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시선 401
김용택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 지망생들은 문학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기성 문인들도 마찬가지다. 문단 내의 추문이 잇따른 이 상황 속에 문학에 대한 확고한 자의식을 지니지 못한다면, 문학을 하는 행위의 소중한 의미를 망각하기에 십상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문인에게 자신의 글쓰기를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는 행위는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는 작업이리라. 대부분 뛰어난 문인들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정교한 자의식과 진솔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확고한 자의식이 실종된 시인에게서 탁월한 시가 나올 수 없다. 나는 김용택의 오래 한 생각을 읽으면서, 문학과 시의 근원적 의미에 대해서 오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오래 한 생각, 울고 들어온 너에게20)    

    

 

문학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숙명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 투명하게 성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시인이나 문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용택은 진정한 시인이 아닐까. 사랑을 모르나보다같은 시는 엄밀한 자기 성찰의 표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쓸 때는 정신없어.

써놓고 읽어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시를 썼지?

놀라다가, 며칠 후에 읽어보면

정말 싫다. 사는 것까지 싫어

당장 땅속으로 푹 꺼져버리거나

아무도 안 보는 산 뒤에 가서

천년을 얼어 있는 바위를 보듬고

얼어 죽고 싶다.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르나보다.

 

(사랑을 모르나보다, 울고 들어온 너에게69)

 

 

난해한 시를 읽으면 정말 싫다. 시인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이런 시를 썼지?”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시인과 독자 사이의 본원적인 교감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데는 사회적인 환경의 변화도 있지만, 시인들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즉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할 시가 쓸데없이 어려워지는 이유를 시인도 잠시 펜을 내려놓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난해한 시는 대체로 자폐성이 있다. 그 시를 쓴 시인은 마음을 꽉 닫아놓고 나는 나대로 이렇게 쓸 거야라고 생각하는 자폐성이 있다. 시는 몇 마디 말로 이루어진 가장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문학적 대화이다. 시도 다른 말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대화이다. 시인이 힘 있고 감동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대화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오는 시를 쓸 수 있다. 이는 시인들이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책임이다.

 

김용택의 시는 담백하고 착하다. 화려한 기교와 인공조미료가 가미된 듯 문장을 요란하게 꾸미고 멋 부리기를 하는 시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거짓 없고 꾸밈없는 글쓰기를 지향해온 시인답게 열두 번째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는 순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시는 천진하고 순박한 자연을 그대로 닮았다. 시인은 꽃 한 송이로 자연의 순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감동을 안겨주고, 깊은 깨달음을 준다.

 

 

내가

저기 꽃이 피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저기 꽃이 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꽃을 보라고

다시 말했다.

 

(시인, 울고 들어온 너에게25)

 

 

시를 읽는 것은 시인과 서로 대화가 돼서 알아들을 때 재미있게 느껴진다. 시인 혼자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시보다는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시를 읽는 게 편하다. 간혹 가벼운 시마저 어렵게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다. 그럴 때 이게 시냐?’, ‘이런 시를 쓰고 다니는 시인이 누구냐?’라고 묻기 전에 한 번 더 읽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말을 듣기 위해 좀 더 바싹 다가앉아야 한다. 이렇게 해도 요즘에 나온 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시집 읽기를 그만두는 것이 좋다. 시의 난해성 앞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마시라. 그런 시들은 거친 생각을 도정(搗精)하지 않고, 언어를 다듬지 않은 공허한 문자 덩어리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1-24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4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4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4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11-24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도 많이 어렵지 않아서 저도, 김용택 시인을 좋아합니다.^^

cyrus 2016-11-25 09:10   좋아요 0 | URL
쉽게 읽을 수 있는 시가 시험 문제지에서 보면 어렵게 느껴질까요? 아이들이 시를 문제지에서만 보게 되니까 시가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

단발머리 2016-11-25 09: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희 집 아이도 시 분석을 그렇게 싫어하더라구요~~ 먼저 충분히 느껴야하는데 ㅠㅠ

