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院紀行(1)]

書院의 嚆矢이자 最初의 賜額書院

- 紹修書院 -

李浩一(小說家)


  우리나라 書院의 嚆矢이자 最初의 賜額書院으로 有名한 紹修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慶尙北道 榮州市 順興面 內竹里이다.

  順興 地方이 只今은 一介 面에 不過하나 本디 高句麗의 及伐山郡으로 新羅 景德王 때는 岌山郡이었다가 高麗 初에 興州로 고쳤으며, 이 고을에 忠烈王 ․ 忠肅王 ․ 忠穆王의 胎를 安置한 뒤에는 地名을 興寧縣令 ․ 知興州事 ․ 順興으로 고치고 府로 昇格시켰다. 그리고 朝鮮 太宗 때인 1413年에는 都護府로 또다시 昇格되었다. 그러나 1457年(世祖 3) 順興에 流配돼 있던 世宗의 여섯째 王子 錦城大君이 順興 府使 李甫欽과 함께 端宗의 復位를 圖謀하다가 失敗함으로써 都護府가 廢止되어 豊基郡과 榮川郡, 奉化縣에 各各 나뉘어 隸屬되고 말았다.

  紹修書院은 順興面 東北쪽 거북이 엎드린 形象의 靈龜峰 아래에 있다. 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이 神靈스러운 거북이 알을 품는 자리라고 한다. 老松이 鬱蒼하게 에워싸고 있는 紹修書院은 小白山의 草庵溪谷에서 發源한 시냇물로 太白山의 黃池와 함께 1,300里 洛東江의 源流를 이루는 竹溪水가 감돌아 흐르고 있어 빼어난 景致를 자랑한다. 竹溪水가 흐르는 溪谷 周圍에는 바위가 屛風처럼 펼쳐져 있어 鬱蒼한 松林과 함께 絶景을 빚어내고 있는데, 書院에 配享된 謹齋 安軸은 <竹溪別曲>에서 ‘아, 小白山 높고 竹溪水 맑은 風景 그 어떠합니까’라고 이곳의 景致를 讚揚하고 있다.

  紹修書院 入口에는 높이 4미터에 이르는 幢竿支柱가 서 있다. 寶物 第59號로 指定돼 있는 宿水寺 터 幢竿支柱로서, 紹修書院 자리가 本디 宿水寺란 큰 절이 있던 터임을 證據하고 있다. 이곳에 있던 宿水寺는 統一新羅 때 세워진 大伽藍으로 高麗 때까지는 크게 隆盛했으나 朝鮮의 抑佛崇儒政策으로 衰落을 거듭하다가 그 자리를 紹修書院에 내주고 만 것이다.

  幢竿支柱를 지나 선비의 節槪를 象徵한다 하여 學者樹로 불리는 松林 사이를 걸으면 紹修書院이 나타나고, 書院의 正門 옆에 세워져 있는 景濂亨을 만날 수가 있다. 愼齋 周世鵬(1495~1554)이 세운 亭子로서, 우리나라 亭子 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亭子의 이름을 ‘景濂亨’이라 한 것은 儒敎 哲學을 創始하여 宋學의 始祖로 불리는 中國 北宋의 儒學者 濂溪 周郭頤를 景慕하는 뜻에서였다는 것이다.

  紹修書院은 1541年(中宗 36) 豊基 郡守로 赴任한 周世鵬이 平素에 欽慕하던 性理學者 晦軒 安珦(1243~1306)을 配享하기 爲한 祠堂을 세우면서 비롯되었다. 周世鵬은 1542年 頹落한 宿水寺를 헐고서 安珦의 祠堂을 세웠다. 安珦이 어린 時節 노닐면서 工夫하던 옛 宿水寺 자리에 그를 配享하는 祠宇를 建立한 것이다. 그리고 1543年 祠堂 東쪽에 學舍를 지어 書院의 骨格을 갖춘 周世鵬은 安珦의 影幀을 서울의 宗家집에서 옮겨다 奉安하고 書院 이름을 白雲洞書院이라 했다. 書院 이름을 白雲洞이라 한 것은 朱子가 講學한 白鹿洞書院을 本받은 것이었다.

  周世鵬은 牧使 安暉에게 보낸 便紙에서 ‘赴任하여 며칠 만에 옛 順興府에 이르러 보니, 한 마리 소가 울고 있는 宿水寺 옛터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文貞公 安軸이 <竹溪別曲>을 지은 곳으로 마치 神靈한 거북이 엎드린 形象의 山 아래에 竹溪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小白山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 等 眞實로 山水風光이 白鹿洞書院이 있는 중국의 廬山에 못지않았습니다. 구름과 山, 언덕과 江물, 그리고 흰 구름이 恒常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敢히 이곳을 ‘白雲洞’이라 이름 짓고 感懷에 젖어 徘徊하다가 祠堂 建立의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安珦을 配享하기 爲한 祠堂 建立의 뜻을 품게 된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編纂한 《竹溪誌》序文에는 ‘敎化는 時急한 것이고 이는 尊賢으로부터 始作되어야 하므로 安珦을 높이어 받드는 祠廟를 세웠고, 兼하여 儒生들이 冊을 읽고 學問에 힘쓰게 하기 爲해 書院을 세웠다.’고 祠廟와 書院을 建立하게 된 動機를 적고 있다.

