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 난폭한 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맞으면서 자랐다. 반면 소년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착했다. 그녀는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는 소년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줬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모성애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의 난폭함은 소년에게 강한 증오심을 심어주고 말았다. 어른으로 성장한 그는 그림을 공부하여 화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훌륭한 화가가 될 실력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기 원하는 삶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세상을 원망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독일 군부대로 자원입대한다. 이때부터 소년은 전 유럽을 피로 물드는 전쟁의 힘에 매료되었고, 세상에 대한 증오심은 반유대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이 소년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된다. 그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 밑에서 학대받으며 불후하게 자라 냉혹하다는 진단이 일반적이다.

 

한 시대에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지도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숱하게 살육하고,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짓밟혔고 마침내 악몽의 역사를 후세에 남겼다. 히틀러와 스탈린. 이 두 사람은 모두 국가라는 이름 아래서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유럽을 지배하려는 야심도 갖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광기의 지도자로 만들었는가. 프로이트의 분석을 빌리자면, 어린 시절의 좌절과 상처가 있는 권력자들은 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두 비참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헌신적인 어머니가 있었지만 난폭한 아버지도 있었다. 스탈린도 히틀러처럼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스탈린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캅카스 산맥 상에 있는 조지아(옛 이름은 그루지야)의 작은 도시 고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스탈린은 자신과 어머니를 무지막지하게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경멸을 느껴 아버지에게 칼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폭력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폭력으로 맞서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에게 폭력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전략이었다. 스탈린은 불행한 사고를 두 번이나 겪는 바람에 왼쪽 팔을 못 쓰게 되었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에게는 ‘초푸라(곰보)’, ‘게자(절름발이)’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하지만 신체적 약점은 스탈린의 성품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다. 어린 시절의 스탈린을 회고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모범생이면서도 난폭한 기질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이중 인간이었다.

 

정적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힘만 쓸 줄 아는 무식한 행동대장쯤으로 여겼지만, ‘천의 얼굴’ 스탈린의 가면 중 하나를 봤을 뿐이다. 히틀러가 화가의 꿈을 간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면, 스탈린은 시를 직접 쓸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학비를 벌려고 합창단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합창단의 핵심인 제1 테너였다고 한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아들은 교회 관계자를 잘 아는 친척 덕분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엄숙한 분위기의 직업은 스탈린에게 맞지 않았다. 스탈린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으면서 무신론자가 되었고, 마르크스의 책에 푹 빠졌다. 신부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조지아 민족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꿈꿨다. 저 유럽 반대편에서 자란 히틀러는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결합한 나치즘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도 백수 시절에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지지만, 스탈린의 독서와 비교하면 형편없다. 히틀러는 책에서 본 내용만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잘난척 했으며 그의 지적 수준은 훌륭하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히틀러와 스탈린은 같은 장소에서 거주했다. 1913년 오스트리아 빈. 스탈린은 레닌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싸구려 하숙집에서 자신의 그림 실력을 한탄하면서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사는 궁전 근처에 있는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비록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공원을 거닐다가 한 번 정도는 옷깃을 스쳤을 것이다. 정확히 30년 뒤에 두 사람은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가 되어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에서 자존심 대결을 펼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으로 알려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히틀러 「The Courtyard of the Old Residency in Munich」 (1913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한결같이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항상 자신에게만 맞춰주고, 복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애정 결핍 상태로 불행한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얻기라도 하듯 권력을 좇고, 악용했다. 사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시를 쓰는 조지아 시골청년과 그림을 그리는 오스트리아 백수가 비정한 권력자가 되어 역사의 악인으로 기억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앞에는 누구에게나 하얀 도화지가 놓여 있다. 인생은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풀잎 위에 앉은 이슬처럼 청초한 삶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극적인 상처와 절망을 그리는 이들도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도화지를 아주 어둡게 칠했다. 그들은 유년 시절까지 색칠했던 어둠의 기억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를 숨기려고 새로운 색깔로 인생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것은 바로 핏빛 색깔로 그려진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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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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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지금까지 토토로는 알고 있어도 우토로는 몰랐을 거다. 얼마 전에 방영한 방송 프로그램 <무한도전> 덕분에 우토로가 다시 한 번 알려지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우토로를 치면 관련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1998년에 우토로 사람들(이사히신문사)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토로 마을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저자로 참여한 우토로(민중의소리), 2010년에 어린이 독자를 위한 우토로의 희망 노래(푸른책들)까지도 나왔다. 이미 공중파 방송의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적도 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 우토로 마을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낯설다. 우토로 마을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의 반응이. ‘무한도전우토로 편은 아주 오랫동안 꺼져 있었던 관심의 불씨를 다시 살렸지만, 과연 이 불씨가 얼마나 오래갈지 걱정이 든다.

