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읽다 만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셜록 홈스 시리즈 읽기는 여러 명의 번역가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전투적인 독서’였다. 내가 결투에 사용한 무기는 번역기와 영어사전이 전부다. 하지만 번역가들은 내 결투에 응하지 않았다. 하긴 이런 조용한 블로그에 전문적으로 글 쓰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자주 접속할 일은 없다. 언젠가 우연히 검색하다 내 글을 보고 딴죽을 걸겠지.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책이 내 심기를 건드린다. 문제의 번역본이 절판되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 코난 도일, 정태원 옮김 《셜록 홈즈 전집 8: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시간과공간사, 2002)

 

* 코난 도일, 정태원 옮김 《셜록 홈즈 전집 7: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시간과공간사, 2013)

 

* 코난 도일,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승영조 옮김 《주석 달린 셜록 홈즈 4》 (현대문학, 2013)

 

 

 

 

《셜록 홈스의 마지막 인사(His Last Bow)는 1917년에 발표된 단편집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코난 도일세 편의 단편집(《셜록 홈스의 모험》, 《셜록 홈스의 회상록》, 《셜록 홈스의 귀환》)을 썼다. 그는 홈스 시리즈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서 홈스가 사망하는 이야기(『마지막 사건』, 《셜록 홈스의 회상록》에 수록)를 끝으로 홈스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홈스 시리즈 마지막 단편소설이 발표되자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영국과 미국의 홈스 팬들(홈 동생들)은 ‘우리 홈(스)을 살려내라’면서 항의하는 내용의 편지를 도일에게 보낸 것이다. 홈 동생들의 성화에 못 이긴 도일은 장편 소설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을 발표했지만, 이 작품은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홈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홈 동생들은 ‘우리 홈의 생전 모습’이 아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우리 홈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도일은 홈스 시리즈를 다시 쓰기로 했고, 1905년에 홈스가 부활하는 단편이 실린 《셜록 홈스의 귀환》을 발표했다. 홈 동생들은 살아 돌아온 홈스를 격하게 환영했지만, 정작 도일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홈스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셜록 홈스의 마지막 인사》는 전작에 비하면 작품의 질이 좋지 못하다. 전작에서 이미 썼던 서사 전개와 약간 유사한 작품(『붉은 원』, 『프랜시스 카팩스 여사의 실종』)이 있으며 작품 곳곳에 ‘설정 오류’로 보이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전작과 달리 홈스가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는데, 용의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거나(『브루스 파팅턴 호 설계도』) 자신이 맡은 사건의 유력한 범인을 놓치기도 한다(『프랜시스 카팩스 여사의 실종』).

 

내가 읽은 《셜록 홈스의 마지막 인사》 번역본은 故 정태원 씨가 번역한 것이다. 2002년에 나온 이 번역본은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데, 이상한 점은 ‘개정판’과 같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정판이 나왔으면 당연히 구판은 절판되어야 한다. 2002년 초판 번역본은 ‘구판’이다. 구판은 양장본이고, 개정판은 반양장본인데 가격은 같다. 그렇다면 이 두 권의 번역본 중 무엇을 골라야 할까? 그런데 굳이 두 권 중에 무조건 골라야 하나? 나 같으면 두 권 모두 고르지 않겠다. ‘완역본’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코난 도일, 바른번역 옮김 《그의 마지막 인사》 (코너스톤, 2016)

 

 

 

구판에 왓슨(John H. Watson) 박사의 서문이 누락되어 있다. 왓슨 박사는 ‘홈스의 (약간 머리가 둔한) 조수’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홈스가 해결한 사건들(해결하지 못한 사건들도 포함된다)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기록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당연히 왓슨 박사의 서문을 실제로 쓴 사람은 도일이다. 개정판에도 왓슨 박사의 서문이 없다. ‘서문이 없는 완역본’은 완역본이라 할 수 없다.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니 추리소설 전문가 박광규 씨가 감수한 ‘코너스톤’ 판본에도 서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다. 다음 문장은 『위스테리아 로지(Wisteria Lodge, ‘등나무 별장’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에서 홈스가 자신의 수사에 만족감을 드러내면서 하는 말이다.

 

 

 전보를 읽고 수첩에 넣어 두려던 홈즈는 내가 궁금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웃으면서 전보를 건네주었다.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홈즈가 말했다.

