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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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보다.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평범하고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느낀다. 그것은 추억과 공감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태어난다. 흔히 그리움이란 두 손 두 발로 만져왔던 자신만의 추억들을 향하고 있기 마련이다. ‘토토가’가 우리에게 준 감동의 열기가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들려준 90년대 가수들의 목소리는 잊고 있었던 시절에 대한 환영들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시를 잘 읽지 않거나 시를 읽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짧은 시에서 우리가 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날 읽은 시 한 편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학창시절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국어 시간에 배운 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의 문장으로 새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안도현의 발견』(한겨레출판, 2014)의 부제가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다. 지나치게 길면서도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 시를 읽음으로써 단순한 대상을 새로 보게 된다. 시인은 단어를 조합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간결한 직물을 짜낸다.

 

11년 전에 나온,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 안도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는 사람과 사물 혹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나오는 대상은 대체로 우리가 소박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시인은 꽃, 나무, 새, 물고기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자연의 섭리나 기억되지 못하는 하찮은 사물에 세상사를 비유하여 직접 눈에 보이도록 만든다. 즉, 시인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삶의 방식, 즉 보조관념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루빈의 잔’이 생각난다. 눈과 마음이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와 욕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독자의 고정된 관습을 시인은 타파한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의 시야를 넓힌다.

 

이 시집은 언뜻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를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인물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이 바로 시인 백석이다. 안도현 시인은 작년에 『백석 평전』(다산북스, 2014)를 펴낼 정도로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흠모해왔다.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서 평소 백석을 사랑했던 시인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16쪽)

 


이 시집이 안도현 시인이 펴낸 이전 시집과 다르게 자아와 외부 대상(자연)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무척 농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의 전개가 가능한 이유를 백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백석 「북관」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104쪽)

 


시에서 북쪽 지역 방언과 고어를 사용했던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도현 시인은 여치 소리를 들으려고 무릎을 모은 뒤에 앉아 ‘끼밀고’ 있다. 여기서 ‘끼밀다’는 어떤 물건을 자세히 보고 느끼기 위해 얼굴 가까이 들이미는 자세를 뜻한다. 백석은 이미 자신의 시 ‘북관(北關)’에서 함경도 음식을 먹으면서 이 지역의 투박함을 자신 삶의 일부로 껴안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끼밀기를 통해 시인은 여진에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화려했던 신라의 향수를 맛보는 데 성공한다.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집 한 채, 어느 날 가보니 저 혼자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형편없이 납작해졌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러나 귀가 뭉개진 집은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을 내려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 집에 살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나 안 오나
 처마 끝으로 고독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집 없이 떠도는 옛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두 눈으로 바라볼 게 없도록
 도무지 그리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도록
 단 한 번에 기둥은 무릎을 접고 서까래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꺾고 봉창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주저앉은 집」, 68쪽)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략)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 「정주성」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84쪽)

 


「주저앉은 집」은 백석의 첫 작품 「정주성」의 분위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작품 다 더 이상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건물을 쓸쓸하게 묘사한다. 백석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경성을 벗어나 고향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북방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곳 또한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백석이 가보고 싶은 북방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고향이지만, 이제는 정착할 수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변했다. 시인이 본 ‘헐리다 남은 성문’은 근대화 바람에 풍화되어 무너져버린 전통사회이다. 「주저앉은 집」에서 무너져버린 폐가 상태에 감정을 이입하여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주인을 기다린다. 폐가가 기다리는 주인은 혹시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해 북방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백석이 아닐까. 그가 아니더라도 북방의 고향 전체를 마음속에 간직했던 백석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귀 본능을 지닌 도시인이 돌아오기를 폐가는 말없이 기다린다. 그가 돌아와야 어렴풋이 남아있는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대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드물다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중에서, 92쪽)

 

 

