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이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8
아모스 오즈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 Soumchi (1978)

 

 

 

첫사랑.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세 글자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금세 하얀 뭉게구름이 하트 모양을 그리며 뭉실뭉실 피어오를 것만 같다. 첫사랑의 추억은 우리의 마음속에 남는다. 그것을 담아두는 저장고는 머리가 아니라 대개 가슴의 영역이다. 열병 같은 첫사랑의 기억도, 부질없어 보이던 청춘의 방황도 세월이라는 이름 속에 사라지는 것 같지만, 어느새 추억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우리의 가슴 속에 잔잔하게 스며든다.

 

아모스 오즈의 《첫사랑의 이름》은 우리에게 잊힌 첫사랑의 추억을 다시 환기하는 소설이다. 평범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 어쩌면 다소 작위적하고 통속적인 설정으로 비칠 수도 있었던 이 잔잔한 성장 소설이 외국 문학상 심사위원의 지지를 이토록 깊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삶의 진실이 문자로 명료하게 드러날 때, 그것을 읽는 독자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소설의 서늘한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수줍은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의 감정 변화를 생생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시선이 인상적이다.

 

책에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신, 동네 친구들이 그를 놀리기 위해 붙여준 별명이 이름을 대신한다. 소년이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이 독특하다. 지리 수업 시간에 소년은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한다. 훌라 호수를 ‘숌히(Soumchi) 호수’라고도 부른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당황한다. 선생님은 탈무드에 훌라 호수의 또 다른 지명이 있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교실의 아이들은 소년의 대답이 완전히 틀린 줄 알고, 크게 비웃는다. 이때부터 소년은 ‘숌히’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숌히가 좋아한 소녀 에스티는 전형적인 ‘츤데레’(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 스타일. 에스티는 숌히를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숌히는 어떻게든 그녀의 관심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숌히는 외삼촌으로부터 자전거를 생일 선물로 받는다. 좀처럼 받기 힘든 특별한 선물을 자랑하고픈 마음에 숌히는 아이들 앞에서 자전거를 탄 채 등장하지만, 아이들은 숌히의 자전거가 여성용이라고 놀린다. 자존심 제대로 상한 숌히는 자신을 동네북으로 여기는 이곳을 벗어나 저 멀리 아프리카의 잠베지 강으로 떠나려고 결심한다. 말 그대로 가출을 꿈꾼다. 하지만 여행의 동반자가 될 자전거를 부잣집 아들인 알도의 장난감 기차 세트와 바꾼다. 이번에 고엘 게르만스키라는 소년이 자신이 키우는 개를 숌히의 장난감 기차 세트와 맞바꾸자고 강압적으로 제안한다. 너무나도 순진한 숌히는 개가 족보가 있는 순종이라는 고엘의 말을 믿고, 장난감 기차 세트를 주는 대신에 개를 얻는다. 숌히는 뒤늦게 자신의 결정에 후회한다. 하루 동안 모든 걸 잃어버린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한다.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에스티의 아버지를 만난다. 에스티의 아버지는 친절하게 숌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뜻밖의 행운! 숌히는 에스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한다. 운 좋게도 에스티의 방을 처음 구경하게 되고. 방에 그녀와 함께 있는 겹경사를 누린다. 이 만남을 계기로 숌히와 에스티는 다정하게 지내게 된다. 여기까지 숌히가 어린 시절에 겪은 첫사랑의 추억이다.

 

숌히는 뜻하지 않은 상황 덕분에 극적으로 에스티와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 독자는 알고 있으리라. 운명이란 자기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점을. 세상은 점점 변하고, 영원할 것 같은 우리 마음도 세월 따라 무심히 변한다. 숌히는 히말라야나 아프리카에 가면 시간이 그대로 멈춘 장소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의 변화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 숌히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나이를 먹게 된다.

