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論]

다시 한자 문제에 대하여

宋載卲(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글전용이냐, 한자혼용이냐, 한자병기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많이 논의되어 이제는 산이 평지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도 그동안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수없이 써 왔다. 우리말 어휘의 70%가 한자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옳게 쓰기 위해서도 한자를 알아야 한다든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 한자,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등의 너무도 당연하고 일반적인 논의를 떠나서 이 자리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지금 여름방학 중의 대학가에 한자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한다. 삼성, LG, SK를 비롯한 37개 기업이 가을에 있을 입사시험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한자 능력을 테스트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어떤 곳인가? 이윤추구를 최대의 목표로 하는 곳이다. 기업이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사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왜 한자를 구사할 줄 아는 사원이 필요할까? 아마도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 국가들과의 교역을 위해서일 것이다. 이익이 남지 않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다. 국가 간의 교역에서 기업이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우리의 경제가 그만큼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國富가 축적되고, 국부가 축적되면 국민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진다.

  이렇게 보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데에 한자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무엇을 망설이는가? 민족문화니 전통문화니 하는 거대담론을 구태여 끌어대지 않더라도 우리가 한자를 배우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명백한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중국어와 한자는 다르다”고. 물론 똑같지는 않다. 글나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를 알면 현대 중국어를 훨씬 쉽게, 빠르게 배울 수 있다. 또 중국어를 몰라도 筆談으로 주고받는 한자어만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 한자를 가르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한자가 한글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지금 영어의 무분별한 남용이 한글을 파괴하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왜 영어의 사용은 용인하면서 유독 한자에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경제적인 이익 창출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하다면 꼭 같은 이유로 한자도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는 중국의 시대가 오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영어 학습에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의 10분의 1만 들여도 효과적으로 한자를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한자를 학습하는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다. 사람 이름만 해도 그렇다. ‘빛나리’, ‘바우’와 같은 순 한글식 이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름은 한자를 근거로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한자를 근거로 지은 자기 이름의 뜻쯤은 적어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地名도 마찬가지이다. 지명은 반드시 그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蘆原區’란 지명을 보면 이곳에 옛날 갈대(蘆)가 많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고, ‘孝子洞’엔 이름난 효자가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유추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지적 활동의 일부분이다. 이런 지적 활동을 통하여 인간은 더 고급 단계로 발전한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은 이런 지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자를 쓰지 않고 그냥 ‘방화동’, ‘방학동’으로만 표기하면 지적 활동의 여지가 없어진다. ‘방화동’하면 먼저 떠오로는 것이 ‘放火’일 것이고, ‘방학’을 연상시키는 첫 생각은 ‘放學’이기 쉽다. 아마도 ‘방화동’은 ‘芳花洞’ 즉 아름다운 꽃이 많았던 곳일 터이고, ‘방학동’은 ‘放鶴洞’으로 옛날 이곳에서 학을 放飼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적 연상 작용은 교육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설악산을 갈 때마다 미시령을 넘으면서 ‘왜 이곳을 미시령이라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이 의문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미시령 꼭대기의 바위에는 ‘미시령’이라는 한글과 영어만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곳의 지명이 미시령이구나’ 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그 지명의 연원을 캐보고 싶은 지적 호기심 또한 본능에 가까운 인간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가 훈련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한자는 이러한 지적 활동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특히 성장기의 아동들에게 그렇다.

  언어와 문자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 이상의 역할을 한다. 말과 글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품을 나타낸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저속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품위 있게 표현할 수도 있다. 한자문화권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한자를 알면 훨씬 품위 있는 文化語를 구사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자네 아버지 잘 계시는가?”라는 말과 “자네 春府丈께서는 無故하신가?”라는 말은 그 말에 실리는 무게가 다르다. 아버지라는 우리말을 두고 왜 춘부장이라는 한자어를 쓰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소치이다. ‘아버지’도 알고 ‘춘부장’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적 영역의 확대를 통하여 인간의 품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막말’이 세인의 지탄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반인의 문자생활 말고도 한자 기피 현상으로 말미암은 폐해는 심각하다. 1963년에 나온 李秉岐, 白鐵 공저《國文學全史》를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학생들이 읽지 못한다고 한다. 한문이 아닌 국한문 혼용체로 쓴 책이다. 어느 대학에서 이 책을 교재로 채택했더니 학생들이 ‘解讀’을 위한 소모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른바 학문을 하겠다고 대학원에 입학한 국문과 학생들이《國文學全史》나 趙潤濟의《韓國文學史》를 읽지 못하고, 사학과 학생들이 국한문 혼용체로 된 申采浩의《朝鮮上古史》를 읽지 못하는 이 기막힌 현상을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정부의 기형적인 문자정책 때문에 초래된 현상이다. 한자, 한문을 익히면 나라의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일반인의 문화수준도 높아지고 國學의 진흥에도 기여하는 一石三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왜 이리도 한자, 한문을 白眼視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부는 하루 빨리 한자, 한문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 국민들이 자유로운 문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자 추방만이 나라 사랑의 증표인 양 착각하고 있는 한글전용주의자들의 반성을 엄중히 촉구한다.

(<전통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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