 

(정태원 옮김, 구판 30쪽)

 

 Holmes read it and was about to place it in his notebook when he caught a glimpse of my expectant face. He tossed it across with a laugh.

“We are moving in exalted circles,” said he.

 

 

‘exalted’는 ‘상류층’ 또는 ‘너무나 기쁜(행복한)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아마도 정태원 씨는 후자의 의미에 맞춰서 문장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홈스는 기이한 사건을 수사하고 해결하는 것을 즐기는 괴팍한 인물이라서 사건을 수사하는 내내 기분이 들떠 있고 즐거워한다. 그렇지만 “We are moving in exalted circles”는 홈스 본인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는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의 주어 ‘We’는 홈스와 왓슨을 의미한다. ‘exalted circles’는 서로 비슷한 이해관계나 직업, 계층 등을 이유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우린 상류사회를 파고들 거야”(승영조 옮김, 주석판 33쪽)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 박상우 《박상우의 포톨로지》 (문학동네, 2019)

*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20세기북스, 2018)

* [절판] 콜린 비번 《지문》 (황금가지, 2006)

 

 

 

『붉은 원』의 역주(구판 108쪽)지문 식별 시스템의 기초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인 ‘프랜시스 갤턴’이 언급되어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쓴다면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다. 골턴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외사촌 형이며, 그는 인종 분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연구는 특정 인종을 촬영한 합성사진으로 지구에서 우수한 인종, 즉 ‘평균인’에 부합하는 인종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골턴은 범죄자의 얼굴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고 범죄자의 특징을 알아내기 위해 합성사진을 이용해 인체를 측정했다.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따로 있다는 그의 생각은 ‘우생학(eugenics)이라는 학문이 발전하게 만든 씨앗이 되었다. 골턴이우생학의 아버지’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너무 많이 알려진 탓에 대부분 사람은 그가 지문 식별 시스템을 고안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범죄학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골턴이다.

 

골턴과 그 밖의 여러 인물들이 지문 식별 시스템을 고안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책으로는 절판된 《지문》(황금가지)이 있다. 범죄 수사의 기초 증거로 사용되는 지문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평균의 종말》(20세기북스)《박상우의 포톨로지》(문학동네)는 과학(전자의 책은 통계학, 후자의 책은 사진술)이 인종 차별 담론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개입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사이비 이론이 학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중심에 골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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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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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4년제 대학을 나왔다.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4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부를 못한 학생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철이 덜 든 아이들은 우스갯소리로 공부하기 싫어 실업계를 선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소에 공부를 안 했던 아이들은 어떻게든 인문계에 진학하려고 용을 썼다. 중학교 성적이 고등학교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인문계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 합격선에 들어오지 못한 학생들은 실업계를 선택해야 했다. 내 부모님은 내게 무조건 인문계에 진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면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에 다닐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과거에는 학업 성적이 좋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실업계 고교에 진학했다. 이렇다 보니 실업계 고교생들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말 못 하는 서러움을 느껴야 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고졸 출신의 부모들은 자식마저 냉대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중졸 출신, 어머니는 고졸 출신이다. 두 분 모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학업에 계속 전념할 수 없었고 꽤 이른 나이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4년제 대학 진학률도 높아졌다. 8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4년제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실업계 고교 진학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때 신입생 충원조차 어려울 정도로 실업계 기피 현상이 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인문계 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 대신에 ‘일반계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로 부르고 있다. 2010년에는 특정 분야의 전문 직업인을 국가 차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마이스터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 학생들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다. 부모는 일부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를 제외하면 수준 낮은 학생들이 많아서 그 아이들과 어울리면 자식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대학에 나오지 못한 자식이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아갈 것 같아 걱정하는 부모도 있다. 특성화고에 진학하려는 자식을 둔 부모가 제일 많이 걱정하는 것은 열악한 현장실습 환경이다. 실습 현장에서 불의를 사고를 당한 학생은 과거에도 끊이지 않았다. 2016년에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살 실습생이 도어에 끼어 사망했다. 끼니 챙길 시간 없이 노동에 시달렸던 그의 가방에선 미처 먹지 못한 컵라면이 나와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취업률 경쟁에 내몰린 특성화고 학생들은 ‘현장 실습생’이라는 이름 아래 장시간 노동을 하며 일터 내 폭력과 안전사고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보는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은유 작가는 인터뷰 취재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어린 노동자들이 어떻게 마음의 병을 앓고,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는지를 밝혀낸다. 김동준 군은 장시간 노동과 사내 폭력을 견디지 못해 2014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자는 동준 군이 남긴 노트와 그의 SNS 등에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속마음을 재구성한다. 작가는 더 나아가 동준 군의 가족, 이 사건을 담당했던 노무사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여 동준 군의 죽음이 산업재해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 작가의 취재는 계속 이어진다. 그녀는 제주 생수 제조업체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이민호 군의 아버지, 특성화고 현직 교사와 특성화고 재학생 등을 만났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특성화고 학생을 ‘몰라도 되는’ 부끄러운 존재로 여겼다. 편견은 우리가 특성화고 학생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투명한 눈가리개다.

