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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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처음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 보도를 전해 듣긴 했어도 대단한 사고가 아니라는 공식 발표가 곧바로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일대는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이 병원에 수용된 아이들만 오늘도 벌써 오전 중에만 일곱 명이 죽었다. 대체 오늘 하루 동안에 몇 명의 아이들이 시체 처리실로 보내질 것인가.” (117쪽)

 

1986년 4월 26일, 당시 소련이었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방사선 피폭 때문에 56명이 사망했다. 고도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 이 중 2만 5000명 정도가 사망한 걸로 알려졌지만, 그린피스는 이 사건 때문에 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뒤에 회고하기를 체르노빌 사고 수습 비용이 소련 1년 예산과 맞먹었으며, 그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도 언급할 정도니 사고의 피해 정도는 실로 엄청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정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최고 등급인 레벨 7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양으로는 일단락 난 것처럼 보이는 체르노빌과 달리, 후쿠시마 사태는 진행 중이다. 지금 2년 전 그 때의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남긴 위험한 흔적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걱정해야 한다. ‘등급’이 모자랄지도 모르는 이 사태야말로, 현대 문명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위기 감지 능력이 얼마만큼 경화되었는지를 증명한다.

 

문제는 방사능의 흔적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그 흔적을 지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 없는 듯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적.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에 침투하고 그 없는 것에 DNA 구조가 바뀐다. 그것은 인류의 그늘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소설로 형상화한 일본 작가 히로세 다카시의 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보면 그 그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하다. 원자력 발전소 간부인 아버지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결사대의 일원으로 뽑혀 발전소 뒤처리 작업 중에 사망해 영웅 칭호를 받는다. 소설은 안드레이의 아내 타냐, 그리고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가 사고를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당국에 의해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격리 수용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방사능 피폭자의 주검은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참상의 피해를 실감나게 그려낸 나카자와 케이지의 만화 『맨발의 겐』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그녀(타냐)가 내민 팔에는 이네사보다 어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머리카락, 얼굴 전체에 뒤덮여 부풀어 오른 검붉은 반점 무늬들이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제 손으로 쥐어뜯은 손톱자국이 무수하게 남아 있었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천재지변이나 폭격에 약하다는 점을 위험요인으로 든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핵발전소는 곧바로 핵폭탄이 된다는 것이다. 방사능 물질은 냄새도 색깔도 없지만 한 번 누출될 경우 대량의 치명적인 피해를 낳을 뿐 아니라 후유증 또한 극심하다.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났고, 체르노빌의 경우 러시아 등지에서 무려 30만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그 외에도 핵폐기물의 안전한 저장과 처리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어려우며, 온배수로 인한 열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전 세계의 반핵 평화 운동가들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 이후 전 세계의 핵발전소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났다. 그 와중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일본 정부의 대책 마련은 뒷북이다. 재미있게도 옆에 있는 한국 정부 역시 일본 정부의 모습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오늘 국립수산과학원은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우리나라 바다에 유입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발표만으로 방사능에 노출되기 쉬운 우리나라는 과연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오염수가 유입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오염수가 남아있는 해역에서 자란 물고기들이 우리나라 연근해로 유입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보도의 진실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심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다.

 

히로세 다카시의 책은 쉽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이 쉬운 이유는 전문가들이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원전산업을 장악한 독점기업과 그들을 비호하는 국가는 대중이 원전의 악취 나는 비밀에 접근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때 당근을 받아먹은 전문가들은 원전산업의 훌륭한 방호벽이다. 더 재미난 것은, 전문가들조차 원전 사고가 추후에 확대될 피해의 정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점. 체르노빌의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분산시키고 의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림으로써 원전 사고와의 관계성을 영영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핵과의 싸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지구를 리셋(Reset)하는 공포 앞에서 인류 문명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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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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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한 청년이 온몸에 석유를 뿌렸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채 달려가며 외쳤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고통과 진실의 절규였다. 몇 시간 뒤 작고 초라한 주검이 덩그러니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기적인 셈에 골몰하던 머리들, 따뜻한 지붕 아래 안온하게 잠자던 가슴들, 빈곤은 오로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마음들 곳곳에 불꽃이 움트더니 이내 활활 큰불로 번져 갔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죽은 청년 노동자의 삶은 그렇게 불씨가 되어 마침내 노동 해방의 거대한 불길이 된 것이다.

