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이여, 안녕 펭귄클래식 51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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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96] 한밤이여, 안녕

 

 Episode

1941년 4월 18일, 영국의 우즈 강 풍경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였다.  우즈 강 주변에는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A 소년과 그의 4명의 친구들은 우즈 강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 길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놀고 있었다. 자전거 타기에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A 소년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가다가 멈추면서 우즈 강변 쪽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저기 강에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가고 있는데, 저거 뭐지? "  

A 소년과 나머지 일행들도 타던 자전거를 멈추고, 친구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강변 쪽으로 일제히 고개가 향했다. 그 친구 말대로 강변에는 시커먼 물체가 강 위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A는 강 위의 물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의문의 물체를 뚫어지게 쳐다본 A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 야,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거,,, 저거 사람 시체 같은데,,, "  

A의 말에 친구들도 다시 한 번 그 문제의 물체를 주시하였다. 그러자 이들도 이제서야 사람의 시체인 것을 아는 순간, 놀랐는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시체를 본 순간 느낀 충격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채 한 명은 바로 경시청으로 신고하였고 나머지 동료들은 떠내려가고 있는 시체를 건져냈다.  

소년들이 건져낸 시체는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시체의 상태를 봐서는 익사한지 20일이 되었다. 죽은 여자가 입고 있는 코트 주머니 안에 무언가 가득하게 채워넣었는지 불룩하였다. 코트 주머니를 확인해보니 수많은 돌덩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갑자기, 시체 발견 현장에 얼굴이 빨개진 채 흥분으로 가득한 사내가 시체 쪽으로 달려왔다. 사내는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형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억누르면서 사내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레너드 울프 씨, 혹시 이 여자가 당신이 찾았던 실종되었던 아낸가요? "  

  " 네, 맞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실종 신고했던 제 아내, 맞습니다. "   

4월의 따뜻한 햇살이 내리찌고 있는 잔디밭에 시체가 되어 잠 자듯이 누워 있는 사내의 아내, 그녀는 바로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였다. 죽기 20일 전, 3월 28일. 울프는 자신의 서재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버린 차가운 주검이 된 채, , ,   경시청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생전 그녀가 평소에 앓고 있었던 우울증세로 인한 자살로 판명내렸다.   

 

 

  버지니아 울프 vs 진 리스  

만약에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진 리스<한밤이여, 안녕>을 읽고 난 뒤,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의 성(性)과 문학성이 동일한 이 여성 작가를 반겼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바닥에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진 리스가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여성 독자들과 여성 비평가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 독자들이 보기에는 진 리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너무 나약하고 암울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나로서도 무기력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의 행동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면서도 쉽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진 리스는 울프보다 먼저 8년 전에 태어나, 영국 내에서 여성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작가 '진 리스' 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한밤이여, 안녕>은 1939년에 출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2년 전이다. 울프는 분명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여성 작가와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정신질환 증세가 그녀를 괴롭혔으며 그 정신적 고통의 순간에서도 울프는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 <막간>을 집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시기였다.

버지니아 울프와 진 리스, 이름만 들어도 두 사람 다 영국의 여성 소설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 추구했던 문학 역시 비슷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남성 작가들이 지배하는 문학사들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하면서 여성 작가들을 재평가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력에 눌러 있었던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각인시켜준,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이라는 비평문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울프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진 리스도 '여성' 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한밤이여, 안녕>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작품 속 여주인공인 샤샤라는 인물을 통해서 남성 사회에 억압받고 있는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작품 속 샤샤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져 있으며 온통 불안과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질환자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심한 정신질환과 우울증세를 보여왔었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에게 논란만 남긴 문제의 결말 

<한밤이여, 안녕>의 결말은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소설 속 샤샤는 전체적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괴물' 같은 남자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방이다.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방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는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샤샤의 방은 남성을 믿지 않는 그녀의 폐쇄적이고 어둡기만한 성격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굳건하기만 했던 샤샤의 성격은 결말에 다다르게 되면 허무하게 풀어져버린다.외로운 그녀에 먼저 다가간 르네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재회하기를 고대하던 르네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소설 전반부에서 샤샤가 기피했던 흉측스러운 모습의 사내가 들어온다.(!) 그녀의 방에 들어온 사내는 샤샤는 한 침대에 누우면서 소설은 막을 내리게 된다.  

샤샤가 남자들에 대한 강박적인 혐오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결말에서는 자신이 싫어했던 사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만다. 이런 결말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의 의견이 엇갈려져 있다. 남성들로 가득한 사회에 희생당한 여성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는 비관론적인 의견과 지금까지 겪었던 남성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을 벗어나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아를 다시 얻게 된다는 재탄생이라는 긍정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울프의 방 vs 샤샤의 방

앞에서도 버지니아 울프가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다는 문학적 가정에 대해서 살짝 언급했지만, 그녀가 쓴 <자기만의 방>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이라는 존재의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울프는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 샤샤와 작품 속 결말을 비관론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문학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인 저평가에 대해 예로 들면서 남성 사회에서 부당한 입장에 처한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울프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억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또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와 같은 여성 문학가들이 배출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입(Money)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여성의 공간, 즉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인 샤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방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 사회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울프가 말하고 있는 자유로운 자기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샤샤의 방은 오직 세상의 남성들에 대한 억압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이고 답답한 공간일뿐이다.   

   
 
 "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 "  방이 내게 묻는다.  " 그래? 안 그래? "  
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여성용 큰 침대와 그 맞은편으로 남성용 좀 작은 침대. 세면기는 커튼에 가려져 있다. 방은 꽤 큰 편이다. 싸구려 호텔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내 코를 스친다. 호텔 밖에 자갈을 박아 포장한 좁은 도로는 가파르게 경사져 올라 몇 개의 계단과 만나게 되어 있다. 막다른 길이다.  
 
 - p 9 -  
 
   
   
 
작품의 첫 시작 부부인 샤샤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방에 대한 묘사이다. 샤샤의 방이 의인화되어 샤샤에게 물어보는 첫 문장은 샤샤의 성격이 폐쇄적인 강박 증세를 나타내주고 있다. 방이 샤샤에게 방의 상태를 물어보고 있지만, 이것은 샤샤의 독백 중 한 부분이다. 그리고 방의 외부에는 '막다른 길' 이라는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막다른 길' 은 넓은 세상 앞에서 개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샤샤의 순탄치 않은 삶을 예고하고 있다.
 
   
 

 " 나가세요, 나가요. "  살바티니가 말한다. " 나가라니까. "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가봉실로 들어간다. 이 방은 사용하지 않는 방이다.  이 방이 사용되는 경우는 위층의 방들이 손님들로 가득 찼을 때다. 나는 문을 잠가버린다.

 - p 34 -

 
   

자신의 방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뛰어들어 샤샤는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지만 남성에 대한 기피와 혐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괴롭힌다.  결국, 샤샤는 업무 중 실수로 인해 같은 사무실에 일하는 남성 직원으로부터 싸늘한 시선과 말을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한 충동적인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샤샤는 밀폐된 공간으로 숨게 된다. 그곳이 바로 인적이 드문 회사 내의 가봉실이다. 가봉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가버리는 모습은 자신을 향한 남성들의 따가운 눈총과 언어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자세이다.  

