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할 의무 - 우리 시대의 언어와 기술 그리고 교육에 대한 도발
닐 포스트먼 지음, 손화철 옮김 / CIR(씨아이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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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에 초등학생은 '국민학생'이었다. 그 국민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국민학생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이 시작되는 첫 문장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기초로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국민의식개혁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 바가 있지만, 과연 이 헌장이 우리 국민의 의식에 얼마나 파고들어 무엇을 남겼는지 한 번 곱씹어 보아야 한다.
 
국민교육헌장 가운데 "교육의 종국적 목적은 국가의 목적을 자각하는 일이다"라는 문장은 일제 국민교육의 목적인 황국신민이 연상된다. 비교할 때 양쪽 모두 도구주의적 교육관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국민교육헌장은 문민정부 들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국민교육헌장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국민교육헌장이 사라졌다고 해도 국민을 '교육'하는 제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체제와 권력에 순종하도록 하는 교육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주입하는 질서와 규칙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교무실에 불려 다니다 어느새 가까이하면 안 될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야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관철된 국가주의 교육은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에게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작용했다. 반공교육과 체제 순응 교육, 훈화, 애국 조회 등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했지만,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은 철저히 배제했다. 사회화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게 교육과정이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학생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 혹은 편견을 의심할 수 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전통과 권위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 
 
미국의 미디어 전문가이자 교육평론가인 닐 포스트먼은 『옹호할 수 없는 것에 맞서기』라는 제목의 강연문에서 사회의 편견에 순응하도록 하는 학교의 역할이 오래된 전통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전통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옛말이 있었다. 스승은 제2의 부모로서 공경해야 하며, 그 은혜는 부모와도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오늘날 그 말 속에 학생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강조한 대안적 전통이 바로 편견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이다.
 
실제로 편견을 맞서는 일은 무척 어렵다. 미디어는 근거 없는 편견을 만들고, 증오를 유발하는 역기능이 있다. 미디어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생각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허황한 의식임에도 우리는 일단 미디어로부터 받아들인 언어 또는 이미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 점은 <미디어워치>를 구독하는 박사모 회원에게 구독을 중지하도록 요구해서 <한겨레>를 읽어보도록 설득해보면 알 것이다. 설득 작업은 실로 불편하고 어렵고 더디다. 포스트먼은 학생들이 미디어의 편향성에 취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깊숙이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자리 잡는지 학교가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질서를 받쳐주는 서양의 근본정신은 장황한 법률규정이 아니라 남의 권리를 존중하여 주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권리가 보호받는 것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예링의 말은 바로 이 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남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기의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고, 자기 생각을 떳떳하게 밝히는 냉철한 비판의식이 결여됐다. 포스트먼은 《불평할 의무》 머리말에서 작가로 제일 살기 좋은 나라 두 곳이 바로 미국과 러시아라고 했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이 두 나라가 실수를 저지를 정도로 역동적인 역량을 가진 제국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지도자만 봐도 포스트먼의 말에 수긍이 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 발표한 '올해 가장 힘 있는 사람들'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위에 올랐다. 아마도 트럼프의 미국이 러시아보다 전 세계에 역동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자신을 반대하는 미국인들을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한다고 해도 트럼프의 리더십에 불평하는 미국인들의 입김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작가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자 한 사람이 도덕성과 권위, 정당성을 모두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작가들이 비정상적인 세상에 향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가장 불평 거리가 많은 사회, 즉 제일 좋은 사회에 이르렀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회'의 의미란 국민의 개별적 불평이 광장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공감대로 형성되어 권위의 비정상을 규탄하는 것이다. 통상 정치 철학상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도덕성을 강조하고, 법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런데 '자칭 보수'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박근혜의 안위만 걱정한다. 국정을 어지럽게 한 이 모든 잘못을 언제까지 최순실 그리고 실체가 불명확한 좌파 선동 세력에게만 돌릴 것인가. 어렸을 적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느라 고생했던 국민이 슬그머니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이념적 선명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권위나 편견에 불평할 의무를 택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사회구성원들 의식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 발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시대와 가치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학생들의 자주적 의식에 시비 걸고, 순종을 강요하는 태도가 은연중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45쪽 
어떤 상황에서 그 말들이 쓰이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이 바로 인식론 학자입니다. 교과서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하는 셈이니까요. 교과서가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를 아는 그 학생은 광고하는 사람들, 정치가, 목사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도 알 것입니다. (‘교과서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아는 셈이니까요’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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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2-15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소은 박홍규 교수가 플라톤 전공자여서인지, 국민교육헌장에는 플라톤적인 국가주도의 교육관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분 의견을 들은 것이지만 같은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6-12-16 15:4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닐 포스트먼은 플라톤과 공자의 교육에 사회체제를 순응하도록 만드는 (역)기능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시 플라톤의 책을 열심히 정독한 독자답습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

