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隨想]

讀書는 知識의 生命水

文福姬(暻園大 敎授)


  白凡 金九先生은 『내가 願하는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强力은 남의 侵略을 막을 만하면 足하다. 오직 限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文化의 힘이다.”라고 했다. 精神을 培養하는 것, 그것이 文化이다. 文化는 나와 世上과 事物의 關係性을 들여다보며 意味와 기쁨과 勇氣를 찾아가는 어떤 것이다. 自身을 省察하는 힘, 내 안에 眞正한 感覺과 叡智와 精神을 보듬어 가는 힘, 이것이 文化의 힘이다. 그가 限없이 가지고 싶어했던 最高의 價値가 높은 文化의 힘이라면 그 힘의 基礎를 어떻게 다져 가야 할까?

  開講을 하고 새 學期를 맞으니, 노오란 山茱萸가 무리지어 터지면서 校庭은 活氣가 넘친다. 캠퍼스에는 꽃消息과 함께 學生들의 젊음이 봄을 재촉하고 있다. 새 學期를 始作하면서 나는 大學生들의 삶을 質的으로 向上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結局 人間의 具體的인 삶을 探究하고 自我를 發見하는 지름길은 讀書라는 結論에 이르렀다. 學問의 世界에서 讀書는 地下水의 水脈과 같다. 젊은이들이 讀書를 通해 眞正한 自我를 돌아보고 各自의 삶에 對한 省察의 機會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文化의 힘을 키울 수 있는 端初가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讀書하는 習慣을 갖는 것이 但只 大學生들에게만 要求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適用되고 勸獎되어야 할 일이다. 사이버 空間이나 인터넷 情報를 通해 冊을 接하지 않고도 知識을 習得할 수는 있지만, 冊을 通해 自身을 省察하는 時間을 갖는 것이 精神生活의 健全한 發育을 爲해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는 點에서 讀書는 必須 要件이다.

  讀書는 知識의 寶庫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知識이 담겨 있는 書籍을 要求하고 그것을 攝取하는 讀書가 必要하다. 物質的 生命을 支撐하기 爲해 飮食物 攝取가 必要하듯이 精神的 生命을 維持하기 爲해 知識을 攝取해야 한다. 나를 發見하는 것은 한 卷의 冊, 한 줄의 글일 수도 있다. 나의 自意識을 깨우쳐 주는 것도 冊과 對話하는 時間일 境遇가 많다.

  冊은 貴하고 所重한 存在이다. 儒敎의 根本 精神을 文治主義로 본다면, 글로 다스린다는 것은 冊에서 얻어지는 것, 卽 知識에 依해 國家 社會를 運營하겠다는 意志가 아닌가. 우리 先人들은 晝耕夜讀이라 하고 燈火可親이라 하며 冊 읽는 것을 높은 價値로 보고 讀書를 積極 獎勵해 왔다. 冊을 通하여 知識을 習得하며, 有識하다든가 博學多識하다는 말을 最高의 稱讚으로 여겨 왔다.

  讀書는 知識의 生命水이다. 冊에 담겨 있는 知識이 重要한 生存 戰略이다. 마음의 糧食을 通해 冊에 對한 믿음을 갖고 冊과 함께 숨쉬어야 한다. 知識社會의 基盤은 讀書이다. 그러나 德性 따르지 않는 知識은 毒이 되기 쉬우니 善用되어야 하며, 知識의 濫用이나 惡用으로 弊害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知識은 義를 지나쳐 보고 利를 따르는 데 퍽 銳敏하지만 德性은 私私로운 利益을 犧牲시키더라도 義理를 지키는 데 더 너그러움을 보인다. 이 너그러운 面, 卽 義를 忘却하거나 無視하는 知識은 그 分量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지어내는 바 害毒이 커서 오히려 知識이 없느니만 못하니, 오늘날 우리 農村의 匹夫匹婦가 풋知識을 가진 都市의 冷血兒, 狡智漢보다 얼마나 淳厚하고 무던한 義理와 人情味를 實踐 發揮하고 있는가.”를 指摘한 李熙昇의 글에서 德性이 缺如된 知識의 危險性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知識 習得의 秘訣이 讀書에 있으나, 豊富한 知識의 攝取만 내세우기 前에 眞正한 意味의 知識 習得이 徹底히 要求되어야 한다.