  安珦을 配享한 白雲洞書院에 1544年(中宗 39) 安軸(1287~1348)과 安輔(1302~1357)가 追加로 配享되었으며, 1546年(明宗 1)에는 安珦의 後孫인 安玹(1501~1560)이 慶尙道 觀察使로 赴任하면서 書院의 管理 指針인 <斯文立義>를 마련하여 書院의 院長 任命 問題, 院生의 定員, 祭享 節次와 土地, 書籍, 奴婢, 儒生들의 管理 等 書院 運營에 必要한 여러 가지 基盤을 닦았다.


  우리나라 敎育은 中國의 制度를 좇아 서울에 成均館과 四學이 있고, 地方에는 鄕校가 있으나 다만 書院이 없는 것이 큰 欠이었는데, 周世鵬 郡守가 周圍의 비웃음과 誹謗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에 書院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敎育機關이란 반드시 나라의 認定을 받아야만 오래 維持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根源 없는 물과 같아서 아침에 가득했다가도 저녁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周世鵬 郡守와 安玹 監司가 아무리 設備를 잘해 놓았다 할지라도 이는 한 郡守와 方伯이 한 일인지라 임금의 命令을 받고 國事에 오르지 못하면 오래 維持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監司께서는 위에 아뢰어 宋나라 때의 例와 같이 書籍과 扁額, 그리고 土地와 奴婢를 내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中略) 요즈음 보건대 地方 鄕校들은 그 가르침이 무너져 선비들이 鄕校에서 工夫하기를 부끄럽게 여길 만큼 寒心한 狀態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書院의 敎育을 일으키면 學問과 政治의 缺陷을 補充하여 선비들의 風習이 달라질 것이며 習俗이 아름다워져 임금의 훌륭한 다스림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李滉의 이와 같은 賜額 請願에 따라 明宗은 大提學 申光漢(1484~1555)에게 書院 이름을 짓게 하여 ‘紹修’로 정했다. ‘紹修’는 ‘自己 內的 修養을 通하여 儒學의 精神을 이어간다.’는 意味를 지니고 있는데, 다른 한便으로 ‘이미 廢止된 學敎를 다시 세워 儒學을 잇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意味를 지니고 있다고도 한다. 이는 順興에 流配되어 있던 錦城大君과 順興 府使 李甫欽의 端宗 復位 密謀 事件으로 말미암아 都護府가 廢止되었기 때문이다.

  1550年 明宗은 親筆로 쓴 ‘紹修書院’이란 扁額과 함께 四書五經, 《性理大全》等의 書籍과 奴婢를 下賜하였다. 이로써 紹修書院은 朝鮮 最初의 賜額書院이 되었다. 賜額은 곧 나라의 認定을 받는 것이므로 書院의 社會的 地位가 格上될 뿐만 아니라 書院에 딸린 土地에 對해서는 免稅 惠澤이 주어지고, 所屬 奴婢들은 免役의 特典을 누릴 수 있는 利得이 따랐다. 요즘으로 치자면 最初의 國家 認定 私立大學이 된 것이다. 紹修書院은 처음에 入學 定員이 10名이었으나 賜額을 받은 後에는 30名으로 늘었다. 入學 資格은 生員, 進士 等의 司馬試 合格者에게 優先權이 주어졌다.

  書院 正門을 들어서면 ‘白雲洞’ 懸板이 걸린 明倫堂의 側面이 第一 먼저 눈에 들어온다. 書院의 中心이 되는 建物로 儒生들이 講義를 듣는 講學堂으로, 大廳 北쪽에 明宗이 親筆로 써서 賜額한 ‘紹修書院’ 扁額이 걸려 있다. 明倫堂은 正面 4칸, 側面 3칸의 八作지붕 建物로서 正面의 4칸 가운데 3칸은 大廳이고, 나머지 1칸은 溫突房이다. 이는 中心에 大廳을 마련하고 兩쪽에 溫突房을 配置한 一般的인 講學堂 構造와는 全혀 다른 것으로서, 一定한 形式이 없던 初期 書院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建物 周圍로 退마루가 놓여 있으며, 大廳의 門들은 모두 들어올려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明倫堂 北쪽에 있는 日新齋와 直方齋는 只今의 敎務室과 院長室 같은 役割을 하는 곳으로서, 한 建物로 連結되어 있다. 또한 日新齋와 直方齋 東北쪽에 ‘ㄱ’字 形으로 配置되어 있는 學求齋와 至樂齋는 儒生들이 起居하며 工夫하던 寄宿舍와 같은 空間이다.