2016-11-24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5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6-11-25 07: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자가 쉽게 이해한다고 시인이 시를 쓸 때 정말로 ‘쉽게 쓰여진 시‘가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cyrus 2016-11-25 09:14   좋아요 0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인들은 서재 밖으로 나와서 독자들과 자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독자들이 선호하는 시가 뭔지 직접 알 수 있잖아요. ^^
 
소리의 정치 -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제국의 관객
이화진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영화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무성 영화는 화면만 움직이고, 화면 옆에서 변사(辯士)가 영화 내용을 관객에게 설명해 주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극장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변사가 고소득 인기직종이었다. 소리가 없는 영화였던 탓에 영사막 옆에서 영화를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과 배우들의 목소리가 첨가된 발성 영화(talkie, 토키)가 나오자마자 변사는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영화 속 음향은 영화의 화면을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와 함께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것은 무성 영화에서 발성 영화로 전환된 1920년대 이후부터 유효했다.

 

통상 한국영화의 역사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처음 만들어진 <의리적 구투>(1919년 작)로부터 시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해방기 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대다수 필름이 사라져 한국영화사 복원은 추측과 주변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원본이 없기에 어떤 추측과 주장도 입증 불가능한 명제로 남는다. 그래서 일본이 패전한 1945년까지 제작된 조선영화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으며, 상당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조선영화사에서 당대 정서를 절절히 녹여낸 첫 작품으로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 작)이 꼽힌다. (올해가 <아리랑> 개봉 90주년이며, 내년은 나운규 사망 80주기다) 나운규는 일본에 억눌린 민중의 한을 스크린에 담아내 전국에서 관객 약 15만 명을 끌어모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제창하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 그 후로 나운규는 <아리랑 후편><아리랑 제3>을 제작, 출연했으나 무성영화 시대에서 토키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였던 나운규는 조선어 토키를 만들어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 바로 <아리랑 제3>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출연한 그는 연기의 한계를 드러냈고, 흥행에도 처참히 실패했다. 최초의 조선어 토키는 이명우 감독의 손에 의해 탄생되었다. <춘향전>(1935년 작) 개봉 이후 무성영화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명함만 영화평론가인 조희문(왜 이렇게 소개했는지 궁금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조희문을 검색해보시길)<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니라 일본인일 가능성과 <아리랑>이 항일영화가 아니라는 의견을 주장한 적이 있다. 억측에 가까운 주장이다. 다만, 조선영화 제작 과정에 일본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인들은 조선어로 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극장은 조선인 상영관과 일본인 상영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선인 상영관은 외국영화, 일본인 상영관에는 일본영화가 상영되었다. 우리가 이 시절로 되돌아가서 조선인처럼 생활하면서 영화를 본다고 상상해보자. 조선어 영화를 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한글이 1도 없는 영화를 무슨 재미로 보는가. 게다가 외국영화에 일본어 자막을 입혔기 때문에 영화의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화면을 바라봐야만 했다.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차별을 피하려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인 상영관에 드나들어야 한다. 조선인들은 공적 공간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가정을 포함한 사적 공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상태(diglossia, 다이글로시아)에 처했다. 

 

