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院紀行(1)]

書院의 嚆矢이자 最初의 賜額書院

- 紹修書院 -

李浩一(小說家)


  우리나라 書院의 嚆矢이자 最初의 賜額書院으로 有名한 紹修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慶尙北道 榮州市 順興面 內竹里이다.

  順興 地方이 只今은 一介 面에 不過하나 本디 高句麗의 及伐山郡으로 新羅 景德王 때는 岌山郡이었다가 高麗 初에 興州로 고쳤으며, 이 고을에 忠烈王 ․ 忠肅王 ․ 忠穆王의 胎를 安置한 뒤에는 地名을 興寧縣令 ․ 知興州事 ․ 順興으로 고치고 府로 昇格시켰다. 그리고 朝鮮 太宗 때인 1413年에는 都護府로 또다시 昇格되었다. 그러나 1457年(世祖 3) 順興에 流配돼 있던 世宗의 여섯째 王子 錦城大君이 順興 府使 李甫欽과 함께 端宗의 復位를 圖謀하다가 失敗함으로써 都護府가 廢止되어 豊基郡과 榮川郡, 奉化縣에 各各 나뉘어 隸屬되고 말았다.

  紹修書院은 順興面 東北쪽 거북이 엎드린 形象의 靈龜峰 아래에 있다. 書院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이 神靈스러운 거북이 알을 품는 자리라고 한다. 老松이 鬱蒼하게 에워싸고 있는 紹修書院은 小白山의 草庵溪谷에서 發源한 시냇물로 太白山의 黃池와 함께 1,300里 洛東江의 源流를 이루는 竹溪水가 감돌아 흐르고 있어 빼어난 景致를 자랑한다. 竹溪水가 흐르는 溪谷 周圍에는 바위가 屛風처럼 펼쳐져 있어 鬱蒼한 松林과 함께 絶景을 빚어내고 있는데, 書院에 配享된 謹齋 安軸은 <竹溪別曲>에서 ‘아, 小白山 높고 竹溪水 맑은 風景 그 어떠합니까’라고 이곳의 景致를 讚揚하고 있다.

  紹修書院 入口에는 높이 4미터에 이르는 幢竿支柱가 서 있다. 寶物 第59號로 指定돼 있는 宿水寺 터 幢竿支柱로서, 紹修書院 자리가 本디 宿水寺란 큰 절이 있던 터임을 證據하고 있다. 이곳에 있던 宿水寺는 統一新羅 때 세워진 大伽藍으로 高麗 때까지는 크게 隆盛했으나 朝鮮의 抑佛崇儒政策으로 衰落을 거듭하다가 그 자리를 紹修書院에 내주고 만 것이다.

  幢竿支柱를 지나 선비의 節槪를 象徵한다 하여 學者樹로 불리는 松林 사이를 걸으면 紹修書院이 나타나고, 書院의 正門 옆에 세워져 있는 景濂亨을 만날 수가 있다. 愼齋 周世鵬(1495~1554)이 세운 亭子로서, 우리나라 亭子 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亭子의 이름을 ‘景濂亨’이라 한 것은 儒敎 哲學을 創始하여 宋學의 始祖로 불리는 中國 北宋의 儒學者 濂溪 周郭頤를 景慕하는 뜻에서였다는 것이다.

  紹修書院은 1541年(中宗 36) 豊基 郡守로 赴任한 周世鵬이 平素에 欽慕하던 性理學者 晦軒 安珦(1243~1306)을 配享하기 爲한 祠堂을 세우면서 비롯되었다. 周世鵬은 1542年 頹落한 宿水寺를 헐고서 安珦의 祠堂을 세웠다. 安珦이 어린 時節 노닐면서 工夫하던 옛 宿水寺 자리에 그를 配享하는 祠宇를 建立한 것이다. 그리고 1543年 祠堂 東쪽에 學舍를 지어 書院의 骨格을 갖춘 周世鵬은 安珦의 影幀을 서울의 宗家집에서 옮겨다 奉安하고 書院 이름을 白雲洞書院이라 했다. 書院 이름을 白雲洞이라 한 것은 朱子가 講學한 白鹿洞書院을 本받은 것이었다.

