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1124/pimg_7365531661315411.png)
오늘 중앙일보 신문을 보다가 흥미로운 제목의 칼럼이 눈에 띄었다. 칼럼 제목은 이렇다. <‘응팔’은 왜 실패했나> ‘응팔’은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줄임말이다. 시청자들을 과거의 향수에 젖게 만들었던 ‘응칠(응답하라 1997)’과 ‘응사(응답하라 1994)’를 이은 세 번째 시리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88년에 유행했던 패션, 물건, 유행어 그리고 대중가요들까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응팔’을 재미있게 보는 사람이라면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드라마에 벌써 실패 운운하는 글쓴이가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글쓴이는 드라마가 고증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실패의 원인을 1980년대 관련 유물 및 데이터베이스 정리가 미흡한 사회 현실에서 찾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 제작진은 시중에 구하기 힘든 과거의 소품들을 모조리 찾아내거나 복원하는 등 고증에 신경을 많이 썼다.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그 때 그 시절의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1980년대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80년대의 소품들이 많지 않은 데다가, 그 당시를 기억하는 세대의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한두 개씩 시대적 오류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응팔’의 신원호 PD는 ‘응칠’, ‘응사’보다 고증을 준비하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칼럼의 글쓴이는 ‘응팔’ 제작진의 교훈을 통해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는 ‘응팔’을 시청하면서 제작진의 노력에 몇 번 감탄한 적이 있었다. 제일 찾기 힘들었을 소품을 거의 완벽하게 새것처럼 복원했기 때문이다. ‘응팔’을 챙겨 보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만약 당신이 드라마 제작진 중의 한 사람이라면 어떤 소품이 제일 찾기 힘들었을 것 같은가. 금성 텔레비전? 연탄보일러 온수통? 다이얼로 돌리는 전화기? 아니면 덕선(혜리 분)이 선우(고경표 분)에게 선물로 준 변진섭의 1집 카세트테이프?
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 1988년에 나온 책들이 뭐 있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드라마의 복고 열풍 덕분에 언론에서 8, 90년대 베스트셀러를 조명한 기사를 선보인 적 있었으나 그때 나온 책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헌책방 주인들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책들의 존재감이 점점 잊힌다. 나온 지 오래된 책들은 종이가 변색하고, 찢어지기 쉽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생기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듯이 책도 사람처럼 늙어간다. 젊은 책들의 등장으로 인해 자리를 잃고만 늙은 책은 박스 안에 갇힌 신세가 된다. 오랫동안 책 주인의 손길을 그리워하다가 폐품처리장에서 생을 마친다. 한 번도 주인과 눈 마주쳐보지 못하고 폐지로 전락하는 늙은 책의 신세가 처량하다. 더 슬픈 사실은 주인이 책을 버린 일을 까맣게 잊고, 그 책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점이다. 책은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으면서도 쉽게 잊어버리는 물건이다. 오래 보관하기가 어려운 물건이기도 하다. 물, 불, 습기에 약하다.
