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은 어릴적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실제의 삶에서는 늘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건 아니다. 게다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리저리 얽혀있는지라 나에겐 나쁜 사람이 내 옆 사람에겐 구원의 상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벌을 주고 싶지만 다른이는 그에게 충성할지도 모를일이다. 또한 그 '나쁜'일 이라는게 혹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어디까지나 내 기준일 뿐이지 않은가. '절대적으로 옳다'는게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 기준에서 옳다'고 믿는걸 옳다고 말할 뿐이 아닌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는 자신 있는 거음걸이로 길을 가로질러 내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그는 줄곧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지나오는 길 위의 공기마저도 그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환히 열리는 것 같았다. 그 소년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미소 띤 얼굴로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마치 정복자 같은 당당한 태도에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이었다. (p.39)

 

 

이 책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소심하고 사교성 없는 소년이다. 친구도 별로 없고 파티에서도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앞에 니콜라가 나타난다. 잘생기고 사교성도 어마어마하고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모든 여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그런 소년. 그런 소년이 인기 없는 에드워드의 앞으로 걸어와 자신을 소개한다. 에드워드에겐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일이다.

 

 

바로 그때부터 나는 니콜라의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나 자신의 내부를 텅 비우기 시작했고 내 자아와 욕망들을 포기했다. 그가 어디에 함께 가주기를 원하면 나는 당장 그의 시간에 내 스케쥴을 맞추었다. 그가 뭔가 부탁하면 나는 당장 그의 시간에 내 스케줄을 맞추었다. 그가 뭔가 부탁하면 무슨 일이든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었고,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꼈다. 나는 그런 일종의 겸손한 자부심을 갖고 그의 온갖 변덕에 봉사했다. 나보다 훨씬 나은 누군가 니콜라의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조바심마저 났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자기만의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의 경우, 나 자신에게서 사랑할 만한 부분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사랑을 그에게만 집중시켰다. 나는 기꺼의 그의 제단 앞에 나 자신을 바쳤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한 명의 노예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닐까? (p.43)

 

 

에드워드는 자신과는 정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니콜라의 자발적 노예가 된다. 그의 옆에서 그를 더 빛나게 하는데 일조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은 잘못이지만,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노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이럴때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걸까. 누군가 내 위주로 살고자 노력하는데, 나로서는 그게 싫지 않아 내버려둔다면, 그런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을까.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그래서 매우 어렵다. 하나의 행동을 놓고 그 행동 하나만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 뒤의 사연들을 알고 나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만다. 에드워드와 니콜라가 어른이 되어서 하는 일도, 그 관계도 마찬가지. 에드워드는 니콜라가 과거에 저지른 큰 잘못에 대해 알게되고, 이에 니콜라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그 복수는 성공한다. 그렇다면 니콜라는 악인이고 에드워드는 단지 복수를 한 사람일 뿐일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면, 그건 잘못이다. 그러나 그것이 '복수'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아 그럴수도 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다시, 그 파멸이 어마어마한 것이었다면 그 때도 복수 때문이니까 할 수 없어, 라고 넘길 수 있을까. 역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무릇 자기를 선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이라면, 그를 '용서' 하지 그랬냐고 조언할 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그 용서라는 건 뭘까. 피해를 당한건 나인데 다른이들이 내게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용서라는 게,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길일까. 용서는 최선일까?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아무것도 명확해지질 않았다. 나는 니콜라가 잘생기고 인기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노예부리듯 하고 무시하는 것도 그의 성격에 형성 되었을 거다. 여기에 분명 니콜라의 잘못과 니콜라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이 있다. 에드워드도 마찬가지. 그가 그의 소심한 성격을, 부족한 사교성을 원망하며 찬란하게 빛나는 남자의 자발적 노예가 되고자 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소심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누군가의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에드워드에게도 무조건 잘했다고 할 수 없다. 그 뒤에 벌어진 표절에 대한 일도 마찬가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에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몰락시키겠다는 생각 역시 이해할 수 있지만, 또 가혹하게도 느껴진다. 여기에 있어서도 내 판단은 보류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에드워드가 여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일에 있어서도, 나쁜 일 때문에 만났다고 반드시 나쁜 사람들과는 얽히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주니,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선한 게 어디 있기나 한걸까.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을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해주는 것이 옳을까.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매뉴얼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아주 디테일한 매뉴얼. 이건 잘못이고 이건 잘못이 아니다. 이 정도 잘못을 했다면 이정도 벌이 적당하다. 이정도 잘못이라면 이정도 용서가 적당하다. 실생활에 가능한 매뉴얼. 그렇다면 머릿속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텐데. 그저 매뉴얼을 쭉 펴놓고 목차를 보며, 가만있자, 얘가 이랬으니까 이 정도 벌을 주면 되겠구나, 하고. 뭐, 그래봤자 말도 안되는 생각인 것 같지만.