 

 

 특성화고 학생에 대한 편견은 대개의 편견이 그러하듯 ‘잘 모름’에서 생겨나고, 편견은 ‘접촉 없음’으로 강화된다.  (10쪽)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읽으면 독자는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실에 너무 모르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특성화고 학생들에 대한 무지는 현장 실습생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사회적 무관심을 낳는다. 이 사회적 무관심이 지속하면 잊힌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노력한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가 같이 느끼면서 시작된다. 목숨을 담보로 불안한 일터로 향하는 특성화고 학생들의 고통이 우리 가슴에 느껴지지 않을 때 그들이 스스로 감당하고 있는 문제도 우리 기억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특성화고 학생들의 노동과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저항의 방식이다.

 

오늘도 특성화고 학생과 졸업생들이 사회의 편견에 맞서 하루하루를 힘들지만 주어진 일,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투명한 편견을 깨뜨릴 수 있는 묵직한 한 방이 있는 책으로 남길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50쇄, 100쇄 찍은 스테디셀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이 계속 나온다는 것은 저자에게는 기쁜 일이다. 하지만 현장 실습생의 사망 소식이 나올 때마다 이 책이 언급되고 읽히는 상황은 우리 사회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뼈아픈 증거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자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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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8-1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기를.

cyrus 2019-08-13 15:23   좋아요 0 | URL
저의 반어적 표현을 이해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나무 2019-08-1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이민호 학생의 사고소식과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일의 즐거움과 보람 대신 공포와 체념을 먼저 배웠을 그리고 여전히 배우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낍니다.

cyrus 2019-08-13 15:28   좋아요 1 | URL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현장 실습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어른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현장 실습을 담당하는 기업은 애초에 그들을 노동 현장에 투입시켰으면서도 노동 중에 다치거나 사망하면 대충 보상하면서 모른 척합니다. 학생들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짓입니다.

2019-08-13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3 15:3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따님에게 잘 말씀하셨어요. 임금을 적게 주든 많이 주든 간에 근로 환경이 열악한 곳에 자식을 일하도록 방관해서는 안 돼요. 이 책에 나오는 사망한 학생들의 부모는 후회했어요. 몸과 마음이 힘든 곳에 일한 자식들에게 일 그만 두라고 말하지 못했다면서요. 대부분 어른은 근로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그런지 젊은 사람이 힘든 일을 못 참고 그만두면 한심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꼰대질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깊게 남아 있으면 산업재해를 남 일처럼 여겨요. 그리고 산업재해가 일어난 원인을 다치거나 죽은 노동자 탓으로 돌리죠.

2019-08-15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24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저는 이 책을 만든 작가님이 고맙게 느껴져요.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했고, 보지 못했던 무거운 사회 문제를 취재하셨으니까요.
 

 

 

19세기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는 영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한 여왕의 존재감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를 ‘여왕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신사의 시대’였다.

