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慕辭]

安秉禧 先生을 追慕함

南豊鉉(韓國語文會 副理事長)


  安秉禧 先生이 지난 10月 24日 別世하셨다. 10年餘의 오랜 동안을 超人的인 意志로 病魔와 싸웠지만 그예 돌아갔으니 哀痛하기 그지없다.

  安 先生은 나의 大學 3年 先輩이지만 學問의 깊이와 圓熟함에 있어선 스승과 같은 분이었다. 내가 大學에 入學해서 첫 學期를 마쳤을 때 大學에서 獎學生의 名單을 揭示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成績도 함께 揭示하였는데 先生의 成績은 올A이어서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先生은 學生 時節부터 出衆하였었다. 先生이 碩士論文을 準備할 때는 心岳 李崇寧 先生님께서 稱讚을 아끼지 않으셨다. 講義 時間마다 中世國語의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주는 資料가 繼續 發掘되고 있다고 흐뭇해하시면서 한便으론 先生을 後輩들이 奮發하도록 하는 表象으로 삼으시었다. 그 碩士論文 ‘十五世紀 國語의 活用語幹에 對한 形態論的 硏究’는 豊富한 資料와 緻密한 分析으로 中世國語의 語幹 形態를 記述한 것으로, 只今도 國語史 硏究의 古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以後 先生은 中世國語의 文法論에 對하여 珠玉 같은 論文들을 發表하여 이 方面을 代表하는 硏究者로 認定되어 왔다.

  1970年代부터는 國語史 資料에 對한 文獻學的 硏究에 힘을 기울였다. 資料의 書誌가 分明해야 基盤이 튼튼한 國語史를 確立할 수 있다는 信念을 가지고 15, 16世紀 國語의 文獻 資料들을 涉獵하여 書誌學的으로 그 年代와 資料的 價値를 究明하였다. 이 方面에 對한 先生의 造詣는 매우 깊어서 後에 文化財委員의 重責을 맡아 貢獻한 바가 컸다. 한便 吏讀와 口訣의 硏究에도 새로운 길을 터서 ‘中世國語 口訣의 硏究’는 이 方面 硏究를 草創한 業績이 되어 있다.

  1990年부터는 國語硏究所長과 初代 國立國語硏究院長으로서 硏究院의 基盤을 튼튼하게 세워 나갔다. 한便 南北韓의 言語가 圓滿하게 疏通될 수 있게 하기 爲하여 南北韓의 國語를 아우르는 大辭典의 編纂을 着手하여 後에 그 結實로 ꡔ標準國語大辭典ꡕ이 나왔다. 또한 漢字文化圈에 있어서 漢字 字形의 統一이 重要함을 認識하고 韓 ․ 中 ․ 日 三國이 共通 字形을 協議 ․ 確立하기 爲한 共同 硏究를 推進하였다. 우리 韓國語文會의 理事로서 國漢混用을 通한 國語生活의 正常化를 爲하여 或은 論文을 通하여, 或은 有用한 忠告를 通하여 學會의 發展에 寄與한 바가 매우 컸다.

  先生은 誠實함의 極致로써 學問에 臨하여는 充實한 資料 收集과 明快한 分析으로 成就한 바가 크고도 깊다. 그리하여 同學과 後學들에게 學問하는 姿勢의 指標가 되어 왔다. 이제 先生이 돌아갔으니 그 빈자리를 채울 만한 이는 좀처럼 나오기 힘들 것이다.

  어허! 先生의 永眠은 이 後輩에게 그립고도 哀痛한 마음을 그지없게 하는구나.

(<語文생활> 통권 제109호,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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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散文의 香氣]

漢字 通譯 笑話


  얼마 前 새로 開店한 어느 毛物廛(털옷)에 들렀었다. 그때 마침 中年 紳士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홍콩 아니면 臺灣에서 온 듯한 中國人이었다.

  털옷은 거의가 女子 옷인데 ‘마이 와이프니, 프레센트니’ 하는 말을 하며 그 中國人은 自己 婦人에게 膳物로 줄 털옷을 고르기 始作했다.