  우리 韓國 農村에서 볼 수 있던 옛 모습 中에 너그러움이 담긴 아름다운 光景 하나를 紹介하면, 지게에 볏가리 짐을 가득 담아 등에 짊어진 農夫가 볏단을 실은 달구지를 같이 끌고 가는 모습이다. 소달구지에만 무거운 짐을 모두 맡기지 아니하고 한낱 짐승과도 짐을 나누어 짊어지며 살아가는 農夫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人間에 對한 사랑을 넘어서서 動物에게까지 베푸는 너그러움의 極致이며, 世上을 支撐하는 德性의 한 斷面이다. 讀書가 知識 習得의 捷徑이지만 知識도 人間이나 自然에 對한 너그러움과 사랑이 따르지 않는다면 人間의 삶 속에 生命水가 될 수는 없다.

  끝으로 “時計를 보는 것보다는 羅針盤을 보라.”는 말을 우리 人生의 具體的인 삶에 適用해 볼 때, 그 內面的인 뜻은 時間처럼 그냥 가는 것보다는 올바른 方向으로 가고 있느냐가 더 重要하다는 意味일 것이다. 熾烈한 時間 다툼의 時代에 時計를 보는 것은 競爭에서 이길 수 있는 緊張感을 造成해 주지만, 羅針盤은 올바른 目的地로 가기 爲한 道具에 不過하다. 目的地가 잘못 標示되지 않는 限 羅針盤의 役割은 方向을 알려주는 意味 있는 道具이다.

  讀書는 우리가 가야 할 目的地의 方向을 提示하는 羅針盤과 같은 구실을 하며, 어느 한쪽만 치우쳐 보지 않고 均衡 잡힌 視覺을 갖도록 해준다.

  讀書는 작은 世界에서 未來의 넓은 世界로 나갈 수 있도록 情緖를 擴大 深化하는 作業이다. 또한 讀書는 人生을 多樣한 角度로 보게 해주는 創意的 活動이며, 높은 文化를 이끌어 내는 힘의 根源이다.

<語文生活> 2007.4 通卷 第113號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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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論說]

文字 選擇의 基準

李炳銑(釜山大 名譽敎授)


  只今 우리는 한글專用이냐 漢字 混用이냐 하는 重大한 갈림길에 놓여 있다. 新聞 ․ 雜誌 ․ TV의 字幕에서는 勿論 學術 論著에서도 젊은 讀者層에 맞추어 거의 한글을 專用하고 있다. 어려운 漢字는 括弧 안에 넣고 있으나 漢字를 모르는 讀者들에게는 無意味하다. 또 大學마다 先學들이 애써 쓴 山積한 書籍을 學生들이 읽지 못하고, 할아비[祖]가 쓴 冊을 孫子가 읽지 못한다. 이는 學問의 斷絶과 世代間의 斷絶을 招來한다. 우리는 왜 이와 같은 슬프고도 不幸한 일을 해야 하는가?

  한글을 專用해야 할 理由로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우며, 또 우리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쉬운 것이 能事가 아니니, 이것이 文字 選擇의 基準이 될 수 없다. 한글專用이냐 漢字 混用이냐 하는 選擇의 基準은 첫째, 兩者 中 어느 것이 視覺上으로 읽기가 쉽고 思考를 돕느냐 하는, 文字生活의 效率性에 比重을 두어야 하며 둘째, 말(낱말 ․ 語彙)의 槪念 形成과 縮約性 ․ 造語力 等 言語의 經濟性에 무게를 두어야 하며 셋째, 傳統文化의 繼承과 넷째, 漢字文化圈의 여러 나라들과의 連帶를 생각해야 한다.