 

 

 

일전에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다. '저 아이가 뚱뚱해진다고 해서 내가 날씬해지는 건 아니다' 라는. 학교에서 인기있는 여자애를 뚱뚱하게 만들기 위해 주인공이 노력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자기가 날씬해지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야광토끼'의 [Can't stop thinking about you]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만약에 내가 너를 그녀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그래도 넌 그녀를 택했겠지 난 그냥 아닌거지' 라는. 내가 뭔가를 더 못하고,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는 것이 다른 누구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이 '쟤만 없었어도..' 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아닌 남을 원망한다. 이 책속의 에드워드도 마찬가지. 니콜라는 더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에드워드의 창작력이 솟아나진 않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건 타인이지만, 우리가 봐야만 하는 건 자신이다.

 

 

 

 

이 책을 다 읽고 오늘 출근길에 읽기 시작한 책이, 와, 너무 재미있어서!!! 좋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를만큼. 잠깐만 얘기하자면, 오래된 궤짝이 나오고, 그 안에 오래된 편지들이 들어있고...........................희희희희희. 그 책이 너무 읽고 싶어서, 계속 읽고 싶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지금 당장 퇴근하고 싶다. 아니,

 

 

지금 당장 퇴사하고 싶다. 퇴! 사!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3-09-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멋진데요.

사실, 니콜라 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지만, 조금 이해가 되기는 해요. '나를 필요로 한다는 자부심' 그런게 은근 무섭지요.
오래된 궤작과 오래된 편지 이야기 너무 궁금하기는 한데요, 그래도 퇴사는 안 됩니당!

잠깐, 자꾸 안 된다고 하면 아니되니, 안 돼요, 돼요, 돼요??

다락방 2013-09-06 16:32   좋아요 0 | URL
나 좋다는데, 자발적 노예가 되겠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긴해요. 그치만 저는 자신의 모든 스케쥴을 저를 기준으로 맞춘다면, 그걸 제가 알게 되는 순간 부담감이 작렬해서 절교를 선언할 것 같아요. 어휴..전 부담을 주고 받는 관계를 정말 질색팔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빨리 퇴근해서 오래된 궤짝과 편지 이야기 읽고 싶어요!!

네꼬 2013-09-0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아악! 퇴사는 (아직) 하지 말고, 그 책이 뭔지 당장 밝히시오!


다락방 2013-09-06 16:32   좋아요 0 | URL
므흐흐흐흐흐흐흐 퇴근부터 하고, 다 읽은 뒤에 밝히겠소. 참으시오!

moonnight 2013-09-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닛!!! 오래된 궤짝 속의 오래된 편지 이야기가 뭐예요 도대체. 궁금궁금궁금 +_+;;;;;;

다락방 2013-09-06 16:32   좋아요 0 | URL
다 읽고나면 페이퍼 한 방 쓰도록 하겠습니다. 움화화화화화화화화화핫

무해한모리군 2013-09-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 제목을 어서 밝혀주셔야 제가 지금 주문해서 주말에 읽을거 아닙니까??? 다락방님~~~~

저 책이 영화로도 있는거지요?
그런 메뉴얼을 만들려면 혹은 읽으려면 그것만해도 전 생애를 바쳐야겠다 그죠? ㅎ

다락방 2013-09-06 16:33   좋아요 0 | URL
네, 영화로도 있다고 했던 것 같아요.


오래된 편지의 제목은 다 읽고난 후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움화화핫. 이번 주말엔 사둔 책들 중 안읽은 다른 책을 읽으세요, 휘모리님!!

관찰자 2013-09-0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타인이지만, 우리가 봐야만 하는 건 자신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아침부터.^^

다락방 2013-09-06 16:34   좋아요 0 | URL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분명히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인것 같아요. 그 기준 자체가 모호한 일이니까요. 다 읽고나니 좀 복잡했어요.

꺅 금요일입니다요~~

그렇게혜윰 2013-09-0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그리 오래된것도 아니고 흥미롭게 읽었던것같은데 다락방님글읽기전엔 내용 전~~~혀 생각안났다는ㅠㅠ 그나저나 궤짝편지책 정말 궁금해요!!

다락방 2013-09-09 13:10   좋아요 0 | URL
궤짝편지 이야기는 '카티 나우만'의 [오래된 편지] 였습니다. 바로 위에 페이퍼 써놓았고요. 제가 읽고난 감정은 엄청났는데 막상 글로는 잘 표현이 안되는 것 같아요.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