2016-12-15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16 15:47   좋아요 0 | URL
국민교육헌장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거 사라지기 정말 잘했습니다. 만약에 헌장이 지금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끔찍해요.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거 못 외우는 사람에게 종북 취급할 것입니다. ^^;;
 
거대한 분기 - 신자유주의 위기 그 이후
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 지음, 김덕민.김성환 옮김 / 나름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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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미국의 시대였음에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침탈을 통해 세계적 지배권을 확립했던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지배국의 자리를 미국에 넘겨줬다. 냉전기 소련과 함께 세계의 양대 축으로 군림하던 미국은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 10여 년 만에 세계 패권주의의 정점이 올랐다. 계획경제보다 시장경제가 우월하다는 것은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는 것을 보고 분명하게 알게 됐다. 자본주의적 변신에 성공한 중국과 70여 년의 사회주의 실험에 실패하여 결국 붕괴한 소련의 차이는 바로 시장과 사유재산제도에 있었던 셈이다. 일찍이 다니엘 벨은 1960년대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한 바 있다. 이데올로기가 정치 이념을 뜻한다면, 이념이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는 의미일 터이다. 그리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80년대 후반 ‘역사의 종언’을 주장했다.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이제 인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의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견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현실에 적합한 최적의 사회적 담론도 아니기 때문이다. 냉전체제가 종식된 후 정치·사회적으로 불평등이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 《거대한 분기 : 신자유주의 위기 그 이후》는 주목할 만하다. 현재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다.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변신하여 의기양양하게 득세하고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기업 주도 세계화는 실패했고, 2008년 경제 위기로 전 세계가 홍역을 앓은 이후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은 확산했다.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고, 위기만 넘기면 다시 탐욕과 착취를 반복한다. 첫 번째 위기는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기업의 수익성 저하였다. 경제적 타격을 받은 자본가들은 금융기관의 보호 덕택에 기사회생했다. 이때부터 금융이 자본주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위기는 1929년 대공황이다. 일약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미국경제가 1929년 10월 주가의 폭락과 함께 순식간에 끝났다. 끝없는 실업자의 행렬이 시대의 아픔을 상징하게 되었고,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루스벨트 정부가 시행한 뉴딜 정책은 자본가 계급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관리직 계급과 민중의 ‘사회적 타협(좌파적 타협)’이었다.

 

신자유주의가 탄생한 이후 지난 30년 동안 소수의 상위 자본가 계급들은 금융자본을 이용해 자기 몸집을 키워왔다. 그사이 전 지구적 범위에서 투기와 거품이 끊임없이 양산되었고 이렇게 커진 거품은 경제 체제의 약한 지반을 따라 부분적인 폭발을 일으키면서 문제들을 누적시켜왔다. 세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좌파 정당의 목표는 언제나 효율적인 자본주의 경제 관리와 경제 성장 촉진, 그리고 이를 통한 보다 공정한 잉여의 분배였다. 하지만, 유럽의 좌파 정당은 미래를 위한 경제정책과 정치적 목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분열해왔다. 여기에 우파들은 자본가 및 금융기관과 함께 동맹을 결성하여 신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데 주도했다.