메마른 듯, 얼핏 죽은 듯 보이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로 숨결을 보낸다면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갈매나무는 삶의 고통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시인의 나무이다. 한편, 가족의 안부도 모른 채 저 북방 춥고 쓸쓸한 여관방에서 외로움에 떨었을 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유일한 희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외로운 가장의 차디찬 가슴 한켠에 자란 갈매나무에서 안도현 시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본다.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갈매나무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갈 마음을 다잡게 한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시큰거릴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순수한 사춘기 청년의 마음처럼. 이제는 남아있는 글만으로 만날 수 있는 시인에게 다가서고 싶고, 자꾸 잊혀가는 시간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일생을 복원했다. 참으로 대단한 문학적 사랑이다. 믿거나 말거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 1위가 노랫말에 사랑하는 상대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면서 ‘백석’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을 넣는 대신, ‘백석의 시’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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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도 ˝시를 만들었다˝도 너무 멋진 제목인데요!

cyrus 2015-01-10 22:10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시를 만들 줄 아는 시인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오후즈음 2015-01-0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이 감각적인 제목이라니

수이 2015-01-1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가 있어야 합니다. 얼른. :)

cyrus 2015-01-10 22:11   좋아요 0 | URL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맞아요. `너`가 있어야 하죠.. ㅠㅠ

해피북 2015-01-1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로스님 덕분에 안도현 저자 팬이 되어버릴것 같네요 ㅎㅎ 지난번에 안도현의 발견이란 책을 서점가에서 들춰봤는데 짧은 산문이 어찌나 재미나고 웃기던지, 마치 눈앞에 상황이 보여지고 상황상황에 위트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좋은 책이더군요 ㅎㅎ 전엔 다른 이웃님의 백석평전에 대한 리뷰글을 보며 안도현 저자의 마음도 느껴지고 그 책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엔 시집까지 소개해주셔서 마음이 바빠지네요 ㅋ

cyrus 2015-01-10 22:12   좋아요 0 | URL
조만간 `백석 평전`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요즘 안도현 시인 덕분에 다시 한 번 백석 시집을 읽게 되었어요. 정말 백석의 시는 다시 읽어도 새롭습니다. ^^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에 ‘새뮤얼 존슨 박사를 회상하며’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장르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러브크래프트가 어떤 주제의 소설을 썼는지 잘 알 것이다. 그의 소설은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괴물과 초자연 현상을 묘사하여 우주적 공포를 연출했다.

 

‘회상’은 러브크래프트가 초창기에 쓴 작품에 속한다. 1917년에 ‘Humphrey Littlewit’이라는 가명으로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소설 제목이 긴 관계로 줄여서 ‘회상’이라고 쓰겠다) 그런데 이 소설은 생전에 러브크래프트가 주로 썼던 작품들과 다르다. 일단 무서운 느낌이 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작품을 쓸 때 많이 설정하던 축축한 이끼와 냉기가 감도는 지하 무덤 속 비밀통로와 사람을 공격하는 잔인한 구울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문단을 주름잡았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새뮤얼 존슨과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일화 형식으로 썼다. 새뮤얼 존슨은 문학상 업적을 남긴 공로로 '박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독자는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의 나이가 228살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690년 8월 10일에 데번셔의 영지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인지 아니면 실존 인물만 그대로 따와 허구적인 장면을 썼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얼핏 보르헤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같은 느낌이 난다. 이 작품을 잘 모르는 독자가 많고, 이것에 대한 논의로 빠지면 시시콜콜한 잡문을 쓰고 있는 나나 이 잡문을 읽고 있을 분들에게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그냥 제쳐놓기로 한다. 아무튼 ‘회상’은 장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어서 전집 4권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을 설명하는 역자의 글이 실려 있지 않아 작품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다.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공포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회상’을 재미없게 느껴지거나 그렇게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상’은 러브크래프트의 해박한 지식수준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는 병약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각종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이러한 독서는 어둡고 음산한 상상의 날개를 펴주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회상’에서 눈여겨볼 점은 러브크래프트가 존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더 클럽’ 라는 문학 그룹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러브크래프트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작품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면 18세기 영국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그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을 런던에서 보내면서 아이의 눈으로 윌리엄 통치 하의 저명인사들을 많이 보았는데, 많은 시간을 월스 커피 하우스에 앉아서 탄식에 젖어 있던 드라이든 씨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애디슨 씨와 스위프트 박사는 나중에 잘 아는 사이가 되었고, 포프 씨와는 절친한 사이로서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55~56쪽)