  

 

  검은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마는 샤샤  

여성은 '아름다움' 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이며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남성들보다 민감한 편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사고 싶어하고, 입고 싶어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넘어서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여성' 이라는 정체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려는 심리적 본능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들은 이쁜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한다.  

샤샤는 우연히 옷 가게에서 보게 된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검은 드레스' 는  샤샤가 찾고자하는 잃어버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나는 그 까만색 드레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미치게 화가 날 정도로 나느 그 옷을 갈망한다. 그걸 손에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달라질텐데.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페론 부인이 그 옷을 나를 위해 보관해 주도록 청하면 어떨까? ......  을 꼭 구할 거라고. 그 옷을 살 돈을 반드시 구할 거라고.  

- p 39 -

 
   

하지만, 샤샤는 이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만다. 남성들의 시선을 꺼려하고, 자신의 존재에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에게는 당연히 검은 드레스를 살 수가 없다. 샤샤에게는 여성의 정체성이 이미 상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당에 아름다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샤샤가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에게는 드레스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샤샤에게 당장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주어져있었다면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여 입는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했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전과 같은 남성에 대한 기피증이 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샤에게는 자신의 수중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과 연결되었던 사무실 일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던 당시 유럽의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읽기가 쉽지 않았던 진 리스의 소설

긴 글을 마무리하자면, 진 리스 작품의 결말를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남성의 세상에서 희생당한 여성이라고 비관론적인 해석 쪽으로 손을 들고 싶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문헌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해서 울프의 입장을 빌어서 ' 내 생각은 이렇다' 고 말하기에는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다. 그리고 <한밤이여, 안녕>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어 있어서 쉽게 읽혀지는 것도 아니라서 제대로 읽지 못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 따라서 샤샤의 삶과 작품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글의 마무리를 <한밤이여, 안녕>의 생뚱맞은 결말처럼 마무리짓고자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무척 예민한 성격과 정신질환을 달고 살아야했지만 어렸을 때 의붓 오빠로부터의 성추행과 아버지의 죽음 등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그녀의 마음의 병을 악화시켜버렸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지금보다 미치지 못했다. 울프는 평생 다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기성사회 내에서는 그녀의 활동에 대한 시선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제임스 조이스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작품을 쓰는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울프는 같은 문학적 기법을 구사하는 '여성' 작가가 아닌 제임스 조이스를 뛰어넘는 '문학' 작가가 되기를 바랬다. 어쩌면 그녀의 자살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기성사회를 넘어서지 못한, 불행한 페미니즘 작가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진 리스 역시 남성 위주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 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밤이여, 안녕>이 영국 BBC방송에 극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문학적인 활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는 왕립 문학학회 특별회원으로서의 활동과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작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두 여성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은 같았으나, 이들이 걸어야했던 여성으로서의 삶의 길은 너무 엇갈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에서 보고 있을 울프로서는 진 리스의 삶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위의 Episode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출판번역가 박중서 씨의 글을 토대로 제가 나름 소설 형식으로 꾸민 것입니다. 울프의 죽음과 관련된 실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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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2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The Hours로 버지니아 울프를 엿봤던거 같아요.
'디 아워스'를 시작으로 델러웨이 부인,자기만의 방...정도 읽었던 거 같아요.

cyrus 2010-11-22 12:20   좋아요 0 | URL
울프의 소설들 어떤가요? 울프의 소설을 발표 연도순으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좋은 작품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나무꾼님^^

꽃도둑 2010-11-2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읽었어요. 처음 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되었던 게 아마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였을 거에요. 버지니아 울프가 뭐지?.. 그러다 어느 날 <델러웨이 부인>을 도서관에서 보게 되었죠. 그때의 느낌이란...의식의 흐름...참으로 낯설고 꼼꼼하게 그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야 하는데 좀 지루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극복했던 기억이 나네요...근데 진 리스 작가는 처음 접하네요. 사이러스 님 리뷰 덕분에 흥미로운 책 하나 얻고 가네요..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0-11-22 12: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시를 읽고나서부터 울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답니다.
진 리스도 울프와 동시대의 여성 작가인데 이 사람도 그 당시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나름 시련을 겪었던 작가이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쉽게 읽혀지지도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꽃도둑님 같은 여성 독자분들에게는
진 리스의 작품의 내용이 공감되실겁니다.

지금 국내에서 출간된 작품이 펭귄클래식시리즈로 나온
<한밤이여, 안녕>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전 2권)이
소개되었습니다. 참고로 <사르가소 바다>는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혹시 <제인에어>도 읽어보셨다면
<사르가소 바다>를 읽어보시면 좋을겁니다.

굿바이 2010-11-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어쩐일인지 친구와는 다르게 저는 참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3기니>가 있는데 다시 한 번 꺼내볼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0-11-22 13:3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읽어봤는데,, 글 형식이 비평문이다보니 딱딱한 느낌 때문에
힘들었답니다^^;; 특히 제가 읽었던 <자기만의 방>이 굿바이님께서
언급하신 <3기니>와 함께 수록된 민음사 문학전집 판본이었는데,,
<3기니>와 함께 읽었을 때 고생 좀 했었습니다. 분량도 두꺼웠고요^^;;

비로그인 2010-11-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작가의 일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엔 왜 그렇게 당차던 그녀가 돌을 쥐면서까지 물속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있었는데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죠..

치열한 내면, 용납하지 않는 사회, 이상과 현실의 간극, 그리고 아무도 몰랐을 그녀만의 아픔들.

음.. 오늘 cyrus님의 글을 읽으며 비슷한 시대를, 비슷한 걸음을 걸었던 또 다른 작가를 만나고 갑니다. 왠지 말없이 찡끗 ^^ 웃음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ㅋ

cyrus 2010-11-26 16:2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이 언급하신 <어느 작가의 일기>가 버지니아 울프가 생전에
기록했던 일기문인가요? 진 리스의 작품이랑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나서부터 울프에 대해서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일기라면 그녀의
내밀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을거 같습니다.^^
 
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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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9] 감정 교육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  

 
   

 

  플로베르에게 살짝 굴복당한 뻔하다 

   " 이 책에 굴복한다. "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남겼다. 카프카의 문학은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카프카는 플로베로의 세밀한 묘사를 모방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플로베르의 문학은 사실주의에 속하는데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사실감 있게 묘사하려는 필체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정말 작품 속 단어 하나하나에도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그가 얼마나 꼼꼼했는가 하면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이 작가에게 주말에 놀러가자고 권하자 플로베르는 새 작품을 쓰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자신들끼리 유흥을 즐겼고 일요일에 플로베르의 작품 집필 정도 확인 차 집으로 찾아갔다. 플로베르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작품이 완성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두툼한 원고를 읽어본 친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전에 읽어본 내용과 별반 달라진게 없음을 느낀 것이었다. 한 친구는 플로베르에게 며칠 전에 읽어봤던 그 내용과 똑같다고 지적하였으며 주말동안 뭘 했는지 물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은 주말에 작품 집필하는데 바쁘다고 그러더니 내용이 고치지 않은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다. 그런 친구의 반응에 오히려 본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플로베르가 하는 말,   

 "고쳐진게 없다니. 이 친구야. 어제 이 문장 부분의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가 다시 쉼표로 바꾸었다네. "       