  위 첫째 基準에 있어서, 漢字는 視覺性이 있어서 읽기가 便利하다. 또 表意性이 있어서 思考를 도우며, 表音文字인 한글보다 뜻을 생각하며 글을 읽을 수 있다. 한글은 制字上으로는 매우 科學的이기는 하나, 글字의 꼴이 비슷하여 英語의 大文字와 같이 읽기가 不便하다. 한글專用의 글은 한 字 한 字를 같은 速度(템포)로 읽어야 하나, 漢字 混用의 글은 몇 字 或은 몇 낱말이 한눈에 들어오며 뜻도 쉽게 理解된다. 1970年代에 全國圖書館協會에서 調査한 바에 依하면, 圖書館 利用者의 84%가 漢字 混用의 글이 讀書의 能率을 높인다고 하였다. 國語의 文章은 名詞와 動詞 ․ 形容詞로 된 意味部와 이에 助詞 ․ 接尾辭 等이 添加된 形態部로 構成되었는데, 漢字語로 된 意味部는 漢字로 表記하고 形態部는 한글로 表記함이 바람직하다. 다만 生活에 익은 말은 한글로 表記해도 좋으나, 한 줄[行]에 漢字가 몇 字씩 섞여 있는 것이 읽기가 便하다. 이와 같은 表記方法은 新羅人의 文字生活에서도 볼 수 있다. 卽 鄕歌(慕竹旨郞歌)의 “去隱春皆理米”(가는 봄 그리매‘慕’)에서 가[去]와 봄[春]은 漢字의 訓으로 表記하였고, “毛冬去叱沙哭屋尸以憂音”(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에서 시름[憂音]도 ‘근심 우(憂)’ 字를 借用하였다. 日本人들은 漢字 한 字를 읽는 데 걸리는 時間이 1千分의 1秒 以下라고 한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報告가 없으나, 假令 한글 한 字를 읽는 데 1千分의 1秒가 걸린다고 하더라도 한글에는 뜻이 없다.

  言語는 소리[音聲]와 뜻[槪念]으로 이루어진 生命體이다. 그 中 어느 것이 不分明하여서는 生命力을 잃는다. 言語는 時代의 變化에 따라서 生成하고 消滅하는데, 하나의 말에 槪念이 形成되는 데는 經驗이나 敎育 等 時間이 걸린다. 아래와 같은 우리 文化의 基盤을 이루는 漢字語를 漢字로 表記하면 先驗的 知識이 없어도 그 뜻을 쉽게 理解할 수 있고, 또 槪念이 形成되는 데 걸리는 時間이 節約된다. 食藥廳 ․ 行自部 ․ 勞使政 ․ 聯政 等 機構名과 政治 用語, 抗訴審 ․ 損賠訴 ․ 言渡 等 法律 用語, 自社株 ․ 船團式 經營 ․ 産業 空洞化 等 經濟 用語, 無敵艦隊 ․ 地對艦 미사일 ․ 鶴翼陣 等 軍事 用語, 有實樹 ․ 水耕栽培 ․ 天日鹽 等 農 ․ 水産 用語, 骨多孔症 ․ 血糖 ․ 中耳炎 等 醫學 用語, 脫亞入歐 ․ 遠交近攻 等 政策上의 用語, 易地思之 ․ 事必歸正 等 四字成語. 이를 한글로 表記하여서는 읽어도 뜻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이는 生命力을 잃은 것이다.

  오늘날의 文字生活에서 努力의 經濟를 爲해 말을 줄여 쓰는 일이 많다. 建交部(건설교통부) ․ 終土稅(종합토지세) ․ 安保理(안전보장이사회) 等은 그러한 例이다. 이러한 말도 漢字로 表記하는 것이 理解를 돕는다. 漢字는 글字마다 뜻을 가지는 字素文字로서 造語力이 豊富하다. 卽 守成 ․ 守備 ․ 守舊 ․ 守己…, 城門 ․ 城山 ․ 城主 ․ 城域…과 같이 쉽게 말을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은 有緣性으로 漢字 二千字로 워드프로세서(打字機)에서 약 五萬 個의 말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造語上의 經濟를 생각해야 하며, 또 言衆들의 語彙數를 늘리도록 해야 한다. 漢字語에는 多樣한 思想이 담겨 있다. 語彙가 不足하여서는 未開民族으로 轉落한다.

