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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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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로 활용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철학자 니체다. 니체를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한다. 기존의 철학을 부수고 그 위에 새로운 철학의 집을 지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니체를 망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는 근대를 마감하면서 플라톤 이후 2500년간 서구인들이 신봉해왔던 전통적 가치관을 가차 없이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낡은 가치관을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서 망치를 활용한 철학자다. 미래를 창조하려면 과거를 파괴하고 그 위에 살고 싶은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우상 파괴자, 사유의 망치를 들고 사정없이 부숴버린 니체가 망치를 들고 부수는 행위는 새로운 창조를 전제로 하는 창조적 파괴다.

 

철학자 니체는 망치를 직접 들어 새로운 세상의 등장을 몸소 증명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진짜 손에 망치를 든 건축가는 새로운 건물의 건립을 위해 ‘철학’이 필요하다면 이것 또한 창조적 파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축’은 글자 그대로 건물을 세운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대해 논할 때 은유적으로 건축과 건축가를 들었다. 건축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증명한 셈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옛 건축가에게 철학은 벽돌을 쌓아올리기 위한 토대와도 같았다. 이는 건축물에 대한 일종의 ‘존재의 증명’이기도 했다. 역으로 이야기 해보면, 건축가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면 그의 건축은 그저 벽돌로 쌓은 건물에 불과하다. 물론, 그 건축가의 철학 역시 허공에 지은 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철학을 논하기 위해 건축가에게 기본을 물어보자. 좋은 집이란 과연 무엇이냐고. 전망이 좋은 곳에 지은 아름답고 멋진 집인가, 아니면 화려고 웅장한 집인가. 그렇다면 그의 건축은 단순한 거주의 공간이자 건축주의 욕망을 위한 표현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건축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이끌어가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질서로서 판단하고 그 가운데 어떠한 의미들이 건축적 논의 밖으로 확장되도록 한다. 사실상 우리 사회가 바라는 관계의 위상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건축의 본질과 내용을 결정한다. 건축은 근본적인 존재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문화의 문제를 담고 있으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제시하고자 하는 시대의 의지를 표현한다.

 

고대 로마의 건축이론가 비트루비우스는 인체와 건축의 관계를 분석하고 건축미를 기하학적으로 정의했다. 비트루비우스를 계승한 르네상스 시대의 알베르티는 건축미를 이루는 방, 벽, 기둥, 창의 비례체계를 집대성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인간의 오감으로 느끼기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원리였다. 건축을 위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가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 때 활동했던 안드레아 팔라디오다. 그는 건축물은 완벽한 비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건축 철학을 하나의 이론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현상학적 사고와 시야는 철학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다. 건축에 대한 신체적이고 무의식적인 연결은 현상학으로 인하여 일부 이론가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는데 그러한 토대는 후설에 의하여 개진되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작업에 의하여 건축의 현상학적 고려는 형태중심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미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현상학적 결과들을 노르웨이의 건축 이론가 노르베르트 슐츠는 존재 철학적인 토대에서 장소론으로 발전시켜 건축술에 적용하고자 했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중심의 현존을 주장하기 위해 이분법적 대립항을 만들어 완전한 것을 첫째로 하여 특권을 부여하고, 오염된 것은 둘째로 보아 억압했다. 하지만 데리다가 주장한 해체이론의 출발은 전통적으로 확립된 모든 이분법적 대립이 붕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기 미국현대건축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혼란기를 거칠 때 새롭게 등장한 것이 해체주의 건축이다. 피터 아이젠만 같은 건축가들은 진부한 기존의 모더니즘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했다. 해체주의 건축의 외형적 특성은 비대칭적, 불확실성의 추구이다. 또한 기능주의적 전제는 무시되기도 한다.