문장의 부호 하나 넣는데에도 사실적 표현을 위한 그의 몰입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주말동안 문장 부호 하나를 넣는데 집에 틀어박혀 고심을 한 작품이 아마도 <감정 교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플로베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명작 <마담 보바리>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나는 두 권짜리 <감정 교육>을 읽는 내내 그의 세밀한 묘사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작품 한 편이라도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플로베르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음을.) 1권을 읽는 도중에 여러 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카프카가 왜 플로베르의 작품에 굴복했는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리오 영감> 발자크의 파리  vs <감정 교육> 플로베르의 파리 

<감정 교육>은 파리 상류사회에 진출하려는 어느 청년이 욕망과 허영의 도시인 파리에서 겪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장관이 되기를 꿈꾸는 청년 프레데릭 모로는 자신보다 연상이며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아르누 부인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파리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소속원이 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성에 집착하고 권태에 빠진 상류층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된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자신이 겪은 일들은 부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르누 부인에 대한 사랑도 점차 식어만 갔다. 결국,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은 과거의 사랑에 대한 확인만 한 채 헤어지고 600여 페이지 소설도 마무리짓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길고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통해서 1840년대 파리의 어두운 사회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표 시기는 다르지만 프랑스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굵직한 대혁명 뒤의 프랑스 사회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19세기 초반의 파리를 묘사하고 있다면 플로베르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를 포함한 19세기 중반까지의 파리를 그려내고 있다. 시기와 배경은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 파리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사회진출을 꾀하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다.  

발자크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플로베르는 그의 사실주의적 문학을 영향 받지는 않았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는 무미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의 대단한 집중력과 관찰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필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 프레데릭의 삶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토대로 구상한 것이다. 그러니 플로베르의 파리는 정말 사실적이면서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반면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본인이 말할 정도로 자신이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사회는 순전히 그가 창조한 파리이다. 즉, '발자크의 파리' 인 것이다. 발자크가 묘사한 파리는 무미건조한 파리와는 다르게 생동감 있어 보이며 <고리오 영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플로베르의 작품보다는 쉽게 읽혀진다. (발자크의 작품을 읽어본 다른 이들에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었을 때 술술 읽혀져나갔다) 

서로 다른 사실주의 문학을 구축해서인지, 두 작품의 결말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고리오 영감>의 라스띠냑크는 부에 대한 욕망을 가득한 '진흙투성이' 파리 사회를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낙심과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 

결말에서는 파리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찬 포부를 드러나고 있다. 발자크는 라스띠냑크의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어둡고 칙칙한 파리의 기성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라스띠냑끄의 도전은 발자크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당시 파리의 열악한 현실을 비추어 보면 허무맹랑하다.  그래서 플로베르의 파리와 작품의 결말은 발자크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프레데릭은 부조리한 파리 사회를 목도하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이 제일 좋았다고 중얼거리면서 소설은 결말을 짓는다. 이런 프레데릭의 모습은 혁명 이후의 세대들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뒤집고 바꾸기 위해서 가슴 속에 뜨거운 혁명의 열정을 뿜어내지만 혁명를 지나간 이후에는 이들 역시 혁명 이전의 기성 세대들처럼 순응적이고 나약한 삶을 살게 되면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만약 이 작품을 보들레르가 읽었더라면 

혁명 발발 이후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의 재회 장면은 혁명의 열정이 식어가는 혁명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은 재회를 하면서 서로 간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되지만 아르누 부인에 대한 프레데릭의 사랑은 1권 속 모습과 대조적이다.  아르누 부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면서 속으로는 실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누 부인은 예전과 다른 프레데릭의 변화된 감정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부산 떨면서까지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재차 확인하려고 하고 있다. 프레데릭이 자신 말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거 아닌지 괜한 걱정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프레데릭은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피워보려고 하지만 이전처럼 뜨겁지가 않으며 금방 사그라진다. 식어버린 부인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당혹스러웠는지 담배 한 개피를 물어본다.  

   
 

  프레데릭은 아르누 부인이 몸을 내맡기고자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자 그 어는 때보다도 더 강하며 격렬하고 미칠 듯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 반감이랄까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제지했다. 하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신중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끌어내리지 않으려는 마음에 그는 몸을 돌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 <감정 교육> 2권,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윤진 역, 펭귄클래식, p 338 -

 
   

작품에서는 사소한 장면이지만 당혹스러움에 담배를 피우는 프레데릭과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아르누 부인의 대조적인 모습은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에 쉽게 변해지고 무미건조해지는 인간과 그런 인간의 습성에 두려워하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예전과 달라진 프레데릭의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르누 부인이 떠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에게 전해주는 모습은 딱하기만 하다. 젊음의 상징인 까만 머리카락을 전해줘도 프레데릭의 감정은 이제는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인간의 모습에 대한 알레고리는 <감정 교육>이 발표된 해인 1869년에 나온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쭈글쭈글한 노파는 누구나 좋아하고 환심을 사려 하는 이 귀여운 어린애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노파처럼 그렇게 연약하고, 그녀처럼 이도 머리털도 없는 귀여운 것을. 
 그래서 노파는 아이에게 다가가 웃어주면 좋은 얼굴 표정을 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니는 이 늙어빠진 착한 여인이 어루만져 주는 데 겁이 나 발버둥치며 집 안이 떠들썩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착한 노파는 다시 그녀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  "아! 우리 불행한 노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것들조차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어린것들을 무서워하는구나! "  

 - <파리의 우울> [노파의 절망]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역, 민음사, p 27 -

 
   

<감정 교육> 그리고 <파리의 우울>은 1869년, 같은 해에 암울하기만한 파리를 예리하게 묘사한 글을 발표했지만, 보들레르는 이 유명한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미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이 세상에 나오기 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약에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플로베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파리의 모습을 플로베르라는 동시대의 작가가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높게 평가한 유일한 문학가일 수도 있다. <감정 교육> 발표 당시 문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한 기성 세대가 되어버린 아르누 부인은 보들레르의 글에 나오는 노파처럼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순진무구했던 프레데릭은 저 꼬마처럼 늙어버린 아누르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레데릭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 드러난 프레데릭의 감정들은 다양한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기성 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이 되어서 사회에 대한 환멸과 안주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프레데릭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세대들에게도 드러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프랑스 문단이 플로베르의 날카롭게 파리의 실상을 새긴 <감정 교육>을 외면했던 것은 혁명 이후 보다 나은 세상이 도래되지 않았다는 환멸감과 자신들도 모르게 삶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습성에 물들어 있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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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기전에 적어도 플로베르정도는 읽어줘야 할텐데...
보들레르는 고사하고 김광규만 읽었다나 어쨌다나~~~

근데,플로베르에서 보들레르를 떠올리시다니...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상상력도 대단하십니다여~^^

다이조부 2010-11-14 08:18   좋아요 0 | URL

딴지걸자는 건 아니지만 ^^

저는 세상에 죽기 전에 뭔가 해야 할일, 20대에 꼭 해야 할 일 이런

규정이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것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ㅋ

아무튼 그래서 플로베르 와 보들레르 를 남은 생에서 읽지 않는다고 해서

뭐 그닥 후회는 안할듯~ 한동안 김광규 시집을 틈틈히 읽었던 시기가

있었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언급한 두 명의 외국유명시인의 시를 접하지 못한건 몰라서 모르겠는데