 

전태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그는 1970년 11월 13일, 스물두 살의 젊음을 던지며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살인적인 작업 환경과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죽어 가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구원의 목소리였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외면했거나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반성과 눈뜸의 쇠망치였던 것이다. 지금도 서울 도심의 자연을 소생시킨 청계천에 전태일의 뜨거운 마음은 다시 태어나 세상을 밝히고 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옆 버들다리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전태일 동상.

 

오늘은 8월 26일. 전태일이 태어난 날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누려야 할 세 가지 큰 권리’를 외치며 자신이 읽고 있던 근로기준법과 함께 한 줌 재가 된 그 겨울날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권리 투쟁의 흔적은 서울 평화시장에 우뚝 서 있지만 본적은 대구 출신이다. (신기하게도 전태일의 본적과 생일은 나랑 똑같다) 봉제공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에서 잠시나마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전태일은 진정 공부하기를 좋아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대구에서 잠시 공민학교(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남대문초등학교를 1년 남짓,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몇 달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지만 학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그 때의 기억은 전태일이 남긴 수기 중에서 소년의 감성의 느껴질 정도로 해맑기만 하다. 22년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전태일에게 이렇게 행복했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아홉 번째 서브까지 성공시키고 게임이 끝났습니다. 시합장엔 요란한 박수갈채와 승리의 개가가 퍼지고 나는 일약 오늘 이 게임에서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55쪽)

 

그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자신의 배고픔보다 동생들의 배고픔을 더 아파했다. 가난 때문에 또래들처럼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 전태일은 이때부터 자신의 여린 마음으로 스며드는 가난에 의한 고통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가고 기억하기 위해 흔적을 더듬어야 할 전태일의 고향은 너무나도 조용하기만 하다. 이러다가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 흘린 소년 전태일의 눈물마저 잊을까봐 걱정된다.

 

 

 

 ♣ ‘똑똑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바보’가 되다

 

전태일의 삶은 정말 뼛속깊이 가난했다. ‘밑바닥에서’.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전태일은 서울과 대구 등을 오가며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궁핍하기만 한 현실이 싫어 부산, 서울, 대구를 오가며 전전하지만 어디를 가도 배를 곯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담배꽁초 줍기, 아이스케이크 장사, 우산장사, 손수레 뒤밀이 등... 그 시대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이란 일은 다 하며 눈 붙일 새 없이 열심히 살았건만 가난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재봉틀 일을 배운 전태일은 열일곱 나이에 평화시장에 위치한 봉제공장의 시다(견습공)로 취직했다. 재봉틀사와 재단 보조를 거쳐 드디어 재단사가 됐다. 그러나 봉제공장에서 나름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재단사가 되어도 노동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휴식 없이 장시간 노동해서 그의 손에 쥐어진 돈은 쥐꼬리만 했다.

 

실밥과 먼지, 소음이 가득하고, ‘햇빛을 잘 못 보는’ 공장. 어리게는 12살부터 시작하는 시다들과 19살부터 시작하는 미싱사들은 하루 14시간을 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러고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거나 사먹기가 어려웠다. 일하다가 병을 얻으면 치료가 아니라 해고를 당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주인 있는 개보다 못한’ 이들의 현실을 지켜보며 조금씩 분노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전태일은 순진했고 그런 그가 생각했던 해결책은 그 스스로 모범이 되는 재단사가 되어 여공들을 살피어주는 것이었다. 본인 역시 형편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도봉산 기슭에 살던 전태일은 버스 요금으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어 다녔다. 이따금 통금시간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가진 것도 없는 그가 수백 번 호의를 베풀어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손바닥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거세게 밀려오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애쓰는 꼴이었다. 작은 물고기가 아무리 애를 써봤자 거대한 물결은 움찔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스스로 거센 물살에 밀려 한없이 떠내려갈 뿐이다. 그는 재단사가 되면 업주와 협의해 여공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화’로 근로조건을 개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아버지에게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전해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전태일의 수기에서, 204쪽)

 