  그런데 그 中國人은 韓國말을 全然 못했고 가게 主人은 相對的으로 中國말을 全然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손짓 발짓 제스추어를 쓰면서 벙어리式으로 털옷 흥정이 始作되었는데, 그 中國人이 ‘이 털이 무슨 털’이냐고 묻는 模樣이었다.

  가게 主人은 그 털이 토끼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토끼를 英語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唐慌하다가 나에게 “토끼를 漢字로 어떻게 씁니까”고 묻기에 ‘兎’字를 써 보이니 그 中國人은 알았다는 表情으로 나에게 微笑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그 中國人은 또 다른 털옷을 가리키며 ‘저 털은 무슨 털’이냐고 묻는 模樣인데 주인은 또다시 나에게 “저 털은 삵괭이 털인데 삵괭이는 漢字로 어떻게 씁니까”고 묻기에 ‘狸’字를 써 보였더니 中國人은 또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微笑를 지었다. 結果는는 그 中國人은 털옷 한 벌을 사갔고 가게 主人은 開店 마수거리를 財數 좋게 잘하였다.

  위와 같은 얘기를 紹介하는 까닭은, 이즈막에 ‘漢字敎育’ 問題를 둘러싸고 曰可曰否하는데, 極히 작은 例이지만, 가게 主人은 高校 出身이었지만 解放 後 學校에서 漢字敎育을 못 받은 한글專用論者들에 依한 犧牲者가 되었고, 筆者는 普通學校 4年 卒業生이지만 常用漢字를 배웠던 탓으로, 英語도 中國語도 못하지만 漢字 한두 字로 中國人과 充分한 意思疏通을 할 수 있었으니, 漢字敎育은 絶對로 國民學校에서부터 하루빨리 實施할 것을 强調함에 있는 것이다.

  解放 後에 우리나라에서는 言語政策面에서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無定見 ․ 無思慮한 文敎政策의 拙劣 貧困으로 4半世紀에 걸쳐 國 ․ 中 ․ 高校에서 漢字敎育을 全廢했는데, 그 結果는 大學을 나왔어도 新聞 한 張도 제대로 못 읽는다는 酷評을 免치 못할 程度의 學士文盲을 大量 輩出했고, 恩師에게 보내는 問安 便紙 끝에 “先生님의 冥福을 빕니다”라는 넌센스 風聞도 있었고, 各種 公納金 告知書에도 ‘魚魯不辨’으로 筆者의 이름字에 誤書가 頻繁하니 이 責任은 確實히 文敎部에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言語와 文章에 漢文과 漢字語를 많이 使用해 왔고 앞으로도 使用치 않을 수 없는데 漢字語와 文章을 純 한글로만 記錄하면, 漢字의 素養이 全然 없는 사람은 그 글을 읽기는 하되, 그 內面에 包含되어 있는 참뜻을 充分히 理解할 수가 없는 것이다.(中略)

  넓고 깊고 긴 眼目으로 보아 한글專用論者들이 아무리 ‘不共載天之讎’와 같이 怨讐視하는 漢字이지만 부지런히 배워서 우리 傳統文化를 硏究하고 社會活動에서나 또는 國際 舞臺에서도 有能하고 完璧한 活動을 할 수 있는 人格者를 많이 養成해 내야 되지 않겠는가? 視野를 넓게 또 멀리 내다보라.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 않은가. (<讀書生活> 15號, 77.2)

(『通文館 冊房秘話』의 「學士文盲」中에서)

 

 

 

 

  이 冊은 李謙魯 先生이 新聞과 雜誌에 寄稿한 글, ꡔ月印釋譜ꡕ와 ꡔ月印千江之曲ꡕ 같은 古書 收集에 얽힌 事緣, 書誌學에 對한 硏究 論稿를 모아서 刊行한 것이다.


