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 정규 1집 주변인
이진우 노래 / 파스텔뮤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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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
가끔은 그게 너였으면

가끔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
가끔은 그게 너였으면

우리는 반갑다는 말도
못한 채 돌아서겠지

어젠 네 생각이 많이 나서
우리 함께 듣던 이 노래를
온종일 들으며

홀로 너와의 추억에 잠겨
하루 종일 혹시 하는 맘을
간직한 채 있었지

이렇게 멀어지는 걸까
참 많이 좋아했었어 너를

오늘도 네 생각에 잠겨서
우리 함께 듣던 이 노래를
온종일 들으며

홀로 너와의 추억에 잠겨
하루 종일 혹시 하는 맘을
간직한 채 있는 나            - 새벽 정류장 中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역시 그런 추억이 있다. 이 땅 아래 함께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어디에서 우연히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진채로 일상을 보냈던 날들. 우연히 만났을 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늘 예쁘게 입고 싶었고 예쁜 구두를 신고 싶었다. 혹여라도 그가 나를 부르면 달려나갈거라고 준비했던 그 때의 나는, 매우, 피곤했다. 


그래서 그 일을, 그를 사랑하는 일을 끝내자고 생각했다. 이거 이래가지고서야 원, 사람 사는게 사는 게 아니다 싶었던거다. 그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나는 훨훨 날아갈 수 있을것 같았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날 수 있을만큼 가벼운 육체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어쨌든 그 힘든 시간들에 작별을 고하고자 나는 그에게 이별의 편지를 썼고, 당연하게도 그 편지를 부치지 못한채로 그 뒤로도 한동안 그를 좋아했다. 다른 사람을 사귀면서도 내내. 그댈 잊는것보다 그댈 인정하는 게 조금 더 쉬운 것 같아요, 라고 박정현 언니도 노래했듯이. 아, 떠올리자니 머리가 아프구나. 



누가 뭘 어쩌든간에 시간은 흘렀고 파도치듯 했던 격렬한 감정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이제 그를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지 않고, 그가 만나자고 해도 거절할 만큼의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앨범에서 제일 처음 이 곡을 재생시켰을 때, 그래, 이 노래가 내가 이진우의 앨범 중에서 가장 처음 듣게 된 노래였다, 아, 그래 내게도 이런 적이 있었지, 하고 슬며시 웃었다. 누구나 다 그렇구나, 이건 보편적인 감정이야, 하면서. 그렇게 설핏 웃고는, 



그게 다였다. 



이 앨범이 딱 그만큼이다. 격렬하게 추억을 끌어내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흥, 하고 무시할만큼의 멍청한 앨범도 아니다. 아, 그 때는 그랬었지, 하고 웃게 됐던 딱 그 만큼의 앨범. 나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노래들을 불러주다니 완전 땡큐야 할 만큼 감사한 마음이 드는 그런 앨범도 아닌 것이다. 그저 보통의 앨범. 그저 보편적인 노래들이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한숨이 늘었어'를 불렀던 가수라고만 그를 기억하던참에, 그 목소리와 느낌에 끌려 그의 솔로 앨범을 듣게 됐는데, 아쉽게도 내게는 좋다고 팔짝 뛸 만큼의 앨범이 되지 못했다. 뭔가가 부족한 데,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고, 그러면서도 뭔가가 더 있다면 이대로 넘쳐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적당하게 느껴지기도 하니, 나로서는 딱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거다.