 

이 소설의 에필로그 제목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All's Well That Ends Well) 제목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희곡의 여주인공 헬레나도 숌히처럼 외로운 존재에다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아가 된 헬레나는 후견인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녀는 후견인의 아들을 좋아하지만, 그는 헬레나에 관심이 없다. 가출한 숌히가 에스티의 집으로 초대받은 과정이 희곡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헬레나와 숌히는 사랑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시작되는 모든 사랑이 셰익스피어 희곡의 결말처럼 행복하게 끝맺지 못한다. 숌히가 에스티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밝히지 않은 채 소설은 여운을 남기면서 끝난다. 수줍은 마음으로 에스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숌히에게 삶은 그리 관대하지만은 않다. 에필로그 제목은 달콤하면서 씁쓸한 첫사랑의 추억을 의미하는 슬픈 반어 표현이다.

 

기억 속 앨범 한구석에 있는 첫사랑의 추억을 끄집어내면 멋쩍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이 희미해지고 그렇게 우리는 남자 또는 여자로 성장해 간다. 진한 사랑 한번으로 평생 함께 살았으면 하는 바람들은 철없는 기대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변하고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다시 기억으로 돌아온다. 녹음기에 담겨 있는 소리가 재생버튼을 누르면 언제라도 다시 들려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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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의 탐구 (La Recherche de l'absolu, 1834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노름꾼》은 도박중독자의 심리를 뛰어나게 묘사한 명작이다. 이 소설은 바로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의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한동안 도박에 빠져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앞으로 쓰게 될 작품을 담보로 선금을 받아 도박자금으로 썼다. 이 때 나온 소설이 《노름꾼》이다. 작가의 전 재산이랄 수 있는 문학혼을 걸고 도박자금을 융통한 거로 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도박중독자임에 틀림없다.

 

도박 얘기에 ‘삼성 라이온즈’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 주축 선수 3명이 해외 원정 불법 도박을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나는 이승엽이 아시아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하고,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본 삼성 라이온즈 팬이다. 어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너무 화가 난다. 도박 혐의로 의심받는 이 세 명의 선수가 이번 시즌 우승에 이바지를 했고, 올 시즌에 역대 최고 기록도 남겼다. 야구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투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긴 이닝 동안 오래 던지면서 실점을 적게 허용하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홈런을 뻥뻥 쳐주는 거포 타자들이 즐비한 팀이라도 선발이든 중간이든 투수가 공을 제대로 못 던져서 점수를 허용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세 명의 투수가 도박 혐의 사실이 인정되면, 그들은 ‘투수 노름’으로 인해 내년 선수 생활을 장담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엄청난 결과를 잘 알면서도 부동산, 카지노, 경마, 벤처 등 어떤 아이템이 ‘돈 된다’는 소문만 나면 앞뒤 재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돈 놓고 돈 먹기’란 심정으로 부나방처럼 덤벼든다. ‘대박’을 쫓다가 그만 ‘쪽박’ 신세가 되어 패가망신한다. 오늘날에는 로또, 도박이 사람들에게 대박의 꿈을 부풀리는 위험한 놀이라면 과거에 황금이 귀했던 시절에는 연금술이 한탕주의식 풍조를 불러일으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유행한 연금술은 값싼 금속이나 돌 등을 금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시작되었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고, 자세한 비법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개는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구리, 주석, 납, 철의 4가지 합금을 만들어 비소나 수은의 증기를 쬐면 백색을 띤 ‘은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이때 금으로 만드는 씨앗의 역할을 하는 소량의 금을 촉매제로 첨가하면 일이 마무리된다. 오랜 세월 수많은 실험을 거쳤지만 역사상 연금술을 통해 금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연금술사는 아무도 없다. 그야말로 허황한 꿈이다. 연금술에 푹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들의 무수한 시행착오가 오늘날 화학지식과 화학공업의 모태가 되었다. 그래도 허황한 일확천금의 꿈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한 연금술을 좋게 볼 수 없다. 연금술은 수없이 시도해봤자 ‘꽝’만 나오는 복권과 같다.