  明倫堂 뒤쪽에 담牆을 둘러서 別途의 區域을 이룬 곳에 文成公廟가 있다. 晦軒 安珦의 位牌를 모신 祠堂이다. 高麗의 名臣이며 學者인 安珦은 1260年(元宗 1) 文科에 及第한 뒤 40餘 年 동안의 벼슬길에서 두 次例나 王을 隨行하여 元나라에 다녀오는 等 國事에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文敎와 儒學 振興에 功이 컸다. 安珦은 1289年(忠烈王 15) 元나에 가서 처음으로 朱子가 쓴 《朱子全書》를 읽고 그 理論의 새로움에 魅了되어 《朱子全書》를 손수 베끼고, 孔子와 朱子의 肖像을 그려 가지고 歸國하여 朱子學(一名 性理學 또는 程朱學)을 硏究하였다. 이를 契機로 우리나라에 最初로 性理學이 傳來된 것이다.

  1298年(忠烈王 24) 元나라 學官들이 安珦을 ‘東方의 朱子’로 稱하며 畵工에게 畵像을 그리게 했는데, 그가 世上을 떠난 뒤인 1318年(忠肅王 5) 王命으로 그 畵像이 模寫되었다. 그 影幀은 順興鄕校에 있다가 晦軒 宗家로 옮겨졌고, 周世鵬이 紹修書院을 세우고 書院으로 옮겨 奉安하였는데, 그림이 해지고 彩色이 떨어져나가 湮滅될 地境에 이르자 1556年(明宗 11) 當代 最高의 畵工 李不害를 불러 다시 模寫하였다. 現在 國寶 第111號로 指定된 晦軒 影幀이다. 安珦의 諡號는 文成이며, 高麗의 首都인 開京의 文廟에 配享되고, 長湍의 臨江書院과 谷城의 晦軒影堂에 配享되었다.

  安珦을 主享하고 있는 이 祠堂에는 1544年에 追加로 配享된 安軸 ․ 安輔와 함께 紹修書院의 設立者인 周世鵬도 함께 配享되어 있다.

  1871年(高宗 8) 興宣大院君이 書院을 撤廢할 때 헐어버리지 않고 남긴 47個 書院 中의 하나인 紹修書院은 史蹟 第55號로 指定되어 있으며, 所藏 文化財는 晦軒 影幀(國寶 第111號)과 宿水寺址 幢竿支柱(寶物 第59號), 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寶物 第485號), 周世鵬 影幀(寶物 第717號), 紹修書院 文成公廟(寶物 第1402號), 紹修書院 講學堂(寶物 第1403號)을 비롯하여 慶尙北道 指定文化財인 瑞蔥臺親臨宴會圖(有形文化財 第238號), 明宗 御筆 紹修書院 懸板(有形文化財 第238號), 紹修書院 所藏 板木(有形文化財 第331號)이 있다.

<전통문화>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1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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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壇]

漢字音의 統合

李忠九(國史編纂委員會 古典硏究委員)


  漢字에는 一字異音의 兩音으로 表音되다가 一音으로 統合된 것이 있다. 이 一字異音은 애初 中國에서 流入되어 韓國音으로 表音된 것인데, 後日에 一音으로 統合된 것이다. 이는 一字異音의 漢字音이 同字 內의 다른 漢字音에 吸收되어 統合된 境遇로, 結局 異音干涉에 依한 統合이 된 것이다.

  異音干涉에 依한 統合은 同字 內의 異音에 干涉받아 誤讀함으로 말미암아 그 異音에 統合된 境遇이다. 이는 다시 完全 統合, 不完全 統合으로 나뉜다. 完全 統合은 特定意味를 隨伴하는 特定 音이 消滅되어 異音으로 모두 統合된 境遇이고, 不完全 統合은 特定意味를 隨伴하는 特定 音이 異音으로 모두 統合되지 않고 特定 用例에만 一部 統合되어 誤讀과 不誤讀이 混用되는 境遇이다.


  1. 完全 統合

    (1) 乾 간→건

      ① 旱乾水溢(《孟子》盡心 下 14章) 諺解 音 ‘간’(傍點 省略. 以下 같음)

      ② 乾肉不齒決(《小學》敬身 41章) 音注 干, 諺解 音 ‘간’

      ③ 乾 元亨利貞(《周易》乾) 諺解 音 ‘건’

      ④ 天尊地卑 乾坤定矣(《周易》繫辭 上 1章) 諺解 音 ‘건’

      ⑤ 乾 하날 건, 마를 간(《字典釋要》)

      ⑥ 乾 건 하날, 간 마를(《新字典》)

      ⑦ 乾 하늘 건, 마를 간 ․ 건(《韓辭典》)

  ①의 ‘旱乾’은 意味가 ‘가물어 메마르다’이고, ②의 ‘乾肉’은 ‘마른 고기’이다. 두 境遇 ‘乾’은 音이 干으로, 見聲寒韻 平聲의 ‘마르다’는 意味의 ‘간’ 音이다.

  ③의 ‘乾’은 ‘卦 이름’이고, ④의 ‘乾’은 ‘하늘’ 또는 ‘卦 이름’이다. 두 境遇 ‘乾’은 羣聲仙韻 平聲의 ‘건’ 音이다.