 

《거대한 분기》의 공동 저자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 자체마저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이뿐만 아니라 좌파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 때 좌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좌파의 위기는 거대한 세계 경제 위기의 뒤에 찾아왔다. 1929년 경제 붕괴와 대공황 시절, 1970년대 성장둔화와 스태그플레이션,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그때다. 뒤메닐과 레비는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또 한 번 ‘거대한 분기’에 직면하게 된 자본주의의 향방을 예측하면서도 유럽 좌파들이 선택해야 할 경로를 넌지시 제시한다. 그들은 뉴딜 정책의 사례처럼 ‘사회적 타협’이 형성되어 민중 계급이 신자유주의 쇄신에 주도하는 대안 모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번 위기의 상황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면이 있다. 좌파와 우파, 그리고 중도의 경계가 불명확하고, 각 정파 내에서도 또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며, 역사적으로도 변화해왔다. 역사는 가변적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거대한 분기》는 신자유주의에 반감을 보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숙제다. 사실 우리나라도 ‘사회적 타협’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허상이 낱낱이 알려졌음에도 관리직과 자본가 계급의 우파적 동맹이 아주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 동맹의 핵심은 노동과 시민을 억압하고 배제한다. 이 관계의 ‘뿌리’가 지금까지 썩고 있었던 사실을 목격했다.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 특히 금융이 승승장구하리라는 것을 전망하는 주장들이 빈축을 사고 시대착오적이라 비난받아 마땅한 시기가 왔다.

 

 

 

 

 

 

우리나라가 ‘거대한 분기’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경기 침체의 늪에 계속 허덕인다면, 먼 훗날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선택지를 마주할 수 있다. 보수 우파의 정체성마저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미국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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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11-26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러다임이 shift하는 건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지 아직 모르겠지만, 엄청난 사건이죠...

cyrus 2016-11-26 10:23   좋아요 0 | URL
181쪽 문장을 보면서 제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음을 느꼈습니다.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국가란 무엇인가 3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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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강조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다. 그는 『법』이라는 팸플릿에서 ‘법의 정의’라는 전제하에 권리와 자유와 안정과 책임의 원칙이 지켜질 때만이 인류는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좋은 경제학자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효과를 동시에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책입안자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엄청나게 돈을 뿌린다. 개인 또는 국가의 번영은 단기이익과 장기이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추를 잡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정책입안자들은 단기이익에 몰두하고 있다.

 

정부의 기본 목적은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회를 비롯한 입법기관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입법기관들은 세금을 부과하여 시민들의 재산을 가져간다. 생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시민 집단으로부터 세금을 걷어다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애호하는 시민 집단에 나누어 준다. 의원들은 또한 끊임없이 규제 법안을 만들어낸다. 그런 규제가 시민의 자유를 점점 위축시킨다. 바스티아는 『법』에서 법의 통치가 역전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160여 년 전에 발표된 『법』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오늘날의 법은 ‘타락’했다. 정의와 자유를 실현해야 할 법이 ‘합법적인 약탈’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법은 강탈을 권리로 변모시켰고, 합법적인 방어를 범죄로 변모시켰다. 바스티아는 법이 타락한 원인 중 하나를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에 기초한 자유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늘린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타인의 희생을 발판삼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누리고 싶어 한다. 도덕보다 부를 우선으로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곤 했던 스미스는 이기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스미스가 구상한 시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올바른 덕성과 이익, 부가 조화롭게 구성된 곳이다. 이러한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면 정의와 자유를 보호하는 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야 하는 시장과 법은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어리석은 이기심에 눈먼 자들은 기득권을 강화해 탐욕의 먹이사슬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이 법을 타락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로 규정했지만, 오늘날 그의 논리는 가짜 자유주의자들을 가려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가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라는 이름을 오용하고 다닌다. 전경련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연결하는 정경유착의 고리로 전락했고, 정경유착의 고리에 얽힌 대기업들은 침묵하는 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경련이 설립한 자유경제원 역시 모르쇠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경련이 최순실을 위해서 자행한 ‘합법적인 약탈’을 비판하지 못하는 자유경제원 내부에 정말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자유경제원은 편향된 역사 교과서를 뿌리 뽑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노골적으로 정치 현안에 간섭했다.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바스티아의 또 다른 글 『정의와 박애』를 읽어보도록 권해 드리고 싶다. 바스티아는 통일성을 강제하는 법은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박애를 핑계로 국가가 간섭해 통일성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 국가의 간섭은 억압 즉 불의가 될 것이다. (『정의와 박애』 54쪽)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의 잘못된 박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모든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집단적 이타심이 강박적으로 작용하면 개인의 자유가 규제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결과가 일어난다. 자유경제원은 기업을 옹호하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외면하는 모습은 잘못된 박애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기업경제원의 박애주의는 아주 특별하다. ‘박정희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박정희 사랑’을 두 글자로 줄여보시라. ‘박애(朴愛)’다.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박정희를 사랑하게 하려면 박정희가 주인공인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 자유경제원은 강제적으로 역사를 하나로 통일된 국정교과서를 고집한다. 국정교과서 반대하는 입장을 ‘종북 좌파’의 선동으로 매도한다. 자유경제원은 ‘박통령 사랑’에 자극받아 법으로 역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박애 감정에 자극받아 법이 교육을 이끌어가거나 교육을 강요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법이 오류만 이끌어가거나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묻는다. 오류를 강요하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오류를 강요할 위험이 있는데도 힘에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박애인가? 사람들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다양성을 무정부 상태라는 이름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토론, 연구, 실험을 통해 신장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무슨 자격으로 한 제도를 법으로 또는 강제로 다른 제도들보다 우선시하는가? (『정의와 박애』 55~56쪽)