이런 부당하고,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운규 같은 영화인들 사이에서 우리도 조선어 토키 제대로 만들어보자!”라는 공통된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말재주가 뛰어난 변사들은 극장을 찾은 조선인 관객들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사가 관객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돕는 무성영화의 해설자로만 이해했다. 이러한 인식 탓에 그들이 다이글로시아의 풍경에 저항한 주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어 토키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이명우 감독의 형이자 <춘향전> 녹음 작업을 담당한 이필우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토키 제작자들의 조언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영화 한 편 만들어지려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필우의 시도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어 음악이 배경음으로 깔리는 조선어 토키가 나올 수 있었다. 이필우가 설립한 경성촬영소는 조명과 촬영 설비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촬영장을 개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조선의 영화인들은 양질의 자본이 투입된 영화 제작의 중요성을 몸소 경험했다.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고,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한 영화인들 덕분에 우리나라도 뒤늦게나마 발성영화 시대의 포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인들을 위해 조선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영화인들의 초심이 희미해져 갔다. 일본의 대동아(大東亞) 환상에 찬양하는 조선어 영화나 전시 체제 동원을 긍정적으로 강조하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조선인 배우가 일본어 대사를 하면서 등장한 영화를 조선영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일본영화로 봐야 하는가. 여기서도 또 한 번 복잡한 다이글로시아에 마주친다.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조선인 관객들의 저항 의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존재를 위협하는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고 견디어내는 힘이 나온다. 아마도 조선어 토키는 일종의 고통에 대한 저항 에너지 효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진경의 말을 빌리자면, 극장은 자유롭고 억압받지 않는 삶에 대한 욕망과 혁명이 조우하는 특별한 지점이다. 이 지점, 극장은 식민지 시대를 탈주하려는 자들이 통과하는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항의 탈주를 이끌어 내는 매체로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이 선택한 것이 다름 아닌 조선어 토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고 지배적인 예술이 된 영화야말로 권력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지배 권력의 피해물들이며 동시에 그 지배 권력을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6-11-24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장이네요.ㅎ 지금도 이어지고 있죠. 한쪽에서는 국뽕을, 양식있는 이들은 언론이 다뤄주지 않는 문제를 영화로, 그 중간에서는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는...

cyrus 2016-11-24 09: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늘날의 영화는 상업 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국위선양 목적의 상업 영화도 만들어지기도 하죠. 민감한 소재를 예리하게 파헤친 영화를 보기 힘들어요.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명저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 약칭 자본주의’)는 원래 박사학위 제출 논문이었다. 하일브로너는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로 이 책은 지금까지 13번의 개정과 보증이 이루어졌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나온 지 무려 29년 만에 10판이 나왔고, 2001년에 11판이 나왔다. 하일브로너는 12판을 위한 개정 작업을 착수한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빈자리를 채워 준 윌리엄 밀버그 덕분에 미완성으로 남을 뻔한 12판에 이어서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다룬 내용이 추가된 13판까지 나올 수 있었다. 13판은 2011년에 나왔고, 올해 출간된 자본주의개정판은 13판을 옮긴 것이다.

 

경제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만큼 경제 환경은 급변하기 쉽다.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를 시시때때로 변하기 쉬운 사회조직으로 이해했다.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도 그 연장 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생전에 하일브로너는 1929년 대공황을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고하는 위기 신호가 아닌 자본주의 특유의 역동적인 변화 신호로 봤다.

 

자본주의13판은 자본주의의 자체의 역동성이 충분히 반영된 책이다. 13판이 정식으로 출간된 지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경제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밀버그는 13판에 있는 내용을 수정한 14판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1장 주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중국은 2001년에 WTO에 가입했으며, 러시아는 아직 비회원 참관국이지만 조만간 WTO에 가입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자본주의》13판 11장 후주 557)

 

자본주의13판을 번역한 홍기빈 씨와 출판사 편집자들은 책 뒤편에 있는 후주(後註) 목록을 꼼꼼하게 교정하지 않은 듯하다. 밀버그가 13판 개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WTO 비회원 참관국이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822일 러시아가 15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3판 개정 작업을 완료한 밀버그는 러시아가 WTO에 가입할 거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기빈 씨와 책임 편집자는 후주 내용을 그대로 옮길 것이 아니라 13판 원서의 한계를 설명하고, 러시아가 WTO에 가입한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자본주의2장은 중세의 경제 사회를 설명한 장이다. 여기에 중세 유럽의 길드(guild, 상공업자들의 조합)를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도제는 장색이 될 수 있고, 장색이 된 뒤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예를 발휘하여 그만의 걸작을 완성시킴으로써 일가를 이룬 완벽한 대장인의 지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 13판 287)

 

2장 87쪽에 대한 후주 (546쪽) :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여성은 하녀로서가 아니면 길드에 들어올 수 없었다

