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을 만드는 1인 출판사 페가나북스클라크 애슈턴 스미스(Clark Ashton Smith)의 대표작인 조티크(Zothique)연작을 출간했다. 스미스는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러브크래프트(Lovecraft)코난 연대기(Conan Saga)로버트 E. 하워드(Robert Ervin Howard)와 동시대에 활동한 미국 장르문학의 거장이다[1]. 그의 작품은 이미 선집 형태로 출간된 적이 있다. 러브크래트트 전집의 특별판으로 소개된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황금가지)은 총 1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선집을 통해 소개되었던 조티크 연작은 다섯 편이다. 조티크 연작 중 하나이자 좀비(Zombie)가 등장하는 Necromancy in Naat나트에서의 마법이라는 제목으로 좀비 연대기》(책세상)에 선보였다.

 

 

 

 

 

 

 

 

 

 

 

 

 

 

 

 

 

 

 

 

 

 

 

 

 

 

 

 

 

 

 

 

 

 

*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조티크(페가나북스, 2018)

*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조티크 (샘플 북)(페가나북스, 2018)

*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황금가지, 2015)

* 정진영 옮김 좀비 연대기(책세상, 2017)

 

   

 

 

조티크는 스미스가 창작한 가상의 대륙 이름이다. ‘고대를 뜻하는 앤티크(Antique)의 운을 따서 만든 명칭이라고 한다. 조티크는 과학 기술과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지구 최후의 대륙이다. 그곳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밀교와 고대 마법만이 남아 있다. 스미스는 조티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조티크 연작은 단편 16, 1, 희곡 1으로 구성되어 있다. 페가나북스는 조티크 연작 전부 번역했다. 페가나북스 판과 황금가지 판에 수록된 조티크 연작은 다음과 같다. 스미스의 작품 대부분은 환상소설과 공포 문학을 주로 소개한 펄프 픽션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를 통해 발표되었다.

 

 

 

 

* The Empire of the Necromancers (19329, <위어드 테일즈>)

마법사들의 제국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조티크

 

 

* The Isle of the Torturers (19333, <위어드 테일즈>)

고문자들의 섬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조티크

 

 

* The Voyage of King Euvoran

(1933, 스미스의 단편집 <이중 그림자>에 수록, <위어드 테일즈> 19479월 호에 게재)

에우보란 왕의 항해

조티크

 

 

* The Weaver in the Vault (19341, <위어드 테일즈>)

지하묘지의 방직공

조티크

 

    

* The Witchcraft of Ulua (19342, <위어드 테일즈>)

울루아의 마법

조티크

 

 

* The Charnel God (19343, <위어드 테일즈>)

납골당의 신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시체를 먹는 신 (조티크)

 

 

* The Tomb-Spawn (19345, <위어드 테일즈>)

무덤 속 괴물

조티크

 

 

* Xeethra (193412, <위어드 테일즈>)

지트라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조티크

 

 

* The Dark Eidolon (19351, <위어드 테일즈>)

검은 곡두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검은 신상 (조티크)

 

 

* The Last Hieroglyph (19354, <위어드 테일즈>)

마지막 상형문자

조티크

 

 

* The Black Abbot of Puthuum (19363, <위어드 테일즈>)

푸툼의 수도원장

조티크

 

 

* Necromancy in Naat (19367, <위어드 테일즈>)

나트에서의 마법 (호러 연대기)

나트의 강령술 (조티크)

 

 

* The Death of Ilalotha (19379, <위어드 테일즈>)

일라로타의 죽음

조티크

 

 

* The Garden of Adompha (19384, <위어드 테일즈>)

아돔파의 정원

조티크

 

 

* The Master of the Crabs (19483, <위어드 테일즈>)

게의 지배자

조티크

 

 

* Zothique (1951, 시집 <검은 성>에 수록)

조티크

조티크

 

 

* The Dead will Cuckold You (1951년에 쓴 것으로 추정됨, 1989년에 공개됨)

죽은 자가 부정(不貞)을 저지르리라

조티크

 

 

* Morthylla (19535, <위어드 테일즈>)

모르틸라

조티크

 

 

 

 