 

자율성 및 다양성을 입각한 역사교과서 발행을 막으려는 정부와 자유경제원은 자유의 기초를 외면하고 있다. 감히 누가 누굴 보고 ‘종북 좌파’라고 말하는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들이야말로 바스티아가 지적한 ‘어리석은 이기심에 좌파’에 가깝다. 역사교과서의 통일성을 세우려고 교육에 간섭하는 정부의 행보를 옹호한 자유경제원은 바스티아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왜 인간은 부를 창출하는가. 같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부의 창출 그 자체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사회를 존속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원리가 점점 잊히고, 아니 오히려 그 원칙에 거꾸로 가고 있다. 바스티아의 글은 우리가 잊고 있는 그 근본원리를 일깨워줌으로써, 경제학과 경제가 그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볼 수 있게 한다. 다만, 160여 년 전에 나온 그의 생각들이 오늘의 현실에 적용되는 건 아니다. 현실 감각이 무디지 않은 자유무역 옹호론자들도 자유무역이 평화 유지에 기여한다고 믿는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표출해왔다. 바스티아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도 대중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국가의 정책을 찬성했다. 하이에크와 그들을 추종하는 자유경제원이 애덤 스미스보다 덜 알려진 바스티아를 찬양한 이유가 있다. 바스티아가 한반도 안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신자유주의자들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국에는 진짜 자유주의자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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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당선되었더군요..ㄷㄷㄷㄷ그의 막말에 깔린 심리가 어떨지,,,,,