한 사람을 알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하지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수키김, 「통역사」pp.462-463)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게다가 그 사람안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모습이 숨겨져 있는가. 그러니까 나는 지난주 심규선의 콘서트에 갔다가 게스트로 나온 이진우를 본 것이다. 그가 수줍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그리고 그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 춤 춘거에요' 하던 그 말을 들은 것이다. 그 순간 내게는 뭐랄까, 그에 대한 애정이 조금, 아주 조금, 쏘옥- 하고 싹텄고, 그래서 그의 앨범을 그 뒤로 다시 한 번 들어보게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다시 들어도 딱히 그 전보다 더 좋아지거나 하진 않았고, 역시나 그저 보통의 보편적인 노래들이었지만, 그의 수줍은 모습은 역시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나로서는 이 앨범에 별을 셋 밖에 줄 수 없지만, 이름 때문에, 그의 이름 때문에, 이름이 너무 멋져서 별을 하나 더 준다. 이진우, 라니. 이름이 참 남자답고 멋지잖아?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별을 넷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리뷰란, 역시 편파적이며 주관적이며 순전히 내 마음대로 일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이번 앨범에 내가 딱히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해도 그가 또 앨범을 낸다면 나는 또다시 들어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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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7-02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 영화쿠폰 안쓰시는 분, 저 좀 주세요!

2013-07-02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2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2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13-07-0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에 그렇게 짜게 굴면서 이름 때문에 별 하나를 더 주다니, 이 편파적인 양반아. 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3-07-03 17:47   좋아요 0 | URL
그게 그렇더라고요. 그러니까, 음, 실제로 눈 앞에서 보니까 뭔가 새록새록 정이 생기는 게 이름도 한 번 불러보고 싶고 말이지. ㅎㅎㅎㅎㅎ
 














1882년 초부터 빈센트는 사촌 형인 화가 모베가 활동하던 헤이그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시엔이라는 창녀를 만났다. 빈센트는 시엔과 함께 살기 시작한다. 시엔은 아버지가 제각각인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었고, 게다가 임신 중이었다. 빈센트는 시엔의 불행한 처지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그녀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 「슬픔」은 시엔과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린 것이다. (p.154)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년




언젠가 티븨에서 한 남자연예인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그녀가 너무나 가여워서 그 처지가 불쌍해서 자신이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항상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옆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그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참 싫다' 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상대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니. 내가 상대 여자의 입장이라면 그런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내가 그 입장에 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며칠전에 읽은 츠바이크의 『연민』에서도 유능한 의사가 자신이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던 맹인 여자를 치료할 수 없게 되자 그녀와 결혼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상대의 불행에 대해 연민을 갖고 동정심을 갖고 도우려는 건 숭고하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삶을 나와 함께 하겠다, 라는 마음이 단순히 동정심과 연민에 기반한 거라면, 그 삶이 지속적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다면, 상대를 상대 그 자체로서 사랑하고 매력을 느끼고 옆에 있고 싶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연민을 읽으면서도 내내 고민했던 것을, 이 책,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를 읽으면서도 했다. 


연민으로 시작된 관계가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시엔은 빈센트의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빈센트는 시엔과 자신이 그동안 겪어온 슬픔과 고통을 바탕으로 서로 의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활은 어수선하고 고달프기 이를 데 없었다. 빈센트의 그림은 전혀 팔리지 않았고, 사실 아직은 기본기를 익혀야 할 시기였다. 빈센트는 테오가 보내주는 약간의 돈을 빼고는 생계수단이 없었다. 이 돈을 모델과 재료비, 그리고 시엔과의 생활비로 나누느라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다.

시엔은 살림도 아이들도 찬찬히 보살피질 못했다. 오랫동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꾸려왔던 터라 절망과 무기력에 젖어 있었다. 빈센트가 기대했던 따뜻하고 안정된 삶을 선사할 반려자가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집안은 끊임없이 덜거덕거렸고, 정작 빈센트는 작업에 필요한 비용도 확보할 수 없었다. 시엔에게 돈을 주지 못하면 그녀는 다시 남자들을 상대할 터였다. 시엔은 빈센트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다. (p.156)




빈센트의 이야기를 읽노라니, 연민의 이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이 순간 우리가 서투른 연민으로 서로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그리고 뼈저리게 경험했다. 처음으로, 그리고 너무 늦게. (p.291)










연민은 그 감정이 선의로 시작한다고 해서 무조건 드러내는 것이 좋은 건 아니다. 그것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한다면 나와 상대 모두에게 치명적이다.