 

오랫동안 한반도의 불행을 고스란히 고여 있는 채 흘려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우토로 마을 이야기에 반성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선 안 된다. 일제 지배, 미 군정, 전쟁과 분단, 남북대치, 그 역사의 가파른 기복은 재일조선인들에게 고통이요, 질곡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팔려가고 끌려간 세대들이 해방의 기쁨도 잠시,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일제가 징병으로 강제로 끌고 간 사람들까지 법적 지위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귀향하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부초 같은 삶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세금은 일본인과 똑같이 내면서 외국인으로 취급되며 취직 진학 영업 대출 등에서 시린 차별대우를 견뎌야 했다. 거기에 또 조국의 분단과 대치가 그들의 국적을 갈라놓고 동포사회를 양분했다. 냉전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는 민단(재일한국거류민단)과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대립이 분단 조국에서보다 더 첨예하게 맞섰다.

 

한일 과거사를 논할 때 재일조선인 문제를 제외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재일동포의 삶에 무관심하다. 재일동포대신에 지금 쓰고 있는 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 생소하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요즘에는 조선한국’, ‘대한민국보다 열등하게 보는 의미로 사용된다. 과거 일제 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인 것도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선진국과 거리가 먼 사회구조로 변하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열등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서경식 선생은 글이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재일동포대신에 재일조선인이라고 사용한다. 그 이유가 선생은 조선이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호칭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식민지 나라였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됐다는 이유로, 그리고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은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때로는 일본인처럼 때로는 한국인처럼 분장해야 숨을 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무한도전> 우토로 편이 방영되자, 일본 우익들은 막말을 퍼부었다. 오히려 우토로 마을 사람들을 불법체류자라고 말하면서 조롱을 퍼부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우토로 마을 사람들은 반난민이다. 서경식 선생은 자신의 책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모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의 비극은 국가라는 방호막이 없고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는 나라와 모국, 양쪽으로부터 다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우토로 마을이 2017년에 재개발돼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재일조선인의 역사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우토로 마을의 비극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진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를 인정했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려면 조선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무한도전>이 준 감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은 재일조선인의 울음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익 시위대의 폭력 속에서도 민족 차별의 고통에 울부짖는 존재의 슬픔을. 그러니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점점 더 잊히고 있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걸 그저 눈물만 훔치며 브라운관을 보고만 있는 우리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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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1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했어요. 이렇게 입에 회자되게 해 주는것은 좋은데 본질을 외면한채 감동과 죄책감으로만 끝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예능에서 시작했더라도 진지한 논의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텐데요~ 이런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버린 일들이 너무 많아요.

cyrus 2015-09-11 18:32   좋아요 0 | URL
다음 주 하시마 섬 편은 어떻게 방영될지 기다려집니다만, 역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데만 그칠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5-09-1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픔을 예능으로 꺼집어 내었다는 의미는 크지만,
이걸 자칫 결론없이 단순 감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들었어요..

cyrus 2015-09-11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실 이런 감동도 예전처럼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역사를 제대로 못 배웠다거나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상처에 눈물 흘리는 방송인의 모습을 ‘방송용’이라고 무시할 정도니까요.