  ‘간’과 ‘건’은 異聲異韻의 異音에 依한 韓國音이다. 이 音義는 ⑤⑥에 繼承되었다. 그리고 ⑦에는 ‘간’과 ‘건’이 混用되었다. 그러나 ‘마르다’와 關聯된 語彙 ‘乾燥’ ‘乾川’ ‘乾杮’ ‘口血未乾’ ‘旱乾’ 等이 現在音에 모두 ‘건’으로 通用되는 點에에서 ‘간’이 ‘건’으로 統合된 모습을 보인다.

    (2) 質 지→질

      ① 周鄭交質(《左傳》隱公 3年) 音注 質 音致

      ② 質 바탕 질, 볼모 질, 폐백 지(《韓辭典》)

  ①의 音注 ‘質 音致’에 依한 國音은 ‘지’이고, 意味는 ‘볼모’이다. 이는 職日切 質韻에 依한 ‘질’의 ‘바탕’과는 다른 것이다.

 《字典釋要》에는 “質 전당 지, 바탕 질” 等으로,《新字典》에는 “質 지 幣帛, 질 文書” 等으로 나타나 ‘볼모’는 漏落되었다. 그리고 ②에는 “質 바탕 질, 졸모 질, 폐백 지”라 하여 ‘볼모’는 ‘질’로 나타나고 ‘幣帛’은 ‘지’로 나타났다. 質는 ‘폐백’일 때 ‘지’ 音이 維持되고, ‘볼모’일 때는 關聯된 語彙 ‘人質’ ‘質子’ 等이 現在音에 모두 ‘질’로 通用되는 點에서 ‘지’가 ‘질’로 統合된 모습을 보인다.


  2. 不完全 統合

    (1) 暴 포→폭

      ① 聖人之道衰 暴君代作 …邪說暴行又作(《孟子》滕文公 下 6章) 諺解 音 ‘포’, 諺解 : 暴君이 代로 作야 …邪說와 暴行이  作야

      ② 終風且暴 顧我則笑(《詩經》邶風 終風) 諺解 音 ‘포’, 諺解 : 終風이  暴나

      ③ 暴之於民 而民受之(《孟子》萬章 上 5章) 音注 暴 步卜反, 諺解 音 ‘폭’, 諺解 : 民에 暴야시늘

      ④ 雖有天下易生之物也 一日暴之 十日寒之(《孟子》萬章 上 9章) 音注 暴 步卜反, 諺解 音 ‘폭’, 諺解 : 秋陽으로  暴디라

  ①의 暴君 ․ 暴行은 ‘포’인데 ‘사납다’는 뜻이고, ②는 ‘포’인데 ‘疾(빠르다)’의 뜻이다. ③은 ‘폭’인데 ‘顯(드러내다)’의 뜻이고, ④는 ‘폭’인데 ‘溫之(따듯이 하다)’의 뜻이다.

  ‘포’의 境遇는 위의 例 以外에도 暴力 ․ 暴動 ․ 暴風 ․ 亂暴 等이 있는바, ‘폭’이 쓰인 暴露 等에 干涉받아 ‘暴力’ 等의 ‘폭’으로 읽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暴惡 ․ 暴虐 ․ 强暴 ․ 橫暴 等은 아직도 ‘포’가 維持되고 있다. 이는 ‘포’가 ‘폭’으로 統合된 部分的 傾向을 보이는 것이다.

    (2) 行 항→행

      ① 父之齒隨行 兄之齒鴈行 朋友不相踰(《小學》明倫 87章) 諺解 音 ‘’, 諺解 : 아나 이 조차 니고…기러기 톄로 니고

      ② 大叔于田 乘乘黃 兩服上襄 兩驂鴈行(《詩經》鄭風 大叔于田) 音注 行 戶郞反, 諺解 音 ‘항’, 諺解 : 兩驂이 鴈行이로다

      ③ 肅肅鴇行 集于苞桑(《詩經》唐風 鴇羽) 音注 行 戶郞反, 諺解 音 ‘항’, 諺解 : 肅肅 鴇의 行이여

  ①의 鴈行에는 ‘다니다’의 ‘’이고, ②의 鴈行에는 ‘줄’의 ‘항’이고, ③의 鴇行에는 ‘줄’의 ‘항’이다. 같은 鴈行이 ‘’과 ‘항’으로 다르게 나타나고 그에 따라 意味가 區別된다. ‘항’의 境遇는 行列 ․ 行伍 等이 있는바 現在音에 ‘행’으로 混用되고 있다. 行列은 寸數를 따질 때에 ‘항’과 ‘행’이 混用되지만 數學에서 數列을 말할 때는 ‘행’으로 定着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行伍는 ‘行’과 ‘伍’를 맞추라고 할 때에 ‘행’이라 하여 ‘항’이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이는 ‘항’이 ‘행’으로 統合되어 가는 過程을 보이는 것이다.


  以上 異音干涉에 依한 統合은 誤讀에 依한 統合인데, 統合의 結果는 意味 辨別에 不利하게 作用하는 것이다.

