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친구의 일을 도와주었다. 친구는 CCTV 카메라, 감지센서 기기를 설치하는 회사에서 일한다. CCTV 카메라를 설치한 절이나 공공기관에 찾아가서 부품을 정기적으로 점검도 한다. 나는 친구와 같이 점검하는 일을 했다. 친구의 말로는 정기 점검하는 날이 제일 힘들다고 한다. 하루에 절 두세 곳을 찾아가 혼자 점검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절 내부의 건물이 많고, 절의 구역이 넓을수록 CCTV 카메라 개수가 많아진다. 절 한 곳당 적어도 카메라가 13개다. 13개의 CCTV 카메라 그리고 감지센서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이 많은 것을 혼자 하면 한 시간 반 걸린다. 점검하는 도중에 기계의 문제점을 발견하면 시간이 지체된다. 가야 할 절이 전국 곳곳에 있어서 회사용 차량을 운전하여 이동한다.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도 피곤하다. 그래서 정기 점검하는 날이 오면 친구가 나에게 부탁한다. 친구의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기계를 만질 일이 없다. 그냥 친구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어제는 절 세 군데를 점검했다. 경북 의성에 있는 절 두 곳, 경남 합천에 있는 절 한 곳. 맨 처음 간 절은 의성의 대○사. 절 건물은 화려하지 않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는 곳이었다. CCTV 카메라 화면을 볼 수 있는 기계는 종무소에 있다. 제일 먼저 종무소에 가서 화면 상태를 확인한다. 종무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반가운 것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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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한쪽에 엄청난 양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절에서 많은 양의 책을 보게 되다니. 책 무더기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책이다!’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책 열 권씩 끈에 묶여 있었다. CCTV 카메라가 주변을 샅샅이 살피듯이 내 두 눈도 자연스럽게 책등을 주시하면서 확인하고 있었다. 눈앞에 읽을 만한 책이 하나씩 보였다. 이 많은 책을 소장한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큰스님, 주지스님 중 한 분이 차곡차곡 책 탑을 쌓으셨다. 불교 경전이나 불교 관련 서적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온통 불교 서적이었으면 내가 책 탑을 유심히 관찰할 이유가 없다. 스님의 독서 편력이 예사롭지 않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동문선 현대·문예신서 시리즈,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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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분야가 다양했다. 철학, 종교학, 각종 종교 사상 서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아마도 스님은 불교부터 시작하여 더 나아가 철학, 종교학까지 살피면서 독서로 수행하셨나 보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에는 서양 문학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89번째 책이 《위대한 개츠비 / 롤리타》다. 국내 세계문학 전집 사상 가장 특이한 작품 조합이다. 이 두 편의 작품을 쓴 작가는 정말 유명하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특별한 정보가 없다. 피츠제럴드와 나보코프는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였으나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러시아 출신의 나보코프는 1919년에 유럽으로 망명하여 20년 가까이 유럽에서만 생활했다.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그 해에 피츠제럴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서로 어색한 두 편의 소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 절에서 보게 되니까 기묘한 궁금증이 생겼다. 스님도 ‘롤리타’를 읽어봤을까. ‘위대한 개츠비’와 ‘롤리타’ 조합보다 ‘롤리타’를 읽는 스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서 더 이상하다. 이것이야말로 불심파괴. 동서문화사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발견했다. 성(性)을 대담하게 표현한 걸작들이 스님한테 걸리면 색에 대한 욕심을 부추기는 잡스러운 책이 된다. 수행에 맞지 않는 책은 불쏘시개가 되어 생을 마감했을 텐데 용케도 살아남았다.
절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검하는 날에는 식당, 분식점, 중화 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우리 같은 외부 손님에게 따뜻한 차나 음료수를 주는 스님은 많았지만, 음식까지 대접하는 건 대○사 주지스님이 처음이다. 대○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원주(院主)님의 요리 실력이 대단했다. 무청 된장국, 김치전, 감자전, 고추 장아찌, 돼지껍질 김치볶음, 파래무침, 배추김치, 냉이 무침 그리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인 동치미. 어제 먹은 반찬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군침이 생긴다. 주지스님은 우리에게 밥을 더 먹으라고 권했다. 밥 두 공기에 잔반 없이 다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난 뒤에 원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원주님이 큰스님을 먼저 언급했다. 어제 큰스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큰스님은 특별한 일 때문에 다른 절에 가셨기 때문이었다. 큰스님이 주지스님, 원주님보다 대○사에 가장 오래 머무른 분이다. 큰스님은 37세 때 대○사에 처음 정착해서 14년 동안 쭉 계셨다고 한다. 큰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종무소에 있는 책의 주인이 누군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원주님과의 대화를 오래 할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느긋하게 여유를 가질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특별한 서재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책 탑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렇게 대○사와 이별했다. 어제 대○사에서 발견한 수수께끼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다시 오지 않는 이상, 내 기억 속 미제로 남는다. 책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그가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알 것 같다. 책의 주인은 자신을 향해 이러쿵저러쿵할 속세의 소리를 멀리하려고 책 탑을 쌓았을 것이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이 모든 책을 끌어안을 듯하다. 그때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결정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깨침을 얻은 책 탑의 주인은 세상 떠날 일을 대비하여 서책을 가지런히 쌓아 놓았다. 올 때부터 몸뚱어리 하나 달랑 가져온 사람이기에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 성철 스님의 준엄한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