해피북 2015-09-1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무도`보면서 마음 아프기만 했지 이렇게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 부끄럽네요. 특히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도 희미해진다`는 말이 정말 크게 다가왔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 잊지 말아야겠어요^^ 정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

cyrus 2015-09-12 22:03   좋아요 0 | URL
재일조선인 문제를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차원으로 접근하면 좋은데, 결국 시청자들만 과거 역사에 슬프고 분노하는 데만 그치는 게 너무 아쉽기만 합니다. 해피북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yamoo 2015-09-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방송을 꼭 봐야 겠슴다! 좋은 글 감솨함돠!^^

cyrus 2015-09-12 22:05   좋아요 0 | URL
본방을 놓치면 토요일 정오 12시에 하는 재방송을 보면 됩니다. ^^
 

 

 

 

사진은 달의 궁전카페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신청자가 많으면 달의 궁전카페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활동을 잘 하지 않는 분들이 선정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래도 한 번 신청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청을 원하시는 분은 링크 주소를 클릭하면 됩니다.

 

http://cafe.naver.com/darlgung/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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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9-10 18:16   좋아요 0 | URL
저도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신청을 자제하는 중입니다. 몇 년 동안 서평단 활동 덕분에 공짜 책을 읽은 혜택을 많이 누려서 그런지 서평단 활동을 안 해본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제가 블로그에 서평단 공지사항을 스크랩하면서 올리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제 글에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차원으로 서평단 공지사항을 공유하고 싶어요. ^^

yureka01 2015-09-10 16:31   좋아요 0 | URL
서평단 참가할 기회 더 많으면 좋은것은 맞아요. 소식을 몰라서 못하면 책 알릴 방법이 줄어들테니까요..^^

고양이라디오 2015-09-1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취지네요. 멋지십니다!
 
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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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디 셔먼 『Unitled Film Stills #39』 (1979년)

 

 

 

신디 셔먼은 속옷만 입은 채 욕실에 서 있다. 그녀가 서 있는 사진을 1분 동안 가만히 주시하면 프레임을 가득 채운 그녀의 불안감이 당신에게도 전이된다. 잘 들어보면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내뱉는 그녀의 속삭임도 들린다. “난 정말 예쁘지가 않아. 그 사람이 내 몸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성들은 거울을 자주 본다. 외모가 뛰어나고 안 뛰어나고를 떠나서 여성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10차례 이상은 거울을 들여다볼 것이다. 자신에게 변화를 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거울을 보며 못마땅한 부위를 살피고 이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하거나 최후의 방법으로는 성형수술을 선택하기도 한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자신감의 표현이며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외모 가꾸기’는 몸과 마음을 파괴할 정도로 병적이다.

 

외모지상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다. 작은 치수의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정상 체중인데도 몸무게를 줄이려다 부작용을 겪는다. 이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운동이나 가벼운 다이어트 요법 등을 통해 몸매를 가꾸다가, 점점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하고, 결국은 다이어트 강박증 및 성형 중독 현상에 이른다. 뛰어난 외모는 한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되고 그 누구도 현대사회에서 미용과 패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남성까지 외모 가꾸기에 한창이다. 이제 예뻐지려는 욕구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떤 아름다움이 가치를 갖는지 혼란스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외모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뻔하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것.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행동과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겸비하고 마음을 닦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이런 충고는 외모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의 짜증을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거울 속에 사는 악마가 아름답게 살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악마는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다. 악마의 장난 때문에 우리는 외모 자체의 이상이나 장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왜곡된 신체상을 추구한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연민과 자기애 때문에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지 못하므로 우리는 거울 앞에서 외모에만 치중하라고 자기를 설득하는 중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의 지배에 구속당한 사람들.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는 비단 거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미디어(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 속에서도 ‘아름다움’으로 둔갑한 악마가 득실거리며 산다. 미디어의 악마는 우리의 생각을 획일화한다. 미디어는 외모에 대해서 적지 않은 정형화된 이미지(Stereotype)을 갖게 한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대부분 예쁘고 날씬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나온다. 반대로 뚱뚱한 사람은 미련하다거나 이성 친구가 없다거나 하는 등 미디어의 일반적인 묘사를 통해 우리는 외모에 대해서 크나큰 편견을 갖게 된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모방심리가 강해서 멋있게 나오는 연예인을 보고 동일시하려는 특성도 강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고 외모가 잘생긴 사람을 무조건 우상화한다든지,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하는 선입견이 형성된다.