 

건축을 철학 한다는 것은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이 스스로 건축이라는 관계의 위상과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위대한 창조자, 매우 숙련된 기술자 그리고 뛰어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건축가들은 모두가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의 핵심 이론을 먼저 설명하고 철학이 버무려진 건축 이론을 설명하고 있어서 건축학도가 아니라도 건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볼 수 있다. 물론 정독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책 내용이 그다지 어렵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시대정신과 철학에 따라 진화하는 건축물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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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4-2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축물을 면과 면의 결합 및 경제적, 공간적인 부분으로 볼 것인가, 이데아의 구현으로 볼 것인가가 이 책에서 말하는 건축에 대한 해석의 가장 주된 흐름이겠지요?

cyrus 2013-04-30 17:18   좋아요 0 | URL
이번 달에 중간고사 기간이 겹쳐서 늦게나마 책 읽고 급하게 서평을 썼어요... 한 두 번 정도 곱씹어 읽어보고 써야했는데 번갯불 콩 구워 먹듯이 읽고 쓰다보니 제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
 
[국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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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는 시인 에머슨의 말처럼 플라톤은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인류 역사에 던져놓았다. 플라톤은 30인 과두정치와 이후 다시 부활한 아테네 민주정치를 경험하고, 아테네 시민법정에 세워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정치의 꿈을 접고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 중앙에서 하늘을 가리키며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진리는 이 세상이 아닌 저 하늘에 이데아(idea)로 존재한다. 이 불변하는 이데아를 감각적 사물에 정신이 팔린 인간은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굴에 묶여 벽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벽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참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상적 인간이란 이성에 의해 감각적 욕망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상적 인간이 바로 철학자이며 우매한 대중이 아닌 현명한 전문가가 통치하는 국가가 이상국가이다.<국가(Politeia)>는 플라톤의 정의관과 이상국가에 대한 구상이 담겨 있는 책이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흔히 「국가」로 알려졌지만 당시 도시국가인 폴리스(polis)와는 다른 의미이며 정확한 번역은 ‘정체(政體)’이다.

 