李謙魯(1909~2006)

略歷

 ․ 1909年 平南 龍岡 出生

 ․ 1925年 삼화公立普通學校 卒業 後 上京

 ․ 1934年 金港堂 運營

 ․ 1945年 通文館(前 金港堂 書店) 代表

 ․ 1969年 韓國語文敎育硏究會 創立理事

 ․ 1992年 韓國儒道會 理事

著書

『通文館 冊房秘話』(1987)

『文房四友』(1989)

 

 

 

 

 

 

 

<語文생활> 통권 제109호,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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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檢特輯]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 斷想

2006年度 韓國漢字能力檢定會를 돌아보며


  2006年 丙戌年은 陰曆으로 한 해에 立春이 두 番 들어 있는 雙春年이라 사람들은 여느 해보다 더 즐거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였다. 萬物 甦生의 季節인 봄을 두 番이나 맞는다니 그만큼 吉한 해가 되리라 믿는 까닭이다. 이제 雙春年을 보내는 길목에서 숨 가쁘게 進行된 2006年을 돌아본다.

  2006年 2月 漢字 試驗을 施行하는 他 團體의 두 施行處가 國家公認을 取得함으로써 國家公認을 받은 民間團體는 總 여섯 團體가 되었다. 國內 最初로 漢字能力級數資格을 國家公認으로 認定받았던 本會는 每年 늘어나는 國家公認 取得 團體와 이러한 施行處들에 對해 細細하게 알기 어려운 受驗生들 속에서 先導者로서의 立地를 鞏固히 하고 嚴正한 試驗制度의 構築을 爲해 힘써 왔다.

  本會가 實施한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의 올 한 해 동안의 總 志願者 數는 85萬 名이 넘는다. 올해 최연소 1級 合格者는 이수호(99年生, 판암초 1學年) 學生으로 第33回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에 合格함으로써 漢字에 對한 向學熱이 어느 程度인지를 가늠케 했다. 또한 해마다 적지 않은 數의 合格者를 量産하는 本會는 이제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의 施行處에 局限되지 않으려 努力했다. 漢字敎育이 試驗 合格에만 그 目的을 두는 世態로 變質되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努力의 一環으로 本會의 行步에 있어 올해 歸趨가 注目되었던 것은 바로 1級 合格者 懇談會다. 이는 他 團體 合格者와의 差別化 및 本會의 最高 級數인 1級 合格者들의 自矜心 鼓吹를 爲해 2006年 9月 처음으로 開催되었다. 두 時間 以上 進行된 懇談會에는 60餘 名 以上의 1級 合格者들이 參席하였으며, 參席者들은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의 發展 方向과 語文運動을 爲한 1級 合格者들의 役割 等 多樣한 意見들을 忌憚 없이 提示하였다. 또한 參席者들 서로 間의 對話를 通해 各自가 알고 있는 情報를 共有할 수 있었다. 懇談會 後 參席者들은 向後 定期的인 모임을 爲한 臨時 執行部를 選任하였다.

  한편 本會는 지난 10月부터 EBS에서 新設된 「漢字퀴즈 王」이라는 프로그램의 諮問을 맡게 되었다. 「漢字퀴즈 王」은 어린이부터 成人까지 漢字에 關心 있는 모든 사람들이 參與할] 수 있는 퀴즈 프로그램으로서 2人 1組가 되어 問題를 풀어 나가는 方式으로 進行된다. 이러한 퀴즈 프로그램은 受驗者 또는 合格者들의 漢字 工夫에 對한 學究熱을 高揚시킬 수 있다. 또한 平素 漢字敎育에 큰 關心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漢字에 對한 興味와 더불어 漢字 工夫에 對한 動機를 附與할 수 있다는 點에서 示唆하는 바가 크다.

  漢字敎育을 通한 國語敎育 正常化를 爲하여 獻身的으로 努力하신 蘭汀 南廣祐 先生의 遺志를 받들고자 行해지는 蘭汀獎學金 授與式은 지난 2月, 9月 두 次例에 걸쳐 第31, 32, 33回 漢檢 合格者들을 對象으로 進行되었다. 第8回 198名(2006. 2. 17 수여), 第9回 386名(2006. 9. 9 수여)으로 總 584名에게 1億 5千萬 원을 支給하였다. 올해 最年少 1級 蘭汀獎學生은 석진현(98年生, 분포초 2學年) 學生으로 第32回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에 應試, 優秀한 成績으로 1級에 合格하여 第9回 蘭汀獎學生으로 選定되었다. 第34回 全國漢字能力檢定試驗 合格者를 對象으로 選拔하는 第10回 蘭汀獎學金 授與式은 來年度 2月 中에 進行될 豫定이다.