생전에 김광규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인생이 더 시시했을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하하하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저도 시집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말로만 죽기 전에 읽자고 그러지, 그렇다고 너무 연연하게
두지 않습니다. 예전에 문학 작품 읽기를 소홀히 해서
삶도 바빠지는만큼 조금이라도 열심히 읽자는 차원에서 정한 것이랍니다.
뭐 죽기 전에 다 못 읽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책들이고,
안 읽었다고 그렇게 후회하는 점도 없고요^^


비로그인 2010-11-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기 구석에 있는데,, 오늘밤 다시 끌어 안아 봐야겠습니다. 물론 Cyrus님의 글도 생각해보면서 말이지욥 ^^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읽는데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름 생각거리가 많았던 플로베르의
작품인거 같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감정교육>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학생시절의 정의감을 잃고 속세에 물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90년대부터 우리나라 소설에 나오는 후일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프랑스 고유무술 사바트의 고수가 나오는 것이죠.

cyrus 2010-11-14 20:32   좋아요 0 | URL
자이트님은 격투기를 해보신 적이 있어서 그 장면이 기억이 남았군요^^
이 작품 읽으면서 1840년대 파리가 크게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1권에는 부패한 왕정에 대해서 젋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 간혹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1-14 23:36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문학사는 연변에서 나온 것이라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적인 관점이 강한데, 1848년 혁명을 그린 가장 사실적인 작품으로 <감정교육>을 꼽더라구요.

아...그런데 사바트는 발차기 전문이라 저는 못합니다.저는 오른쪽 골반을 다쳐서 오른쪽 무릎을 많이 올리거나 비트는 동작을 못해요.

cyrus 2010-11-14 23:4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격투기는 남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스포츠이지만,
무엇보다도 몸 관리가 중요한거 같습니다.

blanca 2010-11-1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과 정말 비슷한 구도군요.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플로베르는 예전에 보봐리 부인을 참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망설여졌어요. 감정교육은 꼬옥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cyrus님 말씀 들으니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0-11-14 23: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다음 플로베르의 작품으로 <성 앙투안느의 유혹>과
<마담 보바리>를 읽으려고 하는데, 망설여지네요ㅎㅎ
그래도 blanca님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고 예전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두 권짜리 작품들도 완독하실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무턱대고 덤벼든 감이 있었답니다.^^;;

starover 2010-12-1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이러스 님은 짱임.

cyrus 2010-12-11 16:16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으하님^^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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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70] 영원(蠑蚖)과의 전쟁

 

 

   
 

「왜요?」
「거기 악마들이 있어요. 선장님. 바다 악마들이죠.」
「바다 악마가 뭐요? 물고기?」
「물고기는 아니고요.....
혼혈은 잠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악마에요. 심해의 악마. 바티크 사람들은 <타파>라고 부릅니다. 타파.
그 악마들이 모여서 자기네 마을을 이루고 산답니다. 잔 채워드릴까요?」

- 『도롱뇽과의 전쟁』p 24 -

 

 

 

 국내에서는 생소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

체코에서 이름 있는 작가를 꼽으라면 대부분은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를 언급할 것이다. 체코라는 나라는 예전에 '체코슬로바키아' 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그래서 예전의 국명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1993년에 정식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었음에도 2001년까지 체코를 '체코슬로바키아' 라고 불렀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사실은 알게 된 것은 2001년에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가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했던 당시 체코와의 평가전을 치뤘을 때 알게 되었다. 그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5:0으로 대패하여 거스 히딩크는 그 이후로 '오대빵' 감독이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체코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에는 체코라고 하면 앞에서 언급한 두 명의 문학가와 한 때 세계적인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던 축구선수 네드베드 밖에 생각이 안난다.   

이번에 읽은 <도롱뇽과의 전쟁> 덕분에 카렐 차페크라는 체코의 걸출한 문학가를 알게 되었다. 이 작가 역시,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문학가이지만 체코 국민들에게는 카렐 차페크에 대한 애정이 무척 각별할 정도로 '국민작가'급의 대우를 받았으며 지금도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생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세계적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로봇>이라는 희곡이 있다. 그의 동생이며 역시 작가인 요제프 카페크와 공동으로 집필하였는데 그 동생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용어 '로봇(Robot)' 를 처음 만들고 사용한 인물이다. 로봇은 robota라는 '일한다' 라는 뜻의 체코어에서 유래되었는데, 형인 카렐이 동생보다 많이 알려져 있는 작가인지라 지금까지도 '로봇' 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카렐 차페크라고 알고 있다. 지금도 네이버 백과사전에 '로봇' 을 검색하면 카렐 차페크가 만들었다고 정의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카렐 차페크는 백과사전 편찬자들에게 잘못된 내용을 검토할 것을 종용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카렐 차페크가 쓴 작품들이 번역되긴 하였으나,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서 그런지 절판된 책이 많다. 그는 짤막한 동화 작품집으로도 유명한데 절판 상태이다. (<어느 의사의 길고 긴 이야기><작은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가 있는데, <작은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에도 '어느 의사의 길고 긴 이야기' 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나마 절판된 작품들은 최근에 지만지고전천줄에서 철학소설 3부작 시리즈 중 두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으며 사실 <도롱뇽과의 전쟁> 은 2001년에 두산동아에서 출판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SF소설이 아니다 

<도롱뇽과의 전쟁>을 어느 장르라고 쉽게 말하기 힘든 작품이다. 카렐 차페크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는 '로봇' 용어 창조 이외에도 이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SF소설이 아니다. SF소설을 간략하게 정의하자면 과학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미래의 과학 수준을 예상하여 전개되는 장르이다. 물론 <도롱뇽과의 전쟁>을 읽어보면 SF소설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  도롱뇽이 인간처럼 말을 하고,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도 인간처럼 문명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새로운 종족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내용 중간에 도롱뇽에 대한 연구논문과 학술적인 자료를 발췌한 기록들을 삽입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게 되면 과학소설이면서도 SF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SF소설에는 과학의 미래, 과학의 진보에 수반되는 사회생활의 변화에 대한 문제점들을 다루는데 <도롱뇽과의 전쟁>은 인간처럼 행동하는 도롱뇽을 작품에 등장시키켜 단순히 과학이 진보된 미래를 비판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는 과학이 지배된 사회 비판은 미시적인 내용일 뿐이다. 이 작품은 과학, SF소설이라기보다는 진지하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사회비판적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제2의 종족, 도롱뇽 

이 작품 줄거리는 '자본주의' 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반 토흐 라는 선장은 바닷가에서 우연히 진주조개를 잡는 도롱뇽들을 발견하게 된다. 도롱뇽들에게는 자신들이 잡은 진주조개로 아름다운 빛깔로 둘러싸인 진주들을 채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본 반 토흐 선장은 도롱뇽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한 몫 잡아보기 위한 사업 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그 후로 인간처럼 행동하는 도롱뇽들의 정체는 조금씩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롱뇽들은 인간들에게 직접 접근하여 말을 걸기도 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진주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구상된 반 토흐 선장의 사업 계획은 점차적으로 영역이 확대되어 간다. 기업가들은 노동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도롱뇽들을 노동자원으로 투입시킨다. 노동자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수중 건설사업에 도롱뇽들이 사람 대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도롱뇽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서 전쟁터에도 동원하기도 한다.