 

 

 

 

 

 

 

 

 

 

 

 

 

 

 

 

 

 

* 설혜심, 박형지 《제국주의와 남성성》 (아카넷, 2016)

 

 

 

 

영국 제국주의를 연구한 설혜심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 사업이 영국 남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주목한다. 이 무렵 영국 신사에 부합하는 남성상은 운동으로 단련된 육체와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강인하고 엄격한 가부장적 남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 식민지로 넘어가면 태도가 확 달라진다. 영국 남성들은 본국의 여성을 ‘집 안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로 여기면서 보호하면서도 식민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대했다. 그리고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식민지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 [품절, No Image] 페터 풍케 《오스카 와일드》 (한길사, 1999)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영국 남성이 단지 ‘생물학적인 남성’이라서 남성성을 발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와 제국주의가 부여한 ‘영국 신사’와 ‘식민지 통치자’라는 일종의 역할을 수행(performance)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국 남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남성성을 긍정하면서 수행했을까? 모든 영국 남성이 남성성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남성성 역할을 거부한 남성이 있었다. 남성성을 거부한 가장 대표적인 영국 남성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이다. 그는 머리를 길렀고, 가슴에 커다란 해바라기 장식을 달고 다니는 등 세인의 주목을 이끄는 화려한 패션을 소화했다. 당시 사회의 위선을 공격하는 특유의 독설은 와일드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줬고, 그는 영국 사교계의 인사들 사이에서 재치 넘치는 셀럽(celeb)이 되었다. 기성 사회에 반하는 와일드의 행동과 복장은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양성적인 스타일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설명한 ‘캠프(camp)라는 개념에 부합한 인물이다. 캠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손택은 캠프의 다양한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총 58개의 짧은 글로 구성된 단상 형식으로 글을 썼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캠프는 엄숙한 고급문화를 거부하고, 고급문화에 반하는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캠프는 반 부르주아적이고, 반 전통적인 문화다.

 

 

 

 

 

 

 

 

 

 

 

 

 

 

 

 

 

 

 

*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오들리 부인의 비밀》 (부북스, 2019)

* 장정희 《선정소설과 여성》 (L.I.E., 2007)

*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엮음 《공포와 일탈의 상상력: 영국고딕소설》 (신아사, 2015)

 

 

 

 

그렇다면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한 문학 장르인 선정소설(sensation novel)은 캠프 성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성급하게 결론을 내는 것일 수 있으나, 나는 선정소설의 특징이 캠프 성향과 약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손택은 캠프 취향의 기원을 ‘고딕 소설(gothic novel)에서 찾는다. 고딕 소설은 비밀 통로가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을 배경으로 신비감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르이다. 프랑스에 처음 시작된 고딕 소설은 잠시 유행이 사그라졌다가 영국에서 부활했다. 고딕 소설에서 묘사되는 미스터리한 현상들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 중심주의에 싫증을 느낀 독자들은 고딕 소설을 주목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감성에 호소하고 서늘한 공포심을 유발하는 문학이 인기를 누리게 된다. 고딕 소설이 영국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고 있을 때 여기에 탄력을 받아 등장한 소설이 바로 선정소설이다. 그러나 엄격한 독자와 비평가들은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지 않는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을 ‘천박한 문학’이라고 비판했다. 영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선정소설인 《오들리 부인의 비밀》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비평가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이 철저히 외면당한 이유는 단지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은 대중의 불안과 근심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장르이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에서 묘사된 공포는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든 허구적 요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실제로 느끼는 공포(김일영,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2015).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기성 사회를 위협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지나칠 정도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오들리 부인의 비밀》의 주인공 오들리 부인은 한 집안의 명예에 흠집 낼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 성공하면서 그 후에 나온 선정소설 속 여성들은 가부장제를 위반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장정희, 2007). 기존 소설에서 보지 못한 여성들이 등장하고, 위험한 매력을 가진 선정소설의 여주인공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늘어날수록 보수적인 대중은 ‘여성의 욕망은 위험하다’는 공포를 간접적으로 느낀다.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 출구》 (동문선, 2004)

*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사월의책, 2016)

 

 

 

 

손택은 캠프를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물건을 선호한 것’이라고 했다. 선정소설의 여주인공들은 과도하게 감정을 분출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선정소설에서 재현되는 여주인공의 과다한 감정 표현을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봤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표현 방식을 엘렌 식수(Helene Cixous)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와 연관 지어서 주목하고 있다. 식수가 제안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 중심적인 논리적 글쓰기를 전복시키는 효과가 있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이 유행하면서 여성들은 창작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을 즐겨 읽은 여성 독자들이 늘어났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이 유행하기 전에 나온 소설과 문학은 ‘선택된 사람들만의 것(식수)’이었다. ‘선택된 사람들’에 속하지 못한 여성은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의 등장은 공식적인 텍스트로 인정받던 이성 및 남근 중심주의 글쓰기에 저항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고, 그 공간에 여성들이 들어왔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겁에 질린 남성 지식인과 독자들은 책 읽고 글 쓰는 여성을 경계했다. 글 쓰는 여성은 남성 중심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을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상업적인 소설로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고딕 소설과 선정소설은 그 소설들이 나온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정확하게 반영한 문학 장르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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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8-09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두사의 웃음.. 좋은가요 ? 이 책 살까 말까 했는데 출판사가 동문선이라 안 샀는데... 개인적으로 동문선을 무지 싫어하는 1인.