 

한탕주의식 풍조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마저 힘들게 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발자크의 《절대의 탐구》이다. 소설의 주인공 발타자르 클라스는 훌륭한 귀족 가문 출신의 남자다. 그는 화학 실험에 관심이 많다. 소설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클라스는 프랑스의 유명한 화학자 라부아지에의 제자가 된 적이 있다. 어느 날 화학자이자 장교인 폴란드인 베르초프냐를 만나면서, 화학 실험에 열중하게 된다. 그가 이토록 실험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의 모든 물질을 단일한 ‘절대’ 원소로 만드는 것. ‘절대 원소’로 만드는 과정을 발견하면, 황금을 만드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클라스는 허황한 진리를 믿으면서 자신의 방에 온종일 틀어박혀 실험에 몰두한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간다. 아내는 실험에 빠진 남편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예전 관계로 되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부부의 사랑은 광적인 학문 탐구열을 이겨내지 못한다. 아내는 홀로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다가 병을 앓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제 아내의 역할은 고스란히 클라스의 딸 마르그리트가 맡게 된다. 아내가 죽은 뒤에도 클라스의 실험 정신은 갈수록 심해진다. 가족들 몰래 화학 실험 기구를 사는 바람에 빚이 늘어나게 된다. 클라스는 아내의 유산뿐만 아니라 딸이 물려받은 유산 일부를 빌리면서까지 화학 실험에 필요한 것들을 마구 사들인다. 이런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마르그리트는 좀 더 강경한 자세로 나서서 아버지의 실험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노력한다. 

 

《절대의 탐구》는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인데도,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 벅차다. 발자크 특유의 장황한 묘사에 금세 집중력을 떨어뜨리지만, 무엇보다도 발타자르 클라스의 행동을 보는 내내 짜증이 일어난다. 사실 가정을 소홀히 하고, 말도 안 되는 실험에 집착한 클라스 같은 남편의 행동은 이혼 사유 감이다. 소설 후반부에 이를수록 클라스의 추태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다. 딸이 돈을 빌려주지 않자, 징징대다가 자살 소동을 일으켜서 동정심을 유도하는 모습이 꼴불견이다. 언젠가는 절대 원소를 발견하면 즉시 돈을 갚겠다고 약속하는 모습도 보기 흉하다. 발타자르 클라스는 최악의 남편상, 최악의 아버지상을 동시에 갖춘 최악의 주인공이 되시겠다.

 

어떤 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공통으로 손이 잘리면 발로라도 한다는 식으로 끝까지 집착하는 성향을 보인다. 상대방이 절제하라고 조언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좋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에게 따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참견하느냐고 화를 낸다. 중독 증세가 심한 사람들은 자기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또한, 자신의 중독 증세가 심한 상태라는 것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절대의 탐구》를 읽는 내내, 이번 주 월요일에 방영했던 TV 프로그램 ‘안녕하세요’가 생각났다. 하필이면 그 방송에 낚시에 재미 들인 아버지, 게임 중독 어머니 그리고 폭음하는 아버지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세 사람 다 중독의 원인은 달라도, 증세는 비슷했다.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중독도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 헤어나기 힘든 마음의 병이 된다. 집착할수록 자기 영혼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영혼마저 갉아먹는다.

 

 

 

 

 

※ 눈 뜨고 못 봐주는 오자

 

* 1912년 8월 하순 어느 일요일, 저녁기도가 끝난 뒤, 한 여인이 뜰을 향한 창문 앞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297쪽) → 뜻밖의 타임머신

 

* 자신을 못생겼다고 수군대는 세상의 평판에 순종하는 젊은 처녀의 사랑을 잘 묘사하려면, 좋이 책 한 권은 필요하지 않을까? (307쪽) → 종이책? 그거 좋지!

