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내면 가장 깊숙한 곳, 간신히 감추고 있던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을 꺼내 독자의 마음을 잔인하게 할퀸다. 영혜는 끔찍한 꿈에 짓눌린 채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매달린 건물 안에서 헤매기도 하며,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의 꿈을 반복한다. 끔찍한 꿈의 파편들은 영혜의 평범한 일상을 산산 조각낸다. 영혜는 고기 먹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영혜의 아버지가 강제로 그녀의 입에 고기를 넣어보지만, 영혜의 감정을 더 예민하게 만들고 말았다. 3부 『나무 불꽃』에서 영혜는 식사를 거부한 채 스스로 나무가 되기로 한다.
영혜는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물은 개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잊지 못한다. 영혜의 눈동자에는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자신을 쳐다보던 개의 두 눈이 아른거린다. 영혜 가족은 죽은 개로 음식을 만들어 잔치를 벌인다. 여기에서 사육제(Carnival)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친다. 축제의 기쁨에 흥분한 사람들은 사냥한 짐승의 생살을 찢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었다. 이러한 체험은 평범한 인간에게 짜릿한 일탈의 기쁨을 준다. 이 축제를 거부하는 사람은 반인간적 행위로 간주하여 살해당한다. 영혜는 축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축제의 기쁨보다는 무자비한 폭력과 죽음의 공포가 그녀의 예민한 감정을 지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영혜의 내면에 자리한 숱한 강박감이 되었고, 격렬한 꿈의 이미지로 변환되었다. 한마디로 일상을 거부하고 식물의 세계를 향하려는 영혜의 왜곡된 감정은 죽음, 폭력, 인간 존재의 회의 등 그를 짓누른 극단의 강박관념들이 엉킨 영상이라 할 수 있다.
영혜가 나무가 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최후의 선택이다. 영혜는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햇살에 맡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고통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채식주의자》 2부『몽고반점』 147쪽 임의 편집)
그녀는 자기 자신을 흥분시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벌거벗은 식물’이 된다. 식물의 세계를 지향하는 영혜의 자기(自起) 왜곡은 ‘명랑한 절망감’이다.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이 ‘명랑한 절망감’ 자체를 표출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베이컨은 영혜보다 더 충격적인 자기 왜곡을 시도했다. 그의 얼굴은 피범벅에 뒤죽박죽 엉켜있거나 구멍이 나 있고, 피부는 녹아 흘러내리는 듯 대부분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다. 몸은 기관들을 없애고 마치 고깃덩어리들을 여럿 붙여놓은 것처럼 끔찍하다. 아마도 영혜가 꿈속에서 본 고깃덩어리들은 베이컨의 그림과 흡사한 면이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책형'을 위한 세 가지 습작」 (1962년)
베이컨은 살아있다는 것을 정육점의 고기와 같이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도살장을 그린 그림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베이컨은 끊임없이 동물의 세계를 갈망했다. 그리고 붓을 쥐어 자신을 도살함으로써 정육점의 고기가 되고자 했다. 사실 베이컨도 영혜처럼 정신적 상처에 예민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겪은 공포, 개와 말에 대한 심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천식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의 옷을 몰래 입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크게 혼난 적도 있었다. 또한, 베이컨은 프랑크 모베르와의 대담에서 하녀가 만든 돼지머리 고기 파이가 끔찍했다고 밝혔다. 베이컨 역시 영혜와 마찬가지로 관습을 벗어난 행동을 일삼아 가족과 단절되었고, 아버지를 싫어했다.

고기를 들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
베이컨에게 고기는 자신의 살덩어리, 즉 분신과도 같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신체를 모두 ‘벌거벗은 고기’로 만들어버린다.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교묘하게 말을 돌린다거나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말한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베이컨이 정육점 고기가 되고 싶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영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나무가 되고 싶은 이유를 묻는 말에 침묵한다. 이 두 사람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기가 되던 나무가 되든 간에 결국 인간은 다양한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영혜의 ‘나무’와 베이컨의 ‘고기’는 인간 자체가 아닌,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거대한 고통의 실재다. 그것은 폭력에 기인한 두려움일 수 있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가 되기도 한다. ‘벌거벗은 나무’와 ‘벌거벗은 고기’는 생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면서도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