cyrus 2019-08-10 06:10   좋아요 0 | URL
내용은 좋은데 번역문이 별로 좋지 않아요.

곰발님이 왜 동문선을 싫어하는지 알겠어요. 출판사 대표가 문제가 많죠.. ^^;;

2021-03-24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 부클래식 Boo Classics 78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지음, 홍덕선.오은주 옮김 / 부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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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에 나온 소설 중에 가장 인기 있었던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백여 년 전에 살았던 영국인들이 생각한 ‘인기 소설’의 기준을 잘 모를뿐더러 그 시대에 나온 책들의 판매 부수가 얼마인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소설이 인기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사람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코난 도일(Conan Doyle)의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인기 소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두 작가 모두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사랑받아온 작품들을 남겼다.

 

지금부터 내가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이 쓴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라는 소설도 인기 많았어요’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소설도 있었나요?’라고 말하면서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 빅토리아 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1862년에 잡지에 연재된 《오들리 부인의 비밀》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선정소설(sensation novel)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선정소설이란 말 그대로 선정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이다. 선정소설은 출생의 비밀, 불륜, 살인 등 자극적인 소재가 나오는 아침 드라마와 같다고 보면 된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에도 아침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요소들을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들리 부인은 과거에 결혼한 이력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사실 부인이 이름을 바꿔가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오들리 부인의 원래 이름은 헬렌 몰던(Helen Maldon)이다. 그녀는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벌써 어린 나이에 궁핍한 현실에 무서움을 느낀다. 헬렌은 부잣집 외아들인 조지 톨보이즈(George Talboys)를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조지는 돈을 더 벌어오겠다는 생각에 헬렌과 외아들(아버지의 이름과 같아서 ‘어린 조지’라고 부른다)을 남겨둔 채 호주로 떠난다. 혼자서 자식을 돌보면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처지가 된 헬렌은 가출을 감행한다. 헬렌은 루시 그레이엄(Lucy Graha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전처의 외동딸인 알리샤(Alicia)와 같이 살던 마이클 오들리 경(Sir Micheal Audley)과 결혼하면서 ‘루시 오들리’가 되고, 꿈에 그리던 신분 상승을 이룬다. 그러나 호주에 갔던 조지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하필이면 조지의 절친한 친구가 마이클의 조카인 로버트 오들리(Robert Audley)였다. 로버트는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지 못한 신참 변호사지만, 정의감이 투철한 인물이다. 로버트와 조지는 부인을 만나러 직접 오들리 저택에 찾아갔으나 부인은 외출해 집을 비운 상태였다. 두 사람은 알리샤의 도움으로 오들리 부인의 방에 가게 들어갔는데, 조지는 오들리 부인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조지는 사라져버리고, 행방불명이 된다. 로버트는 친구를 찾기 위해 친구와 관련된 지역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문 수사를 한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조지의 첫 번째 아내 헬렌과 오들리 부인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알아내기로 한다. 로버트는 헬렌 몰던, 루시 오들리 모두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는 부인과 대면하면서 자산이 알아낸 부인의 비밀을 모조리 밝힌다. 그러나 부인은 오히려 로버트를 정신병원에 보내거나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초강수를 던진다. ‘아름다운 귀부인’으로 묘사된 부인은 이때부터 ‘악녀’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는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 간의 양자 대립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로버트 오들리는 부인의 비밀을 밝히면서 오들리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 하고, 사라진 친구를 대신해서 복수하려고 한다. 오들리 부인은 처음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집 안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로 등장하지만,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악의를 서서히 드러내는 ‘집 안의 타락 천사’가 된다.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던 도덕적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오들리 부인은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 사회를 위협하는 해로운 존재이고, 그녀에 맞서는 로버트는 가부장(로버트 오들리와 조지 톨보이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정의감에 투철한 ‘수호천사’가 된다.