 

* 발랄한 취주악의 팡파르에밖에 비유할 길 없는 효과를 내고 있는 빛의 범람 속에... (347쪽) → 여기에 함정이 있어!

 

* 클라스 부인이 천사를 그린 귀드 레니의 그림 앞에서 노신부를 불러세웠을 때... (380쪽) →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Guido Reni’를 ‘귀도 레니’라고 쓰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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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6 1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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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1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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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만들었거나 만들어진 틀 속에 갇혀 산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객관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모두 왜곡된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편견으로 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 소개하겠다.

 

시카고대학 소속 심리학자들이 경찰관이 범인을 체포하는 방식의 시뮬레이션 컴퓨터 게임을 고안했다. 게임 규칙은 간단하다. 참가자는 경찰관이 되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범인이 보이면 재빨리 총을 쏘면 된다. 범인은 한 손에 권총이 쥐어져 있고, 범인이 아닌 선량한 사람은 휴대폰 같은 위험하지 않은 물건을 손에 들고 있다. 화면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되었다. 선량한 사람이 다치지 않고, 정확하게 범인에게만 총을 쏜 참가자는 상금을 받는다. 참가자들은 상금을 얻기 위해 화면에 끝까지 집중했지만, 위험인물에게 총을 쏘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당히 늦게 결정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있는 흑인 남성을 쏘고, 무기를 소지한 백인 남성을 보내주는 실수를 반복했다. 호주 심리학자가 시카고대학의 실험과 아주 비슷한 방식을 시도했다. 이번에 터번을 쓴 남성을 화면에 등장시켰다. 이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평범한 복장의 남성보다 머리에 터번을 쓴 남성을 볼 때 더 많이 총을 쏘았다.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그가 은신 생활을 하는 동안 외신은 하얀 터번, 길게 자란 수염의 빈 라덴 사진과 영상을 반복해서 공개했고, 터번과 수염은 테러리스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상징이 각인된 사람은 터번을 쓴 긴 수염의 중동인만 보면 테러리스트로 의심한다.   

 

 

두 가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위험인물인지 아닌지 식별하는 데 어려워한다. 게임을 하다가 간혹 생기는 단순한 실수로 가볍게 이해해선 안 된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 평범한 시민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오인되어 경찰관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중동인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 내 반이슬람 정서가 높아지면서 아랍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성 범죄가 늘어났다. 이슬람계에 대한 보복성 범죄 증가는 전혀 놀라울 게 못 된다. 지금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이슬람 공포증을 유발하는 수사적 표현을 구사하는 정치인, 언론인들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무슬림과 아랍계 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은 채 증오감을 더 키운다. 터번을 쓴 남성만 보면 무조건 테러리스트로 의심하는 무시무시한 편견이 형성된다.

 

 

 

 

 

'수염 난 장난꾸러기' 스웨덴지부 단체 사진 (사진출처: 연합뉴스)

 

 

무장세력 IS의 난폭함이 갈수록 심해지면 무슬림에 대한 편견도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스웨덴에서 남성들로 구성된 친목모임 단체가 IS 일원으로 오인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성회원 30여 명으로 구성된 ‘수염 난 장난꾸러기들’이 스톡홀름에 있는 고성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단체 깃발을 가지고 왔는데, 검은색 바탕의 깃발에 ‘X’자로 교차한 두 개의 검이 그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흡사 해적 깃발과 비슷하게 생겼다. 깃발을 들고 무리 지어 고성을 찾은 단체 회원들을 목격한 사람은 처음에 그들이 IS조직인 줄 알고 경찰로 신고했다. 아마도 신고자는 수염 난 사내들이 오사마 빈 라덴과 비슷하게 생겨서 위험인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뉴스가 공개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일원들은 공통으로 수염이 많이 자라나 있다. ‘수염 난 장난꾸러기들’은 형제애, 자선, 친절을 목표로 생활하는 엘리트 남성들의 친목단체다. 스웨덴 지부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지부가 있다. 혹시 외국을 여행할 때 정장 차림에 덥수룩한 수염이 있는 남자들이 때로 모여 돌아다닌다면, 일단 무서운 사람으로 오해하지 마시라. ‘수염 난 장난꾸러기’의 단체 깃발도 기억해두시길.