이 책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철학 세계를 글로 남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 대신 플라톤이 스승의 방대한 철학 사상을 옮기는 작업을 했다. <국가> 제1권은 아테네 근처 피레우스항에서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 풀레마르코스, 트라시마쿠스, 아데이만토스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정의'란 무엇인지 의견을 내고 반박, 재반박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대화 형식이다 보니 성인이 읽어도 재미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이 책의 1권에서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트라시마쿠스는 ‘정의이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질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정의는 정직한 것이며, 남에게 받는 것을 갚는 것이다’고 얘기하자, 소크라테스가 ‘무기의 비유’를 들어 더 나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데도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다시 누군가 정의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며 강한 자로 분류되는 통치자나 전문가, 기술자는 약한 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고 지혜롭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무지하고 못된 것으로 판명되며,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무언가 도모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있어 올바른 것이란 언제나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진정한 올바름은 타인의 평가나 가변적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쿠스는 올바른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올바르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이기심’이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낳는다. 트라시마쿠스의 생각에 따른다면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은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무시하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 더 큰 이익이 되는 사회를 용인한다면 처음에는 각자의 이익이 보장되겠지만 점차적으로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집중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처럼 올바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잘못된 사회구조의 개선이 가능하고 사람들의 자의적 판단에 휩쓸려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플라톤은 참주정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면서 대중의 부정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참주(僭主)란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독재적 지위에 오른 지배자를 일컫는다. 흔히 참주정체보다 민주정체가 훨씬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민주정체에서 참주정치가 나올 수 있다. 이는 대중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중은 정치 전문가가 아니므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능력이 없다. 또한 대중은 자신의 이익이나 군중심리에 의해 선동이나 정치적 술수에 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성향이 있다. 인기에 영합하는 선동가를 앞세우는 대중의 어리석음은 참주를 만들어낸다. 민주정치는 중우정치로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대중이 어리석다는 주장은 개인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지적 창의력이나 통찰력이 사라지고 평준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반대로 대중의 판단이 현명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수의 개체가 모여 얻는 지적 능력이 개체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차이에 따라 민주정체를 수용하는 입장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어떤 국가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인가?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상은 정의와 그로부터 오게 될 평화였다. 예컨대 빈부 격차가 너무 커지면, 끊임없이 싸우는 빈자와 부자로 국가가 두 조각 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권력은 능력이 탁월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만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철인통치’다. 플라톤은 완전한 지혜를 갖춘 철학자가 통치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덕(德)을 잘 발휘하여 조화를 이룬 국가를 이상국가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지혜로운 철학자가 통치하고 용기의 덕을 지닌 군인이 수호하고, 서민계급은 욕심을 절제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란 지혜, 용기, 절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각자에게 알맞은 직분을 행하는 것이다. 이상국가는 어떤 한 계급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며, 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잘 수행할 때 국가가 번영하고 행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국가론은 제자이면서 자유를 더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당연히 비판을 받는다. 오늘날도 긴장관계에 서 있는 두 이상인 정의와 자유 사이의 갈등이다. 플라톤은 정의의 편에 서서 정치 전문가를 도입해 정의와 평등과 평화를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려는 시도로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타당하다. 정치란 단순히 파워 게임이 아니라 ‘국가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통찰력이 구현되는 수단이어야만 한다. 어떠한 국가도 더 강력해지고 더 잘 살기만을 추구한다면 시민들이 신명나게 사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정의는 지배자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는 사실상 전체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다고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비판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보통 철학책으로 분류되지만, 철학 이외에도 교육, 정치, 사회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 플라톤은 이 속에서 아테네 현실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이상적 사회를 꿈꾸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 그는 사교육이 국가를 망친다고 반대하고, 제대로 된 공교육을 역설했다. 사교육의 교사들인 소피스트들은 돈을 낼 사람들의 의도에 부응할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좋은 시민도 좋은 정치가도 배출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선거도 물론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리스 교육의 목표는 덕(arete)이었다. 덕은 단지 도덕적으로 훌륭할 뿐 아니라, 탁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생각하는 교육이란 직업교육이나 출세의 발판이 아니라 유능하고도 훌륭한 시민을 키워내는 것이다. 교육의 출발점은 ‘무지의 동굴’로부터 진리의 세계로 영혼을 돌이키는 일이다. 청소년이 교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눈앞의 현상을 넘어서 사물의 진실인 이데아에 도달하는 과정이 교육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읽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 주제가 다르게 나타난다. 정치에 관한 책이면서 철학에 관한 책이며, 교육에 관한 책이자 종교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분량도 많고 주인공 소크라테스와 상대방 사이에 대화가 종횡무진 이어지므로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쉽지 않다면 가치라도 있어야 할 텐데, 플라톤에 관해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 때문에 그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철인 왕이나 이데아 등 중등교육 과정에서 플라톤은 아주 단편적인 몇 단어로 요약돼 학생들에게 전해진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읽으면, 간단한 이야기를 괜히 수백 쪽의 장광설로 늘어놓는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래서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똑같은 요약이 세대를 통해 전승된다. 필자도 처음엔 무슨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읽으면서도 선입견의 틀에 부합하는 말을 따라가는 식이었다. 새로운 읽기는 철인 왕과 이데아 이론을 문제 삼는 자세를 취한 다음에야 가능했다. 책임을 묻고자 증거를 찾아보니 오히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반론의 실마리들이 이미 책 안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화체의 특성상 상대의 반론을 무시하는 일방적 주장은 전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로서도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나면 반문하고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플라톤은 올바른 삶, 정의 등의 본질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했다.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삶을 치유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좋은 독서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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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는 리뷰도 어렵네요.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가봐요. 이렇게 좋은, 그러니까 플라톤, 아니 천병희선생님 번역작을 신간평가단 책으로 받게 되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뭐가?)

저도 플라톤을 낱개로(으응?) 구입해서 하나씩 시작해봐야겠어요. 맨날 결심만 하는 미친 욕심을 어떻게해야될지 모르겠어요. 이 시간에 책이나 읽었으면 부자됐겠죠. 흐응.

cyrus 2013-04-30 17:20   좋아요 0 | URL
아이님도 다음 기수에 인문 분야 신간평가단 활동해보시기를 권합니다. ㅎㅎㅎ 이 책 받자마자 조금씩 꾸준히 읽었다면 좋았을텐데 여유 부리다가 하필 중간고사 기간 때문에 급하게 읽고 서평 썼어요. 사실은 1~3권까지만 두 번 정도 밖에 안 읽었어요.. ^^;; 그래도 박종철 교수 번역본보다는 글이 쉽게 읽혀져서 좋았어요 ^^
 
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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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유시민, 환영합니다!