  2006年은 유난히 ‘새로운 出發, 새로운 試圖’의 다짐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恒常 설레임과 두려움을 同伴하는 ‘새로움’ 속에서 삶이 한層 成熟해지고 豊饒로워지듯이 本會 亦是 例年보다 더 發展된 모습이었기를 바란다. 國家公認 漢字能力給數資格 管理 ․ 運營機關이 된 이래 지난 몇 해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벅차게 달려왔고 이제 다시 봄을 맞은 2006年이었다. 작고 여린, 그러나 終局에는 큰 나무로 뻗어 나갈 새싹을 품에 틔우는 봄처럼 意味 있는 새로운 試圖들 속에서 丙戌年 한 해가 기울어 간다.

  한 해 동안 變함없는 關心과 愛情으로 韓國漢字能力檢定會를 지켜봐 주시고 激勵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感謝의 말씀을 傳한다.

(<語文생활> 통권 제1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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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題가 있는 文化探訪] 仁寺洞

變化를 受容하는 眞正한 傳統文化의 거리


  늦가을 떨어지는 落葉을 밟으며 當到한 곳은 仁寺洞이다. 週末 仁寺洞 거리는 數많은 人波로 넘쳐나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仁寺洞 거리, 複雜하기는 해도 이런 仁寺洞의 시끌벅적함이 마음에 든다. 거리 곳곳에서 우리의 옛 服裝으로 變裝한 사람과 傳統 物件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고, 값싼 紀念品인 부채부터 값나가는 眞짜 藝術品까지 우리 文化財에 關해서라면 仁寺洞엔 없는 것이 없다.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幸福한 느낌이 드는 곳, 이곳이 바로 仁寺洞이다. 하지만 仁寺洞은 傳統文化의 거리이지만, 결코 옛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傳統을 만들어 가고 있다. 仁寺洞 거리의 젊은이들과 外國人들은 이러한 仁寺洞의 魅力에 陶醉되어 발길이 머물고 있는 듯하다.


  特히 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人氣 있는 仁寺洞볼거리는 쌈지길이다. 얼마 前 仁寺洞에서는 때 아닌 쌈지길 有料化을 論難이 있었다. 仁寺洞의 名物인 쌈지길을 觀覽하기 爲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多幸히 只今의 쌈지길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迂餘曲折을 겪은 쌈지길이지만, 週末을 맞은 그곳엔 海外 各國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世界의 온갖 言語가 다 들리는 듯하다. 가까운 日本에서 건너온 사람들, 먼 유럽에서 온 사람들, 머리에 褓자기를 싸맸는데 都統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까지 多樣한 곳에서 온 世界人들의 言語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인다. 世界 여러 나라에서 온 觀光客들만 즐거운 것은 아닌 模樣이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幸福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人形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記念 撮影을 한다.

  最近 쌈지길에서는 앤디 워홀 作品 展示會가 한창이다. 來年 1月 24日까지 繼續되는 이番 展示會는 仁寺洞을 찾는 사람이라면 한 番쯤 가볼 만하다. ‘팝 아트’의 巨匠 앤디 워홀(1928~1987)은 피츠버그 카네기工科大學을 卒業하고 商業 디자이너와 畵家로 活躍했으며, 나중에는 映畵, 小說 部門 等에서도 活躍한 現代 美國의 代表的인 藝術家이다. 事實 처음에는 外國人 展示會가 왜 우리 傳統 거리에서 열리는지 疑問도 들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傳統의 거리에서 現代 巨匠을 接하는 것이 오히려 仁寺洞을 열린 空間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쌈지길 階段 위를 올라가니 娛樂 機械 같은 것이 눈에 띈다. 眞짜 娛樂 機械인지 궁금해서 가보니, 眞짜가 아니라 앤디 워홀의 作品이다. 무슨 意味를 內包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日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藝術 素材로 삼았다는 點이 印象 깊었다. 쌈지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다 되었다. 보랏빛 우산, 앤디 워홀, 그리고 쌈지길은 迂餘曲折 끝에 다시 사람들로 발 디딜 뜸이 없는 文化의 空間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傳統의 거리가 世界 各國 사람들도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아서 좋았고, 傳統의 거리에 登場한 現代 藝術의 巨匠 앤디 워홀을 만난 것도 所重한 記憶이 될 것이다.