 

걸작(masterpiece)’은 중세 길드에서 유래된 단어다. 도제를 거쳐 직인이 되고, 직인에서 장인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걸작에 부합되는 결과물을 제출했다. 그러면 길드를 대표하는 훌륭한 장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하일브로너는 2장을 집필하기 위해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사람들을 참고했다. 그런데 파워의 또 다른 명저 중세의 여인들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길드는 남성 상공업자들이 자신들의 친목 도모와 결속을 위해 만들어졌다. 당연히 여성의 길드 가입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길드가 여성의 참여를 완전히 배제하는 남초 집단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파워도 중세의 여인들에서 남성들만의 모임으로서의 길드를 이해하는 관점에 반박했다. (이종인 역, 105쪽 참조) 길드 조합원의 아내와 딸은 조합원 내의 업무를 도울 수 있었다. 장인의 딸도 도제를 받을 수 있었고, 도제 과정을 수료한 미혼 여성은 팜므 솔르(femmes soles)’라는 지위를 받아 일했다. 하지만 길드 장인의 아내와 딸, 혹은 과부가 길드 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 일반 여성이 정식 길드 조합원으로 대접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파워의 설명을 근거로 546쪽 후주의 내용을 새로 고친다면, ‘여성은 길드에 들어올 수 없었지만, 길드 조합원 혹은 장인의 아내와 딸은 길드 활동이 가능했다라고 쓰는 것이 정확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11-23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론이야 제차 하더라도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게속 증보된다는 게 참 대단한 공부입니다...우리나라 학위 받는 사람도 많을 텐데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경우가 잘 없거든요...

cyrus 2016-11-23 16:24   좋아요 1 | URL
하일브로너가 <세속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을 써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많이 얻었어요. 그런데 과거에는 대학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대중 서적을 내는 일이 전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하일브로너의 저술 활동을 부정적으로 봤고, 하일브로너의 지도교수들은 그의 학위 수여를 거부했습니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런 이상한 편견이 남아있어요. 성과 위주의 사회제도 때문에 교수 명함을 달고 있는 학자들은 어려운 책만 쓰고 있습니다. 장하준 같은 학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어른의 맛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그리고 또 다른 충전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란 그렇게 큰 사건들에서만은 아니다. 그저 잔잔한 일상사에서 느껴질 때가 더 많다. 음식을 눈으로 즐기고 맛에서도 감동적인 만족한 식사가 되었다면 그 또한 휴식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속내를 음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살뜰하고 다정한 마음을 가졌다. 히라마쓰 요코의 《어른의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음식으로 표현한 책이다.

 

음식을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책들은 손맛이 더해진 조리방식을 보여주며 독자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생활의 냄새와 추억의 맛이 더해진 책 속 음식을 보며 독자들은 그 음식을 찾아서 먹게 된다. 《어른의 맛》을 보고 읽노라면 일본 음식의 맛이 궁금해진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문화와 조리법은 비슷한 듯 닮았으면서도 여러 차이가 있다. 사실 책 속에 소개된 특색 있는 일본의 전통 음식은 일본에 가보지 않는 이상 경험하기 힘들다. 또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다. 우리의 미각으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맛이다.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의 인기요인은 먹음직스러운 음식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의 심리적 허전함과 불안감, 뭔가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 같은 무의식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음식은 어느 민족에게나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음식은 국경을 초월하여 민족 정체성이나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원초적 방법이다. 여기에 우리 민족에게 밥상은 식구가 둘러앉아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서로의 안녕과 가족애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어느 나라에나 사람이 있고 가족이 있기에 이들과 함께하는 그 나라만의 가족 음식도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저자는 늦은 밤에 아버지가 사준 주먹초밥과 김초밥을 먹었던 어린 시절의 순간에서 가족의 포근함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천천히 나무도시락 끈을 풀자 주먹초밥(니기리즈시)과 다랑어나 오이가 들어간 김초밥이 화려하게 담겨 있다. 그걸 보는 순간 잠기운이 싹 달아난다. 옆에 있던 여동생도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앞으로 쭉 내민다.