기업주들의 횡포 탓에 모범 재단사로서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좌절한다. 그런 그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다시 희망을 품게 되고 환희와 희열까지 느낀다. 법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시간과 휴일 시간, 건강 지침이 마련돼 있다는 사실, 태일이 꿈꾸던 작업 환경이 꿈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는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6개월 치 월급에 달하는 책을 사 밤새 읽고 또 읽는다.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 밤새 읽어도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지만 근로기준법 조문을 해석하는 게 유일한 하루의 낙이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공장을 만들려는 사업계획을 세웠다. 실천방법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는 1970년 3월 17일 쓴 글에서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 중에도 나의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될(댈) 만한 사람도 없다”“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의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라고 적었다. 같은 달 24일 한 일간지에 실린 실명자에 대한 기사를 보고 당사자에게 “저의 한쪽 눈을 김형 께 드리겠습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생각이 맞는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를 결성하기도 하고, 노동청에 건의를 하며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동료 재단사들을 설득해 모임을 만들어나가기도 했지만 번번이 부(富)한 환경의 배부른 자들에게 기만당해야 했다.

 

반복해서 그려지는 태일의 좌절은 그가 왜 ‘오직 불타는 육신의 항의’로만 투쟁이 가능하다고 결정을 내렸는지를 설명해준다. 평화시장의 실상을 언론에 고발하는 데까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그는 결심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의 ‘호소’에 그쳐서는 안 되겠다고.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 근본적으로 다른 데모를 시작한 그는 가장 사랑했기에 가장 배신당했다 느끼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바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품 안에 안은 채 불타올랐다.

 

 

 

 ♣ 친구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전태일의 유서 중에서, 31쪽)

 

 

전태일이 산화한 지 65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낸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대중과 여론의 냉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개정판을 거듭하여 꾸준히 나올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운동가 이전에 전태일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이 빛이 들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장기간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노동 운동은, 그 어떤 노동 운동보다 순수하고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125쪽) 전태일의 수기는 그의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를 웅변한다.

 

전태일의 죽음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가 하루하루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투쟁했던 22년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억압과 착취의 관계가 이어진다한들 ‘인간 선언’이 되고자 한 그의 존재를 잊어선 안 된다.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을 아는 것이 죽음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가 그토록 비장해지기까지 어떠한 서러움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왔는지, 한낱 개인에 불과한 그가 뿌리까지 썩어있는 사회를 마주하며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의 화형식은 그저 자극적인 하나의 이벤트로 느껴질 뿐이다.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는 불쌍한 가족들, 사랑하는 그 가족을 뒤로 하고 불길로 뛰어들기까지 안고 간 수많은 고민을 읽어내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바보’ 전태일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P.S.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읽을 때마다 어려운 법률용어나 한문이 나와 어려움을 느꼈을 때 똑똑한 대학생 친구 하나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가 바랐던 똑똑한 대학생 친구가 될 수 없지만 오늘 같이 뜨거운 무더위가 가라앉은 선선한 오늘만큼은 그의 생일을 글로나마 축하해주고 그의 흔적을 기억해주는 대학생이 되려고 한다.

 

 

태일이 형,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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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어디에

 

 

 

 

 

 

 

 

 

 

 

 

 

 

 

 

 

 

 

벌써 9년 동안 피렌체 시내를 헤맸다. 청년은 자신의 심장 속에 남아있는 9년 전의 시간, 그 때의 순간을 찾고 싶었다.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심하게 요동치던 그 시간으로.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명망 높은 은행가 집안의 축제에 참석한 청년은 그 곳에서 만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는 은행가 집안의 딸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눈부신 에메랄드빛 눈을 한 소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매너와 상냥한 응대로 순수한 소년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듯했다.

 

그 후 청년은 하루도 소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은행가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어떤 때는 주변의 도로에 주저앉아 온종일 망부석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마치 천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럴수록 소녀의 환영은 아련히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더 생생한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소녀의 환영이 먼저 그를 깨웠다. 그리고 그 환영은 하루 종일 그의 무언의 동행자가 됐다.

 

 

 

 

 

헨리 홀리데이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 1883년

 

 

그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순례하듯 피렌체 시내 중심가를 한 바퀴 소요하고 있었다. 베키오 다리 아래 난간에 기대 무심히 강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 위로 여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은행가 집안의 딸이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를 풍기긴 했지만 9년 전의 고고한 자태 그대로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청년이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심장도 입도 얼어버린 청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짤막한 9년 만의 해후를 허망하게 지나보내야 했다.