오늘날에는 관심 있는 책이 있으면 인터넷 서점 독자 서평, 출판사 서평을 참고할 수 있다. 서평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이해시키기 위한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다. 독자를 염두에 둔 서평도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이다. 책에 서평이 많이 달리는 횟수로 그 책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독자 서평 한 편도 없는 책은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절판된다. 요즘은 독자 서평의 반응에 따라 책이 좋은지 아닌지 판단하지만, 80년대에는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은 책이 많았다. 그때는 독자 서평이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80년대에 나온 책들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수천 권의 책들의 정보를 구축한 인터넷 서점에 종종 80년대 출간 서적이 검색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제목과 저자명은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는데도 표지를 확인하지 못하는 책도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80년대 책을 찾기 위해 헌책방을 헤맸던 헌책 마니아 1세대들이 존경스럽다. 그들 중 일부는 잊혀간 헌책들을 알리기 위해 인터넷에서 정보를 공유하거나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운영자 윤성근의 《심야책방》(이매진, 2011)과 박균호의 《오래된 새 책》(바이북스, 2011)은 우리 기억 속에 사라져버린 책들의 그리움을 담은 소중한 기록들이다. 애서가들의 기록이 없었다면 절판본이 재출간되는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심심찮게 나오는 흔한 서평 집도 다음 세대 독자들을 위한 기록이 된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받는 서평 블로거들의 기록 또한 소중하다. 특히 추리소설 전문 서평을 많이 썼던 故 홍윤 씨(닉네임 물만두)의 활동을 잊어선 안 된다. 장르문학이 잘 안 팔리던 시절에 홍윤 씨는 다양한 작가들의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고, 블로그에 서평을 남겼다. 홍윤 씨의 기록 덕분에 과거에 출판되었던 유명 추리소설 작품이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서평 집에 소개된 책들이 십 년이 지나 절판이 되어도 서평가들의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평 집이 절판되더라도 그 속에 있는 기록들은 인터넷으로 공유된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1124/pimg_7365531661315406.png)
나는 드라마를 시청할 때 책 소품이 나오는 1초의 장면도 유심히 바라본다. ‘응팔’을 시청하면서도 책 소품이 나오는 장면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덕선이 자신이 짝사랑하는 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4화)에서 덕선의 귀여운 표정보다는 책장에 꽂힌 책에 더 눈이 가더라. 그 장면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책등에 찍힌 책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밤 열차》, 《한 아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보인다.
《한 아이》는 특수 교육 교사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문제아로 특수학급에 배치돼 말썽을 일으키지만, 여교사가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내용이다. 아동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한 아이》는 1984년에 샘터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수필가 전혜린의 책으로 추정된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쓴 소설 제목이 전혜린의 수필집 제목과 같다. 이 소설은 1987년에 학원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번역되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1124/pimg_7365531661315407.pn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1124/pimg_7365531661315419.png)
마지막으로 소개될 《밤 열차》는 정체가 궁금한 미지의 책이다. ‘밤 열차’라는 제목이 흔해서 네이버에 검색을 하면 1천 권이 넘는 책이 나온다. 이 많은 책들 중에 《밤 열차》를 찾기란 모래밭에 진주 한 알을 찾는 일이다. ‘응팔’에서 소품으로 나온 《밤 열차》는 문예출판사에서 펴낸 책일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기라고르스. 출판 연도는 1985년. 네이버에서는 이 책을 ‘기타 나라 소설’로 분류했을 뿐 이 책의 줄거리에 대한 소개가 없다. 물론, 이 책을 짧게 언급한 서평 또한 나오지 않는다. 놀랍게도 문예출판사 공식 출판사 홈페이지에 《밤 열차》를 검색하면 ‘없는 책’으로 나온다. 하지만, 문예출판사는 분명히 이 책을 출판했다. 이듬해에 《밤 열차》는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
출판사에 일하는 분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어려운 일을 바라는 건 아니다. 앞으로 책 한 권을 펴낼 때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그 기록들이 오랫동안 보존했으면 좋겠다. 자사가 펴낸 책들을 데이터베이스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책의 출생일을 신고하는 일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는 출생증명서와 비슷하다. 지금은 책을 알리는 홍보의 목적으로 기록하는 것이지만, 나중에 다음 세대 독자들이 참고하는 데 유용한 정보가 된다. 신간 도서를 알리는 것도 좋지만, 과거에 나온 책들도 소중히 여겨 꼼꼼하게 알아보는 애정도 필요하다. 출간된 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출판사의 역사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잊힌 책도 한때 출판 노동자의 땀이 맺힌 노력의 결실이다.
유행을 돌고 돈다. 십 년이 지난 후에 우리는 2015년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컬러링북도 시간이 흐르면 추억이 되고, 한동안 잊다가 또 한 번 유행할 수 있다.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항상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내서 응답하기만 바랄 수 없다. 우리의 뇌와 수명은 몸으로 기억한 과거의 추억을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사람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 그 기억들도 사라져버린다.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 과거의 나를 불러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