 

인종 편견은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는 범죄가 잦아서 흑인 범죄 성향이 높다는 편견 때문에 비무장 흑인마저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지난달 말에 휠체어를 탄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흑인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다른 것을 선천적으로 두려워하는 심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이 흑인이어도 여전히 흑인을 범죄와 연관 지어서 두려워하는 미국인이 많다. 사실과 맞지 않은 원초적 두려움은 편견의 뿌리가 되어 우리 뇌 속에 자라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 하퍼 리의 소설 《파수꾼》에는 흑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편견에 쉽게 조종당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진 루이즈 핀처의 고모는 과거에 메이콤 마을에 일어난 흑인 폭동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NACCP(흑인 인권단체)에 반감을 품는다. 루이즈의 친구는 흑인 인권 운동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한 음모로 믿는다.  

 

뚜렷한 믿음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훌륭한 지침이 된다. 삶을 지탱해주는 기준이 없으면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중심이 없으니 늘 주변에 휘둘린다.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행동이 나도 모르게 잘못된 편견에 매몰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타인을 향한 편견은 증오가 담긴 화살이 되어 선량한 사람의 피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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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0-16 16:14   좋아요 1 | URL
그래서 편견이라는 게 정말 무서워요. 저 또한 그런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는데, 이런 위험을 감지하지 못해요.

[그장소] 2015-10-16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편견일까요? 조종일까요? 일종의 시그널에 계속 노출되서 무의식 중 세뇌라면..아니..의식중 세뇌일 수도..
계속 암시를 줬어요. 대중적 매체를 통해서..그들은
다르다고요...아닐까요...?! 선택되어지도록 ..이 실험은 이미 세팅 자체가 의미 없었는 건지 몰라요.

cyrus 2015-10-16 16:33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말씀하시는 ‘일종의 시그널’이 ‘편견’과 비슷한 의미로 본다면, 제가 소개한 실험이 대중매체가 전파한 편견에 조종당한 사람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겠군요. 이 글의 요지는 편견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편견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건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마립간 2015-10-16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수꾼>에는 흑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편견에 쉽게 조종당하는 사람들. ; 이 문구를 보니, 고양이를 무서워 하는 사람들과 강간을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떠오르네요.

cyrus 2015-10-16 16:39   좋아요 1 | URL
어떤 사람들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너무 무서워서, 고양이 자체를 싫어하기도 해요. 밤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무섭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고양기가 알고 보면 매력 있는 동물이에요.

AgalmA 2015-10-16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공포와 편견이 참 미묘해지는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진화적인 자기 보호본능상 어떤 사건을 트라우마적으로 겪게 되면 편견이나 병증으로 뿌리내리게 되는 상황이 되는 듯 싶으니까요.
˝꼬마 앨버트˝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포 조건반사를 보려고 한 잔인한 실험은, 꼬마 앨버트가 흰쥐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다른 조그만 털 난 동물 전체, 흰 수염에도 공포증을 갖게 만들어 산타클로스도 무서워했다고 하죠. 이처럼 ˝확장성˝이 편견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이죠.
여하간 이 행동주의 관점의 실험은 뇌과학 쪽에선 이의를 제기했죠. 조건형성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인간 뇌가 쥐 같이 병원균을 옮기는 생물을 겁내게끔 만들어졌다는 의견.
이런 실험을 받은 아이들이 단명하거나 사회부적응으로 고통당하는 등의 뒷이야기들은 더 처참하고....

덧붙여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그 자녀들이 유전적으로 공포 불안 상황에 대한 뉴런이 더 많다는 것도 의미심장...
아무튼 참 복잡한 인간 심리...