빈센트는 시엔의 비참한 처지에 자신이 느끼던 슬픔과 절망을 투사했다. 다시는 시엔이 남자들을 상대하며 살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다짐했건만 그녀를 구제하지도 스스로를 구제하지도 못했다. (p.158)




이 책을 보다가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그림은 카유보트의 그림이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 1875 년



이 그림이 너무 신기했다. 뒷모습만 보이는 이 그림이. 그의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고, 그의 스토리를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데, 그의 표정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는거다. 저런 포즈로 창 밖을 내다보는 그가 웃고 있지는 않을거라는 게 확실하달까. 그는 아마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약간 멜랑콜리한 기분인 게 아닐까. 상념에 젖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저 뒷모습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을것 같은 남자를 상상하게 한다. 계속해서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뒷모습만으로도 그림의 분위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전할 수 있지? 신기했다. 이 화가의 다른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 철교」, 1876-77년




뒷모습이란 건 원래 그런걸까? 하나같이 쓸쓸하게 보이는 걸까? 뒷모습이란 건 그런 이미지를 줄 수 밖에 없는걸까? 이 그림에서도 철교의 저 쪽 편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하염없이 쓸쓸해 보인다!!




위의 두 그림이 아주 인상깊었는 데, 아래의 그림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드가의 그림.




에드가 드가, 「목욕통」, 1885-86년



이 그림을 보고 받은 느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이지 어휘력과 표현력이 떨어지는구나. 그저 아 좋다, 할 뿐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무서웠다!!



피터르 브뢰헬,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1568년



이 그림은 '르동'의 목이 잘린 그림들보다도 더 큰 무서움과 슬픔을 가져다줬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맹인들이 서로를 의지해 가고 있는데, 맨 앞의 맹인이 도랑에 빠지고 만다. 그의 인도를 받던 다른 맹인들이 이제 차례로 도랑에 빠지는 것은 뻔한 일. 하아-






빈센트 반 고흐, 「슬픔에 잠긴 노인」, 1890년


처음 시엔의 슬픔을 그렸던 반 고흐가 이제는 슬픔에 잠긴 노인을 그렸다. 드러나지 않는 표정에서, 얼굴을 가린 두 손과 힘없는 어깨에서 그가 얼마나 슬픈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슬픔은 이제 시엔의 슬픔에서 자신의 슬픔으로 옮겨온걸까. 시엔의 슬픔을 그리고 8년이 지나 그린 그림이다.




헨리 월리스, 「채터턴의 죽음」, 1856년



자신이 쓴 시가 보잘것 없는것으로 평가되자 열일곱살의 나이에 비소를 먹고 자살한 채터턴.




에드바르트 뭉크, 「그 다음 날」, 1894-95년



위의 채터턴은 자살을 한 거라면, 이 그림 속의 여자는 잠들어 있는거다. 그리고 표정에서 잠 든거란 걸 알 수 있다. 아니, 잠들었다기 보다는 저 술병들을 보건데 술마시고 기절한 게 아닐까. 그런데 왜 저렇게 혼자 잠들어 있을까.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잠드는 건 지금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그림 속의 여자에겐 어쩐지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토요일엔 심규선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객석이 빈자리 없이 메꿔진 건 아니었지만, 심규선의 노래를 직접 듣겠다며 찾아온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심규선의 아버지가 와 계시다고 했다. 콘서트의 끝무렵 심규선은 아버지에게 인사했고, 아버지는 객석 사이에서 두 팔을 들어 응답하셨다.  그 때 그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딸이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콘서트에는 연인들이 오기도 했지만 남자 혼자 온 사람들도 많았고, 남자들끼리 같이 온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남자들끼리 영화도 잘 보러 가지 않는 것 같은데, 심규선을 보기 위해서 만난 남자들이라니. 어쩐지 심규선이 부러워지는거다. 심규선의 팬까페 운영자도 남자라고 했는데, 확실히 남자들한테 더 인기있는 가수인가 보다. 부러워...........