 

그러나 소녀가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확인한 청년은 오랜 내면의 불안감을 떨치고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수업에 열중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나선다. 그는 소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있은 지 2년 후인 1285년 다른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는다. 이제 청년은 여름날의 폭풍우처럼 스쳐지나간 짝사랑의 흥분을 거두고 현실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짝사랑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청년의 가슴속에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승화되어 내면의 등불로 자리한다.

 

청년이 결혼한 지 2년 뒤에 소녀 역시 은행가 집안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청년은 우연히 소녀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녀 나이 방년 24세. 16년간 자신의 가슴에 자리해온 천사를 잃은 상실감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슴 떨리게 사랑했던 그녀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한마디 고백도 감히 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청년에게 그녀의 죽음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한 손에 쥐어진 펜과 종이는 그의 감수성을 위로해주고 다독여주었다. 청년은 자신의 인생에 축복을 내려준 영광스러운 여인 베아트리체를 위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답했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그에게 바친 연시를 모아 『La Vita Nuova』라는 책을 출간한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새로운 인생’, 청년은 세상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 출판물에 자신의 이름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를 서명한다.

 

 

 

 

 ♣ 화가로 환생한 단테

 

 

 

 

 

 

 

 

 

 

 

 

 

 

 

단언컨대,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가장 완벽한 사랑이다. 슬프게도 죽음의 신이 ‘천사’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단테를 시기한 나머지 너무 일찍 그녀의 영혼을 천상으로 멀리 보내고 말았지만. 그러나 단테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신곡』에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천국과 지옥으로 안내하는 여인이 바로 베아트리체다. 존재는 그의 영혼과 심장을 관통하는 큐피드의 화살처럼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의 마음속에 영원불멸의 사랑으로 각인되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단테가 실제로 10년 동안 타락한 채 외지를 방황했다고 한다. 첫사랑에 상처 입은 외로운 영혼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되었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단테에게는 좀 섭섭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또 그렇게 일찍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신곡』을 접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더 풍요하게 하고, 그 덕분에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불멸의 예술작품의 뒤에는 언제나 예술가의 영감의 원천인 ‘뮤즈’가 존재했다.

 

그런데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40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의 벽을 넘어 이탈리아가 아닌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로 환생하여 다시 한 번 사랑의 재회를 하게 된다. 단테는 화가로, 베아트리체는 그 화가의 아내이자 뮤즈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 부모가 단테를 흠모하여 붙인 이름이다. ‘단테’라는 이름에 함축된 시성(詩聖)의 기운 덕분일까. 로세티는 일찍부터 미술과 문학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동지들과 함께 그 유명한 ‘라파엘 전파’를 결성하고 주도하는 화가로 급부상하게 된다. 예술적 재능에 의한 명예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사랑 운 역시 좋았다.

 

라파엘 전파 소속의 모델이었고 연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과 결혼한다. 로세티의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이 대부분 시달을 모델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La Vita nuova』『신곡』이라는 뛰어난 걸작을 남긴 단테와 그의 문학적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준 베아트리체의 관계가 떠올리게 된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펜과 종이로 뮤즈에게 바치는 축복의 노래를 읊었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붓과 캔버스로 뮤즈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이 곳 영국에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다시 만나선 안 될 불행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로세티와 시달의 사랑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에 비하면 썩 아름답지 못했고 비극적이다. 오랜 기간 연애 끝에 그들은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시달은 병세가 완연할 정도로 연약한 여자였다. 요양 차 시달이 런던에 지내고 있을 때 로세티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라파엘 전파 소속 화가 헌트의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 시달은 충실하지 못한 남편과 여유롭지 못한 경제 그리고 아이까지 사산하면서 우울증을 앓는다. 시달은 영국에서 구하기 쉬운 아편으로 우울증을 달랬고, 결국 아편중독에 걸리게 된다. 우울증에 시달린 시달은 결혼 생활 2년 만에 아편 중독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번에 죽음의 신은 화가 단테의 그릇된 사랑에 분노했다. 그의 연인 시달을 아편의 늪으로 유혹하여 은밀하게 자신의 검은 손길로 이끌도록 만들었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시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한동안 시달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로 실의에 빠진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트리체가 죽는 순간에 단테가 꾼 꿈」1871년

 

 

‘단테’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화가의 운명은 놀라울 정도로 이탈리아 시성의 삶을 닮아가고 있었다. 로세티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인으로 활동할 정도로 문학적 자질이 뛰어났다. 오히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아닌 시인 단테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지 느껴질 정도다. 단테의 처녀작 『La Vita nuova』을 번역한 건 물론이고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을 주제로 그린 그림도 몇 점 남겼다.