[그장소] 2015-10-16 20:48   좋아요 0 | URL
음...더 가면 공포..그렇죠.
알게모르게 노출이 자연스레 이뤄지고 있다는걸.
저는 말한것이고.
cyrus 님은 딱 저 견해를 놓고 만 말씀하신 것이고요.
거기서 파생된 연쇄적 반응에 대해 마립간님 Agalma님이 정리를 해 주신 셈..
제 얘기는 좀 치우친 면이 있답니다 .전문 분야로 논한 게 아니니 너그럽게 양해를 바랍니다.^^

[그장소] 2015-10-16 20:50   좋아요 0 | URL
사람이 참 못할 짓을 과학이란 명분으로 많이해요.
이놈의 호기심...ㅎㅎㅎ
심리..이걸 탓해야하나? 인간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

AgalmA 2015-10-16 21:02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말씀하신 대중매체적 선동도 일리 있습니다.
저는 인간 자체의 심리 작동 방식에서 보려고 한 거여서 맥락이 서로 달랐을 뿐 서로 보족적이지 충돌될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란 명분...뭘 모르니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고 아니겠습니까...빛과 어둠처럼 득이 있는 만큼 피해도 불가피하고요. 득보다 실을 더 피해야 할 텐데 그게 참...

cyrus 2015-10-19 20:01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의 의견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갈마님이 지난주에 제가 달았던 댓글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풀어쓰셨어요. 선동으로 인한 확장성이 편견을 조장하는 원인입니다. 제가 ‘선동’이라는 표현을 썼어야하는데,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어요. ‘대중매체가 전파한 편견에 조종당한’이라고 쓴 표현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아마도 제 댓글이 그장소님의 의견을 반박하는 의미로 보인 것 같습니다. 큰 오해 없으면 합니다. ^^

[그장소] 2015-10-1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galma 님 말씀 대로 같은걸 놓고 서로 각자의 방향에서 보고자 한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하하핫~

[그장소] 2015-10-19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저는 반박으로 본적은 없는데 .왜 저는 선동 이란 단어를
선호치 않아 서 안썼거든요.^^ 너무 우회를 한 탓에 배려 토스가 서로..주어지다보니..조심성만 가득 해진 면이 있단 생각 이..들어요.그냥 포크로찍듯 그 단어를 적재적소에 써야 한단걸..또 배우네요.^^
cyrus님 오해나 반박이나..그런 느낌이 아니고 저는 즐거웠어요.진심으로.^^

cyrus 2015-10-19 20:39   좋아요 1 | URL
좋게 보셔서 고맙습니다. ^^

[그장소] 2015-10-19 20:43   좋아요 0 | URL
저야 다른 사례를 가져와 대입을 시킨 셈이니 이해를 바랄 쪽은 제 쪽이 분명하거든요.
잘 받아주셔서 전 이야기에 흥미가 한껏이었고요.
^^
다시 읽어봐도 논점에 벗어난 글이 아니고.
제 얘긴 다른 사례의 붙임 정도. .로 참고 해주시면 했었어요.ㅡ그러니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ㅎㅎ
 
