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의사들은 처음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 보도를 전해 듣긴 했어도 대단한 사고가 아니라는 공식 발표가 곧바로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일대는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이 병원에 수용된 아이들만 오늘도 벌써 오전 중에만 일곱 명이 죽었다. 대체 오늘 하루 동안에 몇 명의 아이들이 시체 처리실로 보내질 것인가.” (117쪽)

 

1986년 4월 26일, 당시 소련이었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방사선 피폭 때문에 56명이 사망했다. 고도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 이 중 2만 5000명 정도가 사망한 걸로 알려졌지만, 그린피스는 이 사건 때문에 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뒤에 회고하기를 체르노빌 사고 수습 비용이 소련 1년 예산과 맞먹었으며, 그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도 언급할 정도니 사고의 피해 정도는 실로 엄청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정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최고 등급인 레벨 7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양으로는 일단락 난 것처럼 보이는 체르노빌과 달리, 후쿠시마 사태는 진행 중이다. 지금 2년 전 그 때의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남긴 위험한 흔적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걱정해야 한다. ‘등급’이 모자랄지도 모르는 이 사태야말로, 현대 문명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위기 감지 능력이 얼마만큼 경화되었는지를 증명한다.

 

문제는 방사능의 흔적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그 흔적을 지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 없는 듯 우리 안에 존재하는 적.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에 침투하고 그 없는 것에 DNA 구조가 바뀐다. 그것은 인류의 그늘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소설로 형상화한 일본 작가 히로세 다카시의 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보면 그 그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하다. 원자력 발전소 간부인 아버지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결사대의 일원으로 뽑혀 발전소 뒤처리 작업 중에 사망해 영웅 칭호를 받는다. 소설은 안드레이의 아내 타냐, 그리고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가 사고를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당국에 의해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격리 수용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방사능 피폭자의 주검은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참상의 피해를 실감나게 그려낸 나카자와 케이지의 만화 『맨발의 겐』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그녀(타냐)가 내민 팔에는 이네사보다 어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머리카락, 얼굴 전체에 뒤덮여 부풀어 오른 검붉은 반점 무늬들이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제 손으로 쥐어뜯은 손톱자국이 무수하게 남아 있었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천재지변이나 폭격에 약하다는 점을 위험요인으로 든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핵발전소는 곧바로 핵폭탄이 된다는 것이다. 방사능 물질은 냄새도 색깔도 없지만 한 번 누출될 경우 대량의 치명적인 피해를 낳을 뿐 아니라 후유증 또한 극심하다.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났고, 체르노빌의 경우 러시아 등지에서 무려 30만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그 외에도 핵폐기물의 안전한 저장과 처리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어려우며, 온배수로 인한 열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전 세계의 반핵 평화 운동가들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 이후 전 세계의 핵발전소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났다. 그 와중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일본 정부의 대책 마련은 뒷북이다. 재미있게도 옆에 있는 한국 정부 역시 일본 정부의 모습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오늘 국립수산과학원은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우리나라 바다에 유입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발표만으로 방사능에 노출되기 쉬운 우리나라는 과연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오염수가 유입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오염수가 남아있는 해역에서 자란 물고기들이 우리나라 연근해로 유입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보도의 진실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심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다.

 

히로세 다카시의 책은 쉽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이 쉬운 이유는 전문가들이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원전산업을 장악한 독점기업과 그들을 비호하는 국가는 대중이 원전의 악취 나는 비밀에 접근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때 당근을 받아먹은 전문가들은 원전산업의 훌륭한 방호벽이다. 더 재미난 것은, 전문가들조차 원전 사고가 추후에 확대될 피해의 정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점. 체르노빌의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분산시키고 의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림으로써 원전 사고와의 관계성을 영영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핵과의 싸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지구를 리셋(Reset)하는 공포 앞에서 인류 문명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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