  例컨대 ‘乾’은 ‘간’이라고 發話하면 意味가 ‘마르다’로, ‘건’이라고 發話하면 ‘하늘’로 辨別되지만, 모두 ‘건’으로 統合됨으로써 辨別性의 喪失이라는 結果를 招來하였다. 辨別性의 喪失에도 不拘하고 統合된 것은 統合된 結果로도 意味疏通이 可能하기 때문이다. 2字 以上의 合成語가 될 때 例컨대 乾燥 ․ 乾杮를 ‘간’으로 發話하지 않고 ‘건’으로 發話하여도 疏通이 되는 것이다. 疏通되지 않는 境遇는 統合될 수 없는 것이다. 結局 統合된 1音은 統合되기 以前의 二音에 딸린 意味를 모두 表音하는 統合音이 되었다.

  異音干涉의 完全 統合은 2音이 1音으로 歸結되었으나, 不完全 統合은 部分的 統合이어서 不統合音과 統合音의 2音이 共存하는 것이다. 例컨대 ‘暴’는 不統合音 ‘포’의 暴惡 等이 있고 統合音 ‘폭’의 暴君 等이 있어, 同字同義의 音이 ‘포’와 ‘폭’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異音干涉에 依한 統合은 大部分 現在 固定音이 되어 統合 以前의 分化된 狀態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不完全 統合은 音과 義에 따른 辨別이 容易하면서 分明한 誤讀인 境遇 音과 義에 適應되는 애初 讀音을 維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暴의 暴君 等을 ‘포군’ 等으로, 行의 行列 等을 ‘항렬’ 等으로 讀音하게 할 것이 要望된다.

  讀音을 意味에에 適應되도록 合致시키는 것은 音義의 辨別性 以外에도 올바른 讀音을 爲해서도 必要하다.

  不合理한 誤讀音보다 合理的인 正讀音이 言語의 傳達과 記憶 等에 有利하게 作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誤讀의 傾向을 認識함으로써 經史 等의 讀解, 漢詩 作法 等에 統合音대로만 適用하지 않고 統合 以前의 異音에 依한 意味를 追跡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漢字 그리고 漢文 讀解의 正確을 꾀하는 데에 寄與하는 것이다.

(<전통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9~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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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다시 한자 문제에 대하여

宋載卲(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글전용이냐, 한자혼용이냐, 한자병기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많이 논의되어 이제는 산이 평지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도 그동안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수없이 써 왔다. 우리말 어휘의 70%가 한자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옳게 쓰기 위해서도 한자를 알아야 한다든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 한자,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등의 너무도 당연하고 일반적인 논의를 떠나서 이 자리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지금 여름방학 중의 대학가에 한자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한다. 삼성, LG, SK를 비롯한 37개 기업이 가을에 있을 입사시험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한자 능력을 테스트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어떤 곳인가? 이윤추구를 최대의 목표로 하는 곳이다. 기업이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사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왜 한자를 구사할 줄 아는 사원이 필요할까? 아마도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 국가들과의 교역을 위해서일 것이다. 이익이 남지 않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다. 국가 간의 교역에서 기업이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우리의 경제가 그만큼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國富가 축적되고, 국부가 축적되면 국민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진다.

  이렇게 보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데에 한자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무엇을 망설이는가? 민족문화니 전통문화니 하는 거대담론을 구태여 끌어대지 않더라도 우리가 한자를 배우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명백한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중국어와 한자는 다르다”고. 물론 똑같지는 않다. 글나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를 알면 현대 중국어를 훨씬 쉽게, 빠르게 배울 수 있다. 또 중국어를 몰라도 筆談으로 주고받는 한자어만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 한자를 가르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한자가 한글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지금 영어의 무분별한 남용이 한글을 파괴하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왜 영어의 사용은 용인하면서 유독 한자에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경제적인 이익 창출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하다면 꼭 같은 이유로 한자도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는 중국의 시대가 오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영어 학습에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의 10분의 1만 들여도 효과적으로 한자를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한자를 학습하는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다. 사람 이름만 해도 그렇다. ‘빛나리’, ‘바우’와 같은 순 한글식 이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름은 한자를 근거로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한자를 근거로 지은 자기 이름의 뜻쯤은 적어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地名도 마찬가지이다. 지명은 반드시 그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蘆原區’란 지명을 보면 이곳에 옛날 갈대(蘆)가 많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고, ‘孝子洞’엔 이름난 효자가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유추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지적 활동의 일부분이다. 이런 지적 활동을 통하여 인간은 더 고급 단계로 발전한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은 이런 지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자를 쓰지 않고 그냥 ‘방화동’, ‘방학동’으로만 표기하면 지적 활동의 여지가 없어진다. ‘방화동’하면 먼저 떠오로는 것이 ‘放火’일 것이고, ‘방학’을 연상시키는 첫 생각은 ‘放學’이기 쉽다. 아마도 ‘방화동’은 ‘芳花洞’ 즉 아름다운 꽃이 많았던 곳일 터이고, ‘방학동’은 ‘放鶴洞’으로 옛날 이곳에서 학을 放飼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적 연상 작용은 교육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설악산을 갈 때마다 미시령을 넘으면서 ‘왜 이곳을 미시령이라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이 의문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미시령 꼭대기의 바위에는 ‘미시령’이라는 한글과 영어만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곳의 지명이 미시령이구나’ 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그 지명의 연원을 캐보고 싶은 지적 호기심 또한 본능에 가까운 인간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가 훈련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한자는 이러한 지적 활동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특히 성장기의 아동들에게 그렇다.