그건그렇고, 6월이 다 갔다. 올해초에 인터넷으로 본 사주에는 6월에 내가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했는데!! 그도 나를 한 눈에 알아보고 나도 역시 그를 한 눈에 알아볼 거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만 믿고 콘서트장에, 극장에, 카페에, 산에 마구 나를 노출시켰건만....니미.............7월이왔네. -_- 아무일도 없이 7월이 왔어. 인터넷 사주따위.. -_-




오늘 출근길에는 이 노래를 들었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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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3-07-0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력아닐까? 음력으로 6월이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ㅎㅎ

다락방 2013-07-02 08:00   좋아요 0 | URL
앗. 그..그...그런걸까? 희망을 가져야겠다능! ㅋㅋㅋㅋㅋ

twoshot 2013-07-0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처럼 매우 훌륭한 산문입니다! 결정적으로 nimi가 들어가네요...ㅎㅎ

다락방 2013-07-02 08:01   좋아요 0 | URL
삶은 언제나 nimi 의 연속이 아닙니까, 투샷님. ㅋㅋㅋㅋㅋ

프레이야 2013-07-0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미 ㅍㅎㅎㅎ 다락방님, 전 고흐의 그림이 대개는 늘 슬퍼요. 저 노인도 그렇군요. 네, 서투른 연민은 거두어들여야 하는 게 맞겠어요.

다락방 2013-07-02 08:02   좋아요 0 | URL
전 고흐의 그림을 슬프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그런데 저 노인 그림 슬퍼요. 그리고 드가의 그림이 무척 좋아요!

여기는 지금 비 엄청 오고 있어요, 프레이야님. 거기도 그런가요? 새벽부터 계속 내리네요.

Mephistopheles 2013-07-01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본명을 아는 택배 아저씨는 인연이 아니였던게로군요..

다락방 2013-07-02 08:02   좋아요 0 | URL
아 그아저씨는 친절이 너무 과해서 인연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ㅠㅠ

아무개 2013-07-02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는 어느정도의 연민도 섞여 있는거 같긴해요. 뭔가 참 안쓰럽고 잘해주고 싶고 뭐 그런거 말이에요....
물론 그 연민이 전부가 되면 안되겠지만요.

차 타는 곳까지 10분 걸었는데 완전 쫄딱 젖었어요.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서 말리는 중입니다.
에이 꾸질꾸질 찝찝해.
비오는 건 싫지만 그래도 이번주는 쫌 쫙쫙 내려 줬음 좋겠어요. 이번 금욜에 실미도로 단합대회를 간다고 하는데
엄청난 멀미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저는 벌써부터 진이 빠져서 어떻게든 취소 되기만 기대하고 있다는.....ㅜ..ㅜ


다락방 2013-07-02 10:31   좋아요 0 | URL
몇 주전에 본 주말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해요. 연민 없는 사랑이 있을까요? 라고. 그 말을 듣고 전 굉장히 놀랐거든요. 정말? 다른 사람들의 사랑 속엔 연민이 존재해? 저는 누가 저를 동정해서 사랑한다고 하면 정말 불쾌할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식의 시선 때문에 그를 사랑할 수 없었던 적도 있고요. 마찬가지로 상대에 대해 가장 처음 가진 감정이 불쌍함이나 동정이었다면 그걸 계기로 그를 사랑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싶고요. 제게는 아직도 '연민 없는 사랑이 있을까요?' 라는 질문이 낯설고 충격적이에요. 어쩌면 이게 보편적인 감정인걸까, 싶기도 하지만 저는 아직 잘 받아들이질 못하겠어요.

저는 빗소리 듣는 건 좋지만 출퇴근길에 비가 내리는 건 정말 싫어요. 우산 들고 걷고 차 타고 하는게 영... ㅠㅠ 제 남동생도 금,토에 회사에서 야유회를 간다던데, 아무쪼록 아무개님과 제 남동생의 회사 일들이 죄다 취소되기를 바랍니다. ㅠㅠ

자작나무 2013-07-0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팅을 다락방 님의 최고작으로 꼽고 싶네요!