  周世鵬은 牧使 安暉에게 보낸 便紙에서 ‘赴任하여 며칠 만에 옛 順興府에 이르러 보니, 한 마리 소가 울고 있는 宿水寺 옛터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文貞公 安軸이 <竹溪別曲>을 지은 곳으로 마치 神靈한 거북이 엎드린 形象의 山 아래에 竹溪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小白山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 等 眞實로 山水風光이 白鹿洞書院이 있는 중국의 廬山에 못지않았습니다. 구름과 山, 언덕과 江물, 그리고 흰 구름이 恒常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敢히 이곳을 ‘白雲洞’이라 이름 짓고 感懷에 젖어 徘徊하다가 祠堂 建立의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安珦을 配享하기 爲한 祠堂 建立의 뜻을 품게 된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編纂한 《竹溪誌》序文에는 ‘敎化는 時急한 것이고 이는 尊賢으로부터 始作되어야 하므로 安珦을 높이어 받드는 祠廟를 세웠고, 兼하여 儒生들이 冊을 읽고 學問에 힘쓰게 하기 爲해 書院을 세웠다.’고 祠廟와 書院을 建立하게 된 動機를 적고 있다.

  安珦을 配享한 白雲洞書院에 1544年(中宗 39) 安軸(1287~1348)과 安輔(1302~1357)가 追加로 配享되었으며, 1546年(明宗 1)에는 安珦의 後孫인 安玹(1501~1560)이 慶尙道 觀察使로 赴任하면서 書院의 管理 指針인 <斯文立義>를 마련하여 書院의 院長 任命 問題, 院生의 定員, 祭享 節次와 土地, 書籍, 奴婢, 儒生들의 管理 等 書院 運營에 必要한 여러 가지 基盤을 닦았다.


  우리나라 敎育은 中國의 制度를 좇아 서울에 成均館과 四學이 있고, 地方에는 鄕校가 있으나 다만 書院이 없는 것이 큰 欠이었는데, 周世鵬 郡守가 周圍의 비웃음과 誹謗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에 書院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敎育機關이란 반드시 나라의 認定을 받아야만 오래 維持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根源 없는 물과 같아서 아침에 가득했다가도 저녁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周世鵬 郡守와 安玹 監司가 아무리 設備를 잘해 놓았다 할지라도 이는 한 郡守와 方伯이 한 일인지라 임금의 命令을 받고 國事에 오르지 못하면 오래 維持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監司께서는 위에 아뢰어 宋나라 때의 例와 같이 書籍과 扁額, 그리고 土地와 奴婢를 내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中略) 요즈음 보건대 地方 鄕校들은 그 가르침이 무너져 선비들이 鄕校에서 工夫하기를 부끄럽게 여길 만큼 寒心한 狀態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書院의 敎育을 일으키면 學問과 政治의 缺陷을 補充하여 선비들의 風習이 달라질 것이며 習俗이 아름다워져 임금의 훌륭한 다스림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李滉의 이와 같은 賜額 請願에 따라 明宗은 大提學 申光漢(1484~1555)에게 書院 이름을 짓게 하여 ‘紹修’로 정했다. ‘紹修’는 ‘自己 內的 修養을 通하여 儒學의 精神을 이어간다.’는 意味를 지니고 있는데, 다른 한便으로 ‘이미 廢止된 學敎를 다시 세워 儒學을 잇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意味를 지니고 있다고도 한다. 이는 順興에 流配되어 있던 錦城大君과 順興 府使 李甫欽의 端宗 復位 密謀 事件으로 말미암아 都護府가 廢止되었기 때문이다.

  1550年 明宗은 親筆로 쓴 ‘紹修書院’이란 扁額과 함께 四書五經, 《性理大全》等의 書籍과 奴婢를 下賜하였다. 이로써 紹修書院은 朝鮮 最初의 賜額書院이 되었다. 賜額은 곧 나라의 認定을 받는 것이므로 書院의 社會的 地位가 格上될 뿐만 아니라 書院에 딸린 土地에 對해서는 免稅 惠澤이 주어지고, 所屬 奴婢들은 免役의 特典을 누릴 수 있는 利得이 따랐다. 요즘으로 치자면 最初의 國家 認定 私立大學이 된 것이다. 紹修書院은 처음에 入學 定員이 10名이었으나 賜額을 받은 後에는 30名으로 늘었다. 入學 資格은 生員, 進士 等의 司馬試 合格者에게 優先權이 주어졌다.