 

‘윌리엄’은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왕 윌리엄 3세(빌렘 1세)를 말한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략을 저지시켰고 왕위에 올라 명예혁명을 이루었다. 1650년대는 런던에 커피점이 잇달아 생겨, 약 10년간에 그 수가 30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런던 커피 하우스'로 불렸다. 여기에 문인, 학자, 예술가를 비롯하여 각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일종의 아카데미 클럽이 형성되기도 했다. ‘드라이든’은 명예혁명 이전에 계관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존 드라이든(1631~1700), ‘애디슨’은 수필가 겸 시인인 조지프 애디슨(1672~1719)일 가능성이 있다. 유명한 문학자 단체 Kit-Cat Club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죽마고우 리처드 스틸과 함께 <스펙테이터>)(Spectator) 지를 창간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 ‘포프’는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겸 비평가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으로 추정된다. 스위트프는 커피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커피 하우스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가 스물네 살이었을 때 런던의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의 먼 친척뻘 되는 드라이든에게 습작시를 공개했다가 혹평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스위프트는 영국 사회를 움직이는 명사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스펙테이터>의 공동 발행인 애디슨과 스틸과도 한때 친했었다. 

 

 

 

 

 

 

 

 

 

 

 

 

 

 

 

 

스위프트와 포프, 이 두 사람은 ‘스크리블레루스 클럽’에 소속되어 서로 알게 되었다. 『마르티누스 스크리블레루스의 회고록』는 풍자소설을 썼다. 이 작품은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추천도서에 포함되었다. 1713년에 애버스넛 박사의 집에 ‘스크리블레루스 클럽’이 결성되었다. 스크리블레루스는 박식한 지식을 자랑하는 가공인물이다. 클럽 회원들은 스크리블레루스의 입이 되어 속물적이며 부패한 영국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가공인물은 호라티우스, 라블레, 에라스무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클럽 회원들이 쓴 책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스위프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될, 아직 초고에 불과했던 『걸리버 여행기』를, 포프는 『우인 열전』을 인용했다.

 

제임스 보스웰 씨가 나를 존슨 씨에게 소개해 준 1763년까지 나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 (56쪽)

 

작품 속 화자는 보스웰(1740~1795) 덕분에 존슨을 처음 만나게 된다. 보스웰은 존슨을 언급할 때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 인물이다. 1763년에 그동안 사숙하던 존슨 박사와 알게 되어,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박사가 죽을 때까지 가까이 사귀었다. 《존슨 전(傳)》은 전기 문학의 걸작이며, 그 밖에 박사를 수행했을 때의 여행기록을 남겼다.

 

내가 발행하는 주간지 《런더너》에 그의 사전을 좋게 알리고 싶으니 의향이 어떻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57쪽)

 

화자는 자신이 발행한 잡지에 존슨이 만든 사전을 알리고 싶어 한다. 존슨은 1747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자력으로 7년 만에 《영어사전》을 완성했다.

 

그 후로 존슨과 나는 주로 ‘문학 클럽’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이듬해 만들어진 문학 클럽의 창립 멤버로는 박사 본인을 비롯하여 정치 연설가인 버크 씨, 사교계의 멋쟁이 뷰클라크 씨, 신앙심이 돈독한 랭턴 씨, 시민군 대장인 J. 레이널스 경, 유명한 화가인 골드스미스 박사, 산문과 시를 쓰는 뉴전트 박사, 버크 씨의 장인인 존 호킨스 경, 그리고 앤서니 샤미에씨와 나였다. (57~58쪽)

 

1763년에는 존슨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명사들과의 친분 도모를 위해서 문학 그룹 ‘더 클럽’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훗날 ‘문학 클럽’으로 이름이 바뀐다.

