실 왜곡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벤야민은 사진이 우리 사화와 삶에 미치는 양면적인 영향력을 인식했다. 사진에 관한 벤야민의 글은 일상의 삶을 교란하는 ‘위험한 사진’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벤야민은 ‘미래에는 사진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 문맹자’라고 했다. 이제는 사진을 오용하는 사람, 사진의 맹점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 현실을 읽지 못하는 맹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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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3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3 17:07   좋아요 0 | URL
네. 벤야민은 예술, 특히 사진에 대해서 시대를 앞서 간 생각을 했고,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파격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어요. 미완성이 된 <파사주 프로젝트>는 정말 엄청난 결실입니다.

레삭매냐 2018-07-0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의 제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 이런
철학적 분석에 도달할 수 있는 저자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네요.

수집한 사진의 재구성 그리고 혁명적 사용
가치의 발견에까지... 대단합니다.

cyrus 2018-07-04 10:05   좋아요 0 | URL
벤야민은 사진의 예술적 가치, 그리고 사진이 우리 삶에 미칠 긍정적 · 부정적 영향력 등을 예견했어요. 사실 수전 손택, 롤랑 바르트는 벤야민에게 빚 졌다고 봐야 합니다.

suegraphic 2018-07-0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글이 함께있는 작품인가요? 저도 사진을 해서 궁금해지네요.

cyrus 2018-07-04 10:07   좋아요 1 | URL
책에 사진 몇 점 있는데,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19세기에 활동한 사진가들의 흑백 사진 작품이 있습니다.

suegraphic 2018-07-0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빚어지는 사랑의 감정은 아름답습니다. 그중에서도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젊은이들의 사랑보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고난과 역경을 함께 딛고 이겨온 부부의 사랑이 더 끈끈하고 애잔합니다. 부부는 평생을 함께하지만 끝까지 같이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 속도보다 빠르게 가족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립된 1인 가구는 질병 · 사고 등과 같은 위험 발생 때 주변의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늙고 병들어서 의지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 1997)

 

 

 

사랑한다는 것은 참고 이해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을 사랑한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 1997)에서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을 펼쳐냅니다. 스콧은 아내와 함께 미국 버몬트(Vermont)와 메인주(State of Maine)에서 자연과 호흡하는 소박한 삶을 실천합니다. 부부는 53년 동안 함께 농사를 지으며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면서 강연을 하고 저술 활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헬렌은 풍족한 집안에서 자랐고,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소녀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때 인도의 사상가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의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와 결별한 헬렌은 스무 살 연상인 스콧을 만나 또 다시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스콧은 미국 사회의 위선과 폭력을 고발하다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난 신세였습니다. 지식인 사회와 언론에서도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헬렌은 스콧의 사상에 감명 받았고, 스콧이 10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동반자로 살아왔습니다.

 

나이 차가 있고, 살아온 배경도 너무나 다른 헬렌과 스콧을 하나로 이어준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랑의 힘이었을까요? 이 두 사람의 사랑을 가능케 만든 건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부부는 시골로 들어가 손수 땅을 일궈 농장을 만들고 돌집을 지었으며, 죽는 날까지 자연과 어우러진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얻고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나누려고 부지런히 노력했습니다. 스콧을 만나기 전 헬렌은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콧을 만나면서부터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헬렌은 스콧의 반려자가 되면서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삶》은 건강하고 소박하게 사는 법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함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지만, 스콧과 만남을 진솔하게 그린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었을 때 한 편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간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을 읽었습니다.

 

 

 

 

 

 

 

 

 

 

 

 

 

 

 

 

 

 

 

 

* 로드 던세이니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바다출판사, 2011)

* 앨저넌 블랙우드 《웬디고》(문파랑, 2009)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봤던 내용은 헬렌의 독서 취향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만난 상담 전문가들로부터 두 명의 작가를 추천받았습니다.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 던세이니 경)앨저넌 블랙우드(Algernon Blackwood)였습니다. 헬렌은 두 작가의 소설이 ‘이상야릇한 공상의 재미’를 줬다고 술회했습니다.[1] 그리고 헬렌은 큰 소리로 읽기를 좋아하는 책으로 던세이니와 블랙우드의 소설을 꼽기도 했습니다.[2] 저도 이 두 작가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던세이니 경은 아일랜드, 블랙우드는 영국 출신의 작가입니다. 이 두 사람은 주로 환상소설, 공포소설을 썼습니다.