 

2년 전에 KBS 1라디오 프로그램인 ‘열린토론’은 방송 2000회를 맞아 전국 성인남녀 1천여 명을 대상으로 토론을 가장 잘할 것 같은 정치인이 누군지 전화설문을 한 적이 있었다. 1위는 바로 유시민 전 의원이었다. 응답자의 12.3%가 유 전 의원을 꼽았다. 유 전 의원은 ‘직업으로서의 정치’ 생활을 청산하고 예전의 ‘지식소매상’으로서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개혁정책의 상징, 보건복지부 장관, 통진당 공동대표. 통진당 구당권파와 신당권파 간 힘겨루기에 치이고 만신창이가 된 그가 공동대표직을 내려놓고 탈당을 선언했을 때 대부분 사람은 정치생활의 근간으로서 추진해왔던 야권 진보연대의 꿈이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분으로 꺾였던 연대의 날개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펼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통진당에서 나온 신당권파와 함께 ‘진보정의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시작했을 때 이미 ‘진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너무나도 냉담했다. 그러나 자신의 트위터에 단 7줄의 글만 가지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선언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계 은퇴 선언한 지 1년 뒤, 유 전 의원은 정말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인생길을 반추했다.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 시절부터 지식소매상으로서의 활동을 거쳐 ‘직업으로서의 정치’ 생활까지 예사롭지 않았던 삶의 이력을 책 한 권에 담담하게 풀어냈다. 그런데 글의 내용은 과거형인데 반해 책의 제목은 미래형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책은 단순히 사진 앨범을 들춰보는 것처럼 과거의 서사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의 시간을 성찰하면서 이제 막 본격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삶의 후반기를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만의 인생철학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유 전 의원이 전쟁터와 같은 정치판에서 나와 글쟁이로 돌아와준 것에 대해서 격하게 환영해주고 싶다. 정계 입문 전에 탄탄하고 논리적인 문장의 글쓰기로 이름을 날렸던 ‘지식소매상’ 글쟁이답게 필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글쓰기의 방식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전작 때 선보였던 글쓰기와는 다르게 유 전 의원은 산전수전 겪었던 인생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식을 인용, 가공해서 유창하게 풀어냈던 이전의 글쓰기가 이 책의 전체 중에서 반을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나머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사실 그는 책 머리말에서 오랫동안 고집했던 글쓰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느라 적잖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번에 쓴 책이 지금까지 썼던 책 중에서 힘들었으며 글쓰기만큼은 정치적 자기 검열을 철저히 했다고 한다. 시작부터 독자와 좀 더 가까이 소통하려는 그의 ‘내려놓음’이 돋보인다.

 

 

 

 "저는 원래 사나운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조국 서울대 교수는 ‘직업 정치인’ 유시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치고 나가는 감각이 좋습니다. 그 점에서 ‘엉덩이’가 무거운 민주당의 386 정치인보다 낫죠. 그리고 그는 권력의 속성, 정치라는 ‘게임’의 법칙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마키아벨리’적인 재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시민에게는 품성에 대한 ‘낙인’이 있습니다. 이 ‘낙인’은 그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을 예를 갖추지 않고 야멸치게 비판하면서 생긴 것이죠.

 

(조국, 『진보집권플랜』오마이북, 2010, 277쪽)

 

그렇다면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직업 정치인’ 유시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냉철한 모습에 대해서 억울하다고 말한다. 감히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변(辯)은 재미있다. 본인의 가십을 위트 넘치게 '개그'로 승화시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내려놓음'을 보여준다.  