 

베아트리체가 죽어가는 순간에 환상적인 꿈을 꾸는 단테의 묘사한 모습은 시인 단테의 영혼이 화가 단테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흰 옷을 입은 베아트리체는 막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양쪽에 도열한 하녀들은 꽃무늬 천으로 그녀의 몸을 가리고, 들꽃과 화살을 손에 든 천사가 여인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선사하고 있다. 잠옷을 입은 단테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 광경에 충격을 받은 양 땅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정지된 시간으로 고이 간직하려는 것일까.

 

시인 단테가 고정된 시선으로 뚫어지게 바라봤던 환상의 장면을 화가 단테가 그림으로 재현했다.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1871년. 시달이 죽은 지 9년째 되는 해다. 소년 단테가 소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지 9년 후에 서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결정적인 삶의 순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화가 단테는 이미 죽고 떠나버린 시달을 9년이 지나서야 한 폭의 그림에서 만나게 되었으니까. 천사같이 흰 옷을 입은 채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베아트리체와 그녀를 바라보는 단테처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트리체 일주기 날 천사를 그리는 단테」 1853년

 

“내 여인이 영원한 생명의 시민이 된 후 한 해가 다 간 어느 날, 홀로 앉아 그녀를 생각하면서 몇 개의 화판에다 천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단테 알리기에리, 『새로운 인생』중에서)

 

로세티는 자신이 시인 단테와 같은 운명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을까? 1853년. 그러니까 시달과 결혼하기 전에 로세티는 베아트리체 일주기 날에 천사를 그리는 단테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천사, 이제는 ‘영원한 생명의 시민’이 된 베아트리체가 그려진 종이를 손에 쥔 채 여전히 충격에 헤어나지 못하는 단테의 표정을 보라. 그 표정은 정확히 십년 후에 로세티의 얼굴에 나타난다. 시달을 떠나보내고 난 뒤에 시인 단테와 같은 운명을 그 또한 맞이하게 된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타 베아트릭스」 1864~1870년

 

 

베아트리체 사후 일주년에 단테가 그녀의 얼굴을 그렸듯이 로세티도 그녀를 잊지 못한 나머지 ‘사후 초상화’를 그린다. 그로 인해 나온 작품이 바로 「베아타 베아트릭스」. 이 그림은 『신곡』의 한 장면을 그렸지만, 로세티는 시달과의 사랑을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과 동일시해 시달을 베아트리체로 표현했다.

 

로세티의 최고의 걸작인 이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림에서 시달은 무아지경에 빠져있으며 그녀 뒤에 피렌체 도시와 황금색의 베키오 다리가 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화면 왼쪽의 붉은 색의 옷을 입은 베아트리체와 단테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후광이 있는 붉은 색의 새가 시달에게 꽃을 떨어뜨리고 있다. 붉은 색의 새는 죽음의 사신을 암시하고 있으며 새가 떨어뜨린 양귀비는 시달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아편을 의미한다.

 

 

 

 

 ♣ 지독한 사랑

 

 

 

 

 

 

 

 

 

 

 

 

 

 

시인 단테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작품 속에 베아트리체 한 여인을 줄곧 바라봤고 ‘문학’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구축하여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그러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사별한 시달 한 사람만 바라보기에는 힘들었던가 보다. 시달이 죽자 은둔생활을 하다시피하고 있던 로세티는 친구이자 시인 겸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1834~1896)의 아내 제인 모리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모리스는 친구와 아내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두 사람의 동거를 받아들인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페르세포네」 1882년

 

 

제인은 로세티의 후기 그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세티는 제인과의 특별한 사랑을 신화나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그가 원한 ‘새로운 인생’은 자신의 예술에 생명의 기운이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살아있는 뮤즈와의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죽음을 초월하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외도와 재혼을 거듭한 로세티의 사랑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크게 기분 언짢을 필요는 없다. 신은 시인 단테의 사랑을 지옥에서도 허용했지만 화가 단테의 사랑만큼은 끝까지 불행과 고통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제인과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전 아내 시달과 친구 모리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 로세티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급기야 그 역시 약물에 손을 대고 만다. 점점 미쳐만 가는 로세티를 감당하지 못한 제인은 스스로 그의 곁을 떠남으로써 불행하게 끝을 맺는다.