 

 

 

 

 

 

 

 

 

 

 

 

 

 

 

 

‘정치 연설가인 버크’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이다. 영국 보수주의의 대표적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다. 더 클럽의 창설 회원이었으며 이때 당시 그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저술가로 활동했다. 골드스미스 박사가 화가라고 소개되는데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착각 혹은 역자의 번역 실수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보이다. 존슨과 알고 지냈던 골드스미스라는 실존 인물은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 활동했던 올리버 골드스미스(1728~1774)로 봐야 한다. 1761년에 존슨을 사귀고 그의 문학 클럽 회원이 되었다. 존슨의 도움에 힘입어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를 발표해 단번에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 역시 피터 박스홀의 추천도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배우이자 존슨 박사의 죽마고우인 데이비드 게릭 씨, 소우와 조, 워튼, 애덤 스미스 박사, 『유적』의 저자인 퍼시 박사,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 씨, 음악가인 버니 박사, 비평가 맬런 씨, 보스웰 씨가 새로 가입했다. (58쪽)

 

데이비드 게릭은 실제로 존슨과 친분이 있었던 배우이다. 존슨의 문학 클럽에 명사들이 하나둘씩 가입하는데 여기서도 익숙한 이름 두 명이 있다.

 

 

 

 

 

 

 

 

 

 

 

 

 

 

 

 

애덤 스미스 박사와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쓴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기번은 1774년에 문학 클럽에 가입했고, 1776년에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을 출간했다. 보스웰과 스미스는 문학 클럽에 가입하기 전에 이미 대면한 적이 있었다. 보스웰은 1753~1758년에 에든버러대학에서 인문학 과정을 밟았다.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1758년 대학에 돌아왔으나 연극에 매료되었고 로마 가톨릭교도인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는 그를 글래스고 대학으로 보내 애덤 스미스의 강의를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 도덕철학 담당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10여 년 간 계속된 교수 생활을 스미스는 ‘가장 유익했고 행복했으며 명예로운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200살 넘은 화자가 등장하여 존슨 박사를 회상하는 황당무계한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그냥 러브크래프트의 장난기 섞인 위트 넘치는 이야기로 보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게다가 존슨 박사에서 이야기 곳곳에 언급되는 인물들을 잘 모른다면 이 작품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영국사에 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 존슨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알아야 이 작품 속에 재치가 있으면서도 뼈가 있는 날카로운 발언으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슨의 언변술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 역자는 영국사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한 주석을 단 한 개도 달지 않았다. 이 작품 하나 때문에 전공과 무관한 영국사 관련 책을 펼쳐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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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서내공이 상당하시네요^^ 언급해주시는 이름들이 낯설진 않지만 한 작품도 읽어본적 없어 아쉽습니다 ㅎㅎ 영국사까지 호기심을 넓히시는 모습 참 멋지시네요!!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할께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5-01-10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안 읽어봤어요. 저자 이름만 알고 관심이 있으면 검색해서 저자가 쓴 책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즉시 그것과 관련된 것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좀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편도 있어요. 사소하지만 하나라도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해피북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올해 첫 올재 클래식스 4권이 출간된다. 출간횟수로는 13번째인데 이번에 나오는 책을 포함하면 벌써 50여 권에 이른다. 권당 2900원이라는 가격으로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는 올재 클래식스는 6개월 동안 한정 판매한다. 미판매된 책과 발행 수익의 20%는 저소득층, 각종 복지시설 등에 기증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전을 살 수 있는 장점 덕분에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 출간 소식을 고대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올재 클래식스 공식 홈페이지(http://www.olje.or.kr/)에 가입하면 출간 소식을 문자 알림으로 받을 수 있다.  

 

 

 

 

 

이번에 나오는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는 『장자』, 『열자』, 『바가바드 기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내일 오전 11시부터 인터넷 교보문고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하고, 토요일에 전국 교보문고 매장에서 살 수 있다.