 

「개그콘서트」의 ‘희극 여배우’를 흉내내서 말해 본다. “저는 원래 사나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조용하고 수줍은 편입니다.” 미디어에서만 나를 본 사람들은 아마 비웃을 것이다. 당신이 사납지 않다고? 그렇다. 나는 사납지 않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민다. 그 분노를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패할 때가 많다. 분노를 억누르는 데 겨우 성공하는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냉소적으로 변한다. 내 안에 내가 아닌 누군가 있는 것만 같다. 이게 뭐지?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 2013, 108~109쪽)

 

토론 진행 경험이 있어서 유 전 의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친정이나 다름없던 TV 토론 방송 프로그램에 패널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민논객의 반박 의사를 논리적으로 재반박함으로써 주장 의지를 꺾이게 하였는데 이 장면은 ‘토론 잘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부각시켜줬다. 상대방의 견해를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동의하게 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 묻어 나 있는 화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유 전 의원의 토론식 화술은 정치판에서 다른 의원을 설득하거나 그 의견을 반박했을 때 크게 먹혔을지 몰라도 정치 인맥 관계에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영준 민통당 전 최고위원은 유 전 의원을 가리켜 “저렇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고 말할 정도이니 과거 유 전 의원은 정계에서는 ‘상남자’(?)로 통했다고 할 수 있다. 유시민 안에 있는 '누군가'는 바로 중요한 상황에 냉철하게 승부를 걸 줄 알고,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분노할 줄 아는 '상남자' 유시민인 것이다.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 '내려놓음'의 진수를 보여주다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유 전 의원의 솔직담백한 고백은 흥미로울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했지만,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힌 내용과 유물론의 철학적 가치를 설명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유시민도 피를 속일 수 없는 종북이었어.” ‘젊은 보수’를 자처하고 종북 진보를 비판하는 젊은 청년 독자라면 이 내용을 근거로 들면서 이 책을 자기 합리화의 변명을 모아 놓은 산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종북’이라는 오명 때문에 ‘진보’의 참된 의미가 씨알도 안 먹히는 세상인 만큼 자기 검열의 옷을 크게 벗은 유 전 의원의 글은 오독의 여지가 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번에 나온 책이 자신의 종북 이미지를 탈피하는 동시에 정계 복귀를 노리는 의도적인 글쓰기가 아니냐고.

 

‘종북’이라면 분노의 치를 떠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오독의 유형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난센스라고 여기고 싶다. 유 전 의원이 독일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배운 '진보'와 요즘 우리나라에 자주 거론되는(특히 통진당) '진보'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표독스러우면서 싸가지 없는 진보적 정치인 유시민이 기억나는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감정부터 정치적 자기 검열을 거칠 것을 권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향적으로 보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뿐 상대방의 내면에 담겨 있는 가치와 행복에는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언가의 실적에 집착하고, 자신의 성과를 포장하기에 바쁘기도 하다. 이러하다 보니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내려놓음’과 겸손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유 전 의원의 손아래 누이는 그를 ‘유쾌한 남자’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지나치게 심각해지는일 없이 세상의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사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알고 보면 그는 버들나무 이파리처럼 바람의 거친 세기에 유연하게 탈 줄 아는 '버들낭군' 유(柳, 버들 류)시민이었다.

 

완벽주의자가 들고 다니는 사전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를 거부하므로 언제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 최적주의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 세계에는 어느 정도의 실패와 슬픔이 불가피하며 성공은 실제로 달성 가능한 기준에 따라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결과 실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안감을 덜어내며 삶을 좀 더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현실의 한계와 제약을 인정하므로 실제로 달성 가능한 목표를 정하여, 그 결과 성공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기에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도, 조직도 유한한 존재며 우리가 하고 있고 맡은 일과 자리도 유한하다. 그러기에 그 유한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여 최선을 다하면서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든지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비움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내면의 자신감을 갖추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유쾌한 남자’ 유시민은 후자의 인간상에 잘 어울린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몰두할 수 있는 놀이에 빠져들고 싶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깊게 사랑받고 싶다. 그렇게 일하고 놀고 사랑하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 그래야 인생의 마지막 날에도 내 삶에 대해 황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 2013, 62쪽)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는 정답은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한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바로 최적주의자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비울 수 있다는 것처럼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고, 무언가를 지켜야 하고,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구속하고 집착하게 하고 여유가 없게 만든다. 오히려 내려놓음으로써 그리고 비움으로써 우리는 더 큰 행복과 진정한 세상의 승자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유시민을 사회적 약자들이 잘 먹고 잘 살면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 살고 있는 진정한 세상의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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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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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

 

 

 

 