  셋째 ․ 넷째 基準에 對하여서는 說明을 要하지 않는다. 한글이 우리글이니까 하는 우리의 主體性을 말함을 본다. 그러나 歐羅巴 各國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로마字는, 元來 라틴語를 表記하기 爲하여 로마時代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文字란 國籍을 따질 것 없이 自國의 말을 便利하게 적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宗敎가 그의 國籍을 따지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漢字는 二千年 동안이나 우리 祖上들이 써 온 文字로서, 漢字語는 우리 文化의 中心部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漢字를 굳이 中國의 글字라 하여 排斥함은 閉鎖的이고 國粹主義的 思考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칼도 내 칼집에 들면 내 칼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글專用을 主張하는 사람들도 漢字를 배워만 놓으면 便利하다고 한다. 漢字가 어렵다고 하나, 마음만 먹으면 二千字 程度를 배우기란 큰 問題가 아니다. 1948年 한글 專用法이 制定되던 當時는 國民 一人當 GNP가 100弗도 못 되었다. 國民 95% 以上이 農民으로서, 이 法은 晝耕夜讀하던 時代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法은 오늘날의 狀況과 맞지 않으니 廢止되어야 한다.

  日本에서는 初等學校에서부터 漢字를 배워서 한平生 便利한 文字生活을 하고 있다. 이는 ‘先苦後樂’이다. 이에 比해 우리는 于先 便한 것을 좋아하여 ‘先樂後苦’를 하고 있다. 이러하여서는 日本에 더욱 落後될 것이다. 우리는 한글專用으로 漢盲者를 量産하여 漢字의 表意文字로서의 優秀性을 모르게 해 놓고― 漢字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게 해 놓고 한글專用으로 가고 있다. 이와 같은 政策은 하루빨리 바꾸어야 한다. 愛國과 文字의 機能을 混同해서는 안 된다. 漢字의 利點을 살려 國力을 키우는 것이 더 愛國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語文生活> 通卷 第112號,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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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隨想]

‘難易度’는 있어도 ‘高難易度’는 안 써

鄭龍起(前 <서울新聞>編輯委員)


  特히 只今으로부터 40年 後인 2046年은 大韓民國에서 한글專用 敎育을 始作한 지 100週年이 되는 해다. 現在와 같이 方向을 잃고 漂流하는 漢字敎育이 繼續되거나 그나마 中斷된다면 아마 그때쯤 우리 땅에서 漢字는 自然 消滅되고 자취를 찾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이 무렵 어느 시골 中學校 3學年쯤 되는 國語 時間을 想定해 보기로 한다.


敎師 : ‘조령모개’라는 것은 임금도 좋고 대통령도 좋고 하여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침에 이렇게 하라고 영을 내렸다가 저녁이 되자 아니다 저렇게 하라고 딴소리를 한다는 뜻, 한마디로 변덕을 부린다는 뜻이다.

學生 : 선생님 예, ‘조령모개’라카는 게 와 그런 뜻입니꺼? (이 선생님은 애당초 漢字를 배운 일이 없으니 ‘朝令暮改’라는 漢字를 구경한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답 안 할 수 없다.)

敎師 : 먼 옛날 우리 조상 때부터 그런 뜻으로 써 왔다. 조령모개.

學生 : 조상들은 와 그런 뜻으로 썼습니꺼?

敎師 : 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어? 조령모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아버지, 조령모개는 조령모개, 알간?


(以上은 月刊 <한글+漢字文化> 通卷 87號에 실린 金聲翰 님의 「第3의 機會」의 한 대목이다.)


  漢字 없는 時代 國語敎育 現場의 한 場面을 잘 描寫해 주고 있다. 敎師도 學生도 漢字를 모르니 ‘朝令暮改’의 質問에 對한 答辯이 神經質的이고 若干 强壓的이다. 하긴 더 以上 잘 說明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처럼, 조령모개는 조령모개라니 참 답답하다. 全혀 知的이지 않다.

  이런 답답한 心情을 굳이 40年 後에서 찾아볼 것이 무어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데 當場 配達된(2006年 10月 11日) 한 朝刊 新聞 ‘讀者칼럼’ 「韓國語가 眞짜 어려운 言語인가?」에서 그 답답함을 또 接했다.