다락방 2013-07-02 12:18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제가 이 댓글 읽고 제 포스팅 다시 읽어봤는데(덕분에 오타 하나 고쳤네요) 딱히 뭐 훌륭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하하핫 ;;

단발머리 2013-07-02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너무 좋아요. 어제밤에 읽었는데, 지금 한 번 더 읽어봣어요.

제일 좋은 부분은 "상대에 대한 연민"이 사랑으로 이루어저서는 안 된다는 다락방님 얘기구요,
두번째로 좋은 부분은 ㄴㅁ ㄹ 이요.

알라딘에서는
강제적으로요.

다락방님이 이틀에 한 번씩은 이런 멋진 페이퍼를 올릴 수 있도록
갖은 방법을 다해 강제해야합니다.

이 연사,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다락방 2013-07-02 17:3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단발머리님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제대로 말을 못하고 이니셜만 씁니까, 왜요, 대체 왜요!! 그냥 질러버려욧! 내뱉으란 말입니다! 참지마욧!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 봐도 별 거 없는 페이퍼를 멋지다고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단발머리님의 눈엔 콩깍지가 씌었나봐요. 희희희희희. 벗겨지지 말아야 할텐데요. 훗 :)

2013-07-02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13-07-0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이 노래 맘에 들어요. 방금 이거 틀어 놓고 기분 좋게 커피 끓이려다가 전기밥솥 취사 버튼 눌렀습니다. 다락님은 이걸 더 좋아하겠지, 하고요.

다락방 2013-07-03 17:48   좋아요 0 | URL
우앙- 네꼬님도 마음에 든다고 하시니 무척 기쁩니다. ㅎㅎ
밥은 잘 됐어요? 먹었어요? 김 모락모락 나는 밥, 완전 맛있겠어요! >.<
그런데 오랜만에 왔으면 페이퍼든 리뷰든 하나 내놔야지, 응?, 왜 댓글만 달고 그냥 간담? 흥!

따라쟁이 2013-07-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디, 제가 너무 늦은것은 아니길. ^_^
여름이네요

다락방 2013-07-08 12:05   좋아요 0 | URL
늦었어요. 늦었지만, 자주 오면 용서해줄게요. ㅎㅎ
 
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선한 의도로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포장하긴 쉽지만, 서투른 연민은 파멸과 절망을 가져온다. 오타가 많아 짜증나지만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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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6-3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조한 마음.으로 사야겠네요. ^^

다락방 2013-07-01 13:27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님 꼭 읽어보세요. 드림아웃님도 정말 좋아하실거에요!
 















으아아악 상반기 결산 페이퍼를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지금 읽는 중인데, 오늘 아침 출근길, 으으으윽, 소녀가 자신의 흥분을 이제 더이상 숨기지 못하고 소위에게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는 그 순간, 내가 내려야 할 역이라는 방송이 나온 것이다. 아, 미치겠네. 왜 하필 벌써...하아-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직은' 아니다. 절반정도 읽은 현재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것은 제목대로 연민에 대한 이야기이고, 엄청 재미있고 정말 '잘.쓰.여.진' 글이라서 감탄과 감동을 번갈아하며 읽는중. 절반만 읽은 현재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일단 끝까지 읽고나서 하자. 그나저나, 이 책은, 왜, 품절인가!!!!!!!!!!!!!!!! 대체 왜!!!!!!!!!!!!!!!!!!!!!!!!!!!!!!!!!!!!!





스테이크 먹고싶다.







13:34 덧붙임.

위의 품절된 『연민』은 『초조한 마음』으로 나왔다고 에르고숨님께서 댓글로 제보해주셨다. 만세!! 앗싸!!

아직 츠바이크의 연민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어서 읽어보세요,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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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013-06-2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츠바이크의 책은 아주 소장가치가 높은데! 왜 품절일까요!