 

뭐부터 먹을까. 젓가락을 쥐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컵에 든 차가운 물을 마시며 아버지가 말한다. “요코는 오징어, 게이코는 새우.”

 

기분 좋아서 아무렇게나 한 말일 뿐인데 고민고민하던 마음을 들킨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말대로 젓가락을 움직인다. 와사비의 맛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 가지고 오신 나무도시락 초밥 때문에 알게 됐다. 아버지가 사 온 그 나무도시락 초밥도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와사비가 적었던 것 같다. 가족을 위한 야식이기 때문에 와사비를 아주 연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그랬던 것 아니었을까.

 

(《어른의 맛》 43쪽)

 

 

이 글에 묻어 나오는 포근함은 세계 어느 나라에 살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고 느껴봤을 것이다. 그 와사비 맛은 순식간에 그녀를 유년의 어떤 기억들로 데려다주었다. 이 기억은 억지로 생각해서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맛이 몸속의 무엇을 건드려 몸속으로부터 빠져나오는 특별한 기억이다. 이런 특별한 맛의 기억이 추억으로 남고 행복한 삶 일부가 된다면, 성공한 어른으로 자랐다는 방증이 아닐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11-2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는 것만큼 가장 즉각적인 것도 없는 만족감이죠..
반대로 ..먹지 못하는 것만큼 또 불행한 것도 없으니까요..
안먹고도 살수 있다면...또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먹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신이겠지요..ㄷㄷㄷ

cyrus 2016-11-23 13:18   좋아요 1 | URL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음식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대표적인 분이 저희 어머님입니다. ^^;;

레삭매냐 2016-11-2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빌려다 보려고 했는데. 먼저 읽으셨네요.

cyrus 2016-11-23 13:19   좋아요 0 | URL
일본 음식이 낯설고, 음식 사진이 많지 않아서 공감 얻기 힘든 글이 많았어요. 그래서 책 별점 3개 줬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11-23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책이 또 늘어나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제가 책을 읽으려고 태어난 건가 하은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ㅋㅎㅎㅎㅎ

cyrus 2016-11-23 13:21   좋아요 0 | URL
일본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공감하기 힘든 글이 많았습니다. 《황석영의 밥도둑》이나 공지영의 《시인의 밥상》을 보는 것이 낫습니다. ^^;;
 

 

 

 

 

 

 

 

 

 

 

 

 

 

 

 

 

 

 

 

 

폴 고갱은 나이 마흔셋에 문명을 등지고 원시적 감성이 살아 숨 쉬는 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이후 문명과 원시를 몇 차례 오가며 변화무쌍한 삶의 궤적을 남겼다. 그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아 노아(Noa noa》를 썼다. 산문집의 표지와 삽화를 직접 그렸고, 자비로 출판했다. 비록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이 책에 고갱의 고독했던 삶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노아’는 마오리족 어로 ‘향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노아 노아 : 폴 고갱의 타히티 체류기》(열화당, 1979년, 재판 1994년), 《고갱의 타히티 기행》(서해문집, 1999년)은 《노아 노아》를 번역한 책이다. 열화당 판은 출간 연도가 상당히 오래 돼서 구하기 힘들고, 서해문집 판(약칭 《타히티 기행》) 도 절판되었다. 《폴 고갱, 슬픈 열대》(예담, 2000년, 약칭 《슬픈 열대》)에는 《노아 노아》의 일부 내용만 소개되었다.

 

 

 

 

 

 

세 권 중에 비교적 완성도가 높고, 읽을 만한 판본은 열화당 출판사의 《노아 노아》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고갱의 판화는 그의 제자 다니엘 드 몽프레가 복제한 것이다. 《타히티 기행》의 일러스트는 원본이다. 고갱의 자필 문장도 볼 수 있다. 그리고 1962년에 작성된 서머싯 몸의 서문이 있다. 번역어만 가지고 고갱의 문장 실력을 평가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고갱의 친구이자 상징주의 시인인 샤를 모리스가 《노아 노아》 원고 일부를 다듬었기 때문에 《노아 노아》의 원문 전체 중에 고갱이 쓴 것을 찾아내 구별하기가 어렵다. 원고를 윤색한 친구 때문인지 은유, 상징, 관념적인 표현이 들어간 문장이 많다.