  언어와 문자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 이상의 역할을 한다. 말과 글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품을 나타낸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저속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품위 있게 표현할 수도 있다. 한자문화권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한자를 알면 훨씬 품위 있는 文化語를 구사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자네 아버지 잘 계시는가?”라는 말과 “자네 春府丈께서는 無故하신가?”라는 말은 그 말에 실리는 무게가 다르다. 아버지라는 우리말을 두고 왜 춘부장이라는 한자어를 쓰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소치이다. ‘아버지’도 알고 ‘춘부장’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적 영역의 확대를 통하여 인간의 품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막말’이 세인의 지탄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반인의 문자생활 말고도 한자 기피 현상으로 말미암은 폐해는 심각하다. 1963년에 나온 李秉岐, 白鐵 공저《國文學全史》를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학생들이 읽지 못한다고 한다. 한문이 아닌 국한문 혼용체로 쓴 책이다. 어느 대학에서 이 책을 교재로 채택했더니 학생들이 ‘解讀’을 위한 소모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른바 학문을 하겠다고 대학원에 입학한 국문과 학생들이《國文學全史》나 趙潤濟의《韓國文學史》를 읽지 못하고, 사학과 학생들이 국한문 혼용체로 된 申采浩의《朝鮮上古史》를 읽지 못하는 이 기막힌 현상을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정부의 기형적인 문자정책 때문에 초래된 현상이다. 한자, 한문을 익히면 나라의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일반인의 문화수준도 높아지고 國學의 진흥에도 기여하는 一石三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왜 이리도 한자, 한문을 白眼視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부는 하루 빨리 한자, 한문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 국민들이 자유로운 문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자 추방만이 나라 사랑의 증표인 양 착각하고 있는 한글전용주의자들의 반성을 엄중히 촉구한다.

(<전통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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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鑑賞]

‘아침에 彩色 구름 어린 白帝城을 떠나서’

申用浩(公州大學校 名譽敎授)


早發白帝城 (白帝城을 일찍 出發하여)

                                                            ― 李  白


朝辭白帝彩雲間    아침에 彩色 구름 어린 白帝城을 떠나서

千里江陵一日還    千 里 되는 江陵 땅에 하루 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    兩쪽 언덕의 원숭이 울음소리 繼續 들으며

輕舟已過萬重山    가벼운 배 이미 겹겹이 펼쳐진 山을 지나왔네.


  이 시는 盛唐時代의 代表的 詩人으로 詩仙이라 일컬어지던 李太白이 지은 것이다.

  西紀 701年에 誕生한 李白은 57歲 때인 至德 2年(757) 봄에 安祿山의 反亂을 平定한 後 그 收拾過程에서 發生한 皇室의 內紛에 휘말려 死刑宣告를 받게 된다. 그러나 婦人 宗氏의 歎願과 知人들의 努力으로 死刑을 免하고 流配刑으로 減刑되어 四川省의 白帝城에 이르게 된다. 그 後 乾元 2年(759) 봄에 旱魃이 繼續되자 이 災厄을 풀고자 朝廷에서는 3月에, “死刑囚는 流配刑으로 減刑하고, 流配刑 以下는 赦免한다.”는 大赦令을 頒布하여, 李白이 流刑에 處해진지 15個月 만에 赦免을 받게 되었고, 이때에 流配地에서 돌아오면서 지은 것이 바로 이 詩이다.

  李白이 出發한 白帝城에서 江陵까지는 約 600km, 卽 中國 里數로 1,200里가 된다. 이렇게 먼 距離를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만에 돌아왔다는 것은 當時의 交通狀況으로 보면 하나의 事件이라 할 수 있다.

  白帝城에서 江陵 쪽으로 흐르는 揚子江의 골짜기를 三峽이라 하는데, 물살이 매우 세고, 兩岸의 山들은 天下의 絶境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近者에 이곳에 世界에서 가장 큰 댐이 建設되어 배를 타고 李白이 지나왔던 이곳을 踏査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귀로는 三峽을 울려대는 온갖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듣고(이 詩에 表現한 원숭이 울음소리는 원숭이만의 소리가 아니라 온갖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를 包括하여 表現한 것으로 보아야 함), 눈으로는 形形色色의 各其 다른 모습의 山들이 미처 그 아름다움을 다 느끼기도 前에 뒤로 휙휙 사라지고 새로운 景致가 펼쳐지는 天下의 絶境을 鑑賞하며 江陵에 到達한 感懷를 읊은 것이다.


  흔히 한 首의 詩 속에서 詩想의 展開나 變化의 템포가 빠른 詩는 기쁜 感情의 表現에 適合하고, 變化가 緩慢하거나 停止된 場景을 表現한 詩는 슬픈 感情의 表現에 適合하다고 한다.