다락방 2013-06-28 09:13   좋아요 0 | URL
어떻게 해야 이 품절이 풀리려나요.. orz

Jeanne_Hebuterne 2013-06-2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글을 생생하게 다루는 사람은 제겐 전무후무였어요.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는 저 헉스러운 표지에도 불구하고(어찌보면 그런데 또 어울리기도) 계속 읽고 또 읽고. 읽다 보면 그녀가 꼭 저같기도 하고 제가 그녀같기도 한 것은 츠바이크가 그만큼 글을 자신의 것으로 다루었기 때문인 듯합니다.저 책은 다시 책장에서 가져와 읽어야겠어요.


'연민'은 아마 스탕달이라면 삼십 페이지 분량의 단편으로 다루었을 듯한 소재인데 츠바이크는 그걸 길게 늘이고 주름 하나하나 결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면서도 지치지 않고 끌려가지도 않는다는 생각. 그의 머릿속을 거치면 글은 도구가 되고 인간은 그 자체가 기준이 되는 것 같아요.


결론-츠바이크 만만세


다락방 2013-06-28 13:41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 그래요, 쟌님.
연민 읽으면서 연민이 생기는 시점부터 그것이 과도하게 작용하기까지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안타까웠다가 이해했다가 지금 어쩔줄을 모르겠어요. 평소에 연민에 대해 제가 생각하던 것도 책과 겹쳐지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요.

그런데 쟌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문득 이렇게 분석적인 글을 쓰시는 쟌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 궁금해졌어요. 칼럼 같은거 쓰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문학 칼럼. 스탕달이라면 삼십 페이지로 다루었을 것을 츠바이크는 주름 하나하나 결 하나하나를 쓰다듬는다, 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여튼 지금 저는 어서 빨리 퇴근해서 연민을 읽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ㅠㅠ

레와 2013-06-2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드디어 [연민]을 읽는다!!!!! 만만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Jeanne_Hebuterne 2013-06-28 09:12   좋아요 0 | URL
레와님, 우리 모두 만만세 입니다 ㅎㅎㅎㅎㅎㅎ

레와 2013-06-28 11:11   좋아요 0 | URL
다음 새벽 세시, 모임의 주제는 [연민]입니까?!
다시 읽고 싶어지네.. 엄두가 안나지만.ㅋㅋ

다락방 2013-06-28 13:38   좋아요 0 | URL
회사에서 뛰쳐나가 책 읽고 싶어요. 엉엉. ㅠㅠ
그렇지만 아프락사스님은 아직 연민을 안읽었을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

자작나무 2013-06-2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책소개책 한권 내보시는것 어때요? 정혜윤 피디보다 더 잘쓸것 같아요.

다락방 2013-06-28 13:38   좋아요 0 | URL
우앗, 칭찬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자작나무님.
제가 책 내면 사 주실 건가요? 네?

자작나무 2013-07-02 12:15   좋아요 0 | URL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다락방 2013-07-02 12:19   좋아요 0 | URL
ㅎㅎ 약속 하셨습니다!!

에르고숨 2013-06-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 버전으로 읽었는데, 품절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겠던 걸요. 새 번역본이 대산에서 나왔더라고요. <초조한 마음>이라는, 아마 원제에 더 가까운 제목으로. 새 옷을 입고 나오니 요놈도 지르고 싶은 게 오히려 걱정거리일 듯요.
저도...(쑥스-) 츠바이크 만만세효.

다락방 2013-06-28 13:37   좋아요 0 | URL
아, 에르고숨님 감사드려요!
저 이 책을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품절이라 막 속상했어요. 에르고숨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계속 속상해하고만 있을뻔 했네요. 정말 좋아서 세상에 두루두루 읽히고 싶습니다. 흑흑 ㅠㅠ
정보 감사드려요!! >.<


LAYLA 2016-02-17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이 이 책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어떤 글을 쓰셨나 검색을 했는데 아니 이런 감질나는 페이퍼가...ㅎㅎㅎ

다락방 2016-02-17 10:52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러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페이퍼엔 안썼지만 아마 [독서공감]에 뭔가 썼을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페이퍼 읽어보니 좀 부끄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티타늄