 

 

 

 

 

 

 

 

 

 

 

 

 

 

 

 

 

 

알라딘에 프랑스 원어로 쓰인 전자책 《노아 노아》를 무료로 내려받아서 읽어볼 수 있다. 프랑스 원어와 《타히티 기행》 번역문을 대조해서 읽어보고 싶었으나 프랑스어를 1도 몰라서 포기했다. 그래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타히티 기행》 1장 전체 내용을 원문과 대조해서 읽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하지만 프랑스어 문법을 몰라서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다.

 

《노아 노아》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사용한 제사(題詞)로 시작된다.

 

“말해주오... 무엇을 보았는지?” (Dites, qu'avez-vous vu?, 《타히티 기행》 13쪽)

 

《슬픈 열대》는 제사가 없다. 《노아 노아》가 시작되는 첫 번째 글이 《슬픈 열대》 중반부에 배치되는 바람에 번역자가 제사를 삭제한 것 같다. 그리고 발췌 편집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한 흔적도 보인다.

 

 

* Les vahinés reprenaient le bras de leur tanés, parlaient haut, dodelinaient des fesses, tandis que leurs larges pieds nus foulaient lourdement la poussière du chemin. Près de la rivière de la Fatüa, éparpillement général.

 

* 여자(vahines)들은 다시 남자(tanés)의 팔을 잡고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면서 그 큰 발로 먼지를 일으키면서 파튜 (Fatü) 강가를 따라 흩어져 갔다.

(《노아 노아》 12쪽)

 

* 아내는 남편의 팔을 잡고 생기 있게 떠들었고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튼튼한 맨발로 길바닥의 먼지를 심하게 일으켜댔다. 파투(Fatü) 강가 근처에서 모두 흩어졌다.
(《타히티 기행》 20쪽)

 

* 여자들은 남자들의 팔짱을 끼고 엉덩이를 흔들며 먼지 이는 파타우아 강가를 따라 흩어졌다. (《슬픈 열대》 138~139쪽)

 

 

vahiné타히티의 여자뿐만 아니라 아내, 정부(情婦)도 의미하는 단어다. 원서에는 강의 이름이 ‘Fatüa’로 되어 있으나《노아 노아》와 《타히티 기행》의 번역가는 ‘Fatü’로 썼다.

 

 

 

—Tu sais, Gauguin, fit la princesse en se levant, je n'aime pas ton La Fontaine.
—Comment? Notre bon La Fontaine!
—Peut être est il bon, mais ses morales sont laides. Les fourmis….
(et sa bouche exprimait le dégoût).
Ah! les cigales, oui! Chanter, chanter, toujours chanter!

 

 

"고갱, 당신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네 나라의 라 퐁텐을 싫어한단 말이에요."

"어째서? 우리들의 선량한 라 퐁텐을?"

"아마 그는 선량한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사람의 도덕이란 게 도시 맘에 들지 않는단 말예요. 개미...?"

그녀의 입가엔 혐오의 정이 역연했다.

"오, 베짱이. 그는 좋다.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항상 노래하는..."

 

(《노아 노아》 18쪽)

 

 

"고갱 씨, 알아요?" 일어나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네 라 퐁텐느를 좋아하지 않아요."
"어째서? 우리 훌륭한 라 퐁텐느를?"
"아마 훌륭한 사람이겠죠. 하지만 그 사람 도덕은 마음에 안 들어요. 개미는..."
(그리고 그녀의 입은 불쾌감을 나타냈다)
"아, 베짱이는, 그래요. 노래하고 노래하고 항상 노래해요!“


(《타히티 기행》 25~26쪽)

 


"아시나요, 고갱? 난 당신네 작가 라 퐁텐을 싫어해요."
"왜 우리 선량한 라 퐁텐을?"
"선량한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사람이 말하는 도덕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요. 개미라고!"
그녀의 입이 혐오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다.
"난 매미가 좋아요. 이것들은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언제나 노래하죠..."