  이 詩 起句에서 그린 彩色 구름은 流配刑에서 赦免되어 不安과 孤獨에서 벗어나게 된 밝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고, 空谷을 울려대는 各種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도 기쁜 마음으로 단숨에 三峽을 通過하는 李白의 기쁜 마음을 倍加시키는 背景 音樂으로 볼 수 있고, 빠르게 지나가는 가벼운 배도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고 希望에 넘치는 李白의 가벼운 마음을 象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詩에서 그려낸 時間과 空間을 살펴보면, 起句와 承句에서 白帝城과 江陵이라는 두 地點을 千 里라는 線으로 이어놓으면서 所要된 時間은 하루로 設定해 놓고, 轉句에서는 兩쪽 언덕의 猿聲을 그려내어 空間을 兩岸이라는 面으로 擴張하였으며, 結句에서는 가벼운 배가 萬重山을 지났다 하여 空間이 다시 萬重山이라는 立體로 擴張되도록 構成해 놓았다.

  卽, 時間은 하루로, 空間은 點에서 線으로, 線에서 面으로, 面에서 立體로 變化하면서 結句에 이르러서는 空間이 爆發的으로 擴張되도록 構成하고, 彩色 구름으로 視覺을, 猿聲으로 聽覺을 刺戟하게하게 하고 이를 綜合한 觸覺까지 느끼게 하여, 時時刻刻으로 變化하는 空間의 모습과 이를 各種 感覺器官을 모두 動員하여 즐기는 李白의 모습이 躍如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한 首의 詩 속에서의 變化의 템포가 빠른 詩에서 슬픔, 孤獨, 憂鬱함 같은 感情은 到底히 느낄 수가 없게 된다. 卽, 期待, 希望, 즐거움만을 느끼게 하는 詩이다.

  李白 詩의 特徵 가운데 하나가 밝고 樂天的인 面이다. 이 詩에서는 李白 詩의 이런 特徵이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전통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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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2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멜기세덱님.
우연찮게 지난번에 님의 서재를 알게 되었고 제 고향인 인천에
적을 두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종종 글을 훔쳐보고 있다가
오늘은 이 글을 퍼갑니다.

멜기세덱 2006-12-2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훔쳐보고 있답니다...ㅎㅎ
여우님 고향이 인천이세요...! 반갑네요...ㅎㅎ
 

[卷頭言]

왜, 漢字 공부를 해야 하는가!

鄭愚相(서울교대 명예교수 ․ 본회 고문)


  나는 지난해 어느 날, 모처럼 鐘路의 3 ․ 1路를 걷게 되었다. 눈앞에 다가오는 공고문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삼일로(三一路) 주변(周邊) 노후(老朽) 불량(不良) 가로등(街路燈) 개량(改良) 및 조도(照度) 개선(改善)을 위(爲)한 가로등(街路燈) 정비(整備) 공사(工事)입니다.

Jongno. 2005. 9. 25


이라고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노후’ ‘조도’ 까지도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과연 저런 공고문으로 市民들에게 意思 전달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로만 쓰기는 했지만 공고문 전체가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고 다만 ‘~ 및 ~한 ~입니다.’만 고유한 우리말로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말이다.

  공고문을 이와 같이 한글로만 표기하면 읽을 수는 있어도 意味 전달은 제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老朽’와 ‘照度’ 정도는 한자로 쓰던가 괄호 안에 한자를 써 넣어야 할 것이다.

  지난 2004년 4월 2일, 統一部의 한 사무관은 離散家族 행사 지원차 金剛山의 김정숙 휴게소에서 北側 지원요원들과 함께 점심을 하면서 “(금강산) 바위에 ‘천출 명장 김정일 장군’이라고 한글로 써 놓으니 남쪽에선 ‘천민 출신(賤出)’이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바른 말을 했다. 점심을 함께 하던 북측 관계자들은 이 말을 듣고 즉각 우리 연락관을 찾아와 항의했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북측에서는 離散家族 相逢 행사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고 우리 측에서는 統一部長官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사무관을 문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아마도 북측에서는 김정일 장군을 賤民出身이라고 폄하했다 해서 행사 중지를 제의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 초점은 한자어 ‘천출’에 있다. ‘천출’은 ‘天出’과 ‘賤出’의 意味가 있다. 물론 ‘천출 명장’은 ‘天出 名將’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漢字로 ‘天出’이라 表記하지 않고 한글만으로 표기해 놓았기 때문에 ‘天出’과 ‘賤出’의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천출’을 한자로 ‘天出’이라 쓰던가 아니면 괄호 안에 천출(天出)로 표기했더라면 이와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위에 새겨 놓은 ‘천출 명장 김정일 장군’은 표기만 한글로 했을 뿐이지 모두 漢字로 構成된 ‘天出 名將 金正一 將軍’인 것이다.