 

 

 

 

 

 

 

 

 

 

 

 

 

 

 

 

『장자』는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이 번역한 것이다. 출판사는 내편, 외편, 잡편이 모두 수록되어 있고, 한중일 고금의 주석까지 소개한 번역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신동준 소장은 이미 인간사랑 출판사를 통해 『장자』 번역본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인간사랑 판본의 쪽수는 무려 1000쪽이 넘고, 정가도 5만 원 정도에 가깝다. 인간사랑 판본과 같은 내용을 올재에서 출간되는 과정이 무척 궁금해서 직접 올재 출판사로 문의를 해봤다. 이번 『장자』 번역본은 책 기부 취지에 공감한 역자의 도움으로 한정판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간사랑 출판사의 『장자』는 계속 판매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사랑 판본에 있는 오류를 수정했다고 하니 그동안 방대한 분량에 벌써 기가 죽고, 지갑을 활짝 열 자신이 없는 독자라면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장자』를 가방에 넣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가격을 책정했고,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책이라서 활자 크기가 작은 편이다. 눈의 피로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열자』,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 티베트, 중국 등 동양의 고전과 경전을 번역한 정창영 씨가 맡았다. 2001년, 두 책 다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으나 절판된 것을 올재가 복간했다. 『열자』는 『노자』와 『장자』와 더불어 도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작년에 이미 올재가 『노자』를 ‘도덕경’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바가바드 기타』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와 함께 인도 힌두교의 중요한 성전 하나로 꼽힌다. 인도인들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기독교인의 성경 같은 책이며 ‘거룩한 자의 노래’(산스크리트 어인 바가바드 기타의 뜻)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늘 이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며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거기서 용기와 지혜를 구했다.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회의하던 고대 인도국 왕자 아르주나가 마부이자 스승인 크리슈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함축적 시어와 난해한 해설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 인도인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고전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국내 독자들이 즐겨 읽는 괴테의 작품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베르테르’를 독일어 현지 발음에 가까운 ‘베르터’의 일본식 오역이라는 지적도 있을 정도로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주목받는다. 역자는『파우스트』를 번역한 적이 있는 이인웅 한국외대 명예교수이다.

 

의외로 알라딘 서재에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에 관한 서평이나 페이퍼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가 교보문고에서만 판매되기 때문에 알라딘에서 많이 언급되는 기회가 드물다. 올재 클래식스가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만 해도 알라딘에 판매된 적이 있다. 그때 당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라 책을 사기 위해 항상 알라딘에 접속하면 절판 소식을 확인만 했던 기억이 있다. 한정판이라서 간혹 알라딘 중고샵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 적도 있었다. 4권으로 구성된 세트를 정가보다 높게 책정한 판매자도 일부 있다. 알라딘에서 판매되지 않은 책을 중고샵에 살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 혹시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를 구하고 싶은 독자라면 되도록 중고샵에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종이책으로 읽을 수 없지만, 올재 홈페이지에 가면 전자북을 정해진 기간 내에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 어제 교보문고 대구점에 비치된 『안도현의 발견』을 확인해본 결과, 작년 12월 2일에 나온 3쇄였다. 다행히 2쇄에 발견된 인쇄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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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8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늘 느끼는 거지만 책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계신거 같은데 혹시 책 관련 일을 하시나요?ㅎ 올재 클래식은 처음들어봤는데 역시 좋은 정보네요~^^

cyrus 2015-01-08 21:46   좋아요 0 | URL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니고요, 그냥 출판사 신간 소식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독자입니다. ㅎㅎㅎ
 

 

시몬,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 네 가슴은 눈처럼 차다.

 

눈은 불의 키스에 녹지만

네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서 슬프지만

네 이마는 밤빛 머리카락 밑에서 슬프다.

 

시몬, 네 동생 눈은 정원에 잠들어 있다.

시몬, 네 눈은 내 눈 그리고 내 사랑.

 

(레미 드 구르몽 ‘눈’, 고종석 『히스토리아』에 인용)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세계의 명시를 모은 작은 시집을 보면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르몽의 시 ‘낙엽’을 발견할 수 있다. 잔잔한 구름과 붉은 낙엽 그리고 그 밑에 고독한 분위기에 감돈 가을 나그네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구르몽의 어조는 행이 거듭될수록 애상이 짙어지며, 마지막에 이르러 스산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민다. 쓸쓸하고도 짧게 흘러가는 고독감은 곧바로 ‘시몬, 눈은 네 목처럼 희다’로 시작하는 겨울에 관한 시에서도 이어진다. 화자는 시몬을 간절히 불러보지만 그 분위기는 차갑고 더욱 슬프다.