 

여성들은 나이, 계급과 상관없이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을 계발할 것을 주문받는다. 지위와 부는 여전히 사람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지만 ‘아름다움’ 또한 지위나 부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독립적인 특성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호감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혹독한 단련 행위를 거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 결국, 여성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회 속에는 ‘자신을 위한 만족’보다는 ‘남성의 취향’을 먼저 생각하는 의식구조가 숨어 있다. 여기에 맞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못생겨도 당당해지자!’고 외쳤다. 외모를 꾸미지 않음으로써 외모를 평가하는 세상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아름다운 여성’과 ‘지적인 여성’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면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여성들도 거울 앞에 서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고민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美)’에 미쳐버린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몸 숭배와 광기》가 1999년에 출간된 이후로 ‘외모지상주의’ 광풍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미디어와 미용 산업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의 신화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미달한 사람들을 탈락시킨다.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망상은 개인을, 나아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 《몸 숭배와 광기》의 저자 발트라우트 포슈는 우리가 자신을 외부로부터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내부로부터 느끼는 방법을 터득할 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 원론적인 해법만이 외모 강박증을 부추기는 우리 주변의 악마를 무찌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거울 속 못난 얼굴을 보니 문득 故 이주일 선생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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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9월호에 독서모임을 하는 북클럽 ‘달의 궁전’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달의 궁전’은 제가 유일하게 참석했던 북클럽입니다. 여기에 활동하는 분들이 폴 오스터의 소설을 좋아해서 그의 대표작 이름을 따와서 ‘달의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악스트>에 대한 이웃들의 글을 쭉 봤는데요, 아무도 ‘달의 궁전’을 언급 안 해주셔서 전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제가 지방에 살고 있다 보니 독서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지만, 저에게 소중한 인연들의 목소리를 책으로나마 들을 수 있게 되어 반갑게 느껴집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럽습니다. <악스트> 9월호를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서울에 거주하시는 분 중에 독서모임에 관심이 있다면 ‘달의 궁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네이버 공식 카페도 있습니다. 그곳에 접속하여 카페 회원으로 가입하면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독서모임 소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끔 서평 이벤트도 합니다. 앞으로도 ‘달의 궁전’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 ‘달의 궁전’ 공식 카페 : http://cafe.naver.com/darl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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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9-0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기사 났다고 축하 분위기던데 이거였구나.ㅎㅎ

cyrus 2015-09-09 21:11   좋아요 0 | URL
문단에 있는 작가들이 참여하는 문예지에 독서모임 클럽의 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

수이 2015-09-0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_^^ 멀리서나마 뿌듯하다.

cyrus 2015-09-09 21:12   좋아요 0 | URL
야나문도 잘 돼서 잡지에 소개되었으면 좋겠어요. ^^

yureka01 2015-09-09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변에 독서클럽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그런게 없으니..아쉽네요.

cyrus 2015-09-09 21:14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이 오프라인 활동으로만 이루어지면 독서모임하는 북클럽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인디언밥 2015-09-1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아아아 저도 읽었는데! 속으로 부럽다 부럽다 이러면서.. -0-

cyrus 2015-09-10 15:24   좋아요 0 | URL
저도 부러워요. 저 모임에 함께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