  쌈지길을 뒤로 하고, 仁寺洞 樂園떡집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요즘 話題의 作家 陸心媛 氏의 作品이 展示돼 있는 갤러리AM이 나온다. 女子를 그리는 作家 瑞正 陸心媛은 昨年에 觀客들에게 많은 反應과 커다란 呼應을 불러일으켰고, 올해는 더욱 纖細하고 豊富한 女性의 表情을 유머러스하게 담았다. 갤러리AM은 ‘陸心媛’이란 아트 商品을 브랜드化 하여 다이어리, 앨범 等 70餘 가지 商品을 開發해 敎保文庫, 藝術의殿堂 等 全國 30餘 군데 入店하여 많은 呼應을 얻고 있다. 높은 藝術의 門턱을 大衆化하여 成功시킨 좋은 케이스가 되고 있다. 作家는 對象이이 있는 예쁜 女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자들이 마음속에 潛在한 ‘公主이고 싶어하는 自我’를 그린다고 한다. ‘나 이뻐?’하는 表情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나 이뻐?」라는 그림을 보면 陸心媛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理解되고 나 自身도 어느새 公主의 幸福 속으로 빨려들어감을 느끼게 된다.

  그女의 作品이 더욱 빛나는 理由는 模糊한 韓國化의 方向을 提示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파스텔 같은 부드러움과 油畵 같은 華奢함이 질리지 않은 종이의 質感 위에 결코 가볍지 않은 輕快한 디테일感과 함께한다. 東洋畵이지만 色이 盡하고 豊富해서 華奢한 色彩들은 拒否感 없이 다가운다. 그女는 壯紙에 粉彩를 使用하여 隱隱하게 번지는 技法으로 그린다. 粉彩는 固體로 된 材料를 갈아서 阿膠를 섞고 물로 濃淡을 調節해 使用한다. 壯紙는 두껍고 질기면서 隱隱하게 스며드는 性質이 있어 먹과 粉彩를 使用하는데 效果的이다. 特히 壯紙는 想像할 수 없을 만큼의 덧칠이 可能해 한 作品에도 數十番씩 덧칠이 이루어진다. 그 덧칠은 油畵처럼 기름진 느낌이 아니라 淡白하고 깔끔한 華麗함을 살려준다. 作家는 女性이라는 素材만큼이나 粉彩와 壯紙에 愛着을 가지고 있다. 모델이 韓國 사람 같지 않다는 質問에 作家는 가장 예쁜 사람을 그린 것이지 韓國的일 必要는 없다며, 作品을 通해 外國人들과도 偏見 없이 對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예쁜 모델을 그렸을 뿐이라고 한다. 陸心媛 作家의 그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그림은 이래야 된다’라는 뿌리 깊은 旣存의 美術館을, 大衆들의 美術로 代替하고 있는 힘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傳統性과 現代性을 造化시킨 새로운 仁寺洞 美術文化인 仁寺아트센터에 들렀다. 仁寺아트센터는 美術의 生活化와 大衆化를 追求해 온 가나아트샵, 美術 市場의 歷史를 새롭게 써온 가나아트갤러리, 그리고 展示文化를 活性해 나가는 가나오픈스페이스로 構成되어 있는 複合 美術文化 空間이다. 마침 仁寺아트센터에서는 5가지 程度의 展示會가 열리고 있었는데, 클리오의 ‘꿈꾸는 化粧品展’은 化粧이라는 女性의 記號와 藝術과의 進步的인 實驗을 通해 現代 美術의 多樣한 장르를 조금 더 便安하고 興味롭게 接近할 수 있도록 機會의 場을 만들고 있다. 김종상 作家의 近作들도 展示되어 있는데, 幸福을 向한 이미지의 따뜻한 風景들로 空間을 채우고 있다. 또한 韓國 文人畵의 멋스러움이 잔잔하게 배어 있는 展示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이렇게 仁寺아트센터는 古傳의 香氣와 現代的 感覺이 넘치는 複合 文化 프로그램을 遂行함으로써 傳統과 現代뿐 아니라 未來와의 調和를 志向해 나가고 있다.