 

 

 

 

 

 

 

 

 

 

 

 

 

 

 

 

 

 

* 엔도 조, 다나베 세이아 《책 읽다가 이혼할 뻔》(정은문고, 2018)

 

 

 

헬렌은 옛이야기, 공상 이야기, 미스터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도 ‘책 덕후’ 기질이 보입니다. 그녀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호기심을 갖게 되었는데, 셰익스피어에 관한 책을 40권이나 모았다고 합니다. 혹시 헬렌도 ‘셰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음모론을 믿었을까요? 스콧의 독서 취향은 헬렌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스콧은 사회운동가답게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아내의 호기심을 ‘탐정 이야기’으로 취급했습니다. 음, 과연 니어링 부부도 독서 취향이 서로 다른 ‘애서가 부부’ 엔조 도, 다나베 세이아처럼 다투었을까요?

 

이 책을 읽은 우주지감 회원이 말했습니다. 부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을까? 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헬렌은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칩니다. 책의 전반부가 헬렌이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스콧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스콧도 헬렌을 존경했습니다. 스콧은 헬렌이 가장 좋은 조언자이며 동행자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상의 공유를 통한 공감과 존경입니다. ‘읽다 익다’ 책방지기 님은 그것이 부부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삶》에 좋은 문장들이 많습니다. 헬렌은 문장을 ‘직접 인용’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을 때 인상 깊은 문장을 베끼고 밑줄을 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독서 습관은 글쓰기 방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명언이 나옵니다. 부부의 사랑을 대변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학물질의 결합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화한다.”

 

 

이 명언의 문제점을 지적한 우주지감 회원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융의 명언이 ‘두 개성의 만남’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영향을 주는 ‘외부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남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마음이 맞아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사랑은 연인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슬프게 이별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연인을 둘러싼 복잡한 외부적 문제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을 현실적으로 보는 사람 입장에서 융의 명언을 본다면 ‘이상적인 사랑 방식’을 그럴듯하게 표현한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학고재, 2007)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헬렌은 고독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외롭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죽음과 고독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부부의 모습은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도린 고르(Dorine Gorz) 부부의 최후와 너무 대조되었습니다. 앙드레 고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사상가입니다. 그는 연극 배우로 활동했던 도린을 만나 58년 동안 부부로 지냈습니다. 도린은 척추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불치병을 얻었고, 앙드레는 아내의 회복을 위해 그녀와 함께 농촌으로 내려가 병간호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고르 부부도 니어링 부부 못지않게 서로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었죠. 고르는 도린에게 바친 편지들을 모아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그 편지 모음집이 바로 《D에게 보낸 편지》(학고재, 2007)입니다. 그러나 2007년 고르는 아내와 함께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르의 편지를 읽어 보면 그가 아내를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화로운 삶을 산 니어링 부부에게 있어 죽음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삶》에는 자발적인 죽음을 맞은 스콧을 지켜본 헬렌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녀는 죽음 역시 삶의 한 과정이며 죽음에 대한 준비를 통해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르도 다가오는 아내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덮치게 될 상실감과 고독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 부부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누가 더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했는지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시간과 방식은 달랐지만, 두 부부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일상의 모든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이들 두 부부가 살아간 인생의 발자취는 사랑을 가볍게 보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1] 39쪽

[2] 137쪽. 초판에는 ‘둔세니’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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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3 06:46   좋아요 0 | URL
부부는 채식주의자였어요. 식습관이 닮아서 음식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ㅎㅎㅎ

stella.K 2018-07-02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헬렌의 독서 취향이 독특했구나.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말야.
나도 오래 전 니어링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정확히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 나.
그땐 아주 감동스러운 건 아니었는데
지금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암튼 좋은 글이다.^^

cyrus 2018-07-03 06:50   좋아요 0 | URL
혹시 《소박한 밥상》 아닌가요? 독서모임에 참석한 분이 그 책을 선물로 받았데요. 그런데 재미없었데요.. ㅎㅎㅎ

stella.K 2018-07-03 10:46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소박한 밥상!
조금 지루하긴 했지.ㅋㅋ