경제학자들은 왜 싸우는가 - 세상을 움직이는 4가지 경제이론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간결한 입문서!
질 라보 지음, 권지현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우선이냐. 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고전적인 명제다. 효율과 평등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중요시하느냐는 것으로, 이 문제는 경제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국민이 배불리 먹으려면 일단 파이를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고, 파이를 크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공정하게 나누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 역시 타당하다. 그래서 이 논쟁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정당은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갈라지고, 선거 때마다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 이렇듯 경제학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친숙한 학문이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은 이제 일상이 되었고 더 이상 경제가 빠진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경제가 학문이 되는 순간, 우리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경제학의 거장이라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 케인스 같은 학자들도 학창시절 한번쯤 우리를 골탕먹였던 악명 높은 인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 라보의 《경제학자들은 왜 싸우는가》는 그러한 거부감을 줄여주는 책이다. 학자들의 핵심 이론과 좀 더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 다루는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 케인스, 마르크스, 칼 폴라니다. 교과서에서처럼 그래프와 공식으로 뒤덮인 난해한 설명은 없다. 대신 이러한 이론들이 경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아주 쉽게 소개하고 있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처럼 딱 필요할 만큼의 내용을 알려주는 방식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지식을 너무 얇게 진열되다 보니 독자의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갈해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국부론》를 잘못 해석한 용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의 말에 뒷받침해주는 인용문이 없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는 질 라보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애덤 스미스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참고한다. 그러면 질 라보의 설명이 옳은 건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보를 터득하게 된다. 이론을 쉽게 설명한 책이라고 해서 저자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면서 읽는 건 잘못된 독서 방식이다. ‘경제학’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자면, 질 라보의 책은 ‘경제학’을 세우려고 마련한 기본적인 토대와 같다. 달랑 토대만 세워놓은 상태만으로 ‘경제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질 라보는 4가지 경제이론이 인류의 경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준 ‘표상’이라고 말한다. ‘표상’이라는 용어가 이 책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대목일 수 있다. 철학 용어로서의 ‘표상’이 먼저 떠오른다면 잠시 잊어도 좋다. 저자는 ‘표상’을 단순하게 설명한다. ‘경제’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미지를 의미한다. 그래도 용어의 의미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면, ‘본보기’로 순화하여 이해해도 된다.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경제학자들은 이 ‘본보기’를 둘러싸고 설전을 펼친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네 가지 경제 이론이 역사의 무대에 여러 번 재등장했다.

 

처음에 애덤 스미스는 경제를 시장 자체로 인식했다. 시장은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 둘 때 최고의 상태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지적 토양이 되어주었고, 오늘날 주류경제학의 전제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1930년에 들이닥친 대공황으로 대세는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케인스의 이론으로 흘러갔다. 케인스는 경제를 순환적인 흐름으로 이해했다. 경제가 잘되려면 시장경제를 그대로 내버려둬선 안 되고, 선순환이 이루어지도록 정부 지출을 확대하는 ‘큰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1960년대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다시 애덤 스미스의 고전학파가 전성기를 맞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누어지는 권력관계로 본다. 애덤 스미스가 생각한 대로 부는 교환을 통해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가 노동자의 착취로 자본을 축적할 때 형성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칼 폴라니는 시장중심주의 경제의 틀에 벗어나 환경을 해치지 않는 지속 가능한 경체체제로 구상하자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지 경제이론을 이해하고 나면 심오한 질문처럼 느껴지는 책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제목의 ‘경제학자’를 ‘정치인’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경제이론이 교과서에 있어야 할 지루한 내용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에도 시장경제에 모두 맡기자는 고전학파 이론과 감세로 부를 분배하자는 케인스 이론의 자리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 따라 두 이론이 번갈아 선택되고 있다. 어느 것이 최선인가의 정답은 단지 상황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어느 이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은 크게 달라진다. 이 고민은 경제학자,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 숙고해야 할 기본적인 삶의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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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15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낙수효과는 작동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죠..

그러나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다른데로 세버리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돈이 되어 버렸어요.