(<語文생활> 통권 제109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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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한 卷의 冊]『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歷史 속에 놓여진 한 女人의 사랑

兪垣濬 (慶熙大 史學科 敎授)


  高等學校 2學年 여름, 서울에 올라와 鐘路書籍에 갔다가 偶然히 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ꡕ를 사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映畵라도 原作만 못하다는 國語 先生님의 말씀이 생각나 冊을 고르기는 했지만 너무나 두껍고 빽빽한 活字에 언제 이것을 다 읽을 수 있을까하는 負擔도 있었다. 하지만 高等學生이라면 이 程度의 冊은 읽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괜한 自尊心에 冊을 읽기 始作하였는데, 豫想과 달리 今方 冊에 魅了되기 始作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ꡕ는 아름다우면서도 虛榮心 많고, 自由奔放하며 强忍한 女主人公 스카렛 오하라가 自身의 眞正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小說을 읽으면서 그러한 認識이 漸次 바뀌기 始作하였다.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新大陸으로 移住한 初期 移住民을 除外하면 거의 모든 移民者들은 굶주림과 가난을 떨쳐 버리고자 大西洋을 건너 왔다. 그들은 유럽에서 社會의 下層民이었고, 敗北者였으며, 尊重받지 못한 者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럽의 上流層을 흉내내고 싶었고, 自身의 成功을 유럽人들로부터 認定받고 싶어하였다. 成功한 移民者들은 奴隸를 부리며 貴族 흉내를 냈고, 유럽 旅行을 通해 同質性을 確認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歲月의 흐름과 함께 美國은 美國일 수밖에 없는 方向으로 發展하였고, 그에 대한 認定과 不認定, 卽 繼續 유럽의 一部로 남고자 하는 勢力과 그렇지 않은 勢力과의 葛藤은 不可避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칼렛이 사랑했던 男子, 애슐리 윌크스가 뛰어난 知性과 節制力에도 不拘하고 軟弱한 理想主義者로밖에 그려질 수 없는 까닭이었다. 卽 스칼렛이 眞正한 사랑의 對象이라고 생각했던 애슐리는 事實은 漸次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유럽의 痕迹에 不過했던 것이다. 結局 스칼렛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淺薄한 商人이며 行動主義者로 보였던 레트 버틀러였는데, 그는 南部人에 依해 輕蔑의 對象으로 여겨졌던 ‘양키’의 典型이었지만 結局 그는 勝利者로, 그 땅의 主人으로 그려지고 있다.

  南北戰爭은 美國이 美國답게 가기 爲한 不可避한 葛藤이었다. 映畵의 첫 場面에 나오는 멋진 파티, 그리고 戰爭, 輕蔑해 마지않았던 양키의 支配, 慣習을 뛰어넘어 製材所를 直接 經營한 스칼렛의 變身 等은 自身을 유럽과 同一視하려던 南部 美國人의 自己 催眠이 現實 속에서 어떻게 부서져 나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ꡕ를 읽으면서 發見한 이 같은 事實은 高等學校 時節 적지 않은 ‘自我陶醉’를 내게 안겨주었고, 繼續해서 ꡔ아메리카의 悲劇ꡕ, ꡔ忿怒의 葡萄ꡕ 等 美國 小說을 읽게 한 動機가 되었다. 結局 이 世上에서 歷史로 解釋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으며, 때로는 極히 個人的인 일로 여겨지는 ‘사랑’에서까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면 너무 지나친 擴大 解釋일까?

(<語文생활> 통권 제109호,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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