  얼마 전 미국 국무부가 전 세계에 파견된 외국어 보직자들이 사용하는 69개 언어를 난이도에 따라 ‘세계어, 고난이도어, 기타 언어, 초고난이도어’ 등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한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등과 함께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됐다. 우리말 가르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미약하나마 한국어의 세계화에 힘써 온 필자로서는 한국어가 초고난이도 언어에 선정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하략)


  以上 韓國語 專門家의 글이다. 韓國語가 ‘초고난이도 언어’라니 도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어려운 言語라는 말인가, 아니면 매우 쉬운 言語라는 말인가. 앞뒤 文脈으로 미루어 韓國語가 中國語, 日本語, 아랍語와 함께 아주 어려운 ‘超高難度 言語’로 分類된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難易度’란 어려움[難]과 쉬움[易]의 程度를 헤아린다[度]는 뜻이다. ‘難易度’란 말은 있어도 ‘고난이도’ ‘초고난이도’란 말로는 안 쓴다. 그렇게 써서는 問題가 어렵다는 말인지 쉽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修能考査 問題의 難易度 調節’ 하면 어려운 問題와 쉬운 問題를 고루 챙기겠다는 뜻의 말이 된다.

  ‘難度’는 어려운 程度를 말한다. ‘高難度’ ‘超高難度’로 말할 수 있다. 앞의 글 가운데 ‘69개 언어를 난이도에 따라’라는 表現은 맞다. 한데 “한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와 함께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됐다” 라는 表現은 語法에 안 맞는다. 美 國務府에서 韓國語가 배우기 어려운 言語 축에 分類됐다는 뜻이라면 ‘高難度語’ ‘超高難度語’라 말해야 한다.

  덧붙여 ‘선정됐다’라는 用言은 肯定的 意味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 用言에 ‘超高難度 言語’라는 否定的 意味가 强한 말이 오는 것은 共起制限이 되는 語塞한 말이 된다. 筆者 또한 新聞에서 韓國語를 바르게 쓰는 일을 平生의 業으로 삼았던 사람으로서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됐다’는 文章에 어리둥절했다.

  都大體 어떤 좋은 條件이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되게 된 理由인지 알 수가 없다. 美國에서 英語를 基準으로 해서 볼 때 韓國語가 배우기 매우 어려운 言語라는 뜻의 말인 것만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초고난이도’가 아니라 ‘超高難度 言語로 分類됐다’ 또는 ‘屬했다’로 말해야 맞다.

  漢字를 안 쓰니 ‘초고난이도’인지 ‘超高難度’인지를 分揀 못하고 있다. 또 ‘分類됐다’ 또는 ‘屬했다’로 말해야 하는데, 漢字를 모르니 ‘分類’의 뜻도 ‘選定’의 뜻도 대충 類似語로 두루뭉술 넘어가고 있다.

  소쉬르가 말한 恣意性 單語는 어느 言語에나 그 言語의 基礎的 要素로 存在한다. 비, 물, 나무, 불, 밥, 손, 발, 다리, 길, 바위, 바다 等等 大槪 形態 單一語가 恣意性 單語에 屬한다. 이런 單語들은 듣는 瞬間 意味가 느낌으로 把握되는 自然言語로서 多分히 情意的인 面이 强한 말이다. 말의 뜻을 말처럼 비는 비, 나무는 나무, 바다는 바다로 認識한다.

  오늘날 韓國語는 한글專用으로 그 많은 漢字語가 恣意性的 單語로 變하고 있다. 假令 ‘조령모개’도 漢字를 알면 ‘아침 朝, 하여금 令, 저물 暮, 고칠 改’ 4個의 形態素로 이루어진 合成語인 것을, 漢字를 모르니 ‘朝令暮改’는 ‘조령모개’로 말해 意味를 條理 있게 說明하지 못한다. 漢字를 모르고 소리만 적으니 意味의 有繫性을 喪失하여 類似語가 氾濫한다. 意味의 外延이 넓고 明晳性이 不足하여 긴가민가하는 대충 느낌의 말이 된다. 이런 言語는 詩語로는 어떨지 모르나 學問의 言語, 매스컴의 言語로는 不適合하다.