  書院 正門을 들어서면 ‘白雲洞’ 懸板이 걸린 明倫堂의 側面이 第一 먼저 눈에 들어온다. 書院의 中心이 되는 建物로 儒生들이 講義를 듣는 講學堂으로, 大廳 北쪽에 明宗이 親筆로 써서 賜額한 ‘紹修書院’ 扁額이 걸려 있다. 明倫堂은 正面 4칸, 側面 3칸의 八作지붕 建物로서 正面의 4칸 가운데 3칸은 大廳이고, 나머지 1칸은 溫突房이다. 이는 中心에 大廳을 마련하고 兩쪽에 溫突房을 配置한 一般的인 講學堂 構造와는 全혀 다른 것으로서, 一定한 形式이 없던 初期 書院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建物 周圍로 退마루가 놓여 있으며, 大廳의 門들은 모두 들어올려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明倫堂 北쪽에 있는 日新齋와 直方齋는 只今의 敎務室과 院長室 같은 役割을 하는 곳으로서, 한 建物로 連結되어 있다. 또한 日新齋와 直方齋 東北쪽에 ‘ㄱ’字 形으로 配置되어 있는 學求齋와 至樂齋는 儒生들이 起居하며 工夫하던 寄宿舍와 같은 空間이다.

  明倫堂 뒤쪽에 담牆을 둘러서 別途의 區域을 이룬 곳에 文成公廟가 있다. 晦軒 安珦의 位牌를 모신 祠堂이다. 高麗의 名臣이며 學者인 安珦은 1260年(元宗 1) 文科에 及第한 뒤 40餘 年 동안의 벼슬길에서 두 次例나 王을 隨行하여 元나라에 다녀오는 等 國事에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文敎와 儒學 振興에 功이 컸다. 安珦은 1289年(忠烈王 15) 元나에 가서 처음으로 朱子가 쓴 《朱子全書》를 읽고 그 理論의 새로움에 魅了되어 《朱子全書》를 손수 베끼고, 孔子와 朱子의 肖像을 그려 가지고 歸國하여 朱子學(一名 性理學 또는 程朱學)을 硏究하였다. 이를 契機로 우리나라에 最初로 性理學이 傳來된 것이다.

  1298年(忠烈王 24) 元나라 學官들이 安珦을 ‘東方의 朱子’로 稱하며 畵工에게 畵像을 그리게 했는데, 그가 世上을 떠난 뒤인 1318年(忠肅王 5) 王命으로 그 畵像이 模寫되었다. 그 影幀은 順興鄕校에 있다가 晦軒 宗家로 옮겨졌고, 周世鵬이 紹修書院을 세우고 書院으로 옮겨 奉安하였는데, 그림이 해지고 彩色이 떨어져나가 湮滅될 地境에 이르자 1556年(明宗 11) 當代 最高의 畵工 李不害를 불러 다시 模寫하였다. 現在 國寶 第111號로 指定된 晦軒 影幀이다. 安珦의 諡號는 文成이며, 高麗의 首都인 開京의 文廟에 配享되고, 長湍의 臨江書院과 谷城의 晦軒影堂에 配享되었다.

  安珦을 主享하고 있는 이 祠堂에는 1544年에 追加로 配享된 安軸 ․ 安輔와 함께 紹修書院의 設立者인 周世鵬도 함께 配享되어 있다.

  1871年(高宗 8) 興宣大院君이 書院을 撤廢할 때 헐어버리지 않고 남긴 47個 書院 中의 하나인 紹修書院은 史蹟 第55號로 指定되어 있으며, 所藏 文化財는 晦軒 影幀(國寶 第111號)과 宿水寺址 幢竿支柱(寶物 第59號), 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寶物 第485號), 周世鵬 影幀(寶物 第717號), 紹修書院 文成公廟(寶物 第1402號), 紹修書院 講學堂(寶物 第1403號)을 비롯하여 慶尙北道 指定文化財인 瑞蔥臺親臨宴會圖(有形文化財 第238號), 明宗 御筆 紹修書院 懸板(有形文化財 第238號), 紹修書院 所藏 板木(有形文化財 第331號)이 있다.

<전통문화>2006년 가을호/통권 15호, 1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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