스미스의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보다는 환상,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곳에 서 있으며, 비이성과 광기의 세계를 대변한다. 그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속에서 헤매거나 꿈과 환상 속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기괴하게 생긴 괴물들이 나타난다.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마지막 상형문자는 러브크래프트에서 영감을 받은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 분위기를 제대로 담아낸 작품이다. 아돔파의 정원은 인간의 신체 일부와 식물을 접붙인 괴물이 등장한다. 게의 지배자는 스미스가 절필한 지 10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조티크 연작에서 유일한 1인칭 소설이며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티크 연작을 읽기 전에 무료로 구매할 수 있는 샘플 북을 꼭 챙겨 보는 것이 좋다. 이 샘플 북에는 조티크 연작 일부만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샘플 북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를 정도로 스미스의 생애, 조티크 연작에 대한 상세한 설명 등이 채워져 있어서 내용이 알차다. 샘플 북이 아니라 해설서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이 책을 만든 출판사는 페가나북스이다. 1인 전자책 전문 출판사이다. 번역, 출판물 제작, 홍보 등 모든 업무를 엄진이라는 분이 다 하고 있다. 2014년에 처음으로 페가나북스를 알게 됐는데, 매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한편으론 종이책으로 나와도 잘 팔리지도 않는) 장르문학 작품들을 소개하는 엄진 님의 노고에 이 글로나마 감사를 표한다.

 

 

 

 

[] 스미스와 러브크래프트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쓴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리뷰를 참고하면 된다.

http://blog.aladin.co.kr/haesung/96590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큐큐퀴어단편선 1
이종산 외 지음 / 큐큐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퀴어(Queer)는 레즈비언 · 게이 · 양성애자 · 트랜스젠더 등 세상의 모든 성소수자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퀴어 소설은 성소수자의 일상을 전면으로 다룬 소설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성소수자가 등장하지 않는 퀴어 소설도 가능하다. 이런 퀴어 소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성소수자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一般, 이성애자)’ 작가가 소설에서 ‘이반(異般: 성소수자)’ 서사를 조형하는 일은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는 1인 퀴어 문학 전문 출판사인 큐큐가 선보인 국내 첫 퀴어 단편 선집이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종산, 김금희, 박상영, 임솔아, 강화길, 김봉곤 작가가 쓴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여섯 편의 소설들은 서양 고전을 퀴어 서사로 변주한 것이다.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가 쓴 『가든파티』는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맨스필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파티에 들뜬 부유한 사람들과 교통사고를 당한 노동자의 비참함을 비교하며 인생의 한 단면을 펼친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결코 작위적이지 않다. 그저 유복한 집 안에서 자란 소녀가 가난한 노동자의 죽음을 접한 후 겪는 심리 변화만 따라간다. 『가든파티』가 그랬듯이 이종산 작가의 『볕과 그림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의 진실에 깨닫는 인물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죽음은 언제나 삶과 함께한다. 죽음은 삶, 그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종산 작가는 ‘죽음’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의미도 주목한다. 사랑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상실은 또 다른 사랑을 통해 치유된다. 『볕과 그림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느끼는 상실의 감정을 어떻게 마주치면서 극복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삶은 고통스러우나 또한 그것을 ‘사랑’과 함께 안고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기쁨과 묘한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고는 한다.

 

(작가 노트, 35쪽)

 

 

김금희 작가의 『레이디』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애러비』『죽은 사람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소설이다. 아련하고 애틋한 여고생들의 첫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퀴어 문학의 고전이다. 도리언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박상영 작가의 『강원도 형』에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인스타그래머 ‘도이언’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언론, 광고 같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외모 강박이나 외모지상주의는 점점 더 고착화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성소수자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외모지상주의는 성소수자의 몸에 대한 편견(“성소수자는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려고 화장을 한다”)을 낳을 뿐만 아니라 몸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임솔아 작가의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허먼 멜빌(Herman Melville)『선원, 빌리 버드』를 변주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타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여 ‘정상’으로 만들려는 ‘선한 폭력’이 어떻게 인간 대 인간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는 특정한 사람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 자신이 느끼는 삶의 결핍이나 통증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 타자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자기의 유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상이라는 것은 계급이고 권력이라고 생각해. 정상성은 그 영역 안에 종속되어야 안심이 되니까. 나는 비정상이어서 아픈 게 아니라 나를 거부하면서까지 정상이 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아팠어.”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135쪽)

 

 