 

과연 두 편의 시에 언급되는 ‘시몬’은 과연 누굴까. 지금도 미지의 여인이 시인과 어떤 관계인지 무척 궁금하다. 이 시를 처음 읽는 사람은 시인이 짝사랑했던 여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구르몽은 ‘시몬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구르몽은 금욕을 멀리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금욕은 성적 일탈 가운데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구르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달리 완벽한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그가 쓴 시 두 편은 애송되고 있지만, 여전히 시인의 삶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구르몽의 생애를 소개한 글을 알 수 있는 책은 고종석의 『히스토리아』(마음산책, 2003/절판)와 동아일보 이기우 기자의 『매혹과 환멸의 20세기 인물 이야기』(황금가지, 2006), 단 두 권뿐이다. 두 권 다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칼럼을 모은 책이라서 구르몽을 자세히 알기에는 만족스럽지 않다. 고종석과 이기우의 칼럼은 국내에서 단편적으로 많이 알려진 구르몽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구르몽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남겼는데 국내에 소개된 것은 『색 색 색』(문지사, 1993년)이라는 참으로 요상한 제목이 붙여진 작품만이 유일하다. 이 소설은 1908년에 발표되었고, 원제는 『Couleurs, Contes Nouveaux Suivi de Choses Anciennes』이다. 14편의 독립된 이야기와 1편의 산문시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의 다채로운 모습을 주제로 하고 있다. 순수한 목가적 사랑에서부터 쾌락을 강조하는 사랑까지 각기 다른 연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독신인 그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쾌락을 철저히 거부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색 색 색』은 구르몽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가 몰랐던 구르몽의 또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구르몽은 시인 아폴리네르와 플뢰레라는 소설가와 함께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자기만 혼자 걸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혼자 공원을 걷고 싶었던 것일까. 아폴리네르는 구르몽이 어디에 가는지 몰래 뒤를 밟았다. 구르몽은 철책에 서 있더니 거기에 자신의 친필이 있는 종이 한 장을 붙였다. 그러자 종이가 붙인 철책 쪽으로 여인들이 다가왔다. 그러자 여인들은 종이에 적힌 글과 그 글을 쓴 주인을 바라봤다. 갑자기 여인들은 시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하여 그냥 떠나고 말았다. 아폴리네르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구르몽을 피했던 여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시인이 쓴 종이에 자신과 성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100프랑으로 내건 조건이 있었는지 말이다. 여인은 공원을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창녀였고, 못 생긴 시인의 얼굴을 보고 100프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무시하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창녀는 시인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구르몽 입장에서는 무척 자존심 상할 법한 일이다.

 

구르몽은 “금욕은 성적 일탈 가운데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겉보기와는 달리 쾌락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가 실천하는 금욕적 삶은 자신을 스스로 단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묘한 성적 일탈일 뿐이다.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추한 얼굴을 가진 바람에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시인에게 쾌락을 스스로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이다.

 

구르몽이 여성들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 그는 1915년 죽기 한 달 전까지 나탈리 크리포드 버니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꽤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구르몽과 나탈 리가 만나기 시작한 때는 1910년. 이때 나탈리는 33세의 작가 지망생이었고, 구르몽은 화려한 시기가 완전히 지나가버린 52세였다. 두 사람의 집은 서로 가까워서 구르몽은 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을 초청하는 모임에 나탈리도 초대했다. 비록 못 생기고 성적 매력이 없지만, 구르몽은 동료 작가들로부터 훌륭한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아마도 구르몽은 자신의 명예를 기회 삼아 나탈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외모가 아닌 능력으로 승부를 건 것이다. 구르몽은 나탈리가 직접 쓴 시를 자신이 운영하는 문학잡지에 실리게 할 정도로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했고, 완전히 그녀만 바라보는 사랑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구르몽은 그녀를 ‘아마조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사랑을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나탈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레즈비언이었다.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으나 구르몽은 나탈리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여인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녀의 매력에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구르몽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녀에게 보낸 편지글이 책으로 공개되었다. 책 제목은 ‘아마조네스에게 보낸 편지’였다. 구르몽과 나탈리가 남긴 상당한 분량의 편지글은 한 권의 철학책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수준 높은 관념적 주제 혹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나탈리는 1972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파리에 있는 나탈리의 묘지에 ‘구르몽의 아마조네스’라고 언급된 묘비명이 남아 있다.