 Memento mori,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장 프랑수아 밀레  『죽음과 나무꾼』 1856년

 

 

커다란 막대기 다발을 갖고 노인이 먼 거리를 여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지쳐 있음을 깨닫고, 그 막대기 다발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인은 죽음의 신에게, 자기를 불행한 생활로부터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의 부탁에 죽음의 신은 바로 찾아와서, 노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제발, 제가 짐을 다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솝 우화' 중에서)

 

사람은 종종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남들 다 죽는데 나도 그때 죽으면 되는 것이지,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거지.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죽기 전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죽음이 임박하면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누구나 편안히 잠드는 것처럼 죽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외모가 다르듯 죽어가는 모습 역시 다르다. 천차만별의 죽음을 보며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를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정의, 생각해 보셨습니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했지 죽음 단어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서 살아 왔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예일대에서 '죽음'을 주제로 교양철학 강좌를 진행한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정의를 두 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물리주의자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물리적 죽음)과 육체의 관점으로 보는 죽음(육체적 죽음). 물리주의자는 육체가 P 기능(Person function, 인지 기능)을 유지하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고,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육체적 죽음은 말 그대로 B 기능(Body function, 신체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신체와 인격(마음, 정신 등 포함) 두 가지 요소로 죽음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죽음의 시점을 정의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 않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환자에게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 식물인간은 대뇌의 손상으로 의식과 운동 기능이 상실되었으나 호흡과 소화, 흡수 따위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다. 식물인간은 P 기능이 상실되었고 B 기능만 남아 있다. P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P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다시 기능을 재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죽은 게 아니다. 죽음의 정의를 생각한다는 건 무척 골치 아픈 일이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죽어 있는 '상태'가 어떤건지 알려고 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사'가지를 피하는 방법

 

인간이 죽으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P 기능과 B 기능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생의 시간도 멈춰버린다. 살아있다면 누릴 수 있는 삶의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린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나쁘게 보는 근본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은 박탈의 성격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가변성',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편재성'이다. '죽음'의 이미지에 걸맞게 '사'(死, 숫자 四)가지다.

 

그러나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네 가지 부정적인 특성을 근거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관점을 역설한다.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p 377)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덜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썩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생의 한정성에 얽매어 여생을 살아간다는 건 무척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몇 살까지 살지 모른다고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쓸데없는 '기우'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신의 손길은 우리 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약에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죽는 날을 알면서 살아간다면 일상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죽는 날까지 주어진 시간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맞추며넛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에 완벽하게 집중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선고 받은 이후부터 연구에 매진했다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처럼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Memento mori

 

죽음은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삶이 아닌 내 인생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질없이 허망한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생방송이다. 사람들은 텅 빈 자신의 삶 앞에 죽음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제야 후회와 아쉬움에 절망한다. 이렇게 가슴 치는 일보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의미 있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게 될 것이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생의 아름다운 졸업이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죽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덜어내고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곧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의 미래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기는 꺼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고 현재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들을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를 하는 자들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는 죽음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는가. 오늘 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기쁨으로 반길 준비가 돼 있는가. 이제는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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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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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하니까 청춘이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한 청년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앞으로 연애와 결혼도 포기하기로 했다’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기도 비정규직인데 여자 친구도 백수라서 만나면 만날수록 서로 불안한 상황이 더 증폭되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젊은이들이 이 같은 가슴 아픈 고민을 안고 있는데 이들을 ‘삼포(三抛)세대’라고 한다.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들이란 의미인데 대체적인 의미는 연애, 결혼, 출산을 지칭한다. 제대로 된 취업을 할 수 없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니 버거운 생활비용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도 포기 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세대들이란 말이다. 몇 년 전 고용 불안으로 인해 ‘88만원 세대’란 말이 나오더니 이제는 청년 세대들로부터 가족 구성에 필요한 통상적 세 단계를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란 말이 나오니 우울하고 또 우려된다. 불안과 스트레스, 우울증 등 정신적인 이유로 자살을 생각해본 20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에 흔하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2012년 한 해 가장 많이 이용된 도서 80권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본 책이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다. 2011년에 1위를 지킨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2위에 머물렀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통해 2012년의 화두가 ‘힐링’과 ‘청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가 들려주는 힐링법