한 때 깊은 수심속에서 살았던 미지의 동물에서 인간 덕분에 문명의 사다리에 타고 올라간 도롱뇽들은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제2의 종족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인간들에게 불평등과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도롱뇽들은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을 전복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언론 매체를 장악, 통제하였으며 인간에게서 배운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만든 폭탄으로 의도적으로 대홍수를 일으켜서 인간들을 도발하기도 한다. 이 때부터 인간 대 도롱뇽이라는 자신들의 생존권이 달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작품 시작부터 등장하는 아름다운 진주 하나가 인류과 도롱뇽은 서로 피를 보게 되었다. 진주는 아주 값비싼 귀금속 중의 하나이다. 도롱뇽들이 진주를 많이 캐내기 위해서, 그리고 힘든 노동에 도롱뇽들을 투입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도구들을 제공하는 반 토흐 선장이나 기업가들의 모습은 과거 식민지 국가가 많았던 때에 성행했던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연상시키게 한다. 플랜테이션은 사업가들이 자본과 기술을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하게 했던 농업방식이다. 식민지 나라를 다스리던 유럽 열강들이 자주 이용하는 사업 방식이었는데 훗날 유럽 대륙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 열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8세기 중반에 영국에 산업혁명이 불기 시작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공장의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특히 값싼 노동력인 동시에 그 당시에 인권이라고는 가지지 못한 상태였던 빈곤층들을 자신들을 위한 일꾼으로 써먹기에는 딱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빈곤층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으로 기업가들에게 착취당하였다. 이 때부터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와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빈곤층 노동자들은 공장 내의 기계 보급이 두려웠다. 자신들이 기계의 등장으로 고용되지 않을까봐 그들은 게릴라로 공장에 급습하여 기계를 부수는 난동을 펼치기도 했었는데 이를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한다.  

<도롱뇽과의 전쟁>에도 도롱뇽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자 인간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자리가 빼앗길까봐 총파업을 강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롱뇽들을 살해하는 등 극단적인 일도 발생하게 된다. 기계를 파괴하려던 18세기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만능 노동자였던 도롱뇽들을 죽이려고 했던 작품 속 노동자들은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등장하게 된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사상 뒤에 가려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물질적 탐욕이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만들게 된 원인이 되었다. 작품 초기에 배에 타고 있던 진주잡이들이 봤던 시커먼 바다의 악마들은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인류가 만들어낸 골칫덩어리 악마인 것이다.  

 

 

 

  첫 번째가 비극, 두 번째는 코미디, 그러면 세 번째는...?  



칼 마르크스는 "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코미디이다. " 라고 말하였다.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에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희극적인 행적이 담겨져 있다. 인류 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던 자본주의의 역사가 비극이라면, 아마도 역사에 대한 코미디는 이 작품일 것이다. 인류 대 도롱뇽으로 점철되는 자본주의의 비극을 차페크는 코미디로 희화화시키고 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굉장히 슬픈 사람이라고 하였다. 작품 속 마지막에는 에필로그 형식으로 차페크가 작가로 직접 등장하여 작품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차페크는 자신의 작품을 극단적으로 구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미래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흥분과 분노를 억누른 채 종이에 이 글을 꾹꾹 눌러가면서 썼을 것이다. 그는 인류의 비극을 코미디로 승화시킬줄 아는 문학적 광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래에 대한 차페크의 생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다음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역사는 항상 반복되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즉 세 번째 경향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과거와는 별반 다를게 없다. 지금도 자본이라는 수단 하나가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까. 하늘 위에서 이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차페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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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1-1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쿤테라에 이어 보흐밀 흐라발을 추가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덕분에 차페크도 추가합니다.

cyrus 2010-11-10 13:39   좋아요 0 | URL
보흐밀 흐라발이라,, 반딧불이님 덕분에 또 한 명의 체코 작가를
알게 되었네요^^ 제가 읽은 작품 말고도 <호르두발><별똥별>이라는
소설이랑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에세이가 출판되었는데,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대부분 나머지 작품은 절판 상태입니다)
저도 아직 안 읽었지만 카렐 차페크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읽어보려고 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11-1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SF로 분류되어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님의 리뷰를 보니 얼른 읽고 싶어져요.
4대강과 김탁환만 읽고 바로 봐야겠어요.

리뷰 좋아요.
그리고 오늘은 리뷰랑 댓글 박스 사이의 간격이 얼마 안떨어져 있어서 좋아요~^^(속닥)

cyrus 2010-11-10 17:03   좋아요 0 | URL
사회비판적인 소설이면서 그렇게 내용이 우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장하신 책이 두산동아에 출판된 것이라면
열린책들에서 나온 것도 읽어보세요. 이번에 나온 작품이
완역판이라네요. 그리고 나무꾼님이 언급하신 김탁환이
이번에 나온 소설 작품을 말씀하신거지요? 저도 그 책 급땡기던데,,
즐거운 독서 하세요. 나무꾼님^^

노이에자이트 2010-11-1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코 출신 유명인은 그래도 몇 명 알겠는데 슬로바키아 출신은 정말 얼른 생각이 안 나는게 현실이지요.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자유화운동과 반스탈린운동을 이끌던 이들이 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이었고, 그 시절 서기장도 슬로바키아 출신인 두브체크였는데...하지만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갈라진 지금 슬로바키아는 체코에 가려져 인지도가 낮은 나라가 되어버렸지요.

cyrus 2010-11-11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체코슬로바키아라고 알고 있었고, 저처럼 아직도 많은 사람들도
체코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겠군요. 이런 사례와 유사한 것이
유고슬라비아도 몇 년전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고 개명된 것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된 것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조금씩 국외 정세들도
알아야할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1 18:23   좋아요 0 | URL
아...그렇던가요? 제 주변엔 슬로바키아는 몰라도 체코는 거의 다 알더라구요.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나 밀란 쿤데라 덕이지요.여행사에서도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동유럽 중에선 체코를 제일 많이 간다고 하네요.하지만 슬로바키아는 모르던데 그건 아마 체코슬로바키아 시절부터 줄여서 체코라고 했던 버릇때문일 겁니다.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어를 쓰더군요.

슬로바키아 출신들이 자유화 운동의 선두에 섰는데 정작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후로 외국인들은 체코는 알아도 슬로바키아는 모르게 되었으니 묘하게 되어버렸지요.



유고슬라비아는 내전 이후 몇개로 갈라졌는지 어지러울 정도라서...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저번 월드컵 땐 슬로베니아 선수단을 계속해서 아나운서가 슬로바키아라고 한 일도 있습니다.
 
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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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63] 보물섬

 

 

 

  추억의 애니메이션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이 만화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연휴 때만 되면 TV에서 흘러나오던 추억의 만화영화. 

그렇다. 모든 이들에게는 <보물섬>으로 알려진,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데자키 오사무(1943~   )가 그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원작보다도 유명한 만화이다.  

  
데자키 오사무 

나도 이전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만화 <보물섬>이 데즈카 오사무의 명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름만 약간 비슷할 뿐 다른 사람이다. 