붕붕툐툐 2018-07-0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헨렌 니어링의 이 책을 읽고 채식을 시작했더랬죠. 제가 참 좋아하는 책인데 반갑네요~^^

cyrus 2018-07-03 06:55   좋아요 0 | URL
책에 나오는 니어링 부부의 러브스토리와 편지가 좋았어요. 채식은.. 못 따라하겠습니다.. ㅎㅎㅎ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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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마음의 고향이다. 풍요로운 정원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정원에서 쌓인 피로를 훌훌 털어버린다. 정원은 또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닦는 곳이기도 하다. 땅을 파고, 화초를 심고, 잡초를 뽑는 것은 자연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이 주는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낄 수 있다. 땅은 매우 현명하고도 관대하다. 땅은 아름다움의 영감과 생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평온하다. 정원 한가운데서 혼자 있는 기분과도 같다. 3년 동안 땅을 일구며 ‘비밀정원’을 완성한 철학자의 기록을 담은 이 책의 분위기가 그렇다. 《땅의 예찬》(김영사, 2018)은 땅과 식물이라는 자연의 연결고리에 향한 열렬한 사랑을 담은 책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정원을 자연과 인생이 어우러진 평화와 사색의 공간으로 가꾸고 싶어 한다. 정원 일을 하면서 철학을 접목한 그의 이야기는 정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정밀한 사유의 깊이를 보게 된다. 저자는 시간, 행복, 세계의 디지털화, 죽음 등에 대해 명상한다. 아네모네, 미선나무, 크로커스, 옥잠화 등의 살아있는 존재들의 다양한 모습을 써 내려 간 대목에서는 자연의 솔직함이 묻어 있다. 저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고 성장하는 정원의 비밀을 거울에 비추며 땅의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보여준다.

 

저자는 땅과 식물로부터 삶의 철학을 배운다. 저자는 정원을 가꾸면서 땅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그에게 정원 일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소중한 과정이다.

 

 

 나는 자주 놀라워하며 땅[흙, 지구]을 만지고 쓰다듬는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싹은 진짜 기적이다. 차갑고 어두운 우주 한가운데 지구와 같은 생명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보통은 생명이 없는 우주에서 우리는 작지만 꽃이 피어나는 행성에 산다는 것, 우리가 행성의 존재라는 것을 늘 의식해야 한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한다. 고작해야 이나마 유지해야 할 자원으로만 여긴다. 땅을 보호한다는 것은 당에 그 본질을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31쪽)

 

 

저자에게 있어서 정원을 가꾸는 일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바라보는 사적인 행위다. 그가 정원에서 명상하고 글을 쓰는 일은 그 내면세계에서 발견한 진리, 잔인하게 착취하고 파괴된 땅을 다시 살리려는 시도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땅은 ‘행복’의 동의어이다. 한병철은 이미 여러 차례 ‘디지털 세상’을 진단하고 비판했다(《투명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그는 숫자로 이루어진 디지털 문화로 인해 사람들이 지향하고 원하는 것들이 공통으로 ‘매끄러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매끄러움’이 관통하는 디지털 세상은 비밀과 저항을 없앤다.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디지털 세상에 남과 비슷한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고 ‘좋아요(like)’를 많이 받길 원한다. 무한정한 자유가 결국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폭력이 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개인의 자기착취를 유도하는 ‘디지털 권력’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 착취의 노동자’를 ‘자연(땅) 착취’의 함정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우리 스스로 행복을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생명이 있는 곳엔 그 어디든지 아름다움의 비애가 있다. 아끼던 화초가 죽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정원보다 더 심오하게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그 소멸의 주기를 보여 주는 게 있을까? 하지만 정원사는 영원한 성장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정원을 잠재우고 있을 때도 봄이 되면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안다. 정원을 사랑하는 한병철에게 흙을 만지는 일은 연애, 노동, 성찰이다. 《땅의 예찬》은 정원에서 그가 자연을 만나 사랑하고 일하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내밀한 기록이다.

