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책을 찾아주세요" Book #24
《반 고흐, 지상에 유배된 천사》 율리우스 마이어 그레페,
최승자, 김현성 공역 / 책세상 (1990년)
율리우스 마이어 그레페(Julius Meier-Graefe, 1867~1935)는 빈센트 반 고흐를 위대한 예술가의 명당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그레페는 독일에서 미술사학자로 활동했다. 영국의 화가 겸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 1866~1934)와 함께 인상주의 회화의 연구에 앞장섰다. 그레페는 고흐뿐만 아니라 세잔, 르누아르, 뭉크, 마네 등 화가의 평전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화가 평전이 바로 1921년에 발표한 고흐 평전이다. 1926년에 나온 영문판의 제목은 <Vincent Van Gogh: A Biographical Study>이다. 고흐 사후 100주년인 1990년에 국역본이 나왔다. 제목은 《반 고흐, 지상에 유배된 천사》(책세상)다. 이 책은 공동 번역인데 번역자 한 사람이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의 시인 최승자다. 최승자 시인은 이 책의 2, 5, 6장의 번역을 맡았다.
이 책은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레페는 고흐를 광란의 기질을 주체하지 못해 불행하게 살다간 비극적 인간으로 재현했다. 그는 서문에서 고흐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라고 말한다. 흔히 고흐를 소개하면 항상 ‘광기’와 ‘천재’가 들어간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런 과장된 꼬리표를 달게 만든 사람이 그레페다. 그는 고흐의 내적 고통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고흐가 발작하는 장면에 자신이 직접 고흐의 영혼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발작으로 흥분한 고흐가 주절거리는 것처럼 독백 대사를 넣기도 한다. 이 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작가나 미술 비평가들은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는 코드를 ‘광기’로 뭉뚱그려 축약시켰다. 그레페 덕분에 고흐는 불행한 천재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지만 ‘정신분열’, ‘광기’로 고흐를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부실한 평전들이 양산됐다.
20세기 초반에 나온 책인 만큼, 최근에 알려진 고흐에 관한 각종 자료와 비교하면 상당히 오래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고흐 평전을 많이 읽어 본 독자가 그레페의 책을 읽으면 지루하게 느낀다. 고흐가 런던의 하숙집에서 지냈을 때, 그곳 하숙집의 딸 외제니 로이어를 짝사랑했다. 고흐는 용기 있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예전에는 외제니 로이어를 ‘우르슐라(또는 우르슬라)’라고 소개되었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하숙집 딸을 우르슐라로 지칭하면서 썼다. 그러나 우르슐라가 외제니 어머니의 이름으로 밝혀져 하숙집 딸의 진짜 이름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우르슐라 대신에 외제니 로이어로 소개하는 책들이 많아졌다.
최승자 시인이 (부분) 번역한 책이라고 해서 이 책에 군침을 흘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헌책방에서도 만나기 힘든 책이라서 굳이 사서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레페의 책은 잊혀도 고흐와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 이야기들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복제되어 구전되어 화가의 존재감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공아트, 마로니에북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고흐 관련 책들은 그레페의 책을 참고해서 모방한 복제물이라고 보면 된다. 세월의 그늘 속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뻔한 고흐를 다시 대중 앞에서 부활시킨 최초의 인물이 그페레라는 사실, 그것만 기억해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