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의 탄생 - 끔찍했던 외과 수술을 뒤바꾼 의사 조지프 리스터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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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이 무난하게 흘러 지나갈 줄 알았다. 낯선 지역에서 걸려온 두 통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발신자 이름이 없는 전화번호가 평범한 일상에 진동을 일으킨 신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통의 전화 모두 미상의 발신자가 ‘054’로 시작한 전화번호로 걸었다. ‘054’는 경북 지역번호다내가 수신을 두 번 거절하자 이번에 친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순간 동생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받은 분은 ○○○ 씨 보호자이십니까? ○○○ 씨가 다쳐서 우리 병원에 입원했어요. 병원에 보호자 한 분이 있어야 해요.” ‘054’로 시작한 전화번호는 경북 모 지역에 위치한 대학병원 응급실 전화번호였고, 동생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발신자의 정체는 간호사였다. “○○○ 씨가 다쳐서 우리 병원에 입원했어요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기운이 온몸에 확 퍼졌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동생이 입원한 병원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 옷을 부랴부랴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병원이 있는 모 지역은 대구와 가깝지만, 이상하게도 병원에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병원으로부터 처음 연락받은 지 1시간이 지나서 응급실에 도착했다. 동생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동생의 후두부와 웃옷 등 쪽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핏자국은 동생이 기대 누운 침대 시트에도 남아 있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동생은 자취방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취기가 오른 상태에 부엌을 걷다가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부엌 바닥에 세게 부딪힌 후두부에 출혈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동생은 전화로 119를 불렀고,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행히 동생은 뇌진탕과 뇌출혈이 일어날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았고, 두 바늘 꿰매면 봉합할 수 있는 경미한 상처만 생겼다



 

 



내가 음주를 줄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결국 새해 첫날에 동생이 사고를 쳤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응급실 출입 규정이 바뀌어서 보호자 한 명만 응급실에 출입할 수 있다. 그래서 나 혼자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만약 부모님 중 한 분도 같이 갔으면 동생은 욕설 섞인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나는 동생을 혼내고 싶은 부모님을 대신하여 꿀밤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친 부위가 머리라서 주먹을 내밀 수 없었다. 올해에 철 좀 들으라는 의미로 동생의 등짝에 스매싱을 시원하게 날렸다.


그렇게 어수선한 새해 첫날이 훌쩍 지났다. 침대 시트에 묻은 핏자국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동생이 퇴원한 후에 의료진들은 아주 깨끗한 침대 시트를 깔았을 것이며 지금쯤 동생이 누웠던 침대에 어느 환자가 누워 있을 것이다. 어제 핏자국이 있는 침대 시트를 보면서 가보지도 않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의 병원 병동 내부가 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동생의 후두부에 난 상처를 봉합하는 외과 의사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환자의 고통을 무시한 채 수술을 강행한 빅토리아 시대의 외과 의사가 문득 생각났다내가 실제로 보지 않은 먼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작년 12월 초에 빅토리아 시대의 의사들 사이에 유행한 외과수술 방식을 생생하게 소개한 수술의 탄생을 읽었기 때문이다.


수술의 탄생은 수백 명의 군중이 가득한 수술실 내부를 묘사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수백 명의 군중이 가득한 수술실 내부라니.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19세기 초중반에 외과 의사들은 환자가 모르는 군중 앞에 공개 수술을 했다. 공개 수술은 외과 의사의 수술 실력을 군중에게 홍보하기 위한 일종의 메디컬 쇼(medical show)였고, 공개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치면 의사의 평판은 높아졌다외과 의사는 마치 고기를 자르듯이 톱으로 환자의 신체 부위(간단한 수술로 낫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환부가 있거나 환부에 병균이 감염되어 썩은 부위)를 잘랐다. 그 당시에 마취 수술이 나오지 않았다. 공개 수술은 군중의 오락거리가 되었고, 외과 의사와 군중에게 고통에 찬 환자의 비명은 안중에도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병원은 죽음의 집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여졌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외과 의사들은 자신의 손과 수술 도구를 소독하지 않았고, 말라붙은 피가 묻어 있는 수술복을 입고 다녔다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 피 묻은 수술복은 의사의 자랑스러운 표식이었다환자들로 가득한 병동 내부는 지저분했다. 의료진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병원의 위생 관리가 엉망이어서 병동의 침대 시트에 환자들이 흘린 피와 고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환부에 병균이 감염되어 사망하기 일쑤였다.


비상식적인 외과 의사들의 수술 방식과 허술한 병원 운영 체제에 반기를 든 의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리스터의 선배 및 동료 외과 의사들은 상처의 감염은 세균이 아니라 독소가 원인이라고 믿었다. 리스터를 포함한 일부 외과 의사들은 세균의 실체를 알고 있었으며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독소가 있다고 믿는 의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세균 이론과 소독법을 지지하는 의사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 리스터는 여러 차례 실험을 하면서 세균 이론을 증명했으며 소독의 효과까지 알아냈다. 그는 실험 결과를 수술에 적용했다. 하수구 정화에 사용되던 석탄산으로 환부를 소독하고, 의료진의 손과 의복, 수술도구 등 환부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살균 처리했다. 마취제와 함께 외과의학의 양대 혁명으로 불리는 무균수술은 고통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수술의 탄생은 현대의 의료 체계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근대 의학의 과도기를 다룬 역사책이다. 또 한편으로는 의사이자 과학자로 활동한 조지프 리스터 평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소독법의 선구자로만 알려진 리스터의 업적을 소개한 국내 유일의 책이다. 수술의 탄생의 저자 린지 피츠해리스(Lindsey Fitzharris)는 과학자로서 호기심과 탐구심, 어린 환자도 따뜻하게 대하는 의사로서의 사명, 종교(퀘이커교)와 의료 행위 사이에 갈등을 겪은 리스터의 인간적인 모습 등을 흥미진진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리스터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눈길을 빨아들이는 저자의 글투와 역자의 좋은 번역이 만나면서 다시 태어난 리스터의 삶이 책 속에 생생하게 꿈틀댄다. 이 책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엉뚱하게도 응급실에서 19세기 영국의 병원 내부 광경과 공개 수술을 자연스레 떠올리고 말았다. 202111일에 있었던 모든 일과 그다음 날에 태어난 이 글글쓴이의 사적인 이야기가 이 한 편의 졸문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잘 쓴 서평이라고 보기 어렵다은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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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2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1-01-03 15:19   좋아요 1 | URL
책만 읽으면 됩니다. ^^