  굳이 한글 전용만 고집하지 말고 意味混亂이 오는 어휘만이라도 漢字를 써서 한자어와 우리 고유어로 구성된 韓國語의 특징을 살려 간다면 한글과 漢字의 두 날개를 활짝 펴고 蒼空을 飛翔하는 아름다운 飛鳥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韓國語는 한글과 한자를 조화롭게 섞어 써야 意味混亂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국어의 意味分化의 核이 漢字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韓國語 구성의 原理를 생각하지 않고 한글만으로 표기하는 것을 고집한다면 ‘천출’ 사건과 같은 意味混亂의 갈등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國民意識의 혼란까지도 야기될 것이다.

  漢字의 威力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漢字文化의 영향이며 漢字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言語機能, 즉 國(나라 국) 한 글자가 國家, 國民, 韓國, 祖國 등 400여 漢字語를 生成하고 900字의 한자를 알면 72,229의 한자어가 생성되어 어휘력이 놀랍게 伸張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表意文字인 漢字에는 탁월한 視覺力이 있다. 知識情報와 視覺力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五官에서 흡수하는 知識 가운데 聽覺으로부터 받는 약 11%의 정보보다 視覺으로부터 얻는 정보가 83%로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일본의 도로공단이 일본 최초의 메이신(名神) 高速道路를 개통했을 때 도로표지판을 어떤 文字로 쓸 것인가를 실험하였다. 즉 로마(Roma)자와 가나(假名)와 漢字를 표기하여 실험하였다. 실험은 高性能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는 작업을 작동시켜 그 노출 시간의 변화에 의하여 속도를 재는 것이다. 이 실험에 의하면 로마자는 1.5초, 가나(假名)는 0.7초, 漢字는 0.06초로 표지판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것을 東京大學校 工學部 교수 와타나베 시게루(渡邊茂) 박사가 다시 실험하여 확인하였다고 한다. (石井勳)

  즉 漢字 표기의 視覺性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高速道路 표지판의 표기를 한자로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漢字는 速讀의 效力이 높을 뿐 아니라 意味의 認知가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에 우리 어휘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漢字와 한글을 조화롭게 섞어서 써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漢字는 우리 國語의 意味分化의 核을 이룰 뿐 아니라 東北亞의 共通文字로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學生’이라는 單語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韓國, 中國, 日本의 東北亞에서 相通되는 말이다. 다만 우리는 ‘학생’이라 발음하고, 중국에서는 ‘쉬에셩’, 일본에서는 ‘각세이’로 각각 다르게 발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學生’이라고 漢字로 표기하면 韓 ․ 中 ․ 日 모두 같은 뜻으로 意思 소통이 된다. 이것은 漢字가 東北亞에서 共通으로 쓰이고 있는 文字로 東北亞 文化圈을 하나로 엮는 共同文字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로마자가 西洋文化를 形成했다면 漢字는 東洋文化를 生成한 것이다.

  21세기는 知識化, 情報化, 世界化 시대로서 세계의 경제적 촉각이 아세아 太平洋으로 쏠리는 亞太時代라고 한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이미 경제 대국으로 GNP가 31,300달러로 우리의 3배가 되고 근대화도 우리보다 50여 년이 앞서 있는 先進國이다.

  그리고 中國은 한반도의 44배의 면적을 가진 넓은 國土와 13억이 넘는 人口에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근자 무서운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 上海 ․ 北京 ․ 浦東에서는 80층 건물들이 雨後竹筍처럼 솟아오르고 있고, 年 9%의 高度成長과 250억 불의 무역 흑자를 내고 있을 뿐 아니라 2008年 北京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經濟急成長을 위한 계획이 치밀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이 우리의 最大 交易國으로 부상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관광객도 중국 ․ 일본 등 漢字文化圈 사람이 70%를 차지하고 있다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經濟 5大 團體에서 新入社員 채용시험에서 한자 시험을 포함하기로 정하고 그 이유로는,

  첫째 韓 ․ 中 ․ 日간 경제교류 증가로 한자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나 한자 실력은 이에 미흡하다.

  둘째 한자 실력 저하로 한자문화권 국가와의 비즈니스에서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셋째 大卒 新入社員들의 한자 能力 부족으로 外國人 거래처와의 명함 교환이나 人脈 구축 정보 수집 등 업무수행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자 시험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漢字能力 不足으로 야기되는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삼성 李健熙 회장은 한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新年辭나 報告書 글자의 30% 이상을 漢字로 작성하고 있으며 漢字能力檢定試驗에서 3급 이상 자격증을 취득한 지원자에게는 加算點 20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漢字力은 經濟發展의 밑거름이 되므로 우리나라 37곳의 기업에서 漢字 시험을 보고 가산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大學街에서는 한자 공부의 열풍이 불고 있다. 漢字를 알아야 會社에 就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漢字學習은 文字言語 學習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適期에 지도해야 학습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러한 학습 원리를 외면한 한자교육을 이제까지 해 왔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어린이가 해야할 하늘천 ․ 따지, 한자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당국은 이러한 漢字力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早期學習 適期를 놓치지 말고 公敎育으로써 初等에서부터 한자를 철저히 지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전통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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