 

 

 

 

 

 

 

 

 

 

 

 

 

 

 

사랑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사랑의 뒷모습은 미움이고 옆모습은 시기와 질투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뿌리에서 자라난 잎사귀고 열매이다. 어디 사랑의 모습뿐이랴. 그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죽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지만,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부평초처럼 옮겨 다니는 바람둥이 사랑도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랑을 언급할 때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자주 회자된다. 최근에는 영국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A.N. 윌슨은 『사랑에 빠진 단테』라는 자신의 책에서 『신곡』을 단테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기 위한 일종의 상징으로 구성된 자서전이라고 해석했다.

 

 

 

 

 

 

 

 

 

 

 

 

 

 

몇 몇 사람들은 결혼한 아내가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죽은 연인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단테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단테의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과 죽은 여자와의 숭고한 로맨스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시인 단테와 화가 단테의 사랑.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위대한 로맨스 혹은 서로 만나서는 안 될 불행한 만남이 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러브스토리를 바라보는 감정에는 정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사랑이란 이렇게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사로잡고 삶의 의미까지 바꾸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라는 점이다. 정말 지독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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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08-2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폰트를 11로 해서 쓰는구나. 글씨가 크니까 보기가 좋다.
단테의 신곡이 새록새록 나오고 있구나.
'단언컨대,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가장 완벽한 사랑이다.'ㅎㅎ 좋아, 좋아!
단언컨대, 너의 글은 나날이 일취월장 하는구나!^^

cyrus 2013-08-26 22: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ㅎㅎㅎ 가끔 예전에 쓴 글 읽어보니 이렇게 개미만한 폰트를 쓰고 있었다는 게 제 스스로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ㅋㅋ 평소 속 좁은 소리 듣는 편 아닌데 글씨는 왜 이렇게 작은 걸 쓰고 있었던지 참.. ㅎㅎㅎ 요즘 댄 브라운 신작소설이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만든 거라서 요즘 단테 읽기에 푹 빠져 있어요. ^^

oren 2013-08-2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명의 단테 얘기가 정말 흥미롭네요. 저는 비록 피렌체를 예전에 '단 하루' 밖에 거닐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cyrus님의 글을 읽어보니 그곳에서 봤던 붉은 성당 지붕과 베키오 다리와 다비드 조각상 등등 피렌체의 곳곳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때 '단테가 살던 집'을 둘러봤던 기억도 다시금 생각나는군요.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가 죽을 때까지 결코 다시 밟아보지 못했던 그 피렌체와 베아트리체와의 지독한 사랑 얘기를 만나볼 수 있어서 참 좋네요.
* * *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 키케로 (비록 그가 '다른 도시'에 대해 했던 말일지라도 '피렌체' 또한 그가 찬탄했던 도시와 그리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는 않을 듯해서 덧붙여 봅니다.)

cyrus 2013-08-26 22:46   좋아요 0 | URL
와~ 저도 단테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네요. 단테의 러브스토리를 언제나 읽어도 가슴이 뭔가 먹먹해지면서 따뜻해지는거 같아요. 지금 그 곳에 간다면 단테가 느꼈던 감정의 황홀감을 완벽히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키케로의 말처럼 회상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

그렇게혜윰 2013-08-27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이에요. 단테의 단자도 모르지만 궁금증이 생깁니다^^

cyrus 2013-08-27 2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신곡>은 내용 분량이 방대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렵지만 <새로운 인생>은 분량이 얇고 시가 많아서 읽기가 편안합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외의 사랑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새로운 인생>을 먼저 읽어보는게 좋습니다 ^^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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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로(歸路) 세대가 처한 현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 나는 왜 귀로(歸路)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10년 만에 나온 ‘가왕’ 조용필 앨범에 들어 있다는 ‘어느 날 귀로에서’ 한 대목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노랫말을 붙여 화제가 된 곡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퇴직자의 발그림자가 처연하게 느껴지는 가사다. 송 교수는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특이한 형식의 보고서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베이비부머의 내밀한 사연과 냉철한 세대분석을 교직한다.