펠리체 판티노에게




부엌에는 마리아가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을 한, 키가 매우 큰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신문지로 만든 종이배를 머리에 쓰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하얀 장롱에 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얀 페인트가 어떻게 그리 작은 통 속에 담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가끔 파이프를 장롱 위에 올려놓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가 휘파람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따금 쓰레기통 쪽으로 가서 침을 뱉은 뒤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쉽게 말해 그는 너무나 이상하고 낯선 행동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흥미로웠다. 장롱이 하얗게 칠해지자 그는 페인트 통과 바닥에 널려 있던 신문지들을 주워 모두 찬장 옆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찬장도 하얗게 칠하기 시작했다.

장롱이 너무나 윤이 나고 깨끗하고 하얘서 그걸 꼭 만져봐야 할 것 같았다. 마리아가 장롱에 다가가자 남자가 알아차리고 말했다. "만지지 마라, 만지면 안 된다." 마리아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왜요?" 그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만질 필요가 없으니까." 마리아는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하얀 거에요?" 무척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남자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타늄이니까."

마리아는 괴물이 등장하는 동화책을 읽을 때처럼 두려움으로 인한 전율이 기분 좋게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는 주의 깊게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 어디에도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제 뭘 자른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티타늄의 이탈리아어 발음 '티나니오'를 '티 탈리오'(너를 잘라버리겠다)로 잘못 알아들었다.) 이 질문에 남자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거였다. "네 혀를 잘라버리겠다."하지만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널 자른다는 게 아냐. 티타늄이라고."

결론적으로 그는 매우 힘이 센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자하고 친절해 보였다. 마리아가 물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대답했다. "펠리체." 그는 입에서 파이프를 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할 때면 파이프가 위 아래로 춤을 췄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남자와 장롱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대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왜 이름이 펠리체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절대 이유를 물어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친구 알리체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이름이 알리체(알리체는 여자 이름이지만, 작은 멸치인 '앤초비'라는 뜻도 있다. 알리체와 펠리체의 발음이 비슷해서 이렇게 생각한 것.) 였다. 이 남자 같은 어른의 이름이 펠리체라는 게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차츰차츰 이 남자를 펠리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펠리체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칠을 한 장롱이 너무 하얘서 부엌에 있는 다른 물건들이 누렇고 더럽게 보일 정도였다. 마리아는 장롱 옆에 가까이 가봐서 안 될 것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만지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가 발끝으로 살금살금 장롱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갑자기 돌아보더니, 마리아와 두어 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하얀 백묵을 꺼내더니 마리아가 서 있는 바닥에 둥근 원을 그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 원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그러더니 성냥을 켜서 입술을 이상하게 비틀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찬장을 칠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쪼그리고 앉아서 오랫동안 둥근 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원에 출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문질러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백묵 자국이 지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가 이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원은 분명 마법의 힘이 있었다. 마리아는 가만히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발을 뻗어 발끝으로 원을 건드려 보았고 거의 균형을 잃을 정도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장롱이나 벽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 뼘 이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찬장이, 의자들과 식탁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하얘지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남자는 붓과 작은 통을 내려놓고 머리에서 신문지 종이배를 벗었다. 모자를 벗자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머리가 드러났다. 잠시 후 남자는 발코니로 나갔다. 마리아는 그가 뭔가를 뒤적이는 소리를 들었고 옆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리아가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처음에는 조그맣게 그러다가 점점  크게 하지만 지나치게 크게 부르지는 않았다. 사실은 혹시 남자가 그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가 부엌으로 돌아왔다. 마리아가 물었다. "아저씨 이제 나가도 돼요?" 남자는 마리아와 둥근 원을 내려다보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말들을 했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물론이지. 이제 나와도 돼." 마리아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걸레를 집어 마법을 풀기 위해 원을 깨끗이 지워주었다. 원이 사라지자 마리아는 일어서서 깡총깡총 뛰어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는 아주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다. (pp.240-244)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티타늄 편의 전문이다. 어젯밤 잠들기 전, 이 티타늄편이 생각났고 나는 내일 출근길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장에서 꺼내어 침대 옆에 두었다. 출근준비를 하고 나가기 전, 이 책을 가방에 챙겨 넣었고, 티타늄편을 보기 위해 책을 펼치려다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이건 뭐지? 포스트잇은 수소 편에 붙어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수소편을 읽었다. 좋았다. 그리고 티타늄편. 짧은 이야기이고 지하철 안에서 다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 마음은 놀랄 정도로 따뜻해졌다. 새삼 소중한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들이 읽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이야기를 읽고 그들도 나처럼 웃게 되면 좋을텐데! 여동생에게는 매일매일 조금씩 문자로 찍어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 수고하자, 손으로 전문을 치자, 생각했다. 그리고 알라딘에 올리자. 그러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글을 읽고 기분 좋아질 수 있다. 그리고 링크를 여동생에게 줘야지.