 

이 책의 '옥에 티'꽃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지식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오독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문장)이다.

 

 

부용은 한국의 국화(國花)다. 한국어로는 무궁화. (101쪽)

 

 

부용은 무궁화와 비슷하게 생긴 꽃이다. 부용과 무궁화는 쌍떡잎식물 아욱목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학명이 다르고 생김새에 약간 차이가 있다.

 

 

 사프란 꽃 한 송이를 꺾어서 보드리야르의 책 《유혹에 대하여》에 꽂아두었다. 겨울밤 사프란 크로커스는 그 자체가 유혹이다. 138쪽과 139쪽에 아름다운 꽃모양이 찍혔다. 다음의 구절들이 사프란 색깔을 입었다.

 

 모든 범죄도 그렇지만 유혹의 과정에도 무언가 비개인적인, 어딘지 제의적(祭儀的)인, 주체를 넘어선, 초감각적인 요소가 있다. 현실에서 유혹자나 그 희생자의 체험은 그런 요소의 무의식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의 주체들이 소모되어 없어지는, 그런 형식의 제의적 연습. 그래서 전체는 미적 작품의 형태와 아울러 제의적 범죄의 형태를 포함한다.

 

 아름다운 소녀의 유혹하는 힘, 그녀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유혹자의 인위적인 연극론과 전략에 의해 희생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심리학, 영혼, 주체성 등이 없이 나온 유혹자의 기술이 아름다운 소녀의 자연적인 유혹하는 힘을 이긴다. 유혹자는 유혹의 제의(祭儀) 과정에 자신을 바친 사제다. (119~120쪽)

 

 

‘아름다운 소녀의 유혹하는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희생되고 파괴되어야 할까? 왜 나는 ‘아름다운 소녀의 유혹하는 힘’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순수한 모습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롤리타(Lolita)’ 이미지가 생각나는 걸까? 아무튼 이 문장은 계속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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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0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시화 시인이 발견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정원사가 있으면 정원이 있다’ 고, 정원이 있고 정원사가 있는 게 아니고...즐거운 한주 시작하세요!

cyrus 2018-07-02 17:17   좋아요 0 | URL
정원사가 없는 정원에는 잡초가 많아질 거예요. 그만큼 정원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

2018-07-0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2 17:17   좋아요 1 | URL
정원을 잘 가꾸셔서 정원의 세계를 담은 사진집 한 권 내셔요. ^^

레삭매냐 2018-07-0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쌩뚱맞지만 최근 읽고 있는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에 나오는 서구의 도전과 아시아의 응전
이라는 도식이 떠오릅니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서구의 그것
과 자연동반 혹은 친화적인 동양의 아이디어
차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런지요.

그나저나 부용이 한국의 국화라는 말은 정말
처음 들어 보네요.

cyrus 2018-07-02 17:24   좋아요 0 | URL
<땅의 예찬>에서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 중심적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아요. 땅을 소중히 여기자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했습니다만, 자기 성찰에 골몰하는 것 같아서 뭔가 아쉬운 느낌이 많았습니다. ‘부용은 한국의 국화’라는 문장을 보자마자 저는 무궁화와 부용이 같은 꽃인 줄 알았어요. ^^;;