강화길 작가의 『카밀라』는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나오는 세리든 르 파누(Sheridan Le Fanu)의 동명 소설을, 김봉곤 작가의 『유월 열차』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은하철도의 밤』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여섯 편의 소설은 생각하기에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이 ‘평범하게’ 느껴졌다면 이 책을 만든 작가와 출판인들 입장에선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들의 사랑 또한 인간으로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큐큐퀴어단편선’은 매년 한 권씩 선보인다고 한다. 여전히 세상에 호명되지 못한 성소수자들이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자주 나왔으면 한다. 이야기는 멈춰선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거운 식인 - 서구의 야만 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7
임호준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순절(四旬節) 기간에는 예수의 행적을 생각하며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일컫는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사순절은 예수의 삶을 묵상하는 기간이자 경건의 훈련을 하는 경건한 기간이다. 카니발(carnival)은 사순절을 앞두고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독교 전통 축제이다. 카니발이란 말은 ‘육식 금기’를 뜻하는 라틴어 ‘carne vale’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가면과 화려한 복장을 하고 카니발에 참여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평등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시끌벅적한 축제처럼 보이는 카니발에서 인간의 깊은 내면을 열어 보여주는 유용한 열쇠를 찾아냈다. 인간은 질서에 순응하여 살면서도 동시에 전복을 꿈꾼다. 바흐친에 의하면 카니발은 인간의 이런 이중적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화 현상이다. 카니발은 해방된 삶이다. 카니발 기간에는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무질서 상태가 된다. 보통의 삶에 제약을 가하던 모든 금기와 구속이 일시적으로 제거된다. 카니발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모든 금기가 제거된 카니발에서는 거꾸로 된 논리, 반대로 된 논리가 상식을 제압한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이 되며, 성직자는 모독당하고 광대는 추앙받는다. 권위는 추락하고 금욕주의는 조롱당한다.

 

사람이 인육을 먹는 풍습을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 한다. 이 용어는 과거 식인 풍습이 있다고 알려진 서인도제도의 카리브 인들을 가리키는 스페인어에서 유래됐다. 15세기경 서인도제도에 처음으로 가본 스페인 정복자들은 카리브 인들이 인육을 먹는다고 믿었다.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Columbus)는 항해 일지에 카리브 해 식인종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인육을 먹는 행위는 여러 가지 이유로 행해졌다. 주술 혹은 미신이나 종교에 의해 인육을 먹으면 특별한 힘이나 현상이 나타나거나 먹은 사람이 생전에 갖고 있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는 경우도 있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유지하려고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설정했다. 그러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풍습과 신앙은 ‘야만인’의 특성으로 알려졌고, 서구인들의 상상력에서 나온 ‘식인종 신화’는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고, 식인종은 야만인의 표본이 되었다. 야만인은 문명인에게 길들지 않은 존재를 지칭했다. ‘식인종 신화’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즐거운 식인》은 문명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식인 풍습을 ‘카니발’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라틴아메리카의 ‘식인주의’를 소개한다. 식인주의. 국내에서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1920년대 브라질에서 처음 시작된 저항 예술을 설명하는 데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식인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체적인 문화적 정체성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모더니스트들은 식인주의를 내세워 식인종 신화에 맞서 유쾌하게 응수했다. 야만인 담론, 식인종 신화가 유럽인의 문명 우월주의를 부각하기 위해 식인 풍습을 ‘혐오 행위’로 보게 했다면, 식인주의는 유럽인의 시각이 반영된 식인 풍습을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즐기는 ‘축제 행위’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바흐친이 확인한 ‘카니발’의 특징과 비슷하다. 라틴아메리카의 식인주의는 서양 문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골라 먹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식인주의 운동은 유럽 문화를 씹고, 뜯고, 맛을 보면서 소화해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자산으로 만들려는 문화 운동이다.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있어서 식인주의는 모든 민중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한 웃음이다. 라틴 아메리카 지성인들은 식인주의 운동을 통해 유럽 식민주의적 권력의 억압과 위선을 깨부수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생성과 갱생의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카니발은 유럽 기독교 문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흐친이 현재까지도 살아있다면 유럽을 ‘씹어대고 배설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카니발 문화를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는 카니발에 주목한 책을 다시 썼을 것이다.

