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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할 의무 - 우리 시대의 언어와 기술 그리고 교육에 대한 도발
닐 포스트먼 지음, 손화철 옮김 / CIR(씨아이알)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40여 년 전에 초등학생은 '국민학생'이었다. 그 국민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국민학생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이 시작되는 첫 문장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기초로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국민의식개혁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 바가 있지만, 과연 이 헌장이 우리 국민의 의식에 얼마나 파고들어 무엇을 남겼는지 한 번 곱씹어 보아야 한다.
국민교육헌장 가운데 "교육의 종국적 목적은 국가의 목적을 자각하는 일이다"라는 문장은 일제 국민교육의 목적인 황국신민이 연상된다. 비교할 때 양쪽 모두 도구주의적 교육관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국민교육헌장은 문민정부 들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국민교육헌장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국민교육헌장이 사라졌다고 해도 국민을 '교육'하는 제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체제와 권력에 순종하도록 하는 교육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주입하는 질서와 규칙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교무실에 불려 다니다 어느새 가까이하면 안 될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야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관철된 국가주의 교육은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에게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작용했다. 반공교육과 체제 순응 교육, 훈화, 애국 조회 등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했지만,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은 철저히 배제했다. 사회화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게 교육과정이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학생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 혹은 편견을 의심할 수 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전통과 권위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
미국의 미디어 전문가이자 교육평론가인 닐 포스트먼은 『옹호할 수 없는 것에 맞서기』라는 제목의 강연문에서 사회의 편견에 순응하도록 하는 학교의 역할이 오래된 전통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전통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옛말이 있었다. 스승은 제2의 부모로서 공경해야 하며, 그 은혜는 부모와도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오늘날 그 말 속에 학생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강조한 대안적 전통이 바로 편견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이다.
실제로 편견을 맞서는 일은 무척 어렵다. 미디어는 근거 없는 편견을 만들고, 증오를 유발하는 역기능이 있다. 미디어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생각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허황한 의식임에도 우리는 일단 미디어로부터 받아들인 언어 또는 이미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 점은 <미디어워치>를 구독하는 박사모 회원에게 구독을 중지하도록 요구해서 <한겨레>를 읽어보도록 설득해보면 알 것이다. 설득 작업은 실로 불편하고 어렵고 더디다. 포스트먼은 학생들이 미디어의 편향성에 취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깊숙이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자리 잡는지 학교가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질서를 받쳐주는 서양의 근본정신은 장황한 법률규정이 아니라 남의 권리를 존중하여 주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권리가 보호받는 것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예링의 말은 바로 이 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남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기의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고, 자기 생각을 떳떳하게 밝히는 냉철한 비판의식이 결여됐다. 포스트먼은 《불평할 의무》 머리말에서 작가로 제일 살기 좋은 나라 두 곳이 바로 미국과 러시아라고 했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이 두 나라가 실수를 저지를 정도로 역동적인 역량을 가진 제국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지도자만 봐도 포스트먼의 말에 수긍이 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 발표한 '올해 가장 힘 있는 사람들'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위에 올랐다. 아마도 트럼프의 미국이 러시아보다 전 세계에 역동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자신을 반대하는 미국인들을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한다고 해도 트럼프의 리더십에 불평하는 미국인들의 입김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작가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자 한 사람이 도덕성과 권위, 정당성을 모두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작가들이 비정상적인 세상에 향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가장 불평 거리가 많은 사회, 즉 제일 좋은 사회에 이르렀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회'의 의미란 국민의 개별적 불평이 광장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공감대로 형성되어 권위의 비정상을 규탄하는 것이다. 통상 정치 철학상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도덕성을 강조하고, 법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런데 '자칭 보수'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박근혜의 안위만 걱정한다. 국정을 어지럽게 한 이 모든 잘못을 언제까지 최순실 그리고 실체가 불명확한 좌파 선동 세력에게만 돌릴 것인가. 어렸을 적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느라 고생했던 국민이 슬그머니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이념적 선명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권위나 편견에 불평할 의무를 택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사회구성원들 의식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 발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시대와 가치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학생들의 자주적 의식에 시비 걸고, 순종을 강요하는 태도가 은연중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45쪽
어떤 상황에서 그 말들이 쓰이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이 바로 인식론 학자입니다. 교과서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하는 셈이니까요. 교과서가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를 아는 그 학생은 광고하는 사람들, 정치가, 목사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도 알 것입니다. (‘교과서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아는 셈이니까요’로 고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