 

데자키 오사무는 <보물섬> 이외에도 국내 애니메이션 팬들이라면 아는 <허리케인 죠><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그린 만화가이다.  이름 때문에 간혹 <우주소년 아톰>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1928~1989)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데즈카 오사무 역시 '신 보물섬' 이라는 만화를 제작하였는데 여기서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푸른 바다 위의 카리스마, 실버

 


데자키 오사무 <보물섬>의 짐 호킨스

 
데자키 오사무 <보물섬>의 존 실버  

원작이 나온지 오래되었어도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만화에서는 실버는 악역이면서도  

사나이다운 기질이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초등학생 때 만화 속 실버를 본 순간, 

그의 매력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 , ,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설날인지 추석인지 모르겠지만(분명한 건 학교 가지 않은 공휴일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만화 <보물섬>을 TV로 보게 되었다.  만화 <보물섬>이 TV판과 극장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만화 한 편에 소설 줄거리 전체를 담고 있으니 극장판일 것이다.  

이 만화를 보셨다거나 소설 원작을 읽어보신 분들은 줄거리를 아실 것이다. 우연히 주인공 짐 호킨스는  빌 선장으로부터 얻게 된 보물지도를 얻게 되면서 지주 트렐로니, 스몰렛 선장과 의사 리브지 선생, 그리고 요리사로 가장한  해적 존 실버 등과 함께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모험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야기 결과는 밝히지 않겠다. 솔직히 원작 <보물섬>을 읽기 전에는 본 지 오래 되어서 나도 이야기의 결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결말이 궁금하시면 한 번 원작을 읽어보시길. 그러면 잊혀져있었던 추억들이 오롯이 기억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인 나는 이 만화를 보면서 존 실버라는 인물이 인상적이었다.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악역 캐릭터이지만 주인공인 짐 호킨스에게만 선의를 베푸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만화 속의 존 실버는 바다에서 살고, 바다에서 죽는 사나이였다. 이런 실버의 남성다움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주인공 짐 호킨스도 그의 성격에 매료되어 이야기 중반에 보물을 찾기 위해서 그와 함께 동행하기도 한다.  만화 원작가 데자키 오사무는 실버를 매력 있는 악당으로 그렸는데 온갖 위험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모험과 남자다운 기질이 있는 용감무쌍한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인 어린 남자아이들에게는 존 실버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14년 만에 다시 가 본 <보물섬> 

만화 <보물섬>을 본 지 14년이 지난 지금,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을 읽게 되었다.  사실 만화로는 보았을 뿐, 원작으로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데자키 오사무는 스티븐슨의 원작을 토대로 만화를 제작하였지만, 소설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만화에는 짐 호킨스를 따라다니는 새끼 표범 '뱀부' 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뱀부 사진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저작권 문제 및 포스팅 불가 설정 사진이 많아서 못 구했다. 하지만 이 글 제일 위의 사진을 잘 보면 작은 새끼 표범이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바로 '뱀부' 이다)  만화를 본지 너무 오래 되어서 원작 줄거리와 만화 줄거리를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설명한 이 차이점 외에는 소설과 만화 영화는 큰 차이가 없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보물섬>에는 영국의 판타지 소설가 겸 시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활동한 머빈 피크(1911~1968)의 삽화를 볼 수 있다. 딱히 그의 삽화가 잘 그렸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작가 스티븐슨이 살고 있을 당시 발간된 초판본의 삽화를 보는 것처럼 복고풍이 물씬 느껴져서 작품과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머빈 피크 역시 실버를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과거를 숨기면서까지 음모를 꾸미는 간사한 악역으로 그려내고 있다. 

  


 

머빈 피크가 그린 소설 원작 속 실버,  

실버 팔 위에 있는 새는 실버의 영원한 동반자인 말하는 앵무새 플린트


원작에서도 실버는 짐 호킨스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짐 역시 그의 성격에 동화되기도 한다.  소설에서도 실버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악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런데, , ,  너무 오랜만에 '보물섬' 에 가본 탓일까?  아니면 14년 전의 동심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어쩌면 1883년에 쓰여진 영국 작가의 소설과 원작 소설이 발표된 지 95년 뒤에 만든 일본인의 만화가 주고 있는 느낌과 인상이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 때 나의 우상이었던 실버는 만화에서 봤던 성격이 호탕한 멋진 사나이가 아니었다.  

    

 

  실버는 사이코패스이다 

실버는 과거에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에서 키잡이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플린트 선장이 숨겨 놓은 보물을 찾기 위해서 스몰렛 선장의 배인 히스파니올라 호 의 요리사로서 탐험에 참가한다. 실버는 동료 선원인 핸즈와 딕에게 자신이 꾸미고 있었던 계획들을 알려주고 자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제안한다.  사과를 보관하는 나무통 안에서 자고 있는 짐은 우연히 이들의 음모를 엿듣게 된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 호의 사람들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트렐로니와 스몰렛 선장. 리브지 선생은 그가 이번 모험에서 가장 믿을만한 선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를 신뢰하고 있다.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들의 착각은 실버의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보물이 있는 해골섬에 도착한 후, 실버는 자신들의 동료 선원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실버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에는 실버와 그의 일행들은 히스파니올라 호를 점령하게 되고 스몰렛 선장 일행은 간신히 도망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통나무집으로 피신하여 실버 일행들과의 피말리는 전투를 하게 된다. 

주위에서는 신뢰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평범했던 사람이 내부에 숨기고 있었던 악한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과 주변 사람들이 그의 어두운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은 실버가 사이코패스(Psychopath)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원작을 읽어보면 실버의 사이코패스적 특징을 드러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스몰렛 선장이 말했다. " 여기 지도가 있는데, 여기가 그곳인지 좀 봐주게. "   

  지도를 받아 드는 키다리 존의 눈이 이글거렸지만, 종이가 새것인 걸 알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은 우리가 빌리 본즈의 궤짝에서 찾아낸 지도가 아니라 지명, 높이, 수심 등을 빠짐없이 그대고 베낀 복사본이었다. 다만 빨간 X표시들과 글귀는 없었다. 실버는 무척이나 약이 올랐을 게 분명했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을 정도로 자제력이 강했다.   

 (중략) 

 나는 존이 저 섬을 안다는 사실을 태연스레 털어놓는 데 놀랐으며, 존이 내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은근히 두려웠다. 물론 존은 내가 사과 통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럼에도 나는 존의 잔인함, 이중성, 힘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가 내 팔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 <보물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최용준 역, 열린책들, p 122~123 -  

 
   

실버는 보물이 묻어 있는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도를 보지만 아무도 표시되지 않은 복사본인 것을 알게 되자 무척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평상심을 유지한다. 그런 모습을 본 존에게는 실버라는 사람이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악당 실버는 주위 사람들이 신뢰하게 만들 정도로 선량한 선원인 척 행동을 한다. 

   
 

 키다리 존은 무리들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느라 분주했는데, 그 모습만 보면 세상에 저렇게 반듯한 사람이 또 없을 듯싶었다.  존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욕적이고 정중했고, 누구에게나 싱글벙글거렸다.  명령을 받으면 그 누구보다 힘찬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당장 목발을 짚고 일어났고,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면 선원들의 불평을 감추려는 듯 연신 노래를 불렀다.  