 

 

 

 

※ Trivia

 

* 11쪽

어떨결에 → 얼떨결에

 

 

* 39, 40쪽

1943년 → 1493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18-12-0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흥미롭군요. 일단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cyrus 2018-12-08 08:20   좋아요 0 | URL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

2018-12-07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2-08 08:39   좋아요 0 | URL
기독교, 이슬람교는 중동에서 시작됐어요. 서로 다른 면이 많지만, 조금은 비슷한 면도 있어요. ^^

페크pek0501 2018-12-0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복과 지배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거역할 수 없는 진리가 있지요. 모든 인간은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

오자를 잘 밝혀 놓으셨네요.

cyrus 2018-12-09 16:08   좋아요 0 | URL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현상은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어요.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진리는 절대 진리죠.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 터키, 수많은 이민자가 돈을 벌기 위해 이스탄불로 들어온다. 그들은 공터에 정착해서 불법으로 집을 짓는다. 정부는 싼값에 일할 노동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민자들이 불법으로 공터를 차지해도 눈감아준다. 메블루트와 그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열두 살 소년 메블루트는 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와 함께 터키의 전통 음료인 ‘보자’를 팔면서 지낸다. 그는 매일 “맛 좋은 보오자아아!”라고 외치면서 골목을 누빈다. 메블루트는 사촌 형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본 라이하라는 소녀에게 한눈에 반해 3년 동안 연애 편지를 쓴다. 그는 한밤중에 라이하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라이하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눈앞의 그녀는 예전에 사랑했던 소녀가 아님을 확인한다. 하지만 메블루트는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결혼까지 해 아이도 낳는다.

 

 

 

 

 

 

 

 

 

 

 

 

 

 

 

 

 

* 오르한 파묵 《내 마음의 낯섦》 (민음사, 2017)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장편소설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은 이스탄불 거리를 누비며 보자를 파는 메블루트와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파묵은 근대 도시 사회로 변하는 이스탄불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을 다채롭게 그려낸다.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는 과도기와 소시민의 삶이 정교하고 촘촘하게 교차하며 엮인다. 이 소설을 통해 터키 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희수 《터키사 100》 (청아출판사, 2017)

* 전국역사교사모임 《처음 읽는 터키사》 (휴머니스트, 2010)

 

 

 

오스만 제국 해체 후 1923년에 출범한 터키 공화국은 세속주의와 민족주의를 국시로 삼았다. ‘터키의 아버지(Atatürk)케말 파샤(Kemal Pasha)가 이끈 군부는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세속주의와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했다. 이슬람이 정치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케말 파샤는 터키를 유럽 국가로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서양식 옷을 입고 다니게 한 것은 물론 선거권도 부여했다.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를 약간 변형한 터키어도 제정했다. 덕분에 터키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1952년 나토(NATO)에 가입했고, 유럽의 일원이라는 평가도 듣게 됐다. 그러나 경제 성장 등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그늘’이 발생했다. 기득권층이 된 터키 근대화 세력의 부패 문제가 심각했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화적 · 이념적 주도권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빼앗아 오지는 못했다. 점점 시대가 바뀌면서 군부 중심 체제는 한계에 부닥쳤고, 21세기 들어와서 권력이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을 외친 이슬람주의 세력에 넘어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은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터키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군부가 주도한 근대화 정책에서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는 민주 투사로 떠오른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아 200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2003년에 내각책임제 총리로 선출됐다. 그러나 2014년에 에르도안이 내각책임제를 직선제로 바꿔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에르도안 세력에 반대하는 언론인과 정치 인사들이 탄압받았다. 에르도안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파묵은 터키를 떠나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는 2016년 쿠데타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세속주의 세력을 숙청했다. 작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는 데 성공하면서 에르도안은 ‘터키의 술탄(Sultan)’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술탄은 이슬람의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Caliph)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이다. 에르도안 정부는 이슬람주의를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화를 재현하려고 있다.

 

