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하일브로너의 명저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 약칭 자본주의’)는 원래 박사학위 제출 논문이었다. 하일브로너는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로 이 책은 지금까지 13번의 개정과 보증이 이루어졌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나온 지 무려 29년 만에 10판이 나왔고, 2001년에 11판이 나왔다. 하일브로너는 12판을 위한 개정 작업을 착수한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빈자리를 채워 준 윌리엄 밀버그 덕분에 미완성으로 남을 뻔한 12판에 이어서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다룬 내용이 추가된 13판까지 나올 수 있었다. 13판은 2011년에 나왔고, 올해 출간된 자본주의개정판은 13판을 옮긴 것이다.

 

경제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만큼 경제 환경은 급변하기 쉽다.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를 시시때때로 변하기 쉬운 사회조직으로 이해했다.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도 그 연장 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생전에 하일브로너는 1929년 대공황을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고하는 위기 신호가 아닌 자본주의 특유의 역동적인 변화 신호로 봤다.

 

자본주의13판은 자본주의의 자체의 역동성이 충분히 반영된 책이다. 13판이 정식으로 출간된 지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경제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밀버그는 13판에 있는 내용을 수정한 14판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1장 주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중국은 2001년에 WTO에 가입했으며, 러시아는 아직 비회원 참관국이지만 조만간 WTO에 가입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자본주의》13판 11장 후주 557)

 

자본주의13판을 번역한 홍기빈 씨와 출판사 편집자들은 책 뒤편에 있는 후주(後註) 목록을 꼼꼼하게 교정하지 않은 듯하다. 밀버그가 13판 개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WTO 비회원 참관국이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822일 러시아가 15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3판 개정 작업을 완료한 밀버그는 러시아가 WTO에 가입할 거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기빈 씨와 책임 편집자는 후주 내용을 그대로 옮길 것이 아니라 13판 원서의 한계를 설명하고, 러시아가 WTO에 가입한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자본주의2장은 중세의 경제 사회를 설명한 장이다. 여기에 중세 유럽의 길드(guild, 상공업자들의 조합)를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도제는 장색이 될 수 있고, 장색이 된 뒤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예를 발휘하여 그만의 걸작을 완성시킴으로써 일가를 이룬 완벽한 대장인의 지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 13판 287)

 

2장 87쪽에 대한 후주 (546쪽) :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여성은 하녀로서가 아니면 길드에 들어올 수 없었다

 

걸작(masterpiece)’은 중세 길드에서 유래된 단어다. 도제를 거쳐 직인이 되고, 직인에서 장인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걸작에 부합되는 결과물을 제출했다. 그러면 길드를 대표하는 훌륭한 장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하일브로너는 2장을 집필하기 위해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사람들을 참고했다. 그런데 파워의 또 다른 명저 중세의 여인들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길드는 남성 상공업자들이 자신들의 친목 도모와 결속을 위해 만들어졌다. 당연히 여성의 길드 가입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길드가 여성의 참여를 완전히 배제하는 남초 집단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파워도 중세의 여인들에서 남성들만의 모임으로서의 길드를 이해하는 관점에 반박했다. (이종인 역, 105쪽 참조) 길드 조합원의 아내와 딸은 조합원 내의 업무를 도울 수 있었다. 장인의 딸도 도제를 받을 수 있었고, 도제 과정을 수료한 미혼 여성은 팜므 솔르(femmes soles)’라는 지위를 받아 일했다. 하지만 길드 장인의 아내와 딸, 혹은 과부가 길드 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 일반 여성이 정식 길드 조합원으로 대접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파워의 설명을 근거로 546쪽 후주의 내용을 새로 고친다면, ‘여성은 길드에 들어올 수 없었지만, 길드 조합원 혹은 장인의 아내와 딸은 길드 활동이 가능했다라고 쓰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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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23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론이야 제차 하더라도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게속 증보된다는 게 참 대단한 공부입니다...우리나라 학위 받는 사람도 많을 텐데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경우가 잘 없거든요...

cyrus 2016-11-23 16:24   좋아요 1 | URL
하일브로너가 <세속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을 써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많이 얻었어요. 그런데 과거에는 대학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대중 서적을 내는 일이 전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하일브로너의 저술 활동을 부정적으로 봤고, 하일브로너의 지도교수들은 그의 학위 수여를 거부했습니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런 이상한 편견이 남아있어요. 성과 위주의 사회제도 때문에 교수 명함을 달고 있는 학자들은 어려운 책만 쓰고 있습니다. 장하준 같은 학자들이 많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