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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ㅣ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평점 :
우리는 바보다.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평범하고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느낀다. 그것은 추억과 공감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태어난다. 흔히 그리움이란 두 손 두 발로 만져왔던 자신만의 추억들을 향하고 있기 마련이다. ‘토토가’가 우리에게 준 감동의 열기가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들려준 90년대 가수들의 목소리는 잊고 있었던 시절에 대한 환영들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시를 잘 읽지 않거나 시를 읽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짧은 시에서 우리가 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날 읽은 시 한 편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학창시절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국어 시간에 배운 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의 문장으로 새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안도현의 발견』(한겨레출판, 2014)의 부제가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다. 지나치게 길면서도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 시를 읽음으로써 단순한 대상을 새로 보게 된다. 시인은 단어를 조합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간결한 직물을 짜낸다.
11년 전에 나온,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 안도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는 사람과 사물 혹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나오는 대상은 대체로 우리가 소박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시인은 꽃, 나무, 새, 물고기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자연의 섭리나 기억되지 못하는 하찮은 사물에 세상사를 비유하여 직접 눈에 보이도록 만든다. 즉, 시인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삶의 방식, 즉 보조관념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루빈의 잔’이 생각난다. 눈과 마음이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와 욕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독자의 고정된 관습을 시인은 타파한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의 시야를 넓힌다.
이 시집은 언뜻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를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인물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이 바로 시인 백석이다. 안도현 시인은 작년에 『백석 평전』(다산북스, 2014)를 펴낼 정도로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흠모해왔다.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서 평소 백석을 사랑했던 시인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16쪽)
이 시집이 안도현 시인이 펴낸 이전 시집과 다르게 자아와 외부 대상(자연)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무척 농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의 전개가 가능한 이유를 백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백석 「북관」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104쪽)
시에서 북쪽 지역 방언과 고어를 사용했던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도현 시인은 여치 소리를 들으려고 무릎을 모은 뒤에 앉아 ‘끼밀고’ 있다. 여기서 ‘끼밀다’는 어떤 물건을 자세히 보고 느끼기 위해 얼굴 가까이 들이미는 자세를 뜻한다. 백석은 이미 자신의 시 ‘북관(北關)’에서 함경도 음식을 먹으면서 이 지역의 투박함을 자신 삶의 일부로 껴안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끼밀기를 통해 시인은 여진에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화려했던 신라의 향수를 맛보는 데 성공한다.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집 한 채, 어느 날 가보니 저 혼자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형편없이 납작해졌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러나 귀가 뭉개진 집은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을 내려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 집에 살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나 안 오나
처마 끝으로 고독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집 없이 떠도는 옛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두 눈으로 바라볼 게 없도록
도무지 그리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도록
단 한 번에 기둥은 무릎을 접고 서까래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꺾고 봉창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주저앉은 집」, 68쪽)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략)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 「정주성」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84쪽)
「주저앉은 집」은 백석의 첫 작품 「정주성」의 분위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작품 다 더 이상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건물을 쓸쓸하게 묘사한다. 백석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경성을 벗어나 고향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북방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곳 또한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백석이 가보고 싶은 북방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고향이지만, 이제는 정착할 수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변했다. 시인이 본 ‘헐리다 남은 성문’은 근대화 바람에 풍화되어 무너져버린 전통사회이다. 「주저앉은 집」에서 무너져버린 폐가 상태에 감정을 이입하여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주인을 기다린다. 폐가가 기다리는 주인은 혹시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해 북방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백석이 아닐까. 그가 아니더라도 북방의 고향 전체를 마음속에 간직했던 백석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귀 본능을 지닌 도시인이 돌아오기를 폐가는 말없이 기다린다. 그가 돌아와야 어렴풋이 남아있는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대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드물다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중에서, 92쪽)
메마른 듯, 얼핏 죽은 듯 보이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로 숨결을 보낸다면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갈매나무는 삶의 고통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시인의 나무이다. 한편, 가족의 안부도 모른 채 저 북방 춥고 쓸쓸한 여관방에서 외로움에 떨었을 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유일한 희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외로운 가장의 차디찬 가슴 한켠에 자란 갈매나무에서 안도현 시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본다.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갈매나무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갈 마음을 다잡게 한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시큰거릴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순수한 사춘기 청년의 마음처럼. 이제는 남아있는 글만으로 만날 수 있는 시인에게 다가서고 싶고, 자꾸 잊혀가는 시간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일생을 복원했다. 참으로 대단한 문학적 사랑이다. 믿거나 말거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 1위가 노랫말에 사랑하는 상대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면서 ‘백석’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을 넣는 대신, ‘백석의 시’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