카스피 2018-07-0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도시에서는 정원란 말을 이제 더이상 듣기 힘든것 같아요.제가 살던 곳도 요 몇년새 작은 마당(혹은 정원)이 있던 단독주택들이 모두 빌리로 바뀌더군요ㅜ.ㅜ

cyrus 2018-07-03 06:56   좋아요 0 | URL
옥상에 작은 텃밭이나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미세먼지의 양을 생각하면 옥상 텃밭도 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민주주의
정희진 외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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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요구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페미니즘 논의가 주목받으면서 이전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요소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인식 역시 뿌리 깊게 남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성보다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비롯해 고용조건 개선, 권익 · 지위 향상 등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현안이 남아 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사회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에의 참여가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 공천 할당제는 선거 공천 때마다 매번 반복돼 왔던 문제이지만 실제로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시도지사 후보로 등록된 이 중 여성은 6명에 불과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는 35명이다.[1] 6·13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여성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 여성을 공천하지 않았고, 기초단체장도 고작 11곳에 후보를 내 7명이 당선됐다. 선거 과정에서도 여성 후보들을 향한 ‘혐오’의 시선은 일상화돼 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녹색당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를 한 남성이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남성은 페미니스트 후보가 당선되면 남성의 일자리가 빼앗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선거 벽보를 훼손했다고 진술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젠더는 일상생활부터 국가정책, 사회운동, 지식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장 첨예한 논쟁 주제 중 하나다. 페미니즘을 모르면 인간과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미투(#MeToo) 이슈에 대한 상반된 반응에서 보듯이 젠더 이슈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도 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없을까. 젠더 이슈는 정치에서 늘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를 다른 사회적 문제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인식은 우리나라 정치권의 젠더 감수성(gender sensibility) 수준을 보여준다.

 

이번에 나온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교유서가, 2018)오랜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얼룩져왔던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지형을 7명(정희진,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서민, 손아람, 홍성수)의 페미니즘 시선으로 바라본 책이다. 지난해에 열린 <한겨레21> 페미니즘 강연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정희진은 가부장제 사회의 남녀 관계를 ‘톰과 제리’로 비유한다. 톰과 제리는 한쪽이 불행해야 한쪽이 행복해지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고양이 톰이 ‘남성’, 생쥐 제리가 ‘여성’이라고 한다면 남성과 여성은 섹스하는 적대적 모순 관계이다. 남녀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서 가족을 구성할 수 있지만, 힘과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힘들고 불행한 삶에 직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젠더는 정치적 문제가 된다. 젠더는 경험상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일지 몰라도 그것의 생성과 작용은 결코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페미니스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The personal is political)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정희진은 문재인 정부의 유일한 약점이 ‘젠더’라고 지적한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와 ‘촛불 혁명’을 시대정신으로 해서 집권했다. 하지만 일부 진보세력은 여성 문제, 성소수자 문제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남성 연대의 도덕적 우월감은 여 · 야, 보수 · 진보 할 것 없이 공고하다. 진보 정권도, 보수 정권도 그랬다. 젠더 이슈는 뒷전이다. 쟁점화가 안 되고 별 필요 없는 것처럼 그냥 묻혀버린 것이다. 권김현영은 80년대 민주 세력이었던 ‘40대 서울 남성 연대’가 한국 사회의 기득권이 되면서 젠더 이슈를 외면했다고 진단한다.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 손희정은 ‘남성 검사(檢事)’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드러낸 왜곡된 남성성과 남성연대를 분석한다.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검사는 도덕성과 정의감을 지킬 줄 아는 모범적이고 훌륭한 남성으로 묘사된다. 불합리한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는 정의감을 가졌고, 음모론을 파헤치는 ‘시민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영화 속 남성 검사는 ‘나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이 반영되어 있다. 이 뻔뻔한 남성의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사회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다른 문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한다.

 