cyrus 2016-11-09 18:20   좋아요 1 | URL
당선 소감을 봤는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용하고, 다른 나라와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당선 소감만 듣고, 트럼프를 지지하긴 그렇네요... ㅎㅎㅎ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평등한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사회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듯이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기회의 균등을 시장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물론 기회의 균등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다면 개개인의 창의력, 능력, 노력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불평등 문제가 심화하여 빈곤층이 늘어나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사회적 통합이 저해된다. 이는 경제성장력을 잠식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지나친 불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깨뜨리고, 다시 소득과 기회의 불균등을 심화시키는 경제의 악순환을 낳는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학자들은 많은 수치를 통해 불평등이 성장을 막는 것은 물론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빈부 격차가 최악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국식 자본주의를 최고로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방한했던 스티글리츠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방하는 우리나라에 충고한 적이 있다. 90년대 이후 미국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인해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불평등을 높이는 주요 요인은 부자들을 유리하게 만든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를 허용하는 정치구조다. 경제 규모는 커졌어도 소득과 부가 ‘담장 공동체’ 안에 사는 부유층으로 집중돼 중산층은 줄고, 빈곤층은 증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조는 미국의 양상과 흡사해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화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불평등이 빈곤층의 삶을 위협한다고 한탄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과 《새로운 빈곤》이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실업자, 노숙자 등의 빈곤층이 격리의 대상인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경제성장의 이면을 꼬집는다. 담장 공동체 밖에는 다수의 빈곤층이 몰린 쓰레기장이 있다. 과거에는 빈곤층 증가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경멸받는 범죄의 차원으로 바라본다.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차브(Chav)’ 현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무직의 하층계급을 ‘차브’로 규정하여, 복지급여를 부정적으로 타내는 게으른 대상으로 비하한다. 전통과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가벼움과 저속함을 무기로 종종 주류문화에 반격을 가한다. 세련되지 않은, 저급하고 값싼 취향의 패션과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차브 족’으로 변신했다. 전문가들은 차브 족의 등장으로 부정적인 의미의 ‘차브’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주목했지만, 싸구려를 자처하는 그들의 모습은 쓰레기더미에서 향기 나는 꽃을 피우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로 전락한 하층민들이 정상인 대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적 기구가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또 다른 착각이 GDP(국내 총생산)에 대한 맹신이다. 스티글리츠와 아마티아 센은 GDP가 경제지표로서 유용하지 못한다고 줄기차게 비판했던 경제학자들이다. 이 두 사람은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에 활동하여 GDP의 결함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보고서를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GDP는 틀렸다》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전 지구적 세계화의 추세에 힘입어 GDP는 국가의 경제성장 수준을 판별하는 공통된 지표였다. 하지만 GDP가 기업의 현금 흐름만 고려할 뿐, 삶의 질, 환경파괴, 불균형한 소득 분배 등을 측정하지 못한다. GDP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도 이미 GDP의 한계를 인정했다.

 

 

 

 

강대국은 GDP를 국력 비교의 잣대로 사용했다. 가난한 나라들은 GDP 실적을 올려 ‘개발도상국’의 굴레를 벗어 ‘선진국(또는 강대국)’으로 도약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도 GDP를 신뢰하고,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약속할 때마다 GDP 실적 목표를 언급한다. 결과와 수치에만 집중해서 알맹이 없는 양적 성장을 본격적으로 경계하는 시각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2030년 GDP 규모 세계 7위’ 도약 목표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민의 행복 지수와 복지 지출 수준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재난 불평등’을 분석한 존 C. 머터는 재해에 큰 피해를 본 빈곤층에 주목했다. ‘담장 공동체’ 사람들은 지배층의 보호 아래 피해를 면하지만, 담장 밖의 낙후된 지역에 있는 빈곤층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리더십 부재로 인해 복구 혜택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사망자 수가 많은 대형 재난 소식을 접하면, ‘후진국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생각해서 부끄러워한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 역시 재난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심지어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못된 사람들도 있다.

 

 

 

 

홍수나 지진처럼 자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만 통틀어 재난이라고 보지 않는다. 어떤 재난은 인재(人災)로, 누군가의 무관심, 사회적 부조리에서 재앙이 시작된다. 청와대에 4년 동안 숙박한 시녀가 세월호 사고 이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불평등 현상이 경제위기의 본질임을 깨닫지 못한 지도자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청와대 시녀 놀이’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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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1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녀=꼭두각시=아바타=하야!

cyrus 2016-11-02 16:26   좋아요 1 | URL
별명이 많은 대통령으로 기억될 겁니다. 박그네, 닭그네, 최순실 꼭두각시, 최순실 아바타, 병신년

yureka01 2016-11-01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집안이 나라를 말아 먹는 기분 ㄷㄷㄷㄷ

cyrus 2016-11-02 16:29   좋아요 1 | URL
박 가쪽 사람들은 이제 정계 주변에 얼씬도 못할 겁니다.

감은빛 2016-11-02 12: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뿌리깊은 불평등 구조를 과연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많은 국민들이 ˝부조리하지만 어쩔수 없어˝가 아니라
˝부조리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정도가 되어야,
저들도 마음대로 해먹지 못하겠지요.