《내 마음의 낯섦》에는 전통 관습을 옹호하는 터키 사람들과 세속적인 터키 사람들이 나온다. 특히 이 소설에서 터키 여성들은 전통을 거부하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라이하의 언니 웨디하는 담배를 피우며, 메블루트의 사촌 쉴레이만의 아내 멜라하트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면서 살아온 여성이다. 그러나 군부 세력이 터키 여성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고 해도, 가부장적 사회를 잊지 못하는 이슬람세력의 반발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1980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은 헌법을 마음대로 고치면서까지 독재 정치를 일삼았지만, 임기 초기에 임신 중지(낙태)를 허용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웨디하는 에브렌 정권의 임신 중지 허용 정책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케난 에브렌 장군이 1980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삼 년이 지나 좋은 일을 했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라 미혼 여성에게 임신한 지 십주가 지나기 전까지는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을 권리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 권리는 혼전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미혼의 용감한 도시 여성에게 유용했다. 기혼 여성이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남편들을 설득하여 낙태에 동의한다는 사인을 받아야 했다. 둣테페에 사는 많은 남편들은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죄악이야, 애들이 크면 우릴 보살피겠지 하면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 [중략] 어떤 여자들은 서로에게서 배운 원시적인 방법으로 낙태를 시키기도 했다.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메블루트가 사인을 해 주지 않아도 절대 동네 아낙네들의 말에 솔깃해서 그런 짓 하지 마, 알았지, 라이하? 나중에 후회할 거야.”

 

(《내 마음의 낯섦》, 464쪽)

 

 

글쎄, 내가 보기엔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시골에 사는 터키 여성은 합법적인 임신 중지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남편이 아내의 선택에 동의를 받아야 하는가? 남편들은 임신 중지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남편의 동의를 받지 못해 임신 중지를 할 수 없게 된 여성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불법 임신 중지를 행한다.

 

 

 

 

 

 

 

 

 

 

 

 

 

 

 

 

*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 (한울아카데미, 2018)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임신 중지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이슬람 경전 코란(Quran)은 태중의 자식을 살해한 부모는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살해된 자식이 그 부모의 죄를 증언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심지어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도 임신 중지를 허용되지 않는다. 코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무슬림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는 ‘삶의 완성’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슬람은 ‘명예’를 중요시한다. 무슬림 여성은 정숙하게 행동하면서 순결을 지켜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명예로운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출산 거부와 불임은 무슬림 여성의 명예를 위협하는 요인이다.

 

라이하는 아이를 원하는 메블루트를 설득하지 못해 ‘혼자서’ 임신 중지를 시도하게 되고, 끝내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살이다. 이 소설에서 메블루트는 정직하게 사는 인물로 나오지만, 그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라이하의 정신적 부담감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라이하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기를 바란다.

 

 

 라이하는 울기 시작했다. 메블루트가 돈을 잘 벌지 못하고, 매니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했으며, 이번 보자 가게도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 겁을 먹었고, 베이올루의 혼수품 상점에서 주문받아 하는 바느질 일이 없었더라면 매달 말까지 근근이 버티며 살았을 거고, 아기가 제 먹을 것을 달고 세상에 나온다는 말에만 의지할 수는 없고, 이미 결심이 확고하다고 말했다. 어차피 네 명이 아침저녁으로 꽉 끼어 사는 단칸방에는 새 사람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내 마음의 낯섦》, 464쪽)

 

 

 

 메블루트는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어쩌면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상상을 펼쳤다. 아이의 이름은 메블리드한이 될 것이다. [중략] 메블루트는 라이하가 아이를 지우는 데 이토록 단호한 까닭은 돈이 없고 성공하지 못한 남편에 대한 항변, 심지어 일종의 벌주기가 아닐까하는 의심과 원망이 일었다. 아이를 낳으라고 설득하면 그들의 삶에 어떤 결핍이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듯했다. 더욱이 악타쉬 가족보다 더 행복하다는 게 확실해질 거였다. [중략] 행복한 사람은 자식이 많다. 불행한 부자들은 터키에 인구 제한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유럽인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질투했다.

 

(《내 마음의 낯섦》, 465쪽)

 

 

메블루트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남편이 되지 못해서 라이하가 아이를 지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는 아내를 원망한다. 그는 열등감을 떨쳐내려고 ‘희망 고문’을 한다. 라이하가 아이를 많이 낳아주면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메블루트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하며, 가부장으로서의 본인의 경제적 무능력을 은폐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라이하가 아이를 낳아주기를 희망한다. 메블루트의 순진한 발상은 아내의 희생을 강요한다.