  이러니 韓國語가 ‘초고난이도어로 선정되었다’해서 異常할 것이 없어 보인다. 漢字語를 한글로 表記함으로써 意味를 斟酌으로만 아는 言語, 읽기는 하되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全혀 知的이지 못한 言語, 自國民에게도 알기 어려운 ‘超高難度語’로 變해가고 있다. 한글專用이 가져온 韓國語의 오늘이다.

<語文生活> 通卷 第111號,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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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生活 바로잡기] 한글專用論과 國漢混用論의 虛實(6)

우리가 學習하고 쓰는 單語

鄭琦鎬(仁荷大 名譽敎授)


  單語의 意味는 그 構成 成分이 가지는 意味를 單純히 合해서 얻(어지)는 것, 그 語源에 依支해서 學習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들은 <‘幼’ ‘稚’ ‘園’의 세 形態素에 關한 知識이 全혀 없이> ‘幼稚園’…‘自動車’ ‘(세발)自轉車’…같은 말들을 音聲言語를 媒介로 해서 배워 쓴다. (漢字가 무슨 所用이냐!) -어른이라 해도 ‘掌匣’ ‘惹端법석’…같이 形態素에 關한 知識(漢字 知識) 없이 배워서 쓰고 있는 말은 있습니다. 우리가 論議의 對象으로 하는 말들이 그런 日常語 幼兒語는 아닙니다. 專門用語도 包含해서 좀더 高級(表現이 適切한지 모르겠으나)의 知識語(漢字語)들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말 모두를 ‘語源에 依支해서’ 學習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質 ․ 量에서 日常語 幼兒語의 比가 아닌 그 ‘말’들의 槪念을 漢字 없이 學習(把握)하고 쓰는 것이 더 ‘쉽고 正確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에 적는 말씀 가운데의 몇 事例만으로도 그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單語는 나름의 歷史가 있고 個性이 있다. 道路는 山길, 논길, 들길에는 쓸 수 없으며 移動은 集團이나 덩치가 큰 對象을 指稱하는 單語를 主로 하여 쓴다. (漢字가 무슨 所用이냐!) -道路가 山길, 논길, 들길밖에 없었던 때의 ‘길’은 아닙니다. 比較的 큰 길의 새 槪念의 造語이니 山길, 들길에 쓰지 않는 것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첫째 槪念은 ‘길’입니다. ‘道’가 그렇고 ‘路’가 그렇습니다. 辭典에도 그렇습니다. 山길, 들길에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다음의 問題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固有語 ‘길’이라고 그것도 어디 山길, 들길, 또는 道路의 뜻만 입니까? 그런 性格이라고 漢字가 무슨 所用이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道路 地圖…와 같이 글字의 뜻대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이 ‘透明語’, 春秋 矛盾…과 같이 글字의 뜻 外에 다른 뜻을 따로 學習해야 하는 말이 ‘不透明語’다. 國立國語院의 調査에 따르면, 初等學校 敎科書에 쓰인 漢字語의 透明語와 不透明語의 比率은 60:40인데 그 透明語 調査가 쉬운 일은 아니다. 國漢混用論의 根據는 透明語에 限定될 것인데 透明語 調査가 先行條件이다. 그 調査를 한 일이 있는가.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歷史上 그런 調査가 있었다는 말 들어본 일 없고 그런 調査를 하고 漢字를 쓴다는 나라의 얘기도 들어본 일 없습니다. 우리말의 그런 調査를 한 일은 있는지 寡聞의 탓으로 그것도 들어본 일 없습니다.