(《슬픈 열대》 145쪽)

 

 

프랑스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티티(Titi)라는 타히티 여자가 고갱 앞에서 라 퐁텐의 우화를 암송한다. 그리고 그녀는 고갱에게 우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라 퐁텐 우화집은 동물을 위주로 한 소재와 접근방식이 비슷한 탓에 흔히 이솝 우화집과 혼동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가 유사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오랜 시간, 전세계로 구전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살짝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프랑스에선 ‘개미와 매미’로 알려져 있다. ‘cigale’은 매미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이솝 우화 그리스어 원전에도 ‘개미와 매미들’로 되어 있다.

 

 

 

 

 

 

 

 

 

 

 

 

 

 

 

 

 

 

 

고갱이 그린 타히티 여인들의 그림은 문명 세계를 떠난 순수하고 위안을 주는 예술로서 칭송받아 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은 고갱의 그림이 식민주의(colonialism)와 관광주의(tourism)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아 노아를 읽어 봐도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주의가 결합한 고갱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고갱은 원시적이고 순수한곳을 찾아 섬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문명의 손길이 닿은 타히티의 현실에 실망했다. 그곳에는 원시의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고갱은 자신의 몸과 정신에 배어있는 문명의 요소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과정에서 고갱은 자신이 원주민의 삶에 동화된다고 생각했다. 고갱과 동행한 원주민들이 그에게 친밀한 원시의 향기를 맡았는지 알 수 없다. 노아 노아는 고갱의 시점으로 야생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고갱의 타히티 정착 생활은 야생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백인의 관광주의적 체험과 유사하다.

 

고갱은 토테파라는 이름의 원주민과 함께 산 속에 자란 장미 나무를 꺾는다. 그는 도끼로 장미나무를 꺾음으로써 마오리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확신한다.

    

토테파와 나는 무거운 장미나무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까지 날랐다. 장미나무. 그것이야말로 노아 노아였다. 토테파가 나에게 말했다.

 

“Paia?(재미있었어요?)”

 

그럼!”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 그럼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나는 장미나무의 목판에 온 힘을 다해 칼자국을 넣었다. 그리고 칼자국을 넣을 때마다 점차로 고양되는 승리와 회춘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노아 노아!

 

(노아 노아41)

 

 

제국주의 유럽은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면서 절대적인 존재로서 지구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백인들의 의무(mission)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로 나선 것이다. 고갱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식민지 정복을 과시하는 자아도취에 빠져버렸다. 그가 야생의 장미 나무를 꺾고, 확보한다는 것 자체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노아 노아는 원시 문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근대적 욕망이 만들어 낸 환상의 상징이다고갱은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굉장히 추상적인 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건드리려고 시도했다. 고갱이 한평생 추구했던 의무는 가장 아름다울 수도, 더없이 추해질 수도 있는 이중적 욕망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한엄마 2016-11-22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고갱 자신이 문명 우월론자였으면서 원시상태를 꿈꾸고 그 모습을 완벽하게 그리려고 했다는 게 말이 안 됐었네요.자신이 이미 바뀔수가 없는데..

cyrus 2016-11-22 18:52   좋아요 1 | URL
고갱은 자기확신이 강한 편이었어요. 그렇지만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클수록 자신의 선택(타히티 섬 정착)에 실망했을 겁니다. 고갱의 글은 자기 합리화로 포장되어 있어요.

yureka01 2016-11-2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갱이 동양의 도교 사상을 알았더라면 혹시 어떻게 되었을까요..^^

cyrus 2016-11-22 18:54   좋아요 0 | URL
아마도 고갱이 동양미에 심취했으면 이인성 같은 화가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