 

 

 

 

 

 

 

 

 

 

 

 

 

 

 

 

 

 

* 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 《유럽 낙태 여행》 (봄알람, 2018)

* 조은주 《가족과 통치》 (창비, 2018)

 

 

 

우리나라에서 임신 중지는 불법이다. 우리나라에서 ‘낙태죄’가 처음으로 규정된 것은 1953년 형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장을 위해 적극적인 산아제한 정책을 도입하면서 불법 낙태를 묵인했다. 한 자녀 출산 후 불임 시술을 하면 국가의료원에서 그 자녀 출산 비용을 무상화했고, 불임한 부부에겐 주택융자의 우선권이 주어졌다. 남성이 불임을 택하면 예비군 훈련 면제의 특혜를 제공했다. 그러나 산아제한 정책은 주로 여성의 몸에 집중되었다. 국가 권력은 여성의 몸을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정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불법 낙태 시술을 단속하기로 했다.

 

낙태죄 논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은 임신 중지를 ‘범죄 행위’로 만드는 법적 규제나 종교적 · 문화적 장벽들로 인해 불평등을 겪고 있다. 라이하처럼 불법 임신 중지를 행하다가 생명을 잃는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다. 에도르안 정부는 낙태 금지법 도입을 추진하려고 한다. 불법 임신 중지는 여성의 생명을 위협한다. 파묵은 소설에서 라이하의 최후를 단 한 줄로 묘사한다.

 

 

 라이히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했고, 끔찍한 일이 벌어져 출혈과 고통으로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내 마음의 낯섦》, 475~476쪽)

 

 

이 문장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세밀한 묘사로 정평이 난 파묵은 왜 그녀의 임신 중지 행위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을까? '원시적인 방법'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왜 라이하는 혼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여성 작가가 이 소설을 썼더라면 라이하는 쓸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임신 중지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어머니나 동성 친구와 동행하면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는다고 한다. 라이하의 복잡다단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던 언니 웨디하가 그녀 곁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은 게 아쉽다. 이런 묘사가 없다는 건 ‘남성’ 작가의 한계로 봐야 하는가? 이 슬픈 장면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자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8-12-0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한 100여 페이지 정도 읽다가 그만둔지 거의 반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같이 야반도주한 그녀가 다른 사람임이 밝혀지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

cyrus 2018-12-07 12:28   좋아요 0 | URL
파묵의 소설이 독서모임 선정 도서가 아니었으면 읽을 일이 없었을 거예요.. ^^;;

레삭매냐 2018-12-0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궁금하기는 한 데 원체 파묵의
책이 좀 지루하다는 썰이 있어서 선뜻
도전하기가 그렇네요...

cyrus 2018-12-07 12:31   좋아요 0 | URL
분량이 많아서 마음잡고 읽기가 힘들어요.. ㅎㅎㅎ 파묵 작품 전작 읽기에 성공한 독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

2018-12-06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2-07 12:44   좋아요 0 | URL
제가 왜 남의 글을 검토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병신’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단어인 것 맞습니다. 대부분 장애인 인권론자들은 ‘병신’을 쓰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장애인 인권론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히면 장애인 인권 운동에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저는 ‘병신’을 가벼운 농담으로 써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미국에서 이런 비슷한 논의가 진행되었고요, <거부당한 몸>이라는 책에 보면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둘러싼 장애인 인권론자들의 논의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병신’을 써야 할지 안 써야할지에 대한 논의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들도 비장애인의 시선을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고, 또한 그들도 가끔 ‘병신’이라는 말을 쓰니까요.

[‘병신’은 쓰지 말아야 할 표현? 그전에 따져야 할 것]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187121

페크pek0501 2018-12-08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한 책을 읽으셨네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서 그런지 파묵의 책을 선뜻 읽게 되지 않더라고요.
내년에 도전해 봐야겠군요,

cyrus 2018-12-09 16:10   좋아요 0 | URL
오스만 제국의 역사와 터키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파묵의 소설을 읽으면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파묵의 장편소설 대부분은 분량이 많은 편이라서 완독하기가 쉽지 않아요. ^^;;
 
거부당한 몸 -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2
수전 웬델 지음,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옮김 / 그린비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20년 그리스의 밀로스섬에 농부가 밭을 갈던 중 조각상을 발견했다.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그 조각상을 입수했고, 훗날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됐다. 오늘날 루브르미술관이 자랑하는 이 조각상은 ‘밀로의 비너스’이다. 인간의 체형에서 신장과 머리 길이의 비율이 8대 1인 팔등신은 이 조각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신체적 비례와 균형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밀로의 비너스’는 양팔이 없다. 발굴 당시의 조각상 전체 모습이 그려진 그림에 보면 반쯤 남은 왼팔이 있었다. 그러나 루브르박물관 관계자들은 조각상의 왼팔이 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제거했고, 복원하지 않기로 했다.

