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 네 가슴은 눈처럼 차다.

 

눈은 불의 키스에 녹지만

네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서 슬프지만

네 이마는 밤빛 머리카락 밑에서 슬프다.

 

시몬, 네 동생 눈은 정원에 잠들어 있다.

시몬, 네 눈은 내 눈 그리고 내 사랑.

 

(레미 드 구르몽 ‘눈’, 고종석 『히스토리아』에 인용)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세계의 명시를 모은 작은 시집을 보면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르몽의 시 ‘낙엽’을 발견할 수 있다. 잔잔한 구름과 붉은 낙엽 그리고 그 밑에 고독한 분위기에 감돈 가을 나그네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구르몽의 어조는 행이 거듭될수록 애상이 짙어지며, 마지막에 이르러 스산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민다. 쓸쓸하고도 짧게 흘러가는 고독감은 곧바로 ‘시몬, 눈은 네 목처럼 희다’로 시작하는 겨울에 관한 시에서도 이어진다. 화자는 시몬을 간절히 불러보지만 그 분위기는 차갑고 더욱 슬프다.

 

과연 두 편의 시에 언급되는 ‘시몬’은 과연 누굴까. 지금도 미지의 여인이 시인과 어떤 관계인지 무척 궁금하다. 이 시를 처음 읽는 사람은 시인이 짝사랑했던 여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구르몽은 ‘시몬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구르몽은 금욕을 멀리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금욕은 성적 일탈 가운데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구르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달리 완벽한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그가 쓴 시 두 편은 애송되고 있지만, 여전히 시인의 삶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구르몽의 생애를 소개한 글을 알 수 있는 책은 고종석의 『히스토리아』(마음산책, 2003/절판)와 동아일보 이기우 기자의 『매혹과 환멸의 20세기 인물 이야기』(황금가지, 2006), 단 두 권뿐이다. 두 권 다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칼럼을 모은 책이라서 구르몽을 자세히 알기에는 만족스럽지 않다. 고종석과 이기우의 칼럼은 국내에서 단편적으로 많이 알려진 구르몽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구르몽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남겼는데 국내에 소개된 것은 『색 색 색』(문지사, 1993년)이라는 참으로 요상한 제목이 붙여진 작품만이 유일하다. 이 소설은 1908년에 발표되었고, 원제는 『Couleurs, Contes Nouveaux Suivi de Choses Anciennes』이다. 14편의 독립된 이야기와 1편의 산문시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의 다채로운 모습을 주제로 하고 있다. 순수한 목가적 사랑에서부터 쾌락을 강조하는 사랑까지 각기 다른 연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독신인 그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쾌락을 철저히 거부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색 색 색』은 구르몽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가 몰랐던 구르몽의 또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구르몽은 시인 아폴리네르와 플뢰레라는 소설가와 함께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자기만 혼자 걸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혼자 공원을 걷고 싶었던 것일까. 아폴리네르는 구르몽이 어디에 가는지 몰래 뒤를 밟았다. 구르몽은 철책에 서 있더니 거기에 자신의 친필이 있는 종이 한 장을 붙였다. 그러자 종이가 붙인 철책 쪽으로 여인들이 다가왔다. 그러자 여인들은 종이에 적힌 글과 그 글을 쓴 주인을 바라봤다. 갑자기 여인들은 시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하여 그냥 떠나고 말았다. 아폴리네르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구르몽을 피했던 여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시인이 쓴 종이에 자신과 성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100프랑으로 내건 조건이 있었는지 말이다. 여인은 공원을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창녀였고, 못 생긴 시인의 얼굴을 보고 100프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무시하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창녀는 시인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구르몽 입장에서는 무척 자존심 상할 법한 일이다.

 

구르몽은 “금욕은 성적 일탈 가운데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겉보기와는 달리 쾌락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가 실천하는 금욕적 삶은 자신을 스스로 단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묘한 성적 일탈일 뿐이다.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추한 얼굴을 가진 바람에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시인에게 쾌락을 스스로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이다.

 

구르몽이 여성들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 그는 1915년 죽기 한 달 전까지 나탈리 크리포드 버니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꽤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구르몽과 나탈 리가 만나기 시작한 때는 1910년. 이때 나탈리는 33세의 작가 지망생이었고, 구르몽은 화려한 시기가 완전히 지나가버린 52세였다. 두 사람의 집은 서로 가까워서 구르몽은 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을 초청하는 모임에 나탈리도 초대했다. 비록 못 생기고 성적 매력이 없지만, 구르몽은 동료 작가들로부터 훌륭한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아마도 구르몽은 자신의 명예를 기회 삼아 나탈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외모가 아닌 능력으로 승부를 건 것이다. 구르몽은 나탈리가 직접 쓴 시를 자신이 운영하는 문학잡지에 실리게 할 정도로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했고, 완전히 그녀만 바라보는 사랑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구르몽은 그녀를 ‘아마조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사랑을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나탈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레즈비언이었다.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으나 구르몽은 나탈리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여인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녀의 매력에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구르몽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녀에게 보낸 편지글이 책으로 공개되었다. 책 제목은 ‘아마조네스에게 보낸 편지’였다. 구르몽과 나탈리가 남긴 상당한 분량의 편지글은 한 권의 철학책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수준 높은 관념적 주제 혹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나탈리는 1972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파리에 있는 나탈리의 묘지에 ‘구르몽의 아마조네스’라고 언급된 묘비명이 남아 있다.

 

과연 미지의 여인 시몬은 시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나탈리인 것일까. 아쉽지만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낙엽’과 ‘눈’이 나탈리를 만나기 전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몸부림치던 시인이 사랑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상상 속의 뮤즈를 문장을 통해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여인 조각상에 사랑에 빠져 비너스에게 소원을 빌어 조각상을 갈라테이아라는 여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구르몽은 시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시몬을 그리워하고 그녀를 간절히 부름으로써 진짜 사랑이 실현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추한 외모에 모든 연인들의 사랑을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는 비너스마저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시에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녀를 향해 부르는 시인의 공허한 독백이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진다. 시몬아,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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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7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시절 친구가 건네준 편지에 늘 저 싯구가 적혀 있었어요. 그 친구는 4계절 내내 저 싯구를 쓰던 참 철학적인 친구였죠. 구르몽 시인의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까요? ㅎㅎ
그의 삶이 참 안쓰럽긴 한데 그런 고통과 어려움이 없었다면 깊이 있는 시들도 나오지 않았을거란 생각도 드네요. 삶이란 참...^^

cyrus 2015-01-07 11:05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가 있는 편지라니 무척 낭만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