보수 정치인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하나의 정책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고, 당사자인 성소수자들은 모욕감과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도 성소수자의 인권은 계속 ‘나중으로’ 밀리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은 인권의 보편성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특수성에 의해 ‘나중의 일’로 치부된다. 한채윤(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은 성소수자 차별 및 혐오를 합리화하는 종교(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와 정치의 정경유착에 주목한다. 법학자 홍성수는 혐오표현을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에 근거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혐오표현은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이 감정 차원을 넘어 현실 세계로 드러난 문제이다. 홍성수는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은 민주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말한다.[2]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도는 한 사회의 시민의 눈높이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나타낸다.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든 그 성숙도는 여성과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7인은 일상의 여성 문제와 성소수자 문제를 우리 사회 최대의 정치적 상황으로 여긴다. 그들의 이러한 사유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과학자의 비판 정신과 결부돼있다. 그들이 끝도 없는 의문부호를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젠더 권력은 왜 현실 정치로 사소화되는가(정희진)”, “왜 남자들은 여성혐오를 하면서까지 여자들을 침묵시키려고 하는가(서민)”, “대중문화 속 여성은 왜 수동적일까?(손아람)결국엔 날 선 질문들의 끝을 독자에게 겨눈다. 남성만 진보가 아니고 여성과 성소수자와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우리는 사실 미완의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는 그간 남성, 가족, 이성애 중심의 ‘정상 시민’이 주도한 운동에 머물렀던 민주주의의 외연을 넓혀줄 것은 물론 넓게는 페미니즘 및 성소수자 운동에서 사적인 생활 영역과 공공 영역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실마리를 준다.

 

 

 

 

[1] 「6‧13 지방선거 여성 정치인 유리절벽 여전…광역·지자체 장은 남성 중심」 (여성소비자신문, 2018년 6월 25일)

 

[2] 홍성수의 강연 내용은 그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 2018)에 나온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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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7-0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bGaG4pR0GWE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비판적 시각이 많더군요.

마립간 2018-07-01 14:42   좋아요 0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IooGFjEyR3M
https://www.youtube.com/watch?v=EBzEQaRzUTY

추가 동영상입니다.

cyrus 2018-07-02 12:01   좋아요 0 | URL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내부 비판’과 성찰을 통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처음으로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페미니즘을 비판합니다. “나는 알고 있는데, 너희 페미니스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냐”, “니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틀렸으니 니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는 식으로 공격하니까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진짜 의미가 변질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됩니다. 세 편의 동영상을 다 봤는데요, 이미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지한 페미니즘의 문제점이 나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왜곡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마립간 2018-07-02 12:09   좋아요 0 | URL
어떤 부분이 왜곡된 내용입니까?

이미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지한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남성이 지적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cyrus 2018-07-02 12:18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두 번째 댓글의 첫 번째 동영상 50초 화면에 보면 ‘여성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해He for she!!’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렇게 생각한 페미니스트가 있겠죠. 그렇지만, ‘He for she’는 여성을 위해 남성에게 강요하자는 뜻의 구호가 아니에요. 이 동영상을 만든 사람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고, 페미니즘을 비판했다면 ‘He for she’의 원래 의미를 알려줬어야 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미 페미니즘이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 ‘남성’이 지적하지 말라고 언급했습니까?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을 ‘남성’으로 보셨나요? 저는 ‘페미니스트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남성이라고 상정하지 않았어요.

마립간 2018-07-02 12:26   좋아요 0 | URL
첫 번째 지적은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번째 답변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제가 이미 페미니즘이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 ‘남성’이 지적하지 말라고 언급했습니까? ; cyrus 님에 대한 반문이 아니라, (여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문입니다. 보다 일반화하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남녀를 불문하고 용인하지 않는다‘가 제 판단입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이 종교화하고 있다고 했었죠.

‘He for she’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에는 동의하시나요?

cyrus 2018-07-02 12:38   좋아요 1 | URL
저는 페미니즘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남성은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땐 워마드의 존재를 몰랐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워마드를 알게 됐어요. 마립간님이 말씀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남성을 허용하지 않는 워마드를 뜻하겠군요.

지난달에 워마드를 비판하는 글을 썼어요.
http://blog.aladin.co.kr/haesung/10166605

제가 페미니즘 강연에 참석해서 배운 내용, 페미니즘 독서 모임 활동을 하면서 들은 내용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의 종교화’라는 마립간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워마드의 종교화’인데, 페미니스트라면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입니다. 워마드의 성소수자 혐오 및 차별에 대해서 지적하는 여성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마립간님이 언급한 동영상에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페미니스트’를 지적한 장면이 있는 걸로 압니다.

마립간 2018-07-02 13:41   좋아요 0 | URL
의견 감사합니다.

요즘 제가 알라딘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어 잘 방문하지 않지 않아 cyrus 님의 워마드에 대한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의견 교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