  不透明語는 漢字로 적을 必要 없다. 그것에 對해 反論하라. 初等學校 敎科書에 2,687個의 漢字로 된 12,787個의 漢字語가 漢字로 表記되지 않고 쓰이고 있다는 것은 이들 語彙가 굳이 漢字를 通해서 習得하지 않아도 될 것들로 判斷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錯覺하신 듯. 한글專用 ‘令’ 으로, ‘施策’으로, 漢字 廢棄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래서 2,687字(語)면 될 12,787語, 字數(音節)로는 그 倍數 25,000余字로 되는 말의 뜻을 따로따로 習得하는 苦生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警笛’의 뜻은 ‘빵빵’이 되는 것입니다. 不透明語는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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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漢混用 아름다운 글쓰기]

漢字敎育 活性化와 바람직한 語文政策에 對한 小考

朴鍾福(韓國語文 1級 漢字會 會長)


  無人島에 漂着한 로빈슨 크루소가 그곳에 오래 혼자 살게 되었다면 그에게 있어 그동안 사용해 온 말의 意味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가 漸次 體得하게 되는 言語라는 것은 自然과의 疏通 手段 或은 神과의 交流 手段으로서의 意味였지 않았을까 推測해 본다. 一般的으로 言語는 人間의 社會的 關係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變遷 ․ 進化해 간다고 할 수 있다. 卽 言語는 人間과 人間을 이어주는 끈과 같으며 人間 사이를 흐르는 血液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筆者는 公職을 整理한 후 靑雲의 뜻을 품고 公職에 入門하려는 後學들을 指導한 적이 있다. 公務員 試驗 中에서 5級 事務官 試驗(所謂 高等考試)에 合格하기 爲해서는 2次 論文型 科目을 通過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節次를 通하여 受驗生이 作成한 答案의 內容도 內容이거니와 文章力과 言語 驅使力 等도 아울러 살피게 된다. 筆者가 擔當 講師로서 이들이 써낸 模擬考査 答案紙를 採點하고 指導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요즘은 젊은 世代들이 英語 等 外國語와 컴퓨터에는 남다른 關心과 意慾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말을 驅使하고 漢字를 使用하는 데 있어서는 意外로 疏忽히 하는 傾向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境遇에 社會科學의 專門用語는 擧皆가 뜻글자인 漢字(語)로 飜譯 ․ 定着되어 있지만, 이들이 써낸 答案紙에서 漢字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뜻이 曖昧模糊하고 混同을 일으키는 境遇도 생기게 되며 明確한 意思疏通에 障碍를 일으키기도 한다. 講師는 答案紙의 目次 題目과 專門用語 程度는 漢字로 表記해 주기를 注文해 보지만, ‘쓴다’기보다는 숫제 ‘그리는’ 水準의 漢字 活用能力을 보면서 難堪해진 적이 있었다. 甚至於는 自己 이름 漢字조차 잘 모르는 大學生이 있다는 事實은 失笑를 禁치 못하게 한다. 더욱이 外國에서 오래 工夫하여 博士學位를 받아 왔다는 社會科學 分野의 젊은 敎授님들의 論文 ․ 著書에서도 이와 비슷한 現象을 發見하고는 우리나라 語文敎育의 바른 方向에 對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筆者는 50年代 베이비 붐 時代에 태어나 制度圈 敎育을 받아 왔는데 유난히도 자주 바뀌는 敎育政策으로 因해 被害를 본 世代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漢字敎育의 施行과 廢止, 復活과 再廢止를 反復하는 종잡을 수 없는 政策으로 무척 混亂스러웠던 記憶을 가지고 있지만, 多幸히도 筆者는 우리말에 關心이 많았고 漢字에도 남다른 興味를 느껴 中學校 時節에는 獨學으로 漢字 3,000字를 익혔고, 그 後 持續的으로 使用해 온 德分에 韓國語文회 1級 漢字能力檢定試驗에 別다른 準備 없이도 無難히 通過할 수 있는 榮譽를 안았다. 向後에는 國家 百年大計를 내다보는 長期的이고 發展的인 語文政策의 樹立으로 더 以上 ‘갈 之字’式 國語敎育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言語는 그 民族의 삶과 文化를 담는 그릇으로 아름다움과 함께 便利함과 有用性, 그리고 適切性을 아울러 具備하여야 한다. 이러한 次元에서 우리의 語文政策은 民族의 삶의 밑바닥에서 자라온 固有語와 함께 數千 年의 뿌리를 가지고 自然스럽게 우리말의 一部가 되어 있는 漢字語의 올바른 使用과 必要漢字의 適切한 活用을 通하여, 우리의 言語生活을 高揚시키고 文化發展과 國家 競爭力 提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方向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본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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