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Nietzsche)는 소크라테스(Socrates), 플라톤(Plato), 칸트(Kant)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런 자신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표현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아카넷, 2015)
과연 새로운 우상의 비밀을 캘 수 있을까? 이 작은 책은 중대한 선전포고다. 비밀이 캐어져야 할 대상들은 이번에는 한 시대의 우상들이 아닌 영원한 우상들이다. 여기서는 그것들에 소리굽쇠를 갖다 대듯 쇠망치를 갖다 댈 것이다. 이 우상들보다 오래되고 확신에 차 있고 교만한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보다 더 속이 비어 있는 우상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가장 많이 신봉된 우상이었다.
(니체, 《우상의 황혼》 「저자 서문」, 박찬국 옮김, 9쪽)
니체가 미치기 1년 전에 쓴 《우상의 황혼》의 부제는 ‘또는 어떻게 쇠망치로 철학을 하는가’다. 이 책의 2장(「소크라테스 문제」)에서 니체는 삶을 무가치하다고 본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성주의 철학의 원류다. 그러나 니체는 오랫동안 숭배받은 두 사람을 인간의 삶을 병들게 하고, 본능을 말살하는 우상으로 규정한다. 개인의 욕망을 근절하는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는 서양인이 맹목적으로 수용한 가치다. 니체는 그런 가치를 ‘재평가’한다. 이런 자신의 작업을 ‘엄청난 과제’로 여긴다. 니체가 밝혔듯이 《우상의 황혼》은 ‘영원한 우상’을 향한 선전포고다. 그들에게 갖다 대는 ‘쇠망치’는 니체의 철학적 무기다.
시간이 지나면서 니체는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면서 니체도 ‘영원한 우상’이 되었다. 이 글은 《우상의 황혼》에 있는 문장 한 줄에 대한 선전포고다. 나는 그 문장을 쓴 니체에게 쇠망치를 갖다 대려고 한다.
완전한 여성은 작은 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문학을 한다. 시험 삼아, 일시적으로, 누가 보는지를 살펴보면서, 그리고 누군가가 봐주기를 바라며‥….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박찬국 옮김, 20쪽)
이 문장은 《우상의 황혼》의 첫 장 「잠언과 화살」 20절이다. 니체가 생각한 ‘완전한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생물학적 여성을 뜻하는 걸까? 지금으로선 ‘완전한 여성’의 진짜 의미를 알아내는 일은 중요치 않다. 니체가 보기에 문학을 하는 여성, 즉 글 쓰는 여성은 ‘작은 죄를 저지르는 존재’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글을 쓴다. 자신이 쓴 글이 누군가가 봐주길 바라면서.
여성을 하대하는 니체의 편견은 그가 쓴 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오점’이다. 《우상의 황혼》에도 여성에 대한 니체의 생각이 심심찮게 나온다. 9장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6절(106쪽)은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를 혹평한 내용이다. 여기서 니체는 무자비할 정도로 상드를 저격한다. 니체가 본 상드는 ‘남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버르장머리 없는 소년 같은 태도로 여성적 교태를 부리는’ 작가다. 그런 그녀를 ‘흡사 시계태엽 감듯이 자신을 조이면서’ 글을 썼다고 언급한다. 6절은 글을 많이 쓴 상드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마무리된다. 다산(多散)의 글 쓰는 암소.
편력(遍歷)은 ‘여러 가지 경험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니체는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를 포함한 여러 명의 여성을 만났다. 니체는 여성을 만나본 경험을 토대로 상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편력’이 아니라 ‘편견’이다. 《우상의 황혼》 6장 제목은 ‘네 가지 커다란 오류’다. 「잠언과 화살」 20절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6절은 글 쓰는 여성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니체의 ‘커다란 오류’다. 나는 쇠망치를 들어 니체의 오류를 부수고 싶다.
글 쓰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글이 독자의 눈길을 받길 바란다. 수많은 독자의 호의적인 반응은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이다. 작가도 사람이다. 좋은 글을 써서 독자와 비평가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여기에 힘입어 돈과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글 쓰는 행위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활동으로만 볼 수 없다. 글 쓰는 목적은 다양하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다.
