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당한 몸 -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2
수전 웬델 지음,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옮김 / 그린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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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그리스의 밀로스섬에 농부가 밭을 갈던 중 조각상을 발견했다.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그 조각상을 입수했고, 훗날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됐다. 오늘날 루브르미술관이 자랑하는 이 조각상은 ‘밀로의 비너스’이다. 인간의 체형에서 신장과 머리 길이의 비율이 8대 1인 팔등신은 이 조각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신체적 비례와 균형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밀로의 비너스’는 양팔이 없다. 발굴 당시의 조각상 전체 모습이 그려진 그림에 보면 반쯤 남은 왼팔이 있었다. 그러나 루브르박물관 관계자들은 조각상의 왼팔이 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제거했고, 복원하지 않기로 했다.

 

영국의 화가 겸 사진작가인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스스로를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에 빗대어 ‘살아있는 비너스’라고 부른다. 그녀는 1965년 팔다리가 없거나 있어도 극단적으로 짧은 형태로 생기는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Tetra-amelia syndrome)을 안고 태어났다.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보호시설에서 자라났다. 래퍼는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던 미술 공부를 뒤늦게 시작했지만, 미술은 그녀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래퍼는 두 팔 대신 짧은 다리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작품 속 모델은 ‘살아있는 비너스’, 즉 자기 자신의 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예술성이 부족하다’, ‘보기 흉하다’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이 흉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들은 ‘밀로의 비너스’에 양팔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은 양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가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팔이 없는 사람을 보면 흉하고 결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살아있는 비너스’가 비장애인들에게 던진 말은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은 비장애인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비장애인은 일상에서 좀처럼 장애인들을 보지 못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장애인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한다. 장애인들은 이러한 비장애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두려워한다. 그들을 자꾸만 숨게 만들고, 장애가 없는 ‘정상적인 몸’을 권력으로 만드는 것은 비장애인이다.

 

정상적인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의 구분은 ‘규범화된 몸’의 모델을 전제한다. ‘규범화된 몸’이란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장애가 없는 몸, 출산이 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규범화된 몸’에 포함되지 않는 몸은 나이가 들어서 허약해진 몸, 그리고 장애인의 몸이며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캐나다의 여성학 교수 수전 웬델(Susan Wendell)은 이런 몸을 경험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거부당한 몸(rejected bod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녀는 근육통성 뇌척수염 등을 앓는 장애인이다. 그녀가 쓴 《거부당한 몸》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몸이 실제로는 ‘규범화된 몸’이 되길 강요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임을 일깨워준다. 이 책은 여성주의 시각에서 질병과 장애 문제에 접근해 장애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각기 다른 원인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논리가 관통하고 있다. 이 차별적 논리의 배후에는 한 사회의 동일성과 그것을 지탱해주는 정상성이 존재한다. ‘나’와 타자,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 일련의 이항대립을 통해 중심과 주변을 구분한다. 이를 통해 정상적인 중심에 속한 사람들은 정당성을 보장받아 왔다. 즉, 세상을 우리에게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고 타자를 자신의 논리 속에 포섭하며, 만일 포섭되지 않으면 배제하는 방식을 통해 한 사회를 이뤄온 것이다. 이러한 동일화의 논리는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장애인은 건강하지 않은 존재로 이야기되며, 장애는 ‘결핍된 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생물학적 또는 병리적 관점에서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손상된 사람들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비장애인이 장애의 형태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는 장애인의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누가 장애인이고, 왜 장애인인가라는 장애 정체성의 문제를 몸과 관련해서 논의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으로 볼 수 없듯이 장애인이라고 해서 경험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장애의 종류에 따라 장애인들이 겪는 경험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비장애인은 장애의 몸,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기에 장애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와 질병을 최악의 상황으로 보고,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비장애인은 건강관리에 유독 관심이 많다. 건강관리를 잘하면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여성은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굶고, 찢고, 부풀리는 등 엄청난 통제를 가한다. 내 몸을 최대한 통제해서 ‘정상적인 몸’으로 유지하는 것은 마치 장애인의 몸을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보면서, 최대한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장애와 질병을 자연스러운 삶의 범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삶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저자는 장애인의 경험 속에서 그런 지식을 배울 수 있고, 사회에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 정신적 결점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구성하는 창조적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장애인 문제에 접근하는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제 장애인 문제를 논할 때 ‘장애인’이 아니라 ‘사회’에 향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규범의 사회 속에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누구나 정상성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마치 대다수가 ‘정상’에 속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두 제각각 다른 몸과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규범을 통해 서열화되고, 낙인찍히거나 배제를 당한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장애나 질병이 있는 몸, 나이 든 몸은 무시당하거나 은폐된다. 비장애인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장애인을 불행한 타자로 보는 이 사회. 이런 세상에서 먼저 변화해야 할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그들을 거부하는 ‘사회 구조’이다. 그러한 사회 구조는 우리에게 '정상'이 되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장애가 아니라 '정상'을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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