다 읽고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가는 출근길, 늘 놀이터에서 운동하는 아저씨는 오늘도 한결같이 거기 계셨고, 요쿠르트 배달하는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로 거기 계셨다. 어제는 두 손녀와 함께 아침 산책을 하던 할머니가 오늘은 나오질 않으셨네. 매번 큰 길로 가다가 며칠전부터 골목으로 찔러가는데, 골목길을 싫어하는 나지만, 그 아침의 풍경이 좋아 그 뒤로 자꾸만 골목으로 간다. 오늘은 저 쪽에서 마주 걸어오던 여자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아이쿠. 웃으면 안되는데, 나는 이 모든 풍경들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프리모 레비 덕이고, 티타늄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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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3-06-2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에서 이 부분이 가장 좋았었어요!

다락방 2013-06-27 15:32   좋아요 0 | URL
수소도 좋아요! 물론 티타늄이 으뜸이지만요. 다시 읽어도 기분 좋아요. 헤헷.

알케 2013-06-2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아시겠지만 프리모 레비 할배 책의 좋은 짝지는 샘 킨의 <사라진 스푼>이죠.
<주기율표>가 전기라면 <사라진 스푼>은 열전 ...
아포리즘으로 가득 찬 잠언집 대 살짝 드라이한 엔트리급 대중 과학서.

병독하면 시너지가..

다락방 2013-06-27 15:32   좋아요 0 | URL
아뇨, 알케님. 저 사라진 스푼 몰랐어요. 지금 이 댓글 읽고 검색했다가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병독하면 시너지..란 말씀이시죠? 오케바리. 접수요!

Forgettable. 2013-06-2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사랑에 빠진 삘이 ㅋㅋ

다락방 2013-06-27 15:32   좋아요 0 | URL
네?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레이야 2013-06-28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도 티타늄과 수소 편을 찾아서 볼래요. 다락방님 눈에 걸린 정겨운 아침풍경을 따라 저도 씽긋~~^^

다락방 2013-06-28 09:1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읽어보세요. 정말 좋아요. 주기율표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흐흣 :)

레와 2013-06-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다. ♡


나에게 티탸늄이란 값비싼 카메라 바디의 소재, 등산 스틱의 소재,
단단하고 무거워 보이는 그 무엇이 티타늄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면 놀랍도록 가볍지만 고가의 그 무엇이였는데..
이토록 예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ㅎㅎㅎ

이 책이 그렇게 좋단 말이죠!? 앙?! ㅋㅋㅋ


다락방 2013-06-28 13:45   좋아요 0 | URL
응 그렇지만 빨리 읽히지는 않는 책이에요. 천천히 읽어야 되는 책이죠. 어제 여동생도 이거 읽고 정말 좋다고 너무 예쁘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남동생은..........하아- 나오지 말라고 원 그린게 뭐 그리 대수냐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내가 다시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정말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냐고 되물었더니 "그렇게 받아들여야 되냐?" 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응, 이라고 했더니 "그럼 이젠 그렇게 받아들여보지 뭐." 라고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