아직도 오가며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를 옹호하더라구요.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cyrus 2016-11-02 16: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완전히 해결되기 어려운 문젭니다. 불평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외박 - 고공농성과 한뎃잠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8
정택용 지음 / 오월의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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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항거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들만의 외로운 싸움, 그것은 기업과 공장, 법원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 메커니즘의 톱니바퀴에 짓눌려 ‘메아리 없는 함성’으로 그칠 뿐이다.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정택용의 《외박 : 고공농성과 한뎃잠》은 우리가 가장 기피하는 세상의 일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집이다.

 

 

 

정택용의 사진은 예술이 아닌 '기록'으로서 사람들에게 농성장의 모습을 좀 더 기억하게 하는 수기(手記)이다. 수기(手記)는 자기의 생활이나 체험을 직접 쓴 글이다. 잡다한 삶의 비늘을 모아 몸피를 채우고 도금을 하는 작업이다. 한 영혼의 존재가 오롯이 스며든 수기는 그를, 나아가 그가 속한 집단을 이해하는 머릿돌이다. 사진가는 카메라만 있으면 시각적인 수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택용은 시위 현장과 농성 현장을 '투쟁의 현장'이 아닌 '삶의 현장'으로 찍었다. 그는 사람들 틈바구니로 곧장 걸어 들어가, 그들의 간고한 일상을 그냥 살았다.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치는 순간의 역사는 물론, 한쪽에선 싸우다 지쳐 잠든 모습까지 흑백사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래서 사진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리고 거침없다. 농성 현장에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패배하지만, 결코 패배가 아닌, 살아있는 몸짓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평화적 시위문화라는 허상 앞에서 생존을 외치는 시위대는 폭력범이 되고, 신자유주의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은 교통체증의 원흉으로 내몰린다.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시장의 폭력 앞에 벌거벗긴 세력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나누는 것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그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런 풍토에서 《외박 : 고공농성과 한뎃잠》은 가뭄 속 단비와 같다. 사람 사는 세상 속에서 누가 노동자이고, 누가 자본가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싱거운 말일지 모르지만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택용은 자본의 이익만을 좇는 현실에서 핍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아픔을 알렸다.

 

 

 

사진은 상징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전광판 위에 서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을 둘러싸는 듯한 거대한 빌딩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노동자들과 빌딩은 각각 난쟁이로 상징되는 못 가진 자와 거인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기호다. 개발지상주의 망령이 떠도는 지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돈벌이의 욕망에 사납게 찢겨버리고 있다. 원래 그렇게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조용히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이 희미해져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순하고 약한 사람들의 작은 항거들이 무시되고 있는가. 만약 이 사진에 노동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당신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좋은 사람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타인의 사회적 위치가 어디에 있든,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 속 '사람'은 여전히 너와 나를 구분하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 대표는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천막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의 비극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는 정부·여당 사람들은 유족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범죄 피의자처럼 몰아세우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무시하며 유족들을 괴롭히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밤비를 맞는 세월호 농성 천막의 사진은 절대로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적인 저항이다. 이 사진에는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사진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외박 : 고공농성과 한뎃잠》은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보다 두 달 먼저 나왔다. 두 권 모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당연히 강신주의 책이 사진집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그런데 꼰대 같은 질문이지만, 소위 인문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철학을 공부한다 해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철학이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선의 도구인 것은 맞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철학이라면 거부하겠다.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철학을 배우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기본적인 의식을 잃어버린다. 《외박 : 고공농성과 한뎃잠》에는 뚜렷한 사진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 철학, 그게 꼭 사진으로 드러내야만 하는가. 상업적인 영상 콘텐츠와 권력에 복종한 기성 언론과 구분되는 정택용의 현장 사진은 타인의 고통에 바라보고 응답해주는 눈과 입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오늘도 묵묵히 현장을 지키고 있을 정택용의 카메라는 정말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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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29 08:06   좋아요 1 | URL
**님이 언급하신 문제의 글이 뭔지 궁금해서 검색으로 찾아봤어요. 이미 삭제되었는지 흔적 일부마저 찾지 못했습니다. ^^;;

저도 말과 행동이 불일치한 적이 많아서 여기에 글을 남길 때 신중해집니다.

**님의 영향을 받은 이후로 알려지지 않은 사진집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