 

오들리 부인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의 모습과 다른 독특한 인물이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은 성적 욕망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없었으며 순수한 ‘집 안의 천사’, ‘가정의 빛’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브래든은 오들리 부인을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악녀’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내용만 가지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려선 안 되고, 브래든을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에 굴복한 여성 작가’로 폄하하는 평가도 적절하지 않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은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은 인기 소설이었다. 남성 독자들은 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오들리 부인의 매력에 주목했겠지만, 여성 독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면서 살아가는 부인의 과감한 결단력에 주목했을 것이다. 비록 법을 어기긴 했지만, 오들리 부인은 자신의 삶을 죄어오는 갑갑한 현실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는 여성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였고, 하류층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오들리 부인의 비밀》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들이 선호하던 ‘집 안의 천사’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국 여성들은 날개 꺾인 천사로 살아갔다. 여왕이 통치하던 영국 사회 전체는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수정(水晶)으로 만든 천장[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는 여성들이 마음대로 날고 싶어도 함부로 날 수 없는 곳이었다.

 

 

 

 

[주]

영국이 절정에 이르던 1851년에 런던만국박람회가 열렸고, 영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유럽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수정궁(Crystal Palace)을 세웠다. 그래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 상승을 제한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의미하는 ‘유리 천장’과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수정궁’을 합쳐서 ‘수정 천장’이라는 단어를 썼다.

 

 

※ Trivia

 

오자가 너무 많다. 그리고 오류가 있는 역주도 있다.

 

 

* 101쪽 역주: 존 에버렛 밀레 →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 131쪽: 조지의 장인어른은 친구의 행동에 분개하는 로버트 달래주려고 애썼다.

 

 

* 270쪽 [‘니오베’에 대한 역주]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테베의 왕 암피온의 아내 니오베는 자만심에 들떠 7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자랑했다가 레토 여신의 분노를 얻었다. 여신의 부모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에 의해 14명의 아이들이 화살을 맞아 모두 죽자 니오베는 슬픔으로 돌로 변했다.

 

→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레토가 낳은 자식이다.

 

 

* 306쪽: 빈세트 부인 → 빈센트 부인

 

 

* 394쪽: 루크레치아 보르자 루크레치아 → 루크레치아 보르자(Lucrezia Borgia)

 

 

* 583쪽 역주:

플로벨 → 플로베르

보드레르 →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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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8-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드라마 느낌이 나는 소설 같아요. ^^ 사이러스님 글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9-08-09 17:54   좋아요 0 | URL
분량이 꽤 많습니다. 책의 중반부가 지루했어요. ^^;;

레삭매냐 2019-08-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 클래식, 출판사가 의심스러워
기피하고 있습니다.

cyrus 2019-08-09 17:58   좋아요 0 | URL
부북스 출판사의 책을 많이 읽어본 적이 없어서 번역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일수록 그 출판사의 책을 안 읽게 되네요.. ^^;;

수이 2019-08-09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희빈 떠올라. 여성사 쪽에서 보자면 장희빈이 긍정적인 면모가 꽤 많더라_고 전해들었는데_ 앞으로 그 위치가 달라질 거라고 하더라구. 페이퍼 읽고 떠올라서 ^^

cyrus 2019-08-10 06:16   좋아요 0 | URL
악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에도 약간의 공로가 있다면 그것 또한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
 
임윤지당 평전 - 규방의 삶을 벗어던진 조선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경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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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을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조선 시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는 중화권에서 유교 문화를 경험하며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유지하면서 사회 발전을 이뤘다. 16세기 이전까지 조선 사회는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또한 중시하는 친족 관계, 아들딸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하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부터 조선 왕조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가 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왕-아버지-장남을 중시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사회 저변까지 침투하게 된다.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성립되면서 남성이 경제권을 쥐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혈통 계승의 역할을 담당한다. 남성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여성이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 없도록 제한했다. 그 때문에 여성은 결혼 전에는 순결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정조를 지켜야만 했다. 유교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은 ‘현모양처’, ‘열녀(烈女)’가 되려고 했으며 그렇지 못한 여성은 악녀 또는 음란한 여성으로 알려졌다.