 

1970년대에 베이비부머는 이른바 신문명의 담지자가 되었고, 이후 1980년대 ‘운동권 세대’, 1990년대 ‘탐닉 세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즉 베이비부머는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갈 수 있는 교량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스스로 몸을 누이면서 말이다. (8쪽)

 

 

 

2013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50대란 어떤 모습일까? 가정에선 외로운 아버지로, 직장에선 뒤안길로 밀려나는 선배로, 사회에선 말 안 통하는 꼰대 아저씨로 비춰지는 것이 씁쓸한 현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베이비붐세대 10만 명 당 자살율이 2008년 31.4명에서 2011년에는 40.6명으로 늘었다. 하루 평균 6명씩 자살로 세상과 작별 한다. 자살의 주된 원인은 2010년 글로벌경제위기 이후 조기은퇴와 창업실패 등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 같은 내용이 보도 되었음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OECD 자살율 1위 국가다운 우리 사회의 무덤덤한 반응이 더 무섭다. 한국의 중장년층, 농경시대에 태어나 산업화 시대의 주력으로 치열한 생존경쟁 무대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으며 IT 시대의 서막을 열고 퇴장하는 베이비부머들이 주류다. 대부분이 닮은꼴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달려 왔다. 그럼에도 인생의 끝자락까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짊은 그대로 진 채 고려장 같은 은퇴자로 밀려나 자살로 마감하는 이 시대의 암울한 초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민주화 투사들이었고, 찬란한 미래를 꿈꿨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실상 이 땅의 산업화를 일군 성공의 주역들이다.

 

베이비부머는 경륜, 기술, 인간관계가 성숙한 경지에 도달했고 이제 남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재가동하려는 투지로 가득한 연령 집단이다. 본격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양질의 인력(人力)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발령한다. 자립심과 책임감이 강해 힘겹게 가정을 꾸려왔지만 정작 자신의 독립은 위태롭다. 정처 없이 ‘귀로’를 맴도는 숫자가 매년 100만 명이다.

 

 

 

 ♣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없는 ‘가교(架橋) 세대’

 

책은 한달음에 읽힐 정도로 분량은 얇다. 삶이 그믐달처럼 오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50대의 삶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공고 출신 박 회장, 대기업 출신 대리기사 등 실제 베이비부머의 사례를 들어 국민연금 고갈, 부동산 거품 같은 한국사회 고질병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은퇴 후 상실감, 노년을 앞둔 공포 등 정서적 공허함도 따스한 시각으로 어루만진다.

 

송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직장에서 은퇴한 50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게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 자영업은 이미 포화상태로, 은퇴 후 작은 식당이라고 해볼까하는 생각은 곧 망하는 지름길이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재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특히 단순 기술·기능직에 비해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기업에서 고위직까지 오른 사람들일수록 기업들이 받아주기를 꺼리고, 그만큼 재취업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고용센터에서 제공하는 각종 취업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더라도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일 뿐, 대부분 50대 은퇴자들이 눈치 보면서 집에서 돈만 까먹고 있는 상태라고 할까? 게다가 자녀 결혼문제는 닥쳐오고, 모아놓은 돈은 점점 바닥나고... 부러움의 대상일 법한 ‘서울대 교수’인 저자도 팔순 넘은 부친을 부양하는 장남이며 두 딸의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이다. 노후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한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는 1970년대 대학가 구호였다. 송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가교(架橋) 세대면서 마지막 유교 세대라고 규정한다. 근대를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자 김수영이 자신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일갈했듯 베이비부머는 이단(異端)의 세대였으나 전통과 온전히 결별하지 못했다. 유교라는 굴레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충, 효 같은 낱말에 매여 살았기에 가난했으되 당당한 부모와 개성 넘치는 자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물러날 때가 되니 다리가 돼줄 사람이 없다. 이제 자신의 삶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가교가 없는 것이다.

 

최빈국이던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리고 현장에서 물러나는 베이비부머들에게는 허무함이 엄습한다.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가고자 쉼 없이 달려왔으나 여전히 교육, 주택, 부모 부양으로 허덕인다. 젊고 튼튼했던 허리는 점점 휜다. 힘들고 아파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뎌낼 뿐이다. 그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았다.