 

치유의 바람은 새로운 흐름의 전주곡이다. 힐링이 인문학 연구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작년 한국연구재단 주최 ‘2012년 인문주간’의 주제가 ‘치유의 인문학’이다. ‘치유의 인문학’, ‘인문 치료’, ‘철학상담치료’ 등 이름은 조금씩 달라도 지향하는 바는 같다. 인간성 상실과 내면의 상처로 인한 ‘마음의 병’ 혹은 ‘문화적 질병’의 치유가 목표다. 인간 연구가 본령인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는 일이다. 실용적 가치가 적다는 이유로 후순위로 밀렸던 인문 정신이 삶의 위기를 계기로 하여 삶의 가치를 회복해 줄 근원적 자원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청춘', '힐링', '인문학'. 이 세 가지 화두를 적절하게 버무린 책이 있다면 바로 <눈물닦고 스피노자>이다. 이 책은 형식이 독특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괴로워하는 20대 청년, 철수가 우연히 고시원 화장실에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만나 매일 밤 철학 상담을 한다. 진짜 철학자가 매일 밤에 '철학 상담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저술한 책 <에티카>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여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 제가 쓰고 있는 《에티카》 내용 중 <2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에서 정리 19를 보면 ‘인간 정신은 오직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인간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p 29~30)

 

젊은 세대들은 사회가 규정한 현실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안정적인 근로의 직장에만 들어가면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고 돈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게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대기업, 공기업이나 공무원과 같은 안정직 취업을 선호하고 많은 시간에 취업 준비에 투자한다. 그러나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대기업과 공기업 등 괜찮은 일자리는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식 경쟁의 장이 된지 오래다. 젊은 세대는 승자독식이 굳어진 살벌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젊은 세대의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자조적으로 변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신체 변용을 통해서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욕망의 흐름에 맡긴다면 불안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봤다. 변용이란 신체가 외부의 물체를 만나 딱딱하거나 부드러워지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타인의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동안 인정하기 못했던 자신에 대한 존재의 불안함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 변용을 통해서 나 자신의 욕망에 맡겨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현대사회의 새로운 불치병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울증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단순히 마음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거대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억압된 인간 관계망에서 우울증의 원인을 찾는다. 외부와의 관계에 예속되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발현할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표출하지지 못한다면 슬픔의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울증인 것이다. 욕망은 곧 자신이 사랑하는 감정을 표상하여 실행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기 우리 스스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을 재배치해야 한다.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관계망으로.

 

“관계 자체가 예속과 복종의 관계처럼 아예 사랑과 욕망의 힘을 좌절시키는 방향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언제까지고 슬픔의 관계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관계를 기쁨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없고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색다른 사랑의 실천에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미지의 것을 향한 욕망의 흐름과 같은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상상이 떠오르고, 색다른 무엇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기쁨의 관계를 만들어보세요. 창발적인 관계망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욕망이 증대되고 촉발되는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61~62)

 

작년에 청춘들이 ‘힐링’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과 좌절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힐링하는 방법을 명사나 책을 통해서만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힐링을 남들이 하는 걸 따라 맞출 필요 없다. 우리 삶에 작은 변화를 주는 힐링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기쁨의 관계를 구축하는 삶의 과정도 힐링이 될 수 있다.

 

 

 

 긍정의 힘을 보여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정신적 상실을 망각으로 바꾸는 힐링만으로는 마음의 불치병을 완전히 치유하기가 어렵다. 상실을 자기 안에 수락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자기를 변용해내는 방식을 택하며 자기 세계를 재배치해야 한다. 자기를 삶의 주인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힐링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감정적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이며, 하나는 다른 감정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감정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이보다 더 강력한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끈질기게 커지며,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할 뿐이다. 우리 스스로 긍정적인 경험을 간직하고 자신의 정서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바루흐(Baruch, '축복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스피노자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긍정의 힘을 외면한 채 막연하게 먼 곳에서만 힐링을 찾으려고 하는 현대인들을 경고하는 듯하다. 나를 위한 셀프 힐링은 아깝지 않다. 감정적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축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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