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정치 -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제국의 관객
이화진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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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영화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무성 영화는 화면만 움직이고, 화면 옆에서 변사(辯士)가 영화 내용을 관객에게 설명해 주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극장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변사가 고소득 인기직종이었다. 소리가 없는 영화였던 탓에 영사막 옆에서 영화를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과 배우들의 목소리가 첨가된 발성 영화(talkie, 토키)가 나오자마자 변사는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영화 속 음향은 영화의 화면을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와 함께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것은 무성 영화에서 발성 영화로 전환된 1920년대 이후부터 유효했다.

 

통상 한국영화의 역사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처음 만들어진 <의리적 구투>(1919년 작)로부터 시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해방기 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대다수 필름이 사라져 한국영화사 복원은 추측과 주변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원본이 없기에 어떤 추측과 주장도 입증 불가능한 명제로 남는다. 그래서 일본이 패전한 1945년까지 제작된 조선영화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으며, 상당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조선영화사에서 당대 정서를 절절히 녹여낸 첫 작품으로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 작)이 꼽힌다. (올해가 <아리랑> 개봉 90주년이며, 내년은 나운규 사망 80주기다) 나운규는 일본에 억눌린 민중의 한을 스크린에 담아내 전국에서 관객 약 15만 명을 끌어모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제창하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 그 후로 나운규는 <아리랑 후편><아리랑 제3>을 제작, 출연했으나 무성영화 시대에서 토키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였던 나운규는 조선어 토키를 만들어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 바로 <아리랑 제3>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출연한 그는 연기의 한계를 드러냈고, 흥행에도 처참히 실패했다. 최초의 조선어 토키는 이명우 감독의 손에 의해 탄생되었다. <춘향전>(1935년 작) 개봉 이후 무성영화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명함만 영화평론가인 조희문(왜 이렇게 소개했는지 궁금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조희문을 검색해보시길)<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니라 일본인일 가능성과 <아리랑>이 항일영화가 아니라는 의견을 주장한 적이 있다. 억측에 가까운 주장이다. 다만, 조선영화 제작 과정에 일본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인들은 조선어로 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극장은 조선인 상영관과 일본인 상영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선인 상영관은 외국영화, 일본인 상영관에는 일본영화가 상영되었다. 우리가 이 시절로 되돌아가서 조선인처럼 생활하면서 영화를 본다고 상상해보자. 조선어 영화를 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한글이 1도 없는 영화를 무슨 재미로 보는가. 게다가 외국영화에 일본어 자막을 입혔기 때문에 영화의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화면을 바라봐야만 했다.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차별을 피하려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인 상영관에 드나들어야 한다. 조선인들은 공적 공간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가정을 포함한 사적 공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상태(diglossia, 다이글로시아)에 처했다. 

 

이런 부당하고,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운규 같은 영화인들 사이에서 우리도 조선어 토키 제대로 만들어보자!”라는 공통된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말재주가 뛰어난 변사들은 극장을 찾은 조선인 관객들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사가 관객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돕는 무성영화의 해설자로만 이해했다. 이러한 인식 탓에 그들이 다이글로시아의 풍경에 저항한 주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어 토키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이명우 감독의 형이자 <춘향전> 녹음 작업을 담당한 이필우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토키 제작자들의 조언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영화 한 편 만들어지려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필우의 시도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어 음악이 배경음으로 깔리는 조선어 토키가 나올 수 있었다. 이필우가 설립한 경성촬영소는 조명과 촬영 설비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촬영장을 개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조선의 영화인들은 양질의 자본이 투입된 영화 제작의 중요성을 몸소 경험했다.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고,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한 영화인들 덕분에 우리나라도 뒤늦게나마 발성영화 시대의 포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인들을 위해 조선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영화인들의 초심이 희미해져 갔다. 일본의 대동아(大東亞) 환상에 찬양하는 조선어 영화나 전시 체제 동원을 긍정적으로 강조하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조선인 배우가 일본어 대사를 하면서 등장한 영화를 조선영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일본영화로 봐야 하는가. 여기서도 또 한 번 복잡한 다이글로시아에 마주친다.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조선인 관객들의 저항 의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존재를 위협하는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에 저항하고 견디어내는 힘이 나온다. 아마도 조선어 토키는 일종의 고통에 대한 저항 에너지 효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진경의 말을 빌리자면, 극장은 자유롭고 억압받지 않는 삶에 대한 욕망과 혁명이 조우하는 특별한 지점이다. 이 지점, 극장은 식민지 시대를 탈주하려는 자들이 통과하는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항의 탈주를 이끌어 내는 매체로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이 선택한 것이 다름 아닌 조선어 토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고 지배적인 예술이 된 영화야말로 권력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지배 권력의 피해물들이며 동시에 그 지배 권력을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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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11-24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장이네요.ㅎ 지금도 이어지고 있죠. 한쪽에서는 국뽕을, 양식있는 이들은 언론이 다뤄주지 않는 문제를 영화로, 그 중간에서는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는...

cyrus 2016-11-24 09: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늘날의 영화는 상업 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국위선양 목적의 상업 영화도 만들어지기도 하죠. 민감한 소재를 예리하게 파헤친 영화를 보기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