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신디 셔먼 『Unitled Film Stills #39』 (1979년)

 

 

 

신디 셔먼은 속옷만 입은 채 욕실에 서 있다. 그녀가 서 있는 사진을 1분 동안 가만히 주시하면 프레임을 가득 채운 그녀의 불안감이 당신에게도 전이된다. 잘 들어보면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내뱉는 그녀의 속삭임도 들린다. “난 정말 예쁘지가 않아. 그 사람이 내 몸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성들은 거울을 자주 본다. 외모가 뛰어나고 안 뛰어나고를 떠나서 여성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10차례 이상은 거울을 들여다볼 것이다. 자신에게 변화를 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거울을 보며 못마땅한 부위를 살피고 이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하거나 최후의 방법으로는 성형수술을 선택하기도 한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자신감의 표현이며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외모 가꾸기’는 몸과 마음을 파괴할 정도로 병적이다.

 

외모지상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다. 작은 치수의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정상 체중인데도 몸무게를 줄이려다 부작용을 겪는다. 이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운동이나 가벼운 다이어트 요법 등을 통해 몸매를 가꾸다가, 점점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하고, 결국은 다이어트 강박증 및 성형 중독 현상에 이른다. 뛰어난 외모는 한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되고 그 누구도 현대사회에서 미용과 패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남성까지 외모 가꾸기에 한창이다. 이제 예뻐지려는 욕구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떤 아름다움이 가치를 갖는지 혼란스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외모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뻔하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것.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행동과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겸비하고 마음을 닦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이런 충고는 외모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의 짜증을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거울 속에 사는 악마가 아름답게 살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악마는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다. 악마의 장난 때문에 우리는 외모 자체의 이상이나 장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왜곡된 신체상을 추구한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연민과 자기애 때문에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지 못하므로 우리는 거울 앞에서 외모에만 치중하라고 자기를 설득하는 중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의 지배에 구속당한 사람들.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는 비단 거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미디어(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 속에서도 ‘아름다움’으로 둔갑한 악마가 득실거리며 산다. 미디어의 악마는 우리의 생각을 획일화한다. 미디어는 외모에 대해서 적지 않은 정형화된 이미지(Stereotype)을 갖게 한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대부분 예쁘고 날씬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나온다. 반대로 뚱뚱한 사람은 미련하다거나 이성 친구가 없다거나 하는 등 미디어의 일반적인 묘사를 통해 우리는 외모에 대해서 크나큰 편견을 갖게 된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모방심리가 강해서 멋있게 나오는 연예인을 보고 동일시하려는 특성도 강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고 외모가 잘생긴 사람을 무조건 우상화한다든지,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하는 선입견이 형성된다.

 

여성들은 나이, 계급과 상관없이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을 계발할 것을 주문받는다. 지위와 부는 여전히 사람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지만 ‘아름다움’ 또한 지위나 부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독립적인 특성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호감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혹독한 단련 행위를 거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 결국, 여성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회 속에는 ‘자신을 위한 만족’보다는 ‘남성의 취향’을 먼저 생각하는 의식구조가 숨어 있다. 여기에 맞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못생겨도 당당해지자!’고 외쳤다. 외모를 꾸미지 않음으로써 외모를 평가하는 세상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아름다운 여성’과 ‘지적인 여성’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면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여성들도 거울 앞에 서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고민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美)’에 미쳐버린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몸 숭배와 광기》가 1999년에 출간된 이후로 ‘외모지상주의’ 광풍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미디어와 미용 산업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의 신화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미달한 사람들을 탈락시킨다.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망상은 개인을, 나아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 《몸 숭배와 광기》의 저자 발트라우트 포슈는 우리가 자신을 외부로부터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내부로부터 느끼는 방법을 터득할 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 원론적인 해법만이 외모 강박증을 부추기는 우리 주변의 악마를 무찌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거울 속 못난 얼굴을 보니 문득 故 이주일 선생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