 

가부장제의 한계는 비단 형식만 남은 우리나라 유교 문화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권위적인 가부장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누군가는 권위적인 가부장제를 의식에 내면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 문화에 일체화된 채 살아가는 여성은 가모장이 된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일상사를 접하게 되면 유교와 성리학이 ‘여성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으로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 여성들이 활동에 제약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양반 여성들은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공부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고 제한적이지만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글 쓰는 양반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했고 오히려 장려하기도 했다. 유교와 성리학은 여성과 무관한 학문이 아니다. 유교와 성리학을 페미니즘과 완전히 상반된 적대적인 학문으로 본다면 우리는 유교 가부장제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간 여성들의 삶과 업적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임윤지당 평전》우리가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의 일대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깰 조선 시대 양반 여성들의 생활 모습까지 보여준다. 임윤지당(任允摯堂) 조선 시대 중기에 활동한 성리학자다. 그녀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인들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선비들처럼 학문과 수행에 몰두했다. 윤지당의 둘째 오빠 임성주는 윤지당에게 큰 영향을 준 지적 스파링 파트너였다. 그는 누이의 성품과 지적 열정을 높이 사 그녀에게 ‘윤지당’이라는 호를 만들어 주었다. 윤지당은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거나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따져가면서 읽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임윤지당의 존재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것일까?

 

남녀의 위계질서를 중시한 조선 시대에 여성이 남성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성리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양반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경전을 공부하면서 토론하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임윤지당은 여성에게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는 가문에서 자랐으며 특히 그녀의 어머니 파평 윤씨 부인은 딸이 공부하는 것을 지지했다. 조선시대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남존여비’라는 일반적 인식을 확 뒤엎는 역사적인 사례이다. 많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임윤지당처럼 공부하는 양반 여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남성 사대부들이 공부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여성들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거나 혹은 은폐된다. 남성 사대부들은 공부하는 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들의 능력에 한계를 그으려고 했다. 지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양반 여성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쓴 글이 문집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아예 사라지게 되면 후대에 알려지지 못한다. 문집 만드는 일은 남자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양반 여성이 쓴 글이 남성 친척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면 잊힐 가능성이 높다. 임윤지당의 글과 생애는 그녀의 문집을 편찬한 동생 임정주 덕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임윤지당은 도전적인 자세로 임하면서 공부했다. 그녀는 성리학의 핵심인 이기심성과 사단칠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사대부들이 높이 평가한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윤지당은 공자(孔子)가 칭찬한 제자로 성인으로 평가받은 안회(顔回)를 롤 모델로 삼으면서 공부했다. 그녀는 사대부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 중 하나인 성인과 범인(凡人)의 차이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고, 범인과 성인의 본성에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리하여 윤지당은 ‘범인’이자 ‘여성’인 자신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남성 유학자들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하면서 배움의 길을 강조했는데, 윤지당은 여성도 극기복례를 실천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녀의 파격적인 결론은 유교 이념에 충실한 주체나 학문적 경지에 이른 성인을 ‘남성’으로 한정해서 바라본 기존의 입장을 넘어선 것이다. 윤지당은 유교 윤리에 충실한 주체적 여성상을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여성의 주체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을 근대 이후로 잡고 있다. 신문물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신여성은 한국 여성사에서 어떤 여성들보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양반 여성들은 유교 사회가 그어놓은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뚜렷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는 양반 여성들의 주체성을 자세히 보지 못한 채 그녀들을 ‘집 안의 현모양처’로만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녀들의 서사를 가리고 있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장옷[주]을 벗겨내야 한다. 많이 늦었지만, 자기실현의 한 주체로 우뚝 서고자 했던 또 다른 임윤지당을 만날 차례가 왔다.

 

 

 

[주] 조선 시대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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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놈의 사대부 타령!

아직도 성리학적 질서로부터 완전
히 탈피했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싶
습니다만.

그나저나 대척점에 서 있는, 온라인
한겨레에서 읽은 현대판 걸그룹에
해당하는 여성가극단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cyrus 2019-08-09 18:15   좋아요 0 | URL
역사를 공부하면 아쉬운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들이나 결정적인 장면들을 많이 보곤 해요. 이럴 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잊힌 역사들을 살펴보고 싶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