이젠 경제학자들이 분수효과를 이야기 하더군요..^^

cyrus 2015-10-16 16:43   좋아요 0 | URL
낙수/분수 효과에도 각각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분수효과 얘기나 나온다면 새누리당과 자유경제원을 어떻게든 이 분수효과를 깎아내리려고 홍보를 하겠군요. ^^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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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정치에 관해 얘기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신랄하게 꼬집을 수 있어야 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해 어느 시점에 몸을 던져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강박 아래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저항의 등불을 밝힌 청년들이 있었다. 대학 강의를 듣는 일보다 시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고, 조국의 현실 앞에 눈물을 쏟아냈으며, 때로는 온몸을 불살라 절규도 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문학도 새로웠다. 저항시가 문학적 위세를 떨쳤다. 80년대에 노동자시 혹은 농민시라는 이름으로 시들이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심어 주었다. 시인들은 저항과 투쟁의 거리 한가운데를 달리며 의연한 싸움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길거리에 최루가스 냄새가 사라진 이후 대학생들은 자유분방해졌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에 들끓던 민주화운동을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한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젊은 작가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문단을 주도하는 중견, 원로급 작가가 되었고, ‘역사의 시간’으로 남은 그 시절을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라 이름 지어진 순간들은 과연 시간의 저 너머 어딘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 같은 것일까. 유신체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꾸로 돌아가려고 한다. 역사의 오욕과 역류가 벌어지는 오늘의 역사에 삶의 정당성을 위해 싸웠던 지식인들을 지금 무엇 하고 있는가. 그들의 모습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오게 한 저항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부정한 사회에 따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에너지로 전환되기는커녕 과거 추억팔이에 한창이다.

 

시는 비틀거리고 있다. 자기 성찰 하나 없이 지고지순한 세상이 온다는 희망만 노래할 뿐, 진실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현실이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송경동 시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문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과거의 학습효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까.

 

시가 휘청거릴 때 서경식 선생의 책이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온다. 만약에 서 선생이 시인이었다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사랑,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담았을 것이다. 선생은 독서와 시 창작에 매달리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겨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개인 소장판 시집을 펴낸 적도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 ‘시’라는 작은 창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삶과 자유를 갈망하는 ‘실천자’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시는 그를 국가와 언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지식인으로 끌어들인 안내자가 됐다. 선생은 ‘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오늘날 시가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에서 ‘저항시’라는 장르는 도드라진다. 시어는 감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다른 장르에 비해 저항의 정치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과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담겨 있다. 윤동주는 하늘, 바람, 별 같은 서정적인 시어를 골라 썼지만, 그것들이 속한 것은 ‘조국’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아파하던 시인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면서 삶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나갈 것을 다짐한다. 찌그러진 사회에 몸을 굽히지 않는 시인들의 의식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대에도 이어진다.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이라고 칭했던 유신 때도 시인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박노해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드러낸다.

 

정치와 문학의 결합. 서 선생은 사회 앞에 침묵하지 않는 시를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려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생각하는 시의 힘이요, 비정한 권력의 힘에 저항하게 하는 의지다. 선생은 여전히 저항시가 현실에 유효한지 의문부호를 단다. 그런데도 마땅한 좌표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저항시의 흐름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직설적 언어로 사회 개혁의 의지만을 천명하기보다는 거대한 대중들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실천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문학의 비판 기능이 사라진다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을 닮아버렸다. 정직하게 분노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부조리한 현실을 회의하고 생각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불운하다. 직관과 영감으로 번뜩이는 아름다운 노래를 읊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좋은 것만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만든다면 그 시는 정말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김수영, 송경동처럼 정의와 도덕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이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시를 쓰면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꿈꾼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정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시의 힘》을 읽고 있을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하라고 했던 구절이 퍼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직한 분노를 묵살해버리는 백색으로 위장한 어두운 현실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고 ‘만주’의 패권을 러시아 다투고 있다. (102쪽) → '러시아와 다투고 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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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1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지금 젊은이들이 그때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건지도 모르죠.
치열이 개인화 되어 버렸더군요..
포기된 시대에 각자도생만 나부낍니다.

cyrus 2015-10-15 21:20   좋아요 0 | URL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정작 정치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정치에 `정` 자만 들어도 냉소적으로 생각해요.

csp 2015-10-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우리의 적을 닮아간다˝는 서평 속 문장이 와닿는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cyrus 2015-10-15 21:22   좋아요 0 | URL
책 속에 좋은 글이 많습니다. 특히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글이 좋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연연하는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