 - <보물섬> p 136 -

 
   

 

사이코패스 인간에 대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에 무감각하므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꾸민 반란이 수포로 돌아가 궁지에 몰리게 된 실버는 오히려 반란이 단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필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영국으로 귀국하여 반란 죄로 처형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두렵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결말에 다다를수록 이전에 스몰렛 선장 앞에서 보여준 착하고 부지런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내뱉으면 숨기고 있었던 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실버에게는 일차적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죽인다. 한편, 짐 호킨스에게는 칭찬과 존경 어린 말을 하면서 사나이다운 좋은 성격을 보여주지만, 보물을 손쉽게 찾기 위해서 짐 호킨스를 꾀기 위한 사탕발림뿐이다. 주인공 짐 호킨스는 위험한 일에도 용감한 행동을 펼치는 인물이지만 너무 착한 게 흠이다. 실버의 이중성을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그는 실버의 달콤한 말에 솔깃해 실버의 일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Blue Psycopath, John Silver

사이코패스는 범죄자로만 국한되는 정신의학적 용어가 아니다. 직장 같은 사회 공동체 집단에서도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인 사이코패스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어느 산업심리학 연구 내용에 의하면 영국의 최고경영자들의 인격적 특성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 사이코패스의 특성과 일치하였으며, 임원으로 승진하는 대상자들 가운데 3.5%가 사이코패스임을 증명하였다. 남다른 지능과 포장술 등으로 주위 사람들을 조종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사람을 '화이트컬러 사이코패스' 라고 한다.   

<보물섬>에 등장하는 실버는 과거에 플린트 선장 밑에서 일할 때도 '위험 인물' 로 낙인 찍혔으며
히스파니올라 호의 모험에 참가하면서도 자신의 반란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는 이제 바다 위의 사나이가 아닌 사이코패스, 즉 Blue Psycopath였다.   

어렸을 때 만화를 보던 이들에게는  '바다 위의 멋진 사나이' 로써 실버 같은 남자를 동경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 집단에 해를 끼치는 남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실버의 이런 행동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있을 수도.) 착한 짐 호킨스가 단순히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서 실버의 가면에 매료된 것만은 아니다.  호킨스의 착각은 지금, 어디선가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범행을 드러날 수 있는 사이코패스를 옆에 두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조심하도록 하자,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는 악마가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ndolphin?Redirect=Log&logNo=20060149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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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0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 위 사진 밑에 이름만 비슷할 뿐 다른사람이라던가,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라던가...
그래야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요?

종종 책으로 읽을땐 멋진데 영상으로 보면 별로이거나,
영상으론 멋진데 책으론 힘들거나...그런 경우가 종종있어요.

전 장르소설은 참 좋아하는데,장르소설이 시각화되면 (꿈에 나타날까 두려워)못 보는 위인이예요~

cyrus 2010-11-05 14:09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말씀대로 다시 그 문장을 봤는데,, 이상하네요^^;;
글 표현법을 더 배워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화로 먼저 접하고나서
책을 읽으려고 하니,, 별로이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1-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데즈카 오사무와는 다른 사람이로군요.<보물섬> 같은 소설은 정말 어른이 되어 완역판을 읽어야겠어요.

cyrus 2010-11-06 21: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완역판을 읽기 전까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 봤던 아동문학전집의 <보물섬>과 이번에
나온 완역판에서 약간은 내용에 차이가 있더라고요.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
에밀리오 살가리 지음, 유향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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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001-212]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

 

 

  산도칸과의 첫 만남

산도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피터 박스홀 외, 마로니에북스)이라는 책이었다. 100명의 외국의 문학가, 교수, 언론인들이 죽기 전까지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북 버킷 리스트’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말로는 ‘북 버킷 스트’이지 1001권이 모두 문학 작품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에서부터 문학의 변방인 제3세계와 북유럽, 동양 문학 작품들 까지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서양과 동양 작가의 작품 비율이 80 대 20이다. (또 동양 작가의 작품에서 한중일로 따지고 들어가면 일본 작품들이 조금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버킷 리스트에 있는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故 박경리의『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뿐이다) 사람들에게 세계의 모든 문학 작품들을 알린다는 취지는 좋으나 잠잘 때 베게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두께에 비하면(900페이지 넘는다) 내용과 구성 면은 그리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소설, 희곡, 수필까지 장르를 아울러 작품들을 소개하있지만 무슨 이유인지 유독 ‘시’는 딱 한 편이 있다. 로트레아몽의『말도로르의 노래』가 유일하다. 보들레르와 롱펠로, 프로스트와 같은 유명 시인들의 작품은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노벨상을 수상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T.S. 엘리엇조차도 버킷 스트 명단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세계 문학이라는 넓은 대륙을 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만족한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이 안 된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대부분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번역되어가는 작품들이 출간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에밀리오 살가리의『산도칸』이다. 3년 전에『1001권』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그 때는『산도칸』이 출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에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 무시무시한 해적 . . . 맞아 . . . ? 

 

그런데 『산도칸』을 읽면서, ‘정말 잔인하고 냉철한 해적이 맞냐?’ 하는 의문이 느꼈다. 작품 속 동명이름의 주인공은 말레이시아에서 맹위를 떨치는 해적으로 등장하는데 별명이 몸프라쳄의 호랑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깐 몸프라쳄의 호랑이가 아니라 그냥 '종이'호랑이 같다.

짝사랑을 하지만 원수 국가인 영국의 여인 마리안나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참 가관이다. 만약에 자신의 연인이 되어준다면 왕국은 물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년 내내 빛나는 황금과 보석으로 샤워시켜주겠다는 등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큰소리를 친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들 중에서 읽기 민망하게 느껴졌던 문장이었다. 필자도 남자이지만 사랑에 빠져 눈에 콩깍씌면 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지 모르겠다.  

 

산도칸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서 앞으로 전개될 산도칸과 마리안나의 러브 스토는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과연 도칸이 그 때의 약속을 마리안나에게 지켜줄지 궁금하기만 하다. 황금과 보석을 그녀에게는 바치는 것은 산도칸에세는 식은 먹는 일이겠지만, 그의 절친이자 동료인 야네스와 헤어지지 않는 한 말레이시아를 지키기 위한 해적 활동은 포기 못할 것이다. 아마도 다음 시리즈에는 산도칸은 또 한번 자신의 본분과 마리안나를 사이에 두고 고민할 것이다. 혹은 몸프라쳄의 호랑이 시절의 향수 때문에 산도칸과 마리안나가 부부싸움을 하는 상황도 상상할 수가 있다.

시리즈의 첫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탈리아의 쥘 베른  


산도칸 시리즈의 첫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잔인한 해적과 자신이 싫어하는 원수 국가에서 태어난 여자의 불꽃같은 사랑을 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국가 간의 대립을 뛰어넘어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대체로 통속소설의 전형적인 줄거리이다. 그래서 산도칸 시리즈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에 충분한 줄거리 위주의 내용으로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후대의 문학가들이 그의 작품을 애독하는 것과 동시에 찬사를 보낸 점은 무시할 수 없는 평가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가인 에밀리오 살가리는 산도칸 시리즈의 배경인 말레이시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말레이시아 관련 자료들을 통해서 최대한 야생의 나라를 표현한 것이었다. 사족 하나 달자면 살가리는 ‘이탈리아의 쥘 베른’ 이라는 별명을 가지있다. 많은 독자들이 알다시피 쥘 베른도 대중적인 모험소설을 남긴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이다. 그의 작품 배경은 19세기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세계 일주, 해저 밑, 지구 속 심지어 우주까지 배경이 참으로 폭넓다. 그런데 놀랍게도 쥘 베른은 우주나 지구 속, 바다 밑에 가본 적도 없으며 그 역시 영국 밖으로 나가서 여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과학, 지리학에 관한 식견, 탐험가들에게 얻은 생생하고 풍부한 자료들, 그리고 자기만의 특유의 상상력으로 100여 편의 모험소설들을 써왔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산도칸을 읽은 이유