바람돌이 2021-01-02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생분이 많이 안다쳐서 정말 다행이예요. 에휴 정말 많이 놀라셨겠어요. 저같아도 등짝 스매싱!!

cyrus 2021-01-03 15:20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에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을 때 동생이 밖에서 쓰러진 줄 알았어요. 어제 날씨가 추웠고, 하필이면 동생이 사는 지역에 눈이 좀 내렸거든요. 다행히 동생은 집에서 다쳤고 큰 부상은 아니었어요. ^^;;

수이 2021-01-02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거지? 새해 첫날 이래저래 놀랐겠다. 등짝 스매싱하는 사이러스님이라니 상상 불가지만 내가 모르는 모습도 많을 테니까 ^^;;; 새해 알라딘에서 자주 만나기를!!

cyrus 2021-01-03 15:23   좋아요 1 | URL
지금까지 살면서 새해 첫날에 기억 남을만한 특별한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올해 첫날에 동생이 추억을 만들어줬어요. 등짝만 때렸지 육두문자는 안 썼어요.. ^^;;

서니데이 2021-01-03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많이 놀라셨겠어요. 동생분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서 다행이예요.

cyrus 2021-01-03 15:30   좋아요 2 | URL
어제 서니데이님이 제가 단 댓글에 대한 답글을 달면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새해 첫날은 전날과 큰 차이는 없지만, 하루 사이에 큰 변화가 생기면 큰일이라고요. 사실 어제 아침부터 동생이 다친 사실을 리뷰에 언급할지 말지 고민했어요. 그런데 서니데이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1월 1일에 겪은 일은 제게 변화를 준 ‘큰 일’이었어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고, 동생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거든요. 동생이 다친 일은 개인사의 한 부분이라서 묻어두려다가 고민 끝에 리뷰를 통해 밝혔어요.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추억이니까요. ^^

서니데이 2021-01-03 15:44   좋아요 2 | URL
새해부터 갑자기 사고가 있어서 놀라셨겠지만 빨리 회복하고 좋은 일 있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복많이받으세요.^^

psyche 2021-01-03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너무 놀라셨겠어요. 그만하기를 정말 다행이네요. 휴우.

cyrus 2021-01-03 15:35   좋아요 1 | URL
만약 동생이 술에 취해 밖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으면 호적에 동생 이름이 파였을 거예요.. ^^;; 지금 저와 가족 모두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어요.

syo 2021-01-03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이 동생 걱정하시는 말씀을 육성으로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불운한 일이었지만 액땜이라 여기시고 2021년 무탈하고 무난하시길.

cyrus 2021-01-03 15:38   좋아요 2 | URL
올해가 동생의 삼재 마지막 해라서 어머니가 동생을 많이 걱정하셔요. 저는 삼재를 안 믿는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성격이 예민한 어머니는 그렇지 않거든요. syo님도 무탈하세요.

붕붕툐툐 2021-01-03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페이퍼 내용과 사진이 찰떡 궁합이네용~ 꽉찬 별을 본 순간 자동으로 읽고 싶은 책장에 넣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가 섞여 최고의 서평이라 생각합니다~👍

cyrus 2021-01-04 11:45   좋아요 2 | URL
가끔 이런 형식의 글을 써보려고 해요. 경험담이나 사적인 일들을 기록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지나간 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

이하라 2021-01-0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를 다쳤는데 봉합만 하면 될 정도였다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이후에는 올해 다 잘 풀릴 거라고 믿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동생분 상처도 빨리 아물기를 빕니다.

cyrus 2021-01-04 11:46   좋아요 0 | URL
위로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

stella.K 2021-02-2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내가 왜 이 글을 이제야 읽는지 모르겠다.
지금 동생은 어떤지 모르겠네.
정말 많이 놀랐겠다. 정초부터.
근데 사진 증말. 넘 웃겨.ㅋㅋㅋㅋㅋ
진짜 농구 경기에서 저러면 얼마나 웃길까.ㅎㅎㅎ

cyrus 2021-03-01 11:51   좋아요 0 | URL
크게 다치지 않았어요. 생각해보면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어요.. ^^;;

감독이 선수 때리는 게 저 정도면 양반이에요.. ㅎㅎㅎ 과거에는 감독이 훈련 도중에 선수를 구타하는 일이 당연하게 여겼어요. 경기 중에 작전 타임이 있으면 중계 카메라 팀이 벤치의 모습을 촬영해요. 어떤 감독은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해요. 그 장면이 고스란히 생중계돼서 TV에 나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