 

과연 미지의 여인 시몬은 시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나탈리인 것일까. 아쉽지만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낙엽’과 ‘눈’이 나탈리를 만나기 전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몸부림치던 시인이 사랑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상상 속의 뮤즈를 문장을 통해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여인 조각상에 사랑에 빠져 비너스에게 소원을 빌어 조각상을 갈라테이아라는 여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구르몽은 시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시몬을 그리워하고 그녀를 간절히 부름으로써 진짜 사랑이 실현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추한 외모에 모든 연인들의 사랑을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는 비너스마저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시에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녀를 향해 부르는 시인의 공허한 독백이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진다. 시몬아,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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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7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시절 친구가 건네준 편지에 늘 저 싯구가 적혀 있었어요. 그 친구는 4계절 내내 저 싯구를 쓰던 참 철학적인 친구였죠. 구르몽 시인의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까요? ㅎㅎ
그의 삶이 참 안쓰럽긴 한데 그런 고통과 어려움이 없었다면 깊이 있는 시들도 나오지 않았을거란 생각도 드네요. 삶이란 참...^^

cyrus 2015-01-07 11:05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가 있는 편지라니 무척 낭만적입니다. ^^
 
안도현의 발견 -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안도현의 발견』을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싶은 분이라면 꼭 이 책이 몇 쇄인지 먼저 확인하시길 당부한다. 내가 읽은 책은 작년 11월 5일에 나온 초판 2쇄다. 그런데 2쇄로 나온 책중에 글 제목을 잘못 인쇄되었거나 아예 제목 자체가 없는 글이 수록된 파본이 있을 수 있다.

 

 

 

 

 

 

130쪽은 순교한 천주교인 요한 유중철과 루갈다 이순이 남매 이야기를 소개한 ‘동정부부’라는 글이 시작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글의 제목이 ‘과일군’으로 인쇄되었다. 그렇다면 글 제목인 ‘동정부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152쪽에 ‘과일군’이 시작되는 페이지에 ‘동정부부’가 인쇄되었다. 글 제목이 서로 뒤바뀌었다.

 

 

 

 

 

 

잘못된 인쇄는 이것뿐만 아니다. 다음 글이 이어질수록 엉뚱한 글 제목이 나온다. 132쪽에 시작되는 글의 제목은 ‘토끼비리’이다. 그런데 150쪽에 나오는 글의 제목인 ‘시비’로 소개되어 있다. 다음 페이지인 133쪽을 보게 된다면 책을 만드는 과정에 편집이 제대로 되었는지 의심이 든다. ‘보리밝기’라는 글의 제목이 찍혀 있다. 

 

 

 

 

 

 

 

134쪽에 나오는 글의 제목은 ‘내성천’이다. 그런데 제목이 사라졌다. 이것 말고도 제목 없이 인쇄된 글이 있다. 책의 2장(‘기억의 발견’)에 수록된 글 제목 대부분 잘못 인쇄되었다. 바로 잡아야 할 페이지가 꽤 많다.

 

초판이라면 이런 실수를 용납할 수 있다. 그런데 2쇄에서 이런 인쇄 실수가 나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판사측이 초판의 인쇄 오류를 알지 못한 채 2쇄를 찍었다는 것이다. 알라딘에 등록된 『안도현의 발견』 서평들 하나하나 읽어보면 인쇄 오류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 서평이 없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인쇄 오류를 발견했으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읽은 책이 수많은 2쇄 중에 하필 잘못 만들어진 소수의 파본일 수도 있다. 