 

 

 

 ♣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50대 베이비부모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고, 내 자식, 내 형, 내 동생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체감하고 적극적 대책마련에 나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정부가 월급쟁이 중산층 유리지갑에 손을 댄 세법 개정안 때문에 베이비부머들의 눌린 기를 또 한 번 크게 죽일 뻔했다. 과연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마음껏 소리 내 웃는 날은 언제 올까?

 

이 책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서글픈 현실을 고발할 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게 비단 베이비부머 세대와만 관련된 것도 아니요, 일자리정책, 교육정책, 주택정책, 복지정책과도 맞물려있어 “금 나와라 뚝딱” 같은 요술방망이 식으로 해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한국의 50대 절반이 이런 절망의 균열 상태에 내몰리게 된 이유는 결국 십시일반 자신들의 자산을 할애해서 공적 안전망을 만들지 않은 탓이다... 베이비부머들이 구축하고 자신이 스스스로 갇힌 저 지독한 양극화 구조는 한국 사회 전체로 그대로 증폭되고 젊은 세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은 베이비부머 세대 스스로가 만든 탓도 있다. 결국 베이비부머 문제는 비단 정부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결국엔 우리 모두가 풀어야한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은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지 말고 공동체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볼 때다. 연대감 확인을 통한 공감과 위로는 곧 베이비부머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에겐 아버지 세대, 가장의 힘겨운 삶을 이해할 기회를, 장년층에게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가질 기회가 생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포용과 나눔. 배려가 필요한 때이다.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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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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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6] 주홍 글자

 

 

 

 

“그녀의 웃옷 가슴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아 환상적으로 멋을 부린 ‘A’ 자가 보였다. 그 글자는 아주 예술적으로 만든데다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공상을 마음껏 발휘한 것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었다.” (16쪽)

 

17세기의 미국 보스턴. 청교도정신으로 똘똘 뭉친 마을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사생아를 낳은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주홍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못 당당하게, 진정한 속죄와 참회로 이웃에 선행을 베풀면서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A’는 간통의 상징에서 점차 ‘Able’(능력)과 ‘Angel’(천사)의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다른 쪽에는 그녀와 간통한 목사 딤스데일, 전 남편 칠링워스라는 인간형이 있다. 이들 역시 보이지 않는 ‘A’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딤스데일은 간통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죄책감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Agony)에 시달리며, 칠링워스는 그것을 알고 분노(Anger)에 찬 채 복수를 노린다.

 

넓게 보았을 때 딤스데일의 죄는 숨겨진 죄를 상징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묘사되는 병약한 모습과 죄를 숨기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죄가 헤스터의 죄보다 더욱 악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호손은 죄를 저지른 행위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숨기는 은폐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딤스데일의 죄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칠링워드의 죄는 헤스터처럼 공개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드러난 죄는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상징한다. 작품 전반에 계속적으로 나타난 인간애를 상실한 그의 차가운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자의 비참한 결말은 칠링워드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죄인가를 한층 더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홍글자 A를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헤스터는 공개적으로 ‘왕따’를 당한 채 변두리 오두막에 살며 바느질로 생계를 잇는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간통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당당하게 견디면서 융통성 없는 청교도의 권위에 도전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산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딤스데일의 무덤 곁에 묻힌 그녀를 ‘청교도적 파우스트’라고 부르는 해석도 있다. 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규범의 쇠사슬을 박차고 인간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며 개인의 참다운 자유를 구하려 한다. 물론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도둑맞은 칠링워스의 사유재산, 한낱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한 페미니스트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헤스터는 딤스데일이 사망한 뒤 청교도 사회를 떠나 유럽에 머물다 뒷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와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남녀 간의 모든 관계가 상호 행복이라는 좀 더 굳건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으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식을 기른 최초의 편친모(偏親母)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 상담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설은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헤스터와 달리 딤스데일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숨기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두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청교도 사회에서 간통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시민이 아닌 목사의 직분을 지닌 딤스데일에게는 더욱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7년 동안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헤스터와 딤스데일, 두 사람의 개인적 성품 차이일 수도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정직성은 사회적 관용 수준과도 관계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보는 타인 또는 사회 전체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원치 않던 낙인에 대해 좌절하고, 숨기고, 때로는 평생의 상처로 안고 간다. 그러나 그 낙인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헤스터가 ‘간음의 A’를 ‘유능함의 A’와 ‘천사의 A’로 바꿨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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