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평등한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사회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듯이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기회의 균등을 시장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물론 기회의 균등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다면 개개인의 창의력, 능력, 노력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불평등 문제가 심화하여 빈곤층이 늘어나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사회적 통합이 저해된다. 이는 경제성장력을 잠식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지나친 불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깨뜨리고, 다시 소득과 기회의 불균등을 심화시키는 경제의 악순환을 낳는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학자들은 많은 수치를 통해 불평등이 성장을 막는 것은 물론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빈부 격차가 최악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미국식 자본주의를 최고로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방한했던 스티글리츠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방하는 우리나라에 충고한 적이 있다. 90년대 이후 미국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인해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불평등을 높이는 주요 요인은 부자들을 유리하게 만든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를 허용하는 정치구조다. 경제 규모는 커졌어도 소득과 부가 ‘담장 공동체’ 안에 사는 부유층으로 집중돼 중산층은 줄고, 빈곤층은 증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조는 미국의 양상과 흡사해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화가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불평등이 빈곤층의 삶을 위협한다고 한탄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과 《새로운 빈곤》이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실업자, 노숙자 등의 빈곤층이 격리의 대상인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경제성장의 이면을 꼬집는다. 담장 공동체 밖에는 다수의 빈곤층이 몰린 쓰레기장이 있다. 과거에는 빈곤층 증가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는 경멸받는 범죄의 차원으로 바라본다.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차브(Chav)’ 현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무직의 하층계급을 ‘차브’로 규정하여, 복지급여를 부정적으로 타내는 게으른 대상으로 비하한다. 전통과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가벼움과 저속함을 무기로 종종 주류문화에 반격을 가한다. 세련되지 않은, 저급하고 값싼 취향의 패션과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차브 족’으로 변신했다. 전문가들은 차브 족의 등장으로 부정적인 의미의 ‘차브’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주목했지만, 싸구려를 자처하는 그들의 모습은 쓰레기더미에서 향기 나는 꽃을 피우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로 전락한 하층민들이 정상인 대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적 기구가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또 다른 착각이 GDP(국내 총생산)에 대한 맹신이다. 스티글리츠와 아마티아 센은 GDP가 경제지표로서 유용하지 못한다고 줄기차게 비판했던 경제학자들이다. 이 두 사람은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에 활동하여 GDP의 결함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보고서를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GDP는 틀렸다》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전 지구적 세계화의 추세에 힘입어 GDP는 국가의 경제성장 수준을 판별하는 공통된 지표였다. 하지만 GDP가 기업의 현금 흐름만 고려할 뿐, 삶의 질, 환경파괴, 불균형한 소득 분배 등을 측정하지 못한다. GDP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도 이미 GDP의 한계를 인정했다.
강대국은 GDP를 국력 비교의 잣대로 사용했다. 가난한 나라들은 GDP 실적을 올려 ‘개발도상국’의 굴레를 벗어 ‘선진국(또는 강대국)’으로 도약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도 GDP를 신뢰하고,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약속할 때마다 GDP 실적 목표를 언급한다. 결과와 수치에만 집중해서 알맹이 없는 양적 성장을 본격적으로 경계하는 시각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2030년 GDP 규모 세계 7위’ 도약 목표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국민의 행복 지수와 복지 지출 수준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재난 불평등’을 분석한 존 C. 머터는 재해에 큰 피해를 본 빈곤층에 주목했다. ‘담장 공동체’ 사람들은 지배층의 보호 아래 피해를 면하지만, 담장 밖의 낙후된 지역에 있는 빈곤층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리더십 부재로 인해 복구 혜택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사망자 수가 많은 대형 재난 소식을 접하면, ‘후진국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생각해서 부끄러워한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 역시 재난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심지어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못된 사람들도 있다.
홍수나 지진처럼 자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만 통틀어 재난이라고 보지 않는다. 어떤 재난은 인재(人災)로, 누군가의 무관심, 사회적 부조리에서 재앙이 시작된다. 청와대에 4년 동안 숙박한 시녀가 세월호 사고 이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불평등 현상이 경제위기의 본질임을 깨닫지 못한 지도자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청와대 시녀 놀이’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