 

한 글자가 잘못 인쇄된 책은 사소한 편집의 실수로 넘어갈 수 있다. 이것만 가지고 파본이라고 우기면서 새 책으로 바꿔달라고 강요하는 것도 우습다. 그런데 4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의 인쇄가 잘못되었으면 책을 산 독자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물론 아량이 넓은 독자라면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편집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인쇄 실수를 출판사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특히 도서정가제 실행 이후로 출판사는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는 품질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 돈 주고 파본을 산 독자 입장에서는 불쾌하다. 파본을 바꾸고 싶지 않더라도 독자는 출판사에 책의 잘못된 점을 알려야 한다. 아니면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를 위해 서평으로 문제 사항을 언급해줘야 한다. 독자 서평은 유명 블로거가 쓴 것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이 잘 안 읽는다. 일부 출판사 관계자들은 독자 서평이 아무리 많은 책이라도 판매 부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름 모르는 독자는 당신의 평범한 서평을 한 번이라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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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7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지 않은 책이라 알 수 없지만,
안도현이라는 작가와, 한겨레출판이라는 출판사를 생각하면 의외네요.

cyrus 2015-01-07 11:11   좋아요 0 | URL
서점에 파는 책들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2쇄 오류를 이미 확인하고 다음 쇄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단발머리 2015-01-0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일이 크네요. 실수라고 하기에도요.
안도현님과 한겨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상황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요.
어쩌면 아예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cyrus 2015-01-07 11:12   좋아요 0 | URL
일단 서점에 파는 책의 상태를 확인하고 인쇄 오류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한겨레출판사 페이스북에 직접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해요.

소민 2015-01-13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쇄를 구입하여 읽던 중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큰 오류라니요. 알리는 방법이 없을까요? 책 내용은 너무 좋은데 안타까워요.

cyrus 2015-01-13 19:07   좋아요 0 | URL
제가 교보문고에 파는 책을 확인해보니 벌써 3쇄가 나왔더군요. 출판사가 2쇄 파본을 미리 확인해서 바로 3쇄를 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소민 2015-01-15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알려주신 덕에 알라딘 1대1 문의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cyrus 님의 리뷰 오류와 같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즉각 3쇄본으로 바꿔줬습니다. 오류본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하나, 했는데 오늘 새책이 왔습니다. 감사드려요.^^

cyrus 2015-01-16 11:58   좋아요 0 | URL
잘 됐군요. 사실 이 정도 오류가 많으면 파본으로 봐야해요. 제가 새책을 받은듯한 기분이 듭니다. ^^

종이배 2015-01-27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책도 그렇습니다.ㅜ
엊그제 출판사에 문의해 놓았는데 답이 없군요.
출판사가 아니라 알라딘에 문의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생기네요.
사실 이건 알라딘 잘못이 아니라 출판사 잘못일 텐데 말이지요...
솔직히 이것은 `전량 리콜` 수준이어서 출판사 홈피 공지사항에 올려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출판사 측에서 먼저 내놓은 답이 없는 것 같아
한겨레출판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책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참 좋은데, 실수에 대응하는 출판사의 태도가 참 아쉽네요...

cyrus 2015-01-27 21:24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인쇄 오류 문제가 심각한데요. 출판사가 아무런 공식 사과문이나 해명도 없다니 실망스럽습니다. 출판사의 안이한 태도가 좋은 저자와 책의 명예까지도 떨어뜨리네요. 이런 출판사는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신뢰받을 수 없습니다. 종이배님도 파본을 새책으로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알라딘에 문의해보셨으면 합니다.

종이배 2015-01-30 21:0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글을 올리고 난 뒤, 고민하다가 출판사에 항의성 메일을 드렸더랬습니다.
그 뒤에 곧바로 출판사에서 새로 찍은 도서를 보내주고
파본 도서의 폐기 또는 반품에 관한 사과문과 안내를 받았답니다.
뒤늦게라도 출판사에서 제대로 처리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 다행스러웠습니다.
평소에 신뢰하지 않았던 출판사였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겠지만,
신뢰하고 싶은 출판사였기에 이런 지적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내 것만 잘못 되었나,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cyrus님이 올려주신 글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거든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