 

내용은 산도칸과 마리안나의 사랑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산도칸이 영국의 지배를 받던 말레이시아의 보호를 위해 해적으로 활동하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역시 산도칸 시리즈의 애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반 제국주의적인 관점서 읽었다고 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와 싸우는 자신을 제국주의 유럽 열강과 싸우는 무모하면서도 혈기왕성한 청년 산도칸에 투영함으로써 한평생동안 쿠바의 혁명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산도칸 시리즈가 유행했던 것은 단순히 대중들을 자극하는 모험소설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동방의 취미에 대한 동경을 나타낸 오리엔탈리즘 문화도 한몫 했다. 19세기 말 유럽의 오리엔탈리즘 문화는 미술 분야에서 먼저 두드러진 발전을 했다. 화가들은 이국적인 동양의 여인과 장식품들을 화폭에 담아내어 동양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화가들도 역시 동방에 직접 가보지 않았지만 여행가들에게 들은 동방에 대한 내용과 자신의 상상력만 있으면 대중들을 사로잡는 오리엔탈리즘 그림을 완성해냈다. 에밀리오 살가리도 당시 유럽 전역을 떠돌고 있는 문화의 유행에 심취했을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높은 관심은 작가의 죽음에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살가리는 일본 사무라이식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대중들의 취향을 그는 제대로 포착하여 자신의 작품 구상에 잘 반영하였다.『산도칸』이 시작하는 페이지에도 보게 되면 산도칸이 이끄는 몸프라쳄 해적단의 본거지 내부가 묘사되어 있는데 문장은 오리엔탈리즘 미술의 영향을 받았을만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사방 벽은 두툼한 붉은 비단과 브로케이드(무늬가 있는 직물)로 덮여 있었는데, (중략) 그래도 아직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자개로 상감 처리하고 은제 프리즈(띠 모양의 조각)로 장식한, 흑단으로 만든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위에 진짜 크리스털로 만든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방의 세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선반들은 지난날 선상 습격에서 약탈한 전리품들로 빽빽하였다.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들이 제각기 내용물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진주 목걸이, 금 목걸이, 귀고리, 반지, 로켓, 메달 등 신성한 성물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거기에다 귀중한 보석들 또한 빠지지 않았으니 진주,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 등등 이 천장에 매달린 금박을 입힌 등불 아래에서 별처럼 반짝거렸다. 

                - 에밀리오 살가리『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p 10~11

    

 

이국적인 고가(高價)의 장식품들에 대한 열거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무려 23줄이나 이루어져 있다. 첫 페이지부터 오리엔탈리즘적 문장의 도입은 이제 막 산도칸 시리즈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을 읽는 대중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20세기로 오게 되면서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은 동방 국가에까지 지배권을 확대시키려는 제국주의로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전에 꿔왔던 동방에 대한 동경을 문화재 약탈이라는 야욕으로 변질되었다. 지금의 유럽 국가들은 과거에 식민지에서 약탈했던 문화재들을 단지 전리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반환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대국이라는 명함을 내세우면서 세계무대에서 떵떵거리는 미국과 유럽 국가의 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과거의 제국주의의 허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적의 총알이 언제 자신의 심장에 박힐지도 모를 위험한 전장 속에서 체 게바라가 유독 산도칸 시리즈를 열심히 읽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몸프라쳄의 호랑이는 죽었다 

  

산도칸과 마리안나는 몸프라쳄 해적단과 영국 군과의 치열한 전투 도중에 몰래 빠져나와 사랑의 도피(?)하는 장면으로 결말을 짓게 된다. 산도칸의 마지막 독백 중에서 ‘이제 몸프라쳄의 호랑이는 죽었다’ 라는 말로 스스로 사망선고를 내린다. 결국 기나긴 고민 끝에 조국을 위한 해적 활동을 잠시 접어두고 마리안나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선택하고 말았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분명히 몸프라쳄의 호랑이는 다시 살아남아 해적질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 현실에는 몸프라쳄의 호랑이는 진짜로 사망하였다. 실제로 말레이시아는 1786년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무려 171년이 지난 1957년에 독립한다. 말레이시아대한 상세 역사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을 한 산도칸과 같은 인물들이 치열한 삶을 살다 갔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을 찾기 위해서 싸웠던 시간은 100년을 훌쩍 넘게 되었다. 에밀리오 살가리마무리 지었 몸프라쳄 호랑이의 잠정적 사망선고가 결국은 오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 말레이시아에게는 백년 동안의 죽음은 그들에게는 가혹한 사망선고였던 것이다. 유럽의 독자들이 산도칸과 마리안나의 재회를 원했던 것과 재회를 통한 해피엔딩에 열광한 것이 어쩌면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당연하게 여겼던 제국주의자들의 염원과 열광이 아니었을까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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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30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겹낫표까지 꼼꼼히 챙겨 주시는 리뷰.
그 책의 리스트에 시가 그렇게 없다니.. 좀 안타깝네요.

^^. 이렇게 열정적으로 책만 보실 것이 아니라 책 너머의 누군가에도 좀 열정적으로 시선을 돌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추워지는데.. ㅎ

2010-10-30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3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도 베고자기에 딱인 두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북 버킷 리스트'가 왕 부러운 걸요~^^

전 몇권이나 꼽을 수 있을까요?

cyrus 2010-11-0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다기보다는(양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읽기에는 버거워요^^;;)
.. 훑어봤답니다. 정말 책베게하기에는 좋더라고요ㅎㅎ

나무꾼님 같은 경우에는 학생 시절부터 외국고전 작품들을 읽으셨을거 같은데요.
저는 열 손가락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꽤 읽으셨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너무 문학작품들을 안 읽어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회생활 하면 언제
이런 작품들을 읽어보겠습니까? ^^;;

2010-11-02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1-02 12:59   좋아요 0 | URL
ㅎㅎ 이건 나무꾼님 댓글에 답글로 설정해야했었는데,,
제가 실수로 안 하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비밀글 설정 해제할께요, 뭐 그닥 비밀스러운(?) 것도
아닌데,, 혹시나 해서 비밀글로 설정했던거랍니다.

2010-11-05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1-05 19: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이트님. 다시 읽어보고 수정했습니다.
살가리가 산도칸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썼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국내에 번역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국내에 산도칸이라는 시리즈가 생소하지만,
국외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할 정도로 유명합니다.
체 게바라 이외에도 움베르토 에코와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산도칸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1-0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선 에코의 소설에 언급되어서 유명해졌다고 하죠.작가들의 인생역정에 관심이 많은데 살가리는 그렇게 책이 인기가 있었는데도 가난 속에서 자살했다고 하니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cyrus 2010-11-06 16:14   좋아요 0 | URL
산도칸 시리즈가 많은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에 대한 인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하네요,
거기에다가 빚도 불어나고요. 그런 환경이 작가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살가리처럼 유명 문학가나 예술가들 중에서는
생전에는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실생활에서는 가난에
허덕이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06 17:20   좋아요 0 | URL
어쩐지 슬프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