 

영국의 화가 겸 사진작가인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스스로를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에 빗대어 ‘살아있는 비너스’라고 부른다. 그녀는 1965년 팔다리가 없거나 있어도 극단적으로 짧은 형태로 생기는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Tetra-amelia syndrome)을 안고 태어났다.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보호시설에서 자라났다. 래퍼는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던 미술 공부를 뒤늦게 시작했지만, 미술은 그녀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래퍼는 두 팔 대신 짧은 다리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작품 속 모델은 ‘살아있는 비너스’, 즉 자기 자신의 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예술성이 부족하다’, ‘보기 흉하다’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이 흉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들은 ‘밀로의 비너스’에 양팔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은 양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가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팔이 없는 사람을 보면 흉하고 결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살아있는 비너스’가 비장애인들에게 던진 말은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은 비장애인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비장애인은 일상에서 좀처럼 장애인들을 보지 못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장애인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한다. 장애인들은 이러한 비장애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두려워한다. 그들을 자꾸만 숨게 만들고, 장애가 없는 ‘정상적인 몸’을 권력으로 만드는 것은 비장애인이다.

 

정상적인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의 구분은 ‘규범화된 몸’의 모델을 전제한다. ‘규범화된 몸’이란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장애가 없는 몸, 출산이 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규범화된 몸’에 포함되지 않는 몸은 나이가 들어서 허약해진 몸, 그리고 장애인의 몸이며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캐나다의 여성학 교수 수전 웬델(Susan Wendell)은 이런 몸을 경험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거부당한 몸(rejected bod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녀는 근육통성 뇌척수염 등을 앓는 장애인이다. 그녀가 쓴 《거부당한 몸》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몸이 실제로는 ‘규범화된 몸’이 되길 강요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임을 일깨워준다. 이 책은 여성주의 시각에서 질병과 장애 문제에 접근해 장애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각기 다른 원인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논리가 관통하고 있다. 이 차별적 논리의 배후에는 한 사회의 동일성과 그것을 지탱해주는 정상성이 존재한다. ‘나’와 타자,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 일련의 이항대립을 통해 중심과 주변을 구분한다. 이를 통해 정상적인 중심에 속한 사람들은 정당성을 보장받아 왔다. 즉, 세상을 우리에게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고 타자를 자신의 논리 속에 포섭하며, 만일 포섭되지 않으면 배제하는 방식을 통해 한 사회를 이뤄온 것이다. 이러한 동일화의 논리는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장애인은 건강하지 않은 존재로 이야기되며, 장애는 ‘결핍된 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생물학적 또는 병리적 관점에서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손상된 사람들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비장애인이 장애의 형태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는 장애인의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누가 장애인이고, 왜 장애인인가라는 장애 정체성의 문제를 몸과 관련해서 논의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으로 볼 수 없듯이 장애인이라고 해서 경험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장애의 종류에 따라 장애인들이 겪는 경험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비장애인은 장애의 몸,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기에 장애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와 질병을 최악의 상황으로 보고,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비장애인은 건강관리에 유독 관심이 많다. 건강관리를 잘하면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여성은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굶고, 찢고, 부풀리는 등 엄청난 통제를 가한다. 내 몸을 최대한 통제해서 ‘정상적인 몸’으로 유지하는 것은 마치 장애인의 몸을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보면서, 최대한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장애와 질병을 자연스러운 삶의 범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삶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저자는 장애인의 경험 속에서 그런 지식을 배울 수 있고, 사회에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 정신적 결점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구성하는 창조적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장애인 문제에 접근하는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제 장애인 문제를 논할 때 ‘장애인’이 아니라 ‘사회’에 향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규범의 사회 속에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누구나 정상성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마치 대다수가 ‘정상’에 속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두 제각각 다른 몸과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규범을 통해 서열화되고, 낙인찍히거나 배제를 당한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장애나 질병이 있는 몸, 나이 든 몸은 무시당하거나 은폐된다. 비장애인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장애인을 불행한 타자로 보는 이 사회. 이런 세상에서 먼저 변화해야 할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그들을 거부하는 ‘사회 구조’이다. 그러한 사회 구조는 우리에게 '정상'이 되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장애가 아니라 '정상'을 거부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