니체는 욕망과 열정을 중요하게 생각한 철학자다. 그런데 글 쓰고 싶은 욕망과 열정을 가진 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이 글을 쓰는 행위를 범죄 행위로 바라본다. 니체가 살았던 시대를 포함한 과거에 여성의 글쓰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반도덕적 행위였다. 서구 남성은 자신들을 태어날 때부터 ‘이성’이 장착된 존재로 여겼다. 그들이 생각한 여성은 이성이 없는 데다가 그것을 영영 가질 수 없는 열등한 존재다. 그런 여성이 남성처럼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며 담배 피우면서 글을 쓴다? 남성은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글 쓰는 여성을 비난했다. 그리하여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남성 작가로 보일 수 있는 가명을 사용했다.
* 리디 살베르 《일곱 명의 여자: 문학사를 바꾼 불꽃의 작가들》 (뮤진트리, 2015)
《일곱 명의 여자》는 니체의 여성 작가 편견을 부수는 데 쓸 수 있는 ‘쇠망치’다. 책에 나온 ‘일곱 명의 여자’는 가명으로 글을 쓴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를 포함한 여성 작가들을 가리킨다. 책의 저자 리디 살베르(Lydie Salvayre)는 글쓰기를 삶의 전부로 여긴 일곱 명의 작가를 ‘일곱 명의 미친 여자’라고 표현한다. ‘일곱 명의 미친 여자’는 남성의 편견이 장악한 문단 한가운데서 글을 쓰기 위해 미쳐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글 쓰는 행위를 ‘문학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관광객의 가벼운 산책(《일곱 명의 여자》 머리말, 8쪽)’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일곱 명의 미친 여자에게 글쓰기는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삶 그 자체다.
* 타니아 슐리 《글 쓰는 여자의 공간: 여성 작가 35인, 그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 (이봄, 2020)
《글 쓰는 여자의 공간》은 글쓰기에 대한 35인의 여성 작가들의 생각과 자신만의 공간에서 글 쓰는 작가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함께 소개된 책이다. 이 책은 다작하는 상드를 ‘암소’로 비유하면서 조롱한 니체에게 갖다 댈 수 있는 또 다른 쇠망치다. 니체는 상드가 쉬지 않고 글을 계속 써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글 쓰는 여자의 공간》에서 독자는 상드가 글쓰기에 미치게 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쉬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 내 딸을 키우고, 내가 다른 사람들이나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의무를 충분히 이행하기 위해서다.”
(《글 쓰는 여자의 공간》, 42쪽)
상드는 본인과 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다. 그녀는 또 슬픔이 밀려오면 글을 쓴다고 밝혔다. 글을 쓰면 슬픔을 잊을 수 있으니까. 상드를 슬프게 하는 것 중 하나는 글 쓰는 여성을 별종으로 취급하는 암울한 세상이다.
* 조애나 러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낮은산, 2021)
SF 작가 조애나 러스(Joanna Russ)는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에서 여성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11가지 수법을 알려준다. 이 수법 중 하나가 ‘금지하기’다. ‘금지하기’ 수법의 단적인 예는 집안일을 해야 하는 여자가 글을 쓰는 건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이는 비난이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은 글 쓰는 여자를 공격할 때 사용되는 망치의 여러 가지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 장영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민음사, 2020)
25명의 여성 작가가 글을 쓰면서 살아온 과정을 소개한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는 《일곱 명의 여자》에 만족하지 못한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상드처럼 오로지 살기 위해 글을 쓴 25명의 미친 여자에 에밀리 디킨슨과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일곱 명의 여자》에도 소개되어 있다.
* 미셸 우엘벡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 (필로소픽, 2022)
욕망을 중시한 니체는 시인에게도 욕망이 있다고 봤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그 욕망이란 최고의 시인에게 주는 영광을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며 그것은 창작열을 자극하는 힘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은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에서 글 쓰게 만드는 시인의 욕망을 정의한 니체의 견해를 ‘개지랄하는 소리’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비판한다(49쪽). 문학적으로 인정받은 최고의 시인은 여자를 밝혔고, 여성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글을 썼다.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최고의 시인은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최고의 시인은 글을 쓰면서 번 돈을 좋아했다. 돈 벌기 위해 그들은 글을 썼다.
상드를 포함해서 글 쓰는 여자를 무시한 니체의 글도 ‘개지랄하는 소리’다. 니체는 글을 쓰려는 여자의 욕망을 외면했다. 그리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도덕을 비판한 니체는 글 쓰는 여자의 창작 의지를 꺾는 ‘도덕 천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지한 니체는 도덕 천장에 쇠망치를 갖다 대지 않았다. 니체! 망치로 맞아 봤음?(코찡긋) 망치로 함 마(hanma)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